“너, 유나 좋아하냐? 내 말이 틀려?” “아닙니다. 맞습니다. 좋아합니다.”
극 중 김창만 역할을 맡은 이희준이 자신의 마음을 입 밖으로 처음 고백하는 순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해야 나도 마음을 조금 열어 보이겠다며 결코 먼저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썸’만 타는 영악한 요즘 사람들의 연애에 질린다고 생각할 때 즈음이었다. 물론 나 역시 몸을 잔뜩 사리고 있던 때였다. 그랬기에 누가 물어도 망설임 없이 좋아한다고 대답할 수 있는 그 모습이 희귀해서 감동스러웠다. 유나의 마음을 확인한 적도 없었는데 자신의 감정에 이토록 확고하다는 점이 감격스러웠다. 고요하던 내 마음의 파장이 마구 흐트러졌다.
가게에 숨어 들어와 웅크리고 있던 유나의 위태로운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만은 유나를 도와준 걸 생색내며 멋있는 척하기 보단 궁핍한 처지를 드러내고 오천 원을 빌렸다. 아마 그 순간까지는 긴가민가한 마음이었다. 그저 자신의 사람 좋은 성품대로 유나를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유나가 척하니 건네 준 오천 원이 오만 원이었던 걸 알고 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을 때 “알아요. 그냥 다 가지세요.”라고 말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던 그녀의 모습에 틀림없이 반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유나에게 알려주면서 사랑은 시작되었다.
<유나의 거리>는 전직 소매치기범인 한 여자와 그 여자가 사는 다세대 주택의 직업, 성별, 나이, 성격까지 천차만별인 그러나 하나 같이 사는 게 퍽퍽해서 양심의 어딘가를 고장 내놓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좀 잘 살아보겠다고 이기적으로 굴지만 미워할만한 스케일은 아닌, 어쩌면 내가 하는 짓이나 별반 다를 바 없어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곳에 어딘가 능청스러운 매력은 있지만 반듯하고 착한 창만이 들어와 함께 부대끼며 사건이 만들어진다.
창만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에게 사랑이란 어렵고 무거운 감정이다. 마냥 설레고 좋을 순 없다. 특히 유나에게 그러하다. 유나는 잘 웃지도 않는다. 퉁명스럽고 거칠다. 그녀에게는 사랑에 빠지는 일보다 의리를 지키는 일이 더 쉬워 보인다. 사랑은 ‘끌림, 보고 싶음, 가까이 있고 싶음, 좋음, 만지고 싶음, 마냥 예쁨’이라는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랑에다 뭔가 숭고미를 끼워 넣으려고 하니 복잡해지는 것뿐이다. 단순하다. 창민이 사랑에 빠졌기에 사연 많은 그 방에 들어와 살기로 결심한 것이고, 유나에 대해 알고 싶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새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나타나 해결해주는’ 만능 척척맨의 면모를 뽐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 받는 것이나, 상대에게 받은 사랑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의심부터 품게 된다. ‘대체 왜 나를 좋아하는 거지?’ 그렇게 벽을 세우고 상대를 밀어내고 마음을 닫는다. 다칠 마음이 그런다고 보호되는 건 아니건만 지레 겁먹고 두려워한다.
창만은 흘러가는 대로 맡겨버리고 감정을 따라가는 것의 긍정을 보여주었다. 허름한 건물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폐업 카페에서 6개월 동안 일한 임금도 못 받고 지내던 그는 “이제 방도 있고, 직장도 있고, 여자도 있고. 없는 게 없네.”라는 말에 “저도 갑자기 왜 이렇게 잘 됐는지 모르겠네요”라는 너스레를 떤다. 오직 사랑을 쫓은 것 밖에 없었는데 어느새 다 가진 남자가 된 것이다.
<유나의 거리>는 참되고 거대한 사랑의 힘을 가진 창만을 통해 한 번 더 사람들을 변화시키려 한다. 창만은 유나가 소매치기를 하는 현장을 보고 실망감을 느끼지만, 사랑의 면모는 좋은 점만 보고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실망한 지점까지 끌어안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임을 알려준다. “소매치기 못하게 만듭니다.”라고 선언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유나의 반응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창만의 당당함에 마음이 부동자세를 취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극의 후반부는 본격적으로 유나의 교화 프로젝트로 이뤄질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랑의 힘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진 않는다. ‘당연히 드라마니까 그렇게 마무리 되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창만이라면 유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창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난다. 현실에선 멸종되고 있는 마음 같아서 더욱그렇다. 나도 슬며시 손을 놓고 잃어버리려고 했던 마음 같아서 그러하다. 그래서 동시에 벅차 오르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 큰 사랑을 품고 싶다고 바라고 욕심 내게 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믿고 싶고 믿을 수밖에 없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랑을, 상대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내 사랑을. 비겁하지만 않으면 할 수 있다. 발을 내디디면 길이 생긴다고 믿는다. 나도 흘러가볼까 한다. 그럼 언젠가는 “좋은 글도 쓰고, 돈도 제법 벌고, 남자도 있고, 없는 게 없네” 라는 말에 창만처럼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다. 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창만을 교과서처럼 여기고 배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할 것이다. 숨길 수 없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두려움 없이 전하고 싶다. “넌 날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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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우는 여자들을 위한 연애 공감 백서
현정
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며 제법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만큼 현명해졌으며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걸 수줍어하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재생능력으로 사랑할 때마다 소녀의 마음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해내고 쉽게 두근거린다. 『사랑만큼 서툴고 어려운』, 『나를 만져요』 등을 썼으며,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를 운영 중이다.
샨티샨티
2014.07.27
또르르
2014.07.12
참으로 따뜻한 말이지요. 그리고 누군가를 한뼘 더 성장시키는 말이기도 하구요.
만만디
2014.07.02
띠엄띠엄 봤는데 잘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