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에 대한 신화, 민담은 거의 태초부터 있었다.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등에도 죽은 자가 깨어나 산 사람을 먹거나 해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는 악마나 괴물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대중문화 속 캐릭터로 인기를 얻으면서 뱀파이어는 점점 매력적인 존재로 진화했다.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뱀파이어들은 햇빛을 받으면 죽는 게 아니라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한다. 뱀파이어의 특성으로 열거되는 사항들을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진시황과 알렉산더 등 수많은 영웅호걸이 염원하던 불사의 존재이며, 인간보다 월등하게 빠르고 힘이 세다. 타인을 조종할 수 있고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도 있다. 피를 빤다는 행위도 혐오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흡혈은 곧 생명의 근원을 마시는 것이고 타인에 대한 정복과 지배의 의미를 지닌다. 연인이나 의형제를 맺는 이들이 서로의 피를 먹거나 합치는 행위는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생명을 보호하고 뻗어나간다는 의미가 된다.
영화 <트와일라잇> 스틸컷
뱀파이어 전설은 트란실바니아, 불가리아, 모라비아 등 동유럽에 많았고 러시아와 중국, 멕시코, 록키산맥의 인디언들에게도 있다. 대홍수 전설처럼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뱀파이어다 보니 토비 후퍼의 <뱀파이어>처럼 외계에서 온 존재라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대 마야문명의 유적이 뱀파이어 소굴이라는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도, 피의 의식을 치렀던 과거가 있는만큼 개연성이 있다. 동유럽에서는 17, 18세기 들어 썩지 않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들이 광범위하게 퍼지며 마녀, 뱀파이어에 대해 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동구권에 있었던 두 명의 실존 인물은 뱀파이어의 기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왈라키아의 군주인 블라드 3세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트란실바니아의 바토리 백작부인은 조셉 셰리던 레파뉴의 <카르밀라>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1456년 왕위에 오른 블라드 3세는 ‘용의 아들’이라는 뜻의 블라드 드라큘라로 불렸고, 침략해오는 투르크족에 맞서 용맹을 떨쳤다. 투르크 포로들을 말뚝에 박아 죽이는 잔인함 때문에 ‘블라드 체페슈’(블라드, 말뚝으로 박는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프란시스 코폴라의 <드라큘라>에 나오는, 투르크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하자 아내가 자살하는 사건도 실화다. 1560년생인 바토리 백작부인은 터키군와 싸우던 남편이 전사한 후에 본격적인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처녀의 피가 젊음을 돌려준다고 생각하여, 수많은 소녀들을 납치하여 그들의 피를 마시고, 목욕을 했다. 권력의 비호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소문이 퍼지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는다. 최근 젊은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실제로 신체조직과 활동이 젊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을 보면 바토리의 악행은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뱀파이어 전설을 대중적으로 전파한 작품이라면 역시 브람 스토커의 고딕 소설 『드라큘라』다. 소설에서 드라큘라는 비이성과 광기의 존재다. 근대성의 상징인 이성과 합리주의가 타도해야 할 전근대적 광기의 상징으로 드라큘라가 지목된다. 그래서 반헬싱을 비롯한 이들이 드라큘라의 이름을, 그의 정체를 알게 되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성적으로 드라큘라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그는 근대문명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성과 합리주의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해명할 수 없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물리친 드라큘라 이후 더욱 더 많은 뱀파이어들이 명멸해왔다. 인간이 두려워했던 초자연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로서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다. 『드라큘라』의 결말이 너무 인간에게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던 스티븐 킹은 『살렘스 롯』에서 뱀파이어들이 메인 주의 한 마을을 장악하는 모습을 인간적으로, 섬뜩하게 그려냈다.
1976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가 시작된다. 『뱀파이어 레스타』, 『저주받은 자들의 여왕』, 『육체도둑 이야기』, 『악마 멤노크』 등으로 이어지는 뱀파이어 연대기는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4년에 제작된 닐 조단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브래드 피트와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뱀파이어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지성적이다. 그들은 피를 갈구하는 야수가 아니라 사랑과 이별 등 인간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면서 영생으로 인한 권태에도 괴로워하는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강인하고, 시간의 몰락을 견뎌내고, 자신의 행동에 한 치의 후회도 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인간’적인 뱀파이어.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는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뱀파이어 연대기’의 영향으로 뱀파이어를 동경하며 뱀파이어의 의상이나 화장 등을 따라하는 고딕족들도 등장했다. 미국 사회에서 뱀파이어 연대기의 팬은 <스타 트렉>의 팬과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성과 합리주의, 미래에 대한 희망, 동부를 대표하는 것이 <스타 트렉>의 팬이라면 뱀파이어 연대기의 팬들은 광기와 디오니소스, 탐닉과 염세주의, 서부를 상징했다. 한편으로 뱀파이어 열풍은 68혁명이 사그러든 후의 세계를 견뎌내야만 했던 젊은이들이 택한 또 하나의 도피처였다. 뱀파이어 연대기에서 말하는 뱀파이어의 근원은 이집트의 신화다. 앤 라이스는 조각난 시체가 부활하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신화에서 뱀파이어를 끌어낸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스틸컷
뱀파이어는 흔히 외부의 침입자로 그려졌지만, 20세기 말부터는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다른 존재로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본성과 다를 바 없다고 간주된다.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쓰고 연출한 오시이 마모루는 소설 『야수들의 밤』에서 뱀파이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진화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등등. 역사의 과정을 돌이켜볼 때, 오시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결코 선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다른 생명체를 살육하는 야수의 중간쯤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구체적인 형상으로 말한다면, 야수의 이빨이 번득거리는 반인반수일 것이다.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처럼.
결국 뱀파이어가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내면과 인간의 내면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HBO의 드라마 <트루 블러드>는 인간과 뱀파이어, 요정, 늑대인간, 신체변형자가 공존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트루 불러드’라는 음료를 마시면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마실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뱀파이어가 굳이 인간의 적이 될 이유가 없고, 인간 또한 반드시 뱀파이어를 박멸할 필요가 없어진다. 인간과 뱀파이어는 다른 인종이나 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것처럼 공존하게 된다. <트루 블러드>는 셸레인 해리스의 소설 『어두워지면 일어나라』로 시작되는 ‘남부 뱀파이어’ 시리즈를 각색한 것이다. 루이지애나를 배경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성 수키와 뱀파이어인 빌과의 사랑을 흥겹게 그린 소설을 각색한 <트루 블러드>는 수키와 빌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순을 진지하게 파헤친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와 드라마 <식스 피트 언더>를 제작했던 알란 볼은 경쾌한 원작을 좀 더 심각하고 무거운 드라마로 만들었다. 지금도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의 시골이라면 뱀파이어가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트루 블러드> 속의 뱀파이어는 동성애자나 소수 민족 등의 사회적 약자, 소수자처럼 그려진다.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테러와 린치를 가한다.
일부는 뱀파이어를 돈벌이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고, 일부는 그들의 힘을 추종한다. <트루 블러드>에서는 뱀파이어의 행동과 선택이 인간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불법적인 살인과 폭력을 저지른다면, 그들 역시 똑같이 법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뱀파이어들의 ‘힘’이 더욱 강조되기는 하지만. <트루 블러드>에서는 뱀파이어의 기원을 아담의 아이를 낳았던 또 하나의 부인 릴리스에서 찾아낸다.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했던, 해머 프로덕션이 만든 70년대 뱀파이어 영화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목에 송곳니를 찔러 넣고 피를 빨아 마시는 행위를 성적인 코드로 읽어낸다. 인간의 정기를 빨아들여 끊임없이 젊어지는 불사의 존재는 더없이 강하고 매력적인 존재다. 반면 앤디 워홀이 제작한 <블러드 포 드라큘라>에서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뱀파이어를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대중문화의 최고 인기 캐릭터인 뱀파이어는 이제 어느 하나로만 머무를 수 없다. 21세기의 뱀파이어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캐릭터 설정도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캐릭터다. 그러니 뱀파이어에 대한 더욱 더 기이하고 묘한 이야기들이 나오길 바란다. 동시에 가장 친숙한 뱀파이어들이 우리들의 일상으로 스며들기를 원하고. 우리와 가장 닮았으면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로서 뱀파이어는 불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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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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