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작 『은교』를 펴낸 뒤, 박범신 작가는 자신의 고향인 충남 논산으로 내려갔다. ‘홀로 가득 차고 따뜻이 비어 있는 집’이라는 집필실에서 ‘홀로’ 글을 쓰고 있다. 주말에는 아내가 있는 서울 집으로 올라오지만, 대부분의 일상은 논산의 고요함과 함께한다. 박범신은 논산을 배경으로 한 전작 『소금』을 쓰고 난 뒤,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작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는 건, 가장 절망적인 일. 박범신은 은퇴를 생각해 볼만큼 고통스러웠다.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느낌이 들어, 나날이 늙어가는 걸 체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범신은 서울 부암동의 한 식당 간판 ‘소소한 풍경’을 만난다. 불현듯 말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명확하진 않지만 분명한 단상이었다.
문단 데뷔 41년을 맞은 박범신의 41번째 장편 소설 『소소한 풍경』은 한 남자와 두 여자, 즉 세 남녀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이들의 관계는 삼각관계와 같은 평범한 감정이 아니다. 하나의 ‘덩어리’로 이뤄진 사랑, 누구도 구속하지 않는 상태의 세 사람의 동거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사랑이다. 사랑일지, 욕망일지, 좀체 정의 내릴 수 없는 세 사람의 이상한 사랑에 독자들은 혼란스럽다. 동시에 호기심을 갖는다. 모호한 이들의 관계는 과연 무슨 감정일까. 작가는 “『소소한 풍경』은 사랑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5월의 어느 날, 평창동 한 카페에서 박범신 작가와 마주했다. 젊은 사람들이 즐겨 신는 스니커즈를 신고 나타난 박범신 작가. “직접 사셨어요?”라고 물으니, “어떤 아가씨가 선물해줬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가는 인터뷰 내내 “나도 이 소설을 잘 모르겠어”, “독후감을 많이 듣고 싶어”, “노작가가 쓸 수 없는 소재라고 말할 순 없지”라며, 작품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언제까지나 위태로운 작가이고 싶다는 그는 노련한 화자인 동시에 영원히 늙지 않는 감성을 툭툭 내던졌다.
사랑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소설
2012년 겨울 『소금』을 쓰고 난 뒤, 좌초했다고 밝혔다. 소설 쓰기를 아예 그만둘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을 보낸 후 쓰게 된 작품이 『소소한 풍경』이다.
절필하고 소설을 다시 쓴 게 1996년이다. 그간 다양한 소설을 썼지만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인간의 존재론적 번뇌였다. 『은교』도 그렇지만, 등산 이야기인 『촐라체』도 결국 인간의 본원적인 갈망에 대한 이야기다. 『고산자』도 김정호 이야기이지만 사회정치적인 환경 속의 김정호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번뇌, 그리움을 그렸다. 15년간 나는 존재론적 이야기에 갇혀 있었고, 이후 새 출발을 하는 마음으로 『비즈니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소금』을 잇달아 썼다.
세 작품은 전작들과는 다르다. 자본주의 폭력성에 대한 사회비판이 많이 담긴 소설이었다. 이렇게 연달아 쓰고 났더니, 웬만한 이야기는 다한 것 같아서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느낌을 받았다.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면, 작가는 글을 쓸 수 없다. 고통스러웠다. 논산에서 시간은 남는데, 절실하게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니 괴로웠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무렵, 서울에 와서 밥을 먹으러 부암동을 갔는데, ‘소소한 풍경’이라는 음식점 간판을 봤다. 간판을 읽고는 불현듯 말하고 싶은 게 떠올랐다.
‘소소한 풍경’이라는 단어가 준 단상은 무엇이었나?
명백하지 않지만, 아직 내 안에 할 말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나를 회생시킨 거다.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있는 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 부르짖고 싶고 하소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육체는 늙어도 영혼은 생생하다. 나날이 늙는 것 같아 우울하던 찰나였는데, 구체적인 이야기는 떠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깊은 우물 밑에서 물방울이 포르르르 올라와서 수면 위에서 팡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노화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제목은 따뜻한 느낌이지만, 소설은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다.
‘소소한 풍경’에서 신호는 받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로 알지 못했다. 다시 논산에 내려가서 쓸쓸하게 누워있다가, 삶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에너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자본주의적 욕망 말고, 어떤 에너지가 있을까? 자문해보니,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삶을 운영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소소한 풍경』이 시작됐다. 근원적인 사랑의 갈망이 우리를 살게 하지만, 살아 생전에는 가질 수 없는 그런 사랑에 대한 슬픔을 말하고 싶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독특한 사랑을 한다. 삼각관계로 보이지도 않고, 서로를 구속하지도 욕망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사랑일까? 의심을 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하지만, 구체적인 사랑을 완성했다는 느낌은 없다. 사랑은 갈망 속에 있을 뿐인지, 현실 속의 사랑을 완성했다고 하는 건,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소소한 풍경』이 시작된 이유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강력한 갈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소설이다. 매 순간 우리가 갖지 못하는 사랑의 불모성에 대한 고변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불모성에 대한 저항을 뒷받침해주는 건, 삶의 유한성이다.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죽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밑바닥, 백그라운드에 ‘죽음’이 있는 까닭이다.
『소소한 풍경』이 사랑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발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그렇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이 소설을 쓰기까지 세 개의 탑을 쌓아 올렸다. 죽음, 사랑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발, 일대일과 다자관계. 우리 사회는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통해 일대일 관계를 유지한다. 인간은 유약해서 사랑을 끝내 지켜낼 만한 용기가 없으니까,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탁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일대일 관계는 이미 끝났다. 이미 결혼한 부부들의 머릿속에서도 일대일 관계는 이미 깨졌다. 각자에게는 파트너가 있지만,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때도 많지 않나? 일대일 관계가 50년씩 원만한 부부로 지켜져 갈 때, 너무나 많은 희로애락의 억제가 필요하다. 이건 폭력일 수 있다. 일대일 관계는 윤리로서의 억압이 필요하다. 인간 본연의 관점에서 보면 폭력적일 수 있다. 폭력 말고 좋은 말이 있으면 좋겠는데, 모르겠다.
언제까지나 위태로운 작가이고 싶다
“내가 그동안 수십 권의 소설을 썼으니 얼마나 플롯에 질렸겠냐 (중략) 작가가 자유로운 상상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건 단순한 생각이야. 작가들은 관리자에 가까운 표정을 갖고 있어”(94쪽) 등, 작품 속에서 플롯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자연스레 작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소한 풍경』에서 보여준 플롯의 파괴에서 작가의 욕망과 의도가 읽혔다.
현대소설은 철저히 인과론에 의해서 쓰여진 작품이다. 막장 드라마는 인과론도 없지만. 엄격하게 노벨이라고 부르는 작품에 있어서는 인과론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소설 쓰기도 삶이랑 같다. 논리를 부여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다. 모든 관계에도 플롯을 부여해야 한다. 나 역시 평생 소설가로 살았으니, 의미를 만들어내고 구조를 만들어냈는데 플롯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욕망이 지금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 『소소한 풍경』은 사랑을 플롯으로 보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반항적인 느낌으로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이유다. 우리는 현실에서 어떤 사람을 나의 애인으로 정하면, 다음 날 아침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도 상대를 보러 가야 한다. 본질적인 사랑의 불꽃을 플롯에 의탁하고 사는 거다. 플롯조차 없으면 일주일도 어렵다. 시간을 연장하는 비겁한 방식일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충분히 플롯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나?
깨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스스로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플롯을 완전히 벗어나서는 쓸 수가 없었다. 내밀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형식에 대한 욕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전 소설을 쓸 때와는 다른 쾌감을 느꼈을 것 같다.
쾌감도 있었지만 매 순간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쓸지 모르겠어서. 소설집이 나오고 기자들이 두 가지를 지적하더라. 첫째는 나이. “당신 나이가 일흔이 다 됐는데, 소재나 주제가 늙은 작가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늙은 작가가 어디 있나? 작가에게는 나이가 없다. 젊은 작가, 늙은 작가 그런 건 없다. 나에게는 강력한 문학 순정주의가 있기 때문에, 나이에 합당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한국식 정서에 굴복할 마음이 전혀 없다. 나는 언제까지나 위태로운 노인으로 살고 싶다. 작가니까.
두 번째 지적은 무엇이었나?
일흔을 앞두고 있는데, 형식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아직도 있냐는 것. 이것도 우문이다. 청년작가이기 때문에 내게는 당연한 거다. 영원한 거다.
문장에 대한 감수성은 여전히 젊다.
감수성은 늙는 게 아니다. 나이에 합당한 어떠한 권위를 갖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전히 내가 늙지 않고 있는 건 사실이다.
작품이 작가에게 주는 예언적 기능
소설 속 주인공은 “권태야말로 살인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에게도 권태는 절대악이지 않나?
『소소한 풍경』을 쓰기 전, 약 2년간 원고가 나오지 않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원고를 안 쓰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권태를 느끼면 가출도 해보고, 술도 마시고, 산도 가보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논산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삶의 안락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권태로우면 자학이 온다. 자학의 밑바닥에는 거대한 우울이 있다. 자기 학대를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한다. 그 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게 있으면, 원고를 쓰게 된다.
주인공의 스승은 “글을 쓰다 보면, 다가올 인생을 미리 알고 있다는 서늘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작가도 그러한가?
작가 스스로에게도 작품이 주술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은교』를 쓰기 전에는 늙어가는 고통이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는데, 그 고통의 정체를 몰랐다. 매일 울고 싶고 매일 화나고, 소리 치고, 사춘기 소년 같았다. 마치 폭탄주를 30잔 정도 마신 것 같은 정서였다. 늙어가는 그런 슬픔을 견디다가 『은교』를 쓰고 내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됐다. 늙어가는 문제를 어떻게 맞닥뜨려야 할지 알게 됐고, 완전하진 않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은교』를 쓴 후, 내가 어떻게 늙어가겠다는 걸 알았다. 극복했다는 것보다는 내가 늙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응하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어찌 보면 작품이 예언적 기능도 있는 거다. 『소금』은 늙은 아버지를 변호한 것 같지만 결국 나를 변호한 것이다.
『소소한 풍경』을 쓰고 나서,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나.
이 소설의 정체가 뚜렷하진 않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의 불완전성에 대한 슬픔을 극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됐다. 알기 전까지는 내 안에 꽃피고 있는 사랑의 불꽃을 실현하려고 했다면, 이 소설을 쓰면서 사랑은 죽을 때까지 완성할 수 없고 꿈꾸는 것들은 헛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앞날에 사랑의 불완전성에 대한 슬픔이 가득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 슬픔으로 나는 죽지 않을 거다.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다르다. 그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쓴 게 아니라 쓰면서 알게 됐다.
논산에서 살지 않고, 서울에서 살았더라면 이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소설 속 배경인 ‘소소시’는 공주를 생각하면서 쓴 거다. 거기서 홀로 쓸쓸하게 있던 기억들을 모티프로 따왔다. 주인공들이 사는 집도 격리된 외딴집 아니었나? 논산에서 혼자 살지 않았다면, 쓸쓸하고 가난한 밥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안 썼을지도 모를 소설이다.
위태로운 작가로 살고 싶다
소설이 3개 챕터로 이뤄졌다. ‘혼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더 좋아’ ‘셋이 사니 진짜 좋아’. 더좋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같게 느껴지기도 하다.
혼자 살아도 사랑을 완성할 수 없고, 둘이 살아도 완성할 수 없고, 셋이 살아도 결코 완성할 수 없으니 슬픈 거다.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셋이 살아도 결국 사랑을 완성하는 건, 불가능한 꿈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작가는 이중 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논산에서는 혼자, 서울에서는 아내와 함께. 어떤 삶이 더 자유로운가?
평일에는 논산에 있고 주말에는 서울에 간다. 사흘 정도 논산에 있으면 정말 좋다. 자유롭고. 서울에서는 아내와 둘이 지내는데, 아내가 나를 제한하는 건 없지만 그래도 맞춰서 살아가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하지만 논산에서 며칠 있다 보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독하니까 아내에게 오고 싶다. ‘둘이 사는 게 역시 좋아’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것 같다. 나는 지금 혼자 사는 삶과 둘이 사는 삶을 갈팡질팡 왔다 갔다 하는데, 작가의 내적 긴장을 높이는 데는 좋은 것 같다. 상상력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최근 인터뷰에서 “사랑 없는 존경보다 존경 없는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 존경에 대한 욕망도 들지 않나?
존경과 사랑이 전혀 다른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실한 사랑에는 진실한 존경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존경이라고 하는 것에는 권위에 따른 존경이 너무 크다. 나이 많은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권위에 따른 합당한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데, 사랑을 받으면 존경도 받고 있다고 느낄 거다. 나는 40년을 오직 소설만 써온 작가라는, 그런 식의 나이에 합당한 존경은 원치 않는다. 사랑, 존경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싶지만 굳이 한 가지를 선택하려면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에는 존경이 있으니까.
1970, 80년대 최고 인기작가였지만,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를 여섯 차례 다녀왔다. 3여년의 절필 기간이 없었더라도 지금까지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아마 쓸 수 없었을 가능성이 많다. 인기작가 시절의 질주를 따라갔으면 좌절했을 거다. 절필은 자기 죽음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 선언을 통해서 작가로 새로 태어났다고 느낀다. 현실적인 기득권은 잃었지만 내 인생에서 좋은 선택이었다고 믿고 있다. 절필한 건 아니었지만, 『소금』을 쓰고 난 후의 2년간은 내게 절필 시간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와 작가로서의 자아가 충돌할 때는 없나?
내게는 두 개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사회적 자아, 정치적 자아, 아버지로서 갖는 책임으로서의 자아와 창조적인 자아. 사회적 자아에 대한 책임감은 크다. 내 삶에서 개인사가 잘 여민 건, 사회적 존재로서 내가 갖고 있는 성실성, 책임감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로 나의 문학적 세계를 포장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강력한 저항감을 갖고 있다. 예술적, 창조적 자아로서는 삶의 어떤 양식을 깨뜨려서 가고 싶고, 매우 위태로운 작가로 살고 싶다. 양다리를 걸친 사람? 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앞서 “할 말이 있지 않는 한, 늙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 마음속에 갖고 있는 할 말은 무엇인가.
작가의 말에도 썼듯이, 삶의 비밀스러운 밑바닥을 그려보고 싶다. 『소소한 풍경』은 내가 썼지만, 나조차도 이 소설을 다 알고 있지 못한 느낌이다. 어떤 문장들은 분명히 내 밑바닥에서 가져온 예시를 갖고 썼지만, 해설을 잘하지 못한 문장이 있음을 느낀다.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말은 애매하지만, 관리자에 가까운 작가의 마음으로 쓰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의 문제들, 삶의 가장 본연적인 비밀에 대해 쓰고 싶다. 그게 나의 소망이다.
작가에게 지금 한 권의 『소소한 풍경』이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가?
소유라는 욕망으로 자기 사랑을 해치는 사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으로 자기 감정을 해치고 있는 사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지 않을까. 소유라는 감정은 사랑의 최대 적이자 에너지다. 잘 쓰면 좋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사랑을 해친다. 어린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면 모두 부숴버리지 않나? 젊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주면 다 부숴버린다. 우리에겐 본질적으로 이런 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욕망이 있으니까. 이런 욕망을 느끼는 사람이 읽는다면, 가깝게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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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저 | 자음과모음(이룸)
도대체 이런 사랑도 가능한 것일까.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있다. 정확히는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또 다른 여자가 있다. 이 셋이 서로를 사랑한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와 그리고 셋이서 함께. 삼각관계도 아니고 파트너를 추가하거나 맞교환하는 게임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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