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접어들며 찾아오는 가장 뼈아픈 깨달음은 중 하나는 아마도 ‘좀 더 괜찮은 여자가 될 줄 알았는데…’가 아닐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우리는 ‘이런 어른이 될 줄 몰랐다’는 자책과 자기연민, 후회와 우울 속에서 어른의 시간을 맞이한다.
적당한 방황과 적당한 공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적당한 점수를 받고 적당한 대학에 들어가 적당한 전공을 선택하고, 역시나 적당한 직장에서 적당히 성실하게 일해왔다. 돌아보면 속 타는 절박함도, 피 끓는 열정도 언제나 한 뼘쯤 부족했다. 아니, 한때는 대책 없는 미래를 고민하며 자기계발의 아이콘처럼 ‘새벽형 인간 코스프레’도 시도해본 것 같다. 출근 전에 새벽반 영어수업을 듣고, 헬스장이나 수영장에 몸 담그기도 했다. 그러나 결심은 늘 석 달을 못 미쳤다. 자신이 듣기에도 민망한 ‘시간이 부족해서’ 혹은 ‘업무에 치여서’라는 상투적인 핑계를 내걸고 뒷걸음치며 멈추기를 반복해왔다. 자신을 속이기는 얼마나 쉬운가. 얼마나 간편한가. 지금도 수많은 여자가 자신과의 대결에서 너무도 허무하고 또 허술하게 패배를 인정해버린다.
그러다 문득 우리를 깨우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 종점과 종점 사이를 무한히 오가는 대도시의 차가운 지하철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우연히 그런 소식을 접하는 것이다.
“아무개가 결국 그걸 해냈대!”
이 짧은 문장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사돈의 팔촌이나 친구의 친구, 엄마 친구의 딸쯤 되어 간간이 소식만 접하던 아무개가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는 소식 말이다. 그것이 해외 MBA이건, 초고속 승진, 국가고시 합격이나 책 출간, 창업, 전직이건 타인의 꿈-엄밀히 말해 타인의 꿈 실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레 머릿속에 수많은 필름이 스쳐 간다. 꿈을 위해 누구보다 촘촘한 시간을 인내했을 그녀의 끈기와 에너지에 감탄이 흘러나오다가도, 어쩔 수 없이 그에 오버랩 되는 자신의 허무맹랑한 시간을 잔인하게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부러움으로 포장된 묘한 감정이 세포를 하나씩 건드리는 기분이다. 질투도 나고, 이상하게 화도 난다. 호기심이 일기도 하고, 맹렬한 자극이 되기도 한다.
지난 몇 개월간 나는 꿈을 이룬 여자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자 내가 가진 시간과 열정을 온통 쏟아 부었다. 여기서 내가 선택한 ‘꿈을 이룬 그녀들’의 공통분모는 출발 선상이 평범하기 그지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고 남루해 보이는 ‘과거’를 가졌으나 결국 상상을 현실로 바꾼 여자들. 이것이 내 연구대상자들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두 번째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바로 행복의 도정(道程)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낯선 도전과 인내와 열정의 과정을 무엇보다도 행복으로 그려가야 했다. 강박적으로 사회적 성과만을 탐닉하거나, 모든 가치를 내던지고 성공에만 몰두하는 것은 진정한 성공이라 간주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경건하고 또 절절한 마음으로 그녀들의 성공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줄의 결론이 나왔다.
나만의 키친테이블노블을 가질 것!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거기 존재했던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쨌든 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 기묘한 주문이었다. 나만의 키친테이블노블(Kitchen Table Novel)을 가지라니. 알다시피 키친테이블노블이란 자신의 식탁 위에서 긁적이는 소설을 말한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이렇다.
병아리 눈물만큼도 원하지 않는 업무를 하루에 꼬박 10시간씩 견뎌내는 서른의 싱글녀가 있다. 그녀의 유일한 꿈이자 일상의 구원은 퇴근 후 자신만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소설을 쓰는 시간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 안에서 꿈을 향해 키친테이블노블을 써내려간다. 하루, 이틀, 1년, 2년. 그리고 5년쯤의 세월이 흘러 그녀는 결국 꿈을 이룬다. 남들 눈에 영양가 없어 보이는 모래알 같은 시간을 쌓아 꿈의 모래성을 지은 것이다.
키친테이블노블이 모두에게 소설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세계를 무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영어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학창시절 놓아버린 그림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독서와 글쓰기에, 누군가는 철학이나 심리학에 미쳐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배움’이라는 키워드다. 영원히 성장하기를 원하고 또 바라는 것. 그래서일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밤마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넘기는 그녀들의 모습에는 그 어떤 수식어로도 담지 못할 아름다움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절망과 포기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아니다. 꿈꾸기를 지속하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청춘 여자’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믿고, 이제 다시 한 번 일어서봄은 어떨까?
서른,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다. 새로운 출발 앞에서 오히려 이른 나이다. 꿈을 위한 우리들의 갸륵한 수고, 그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보답할 터이니. 지금, 당신만의 키친테이블노블을 써내려갈 준비가 되었는가? 자, 우리 삶의 2막을 함께 열어보자.
* 김애리 작가의 칼럼이 『여자에게 공부가 필요할 때』 책으로 나왔습니다.
* 김애리의 ‘서른 여자 공부법’은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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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리
천 권의 책에 인생의 길을 물었던 김애리. 그녀는 거창한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견디기 위해 책을 읽었다. 우울증에 시달릴 만큼 예민하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서 안정된 생활을 쫓던 그녀에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이놈의 ‘삶’을 견디는 일은 다 커서 젓가락질을 다시 배우는 일마냥 멋쩍고 창피했다. 이토록 소심한 여자가 청춘을 견디고, 서른을 견디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독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며불며 책을 읽었고, 사랑 역시 책으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이 되기 전에 천 권의 책을 읽었다. 청춘이라는 악몽 같은 시간을 오직 책으로 버텨낸 그녀의 열정은 2009년 겨울 서정문학상에 단편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이 당선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며 이후 『책에 미친 청춘』, 『십대, 책에서 길을 묻다』, 『아까운 책 2012』(공저) 등을 펴냈다. 현재 언론진흥재단, 김영사 웹진 등에 칼럼을 연재하며 독서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봄봄봄
2014.06.17
저도 몇달 동안 YES24에서 멀리 있었는데 이제 다시 시간이 됩니다.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