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상춘곡(賞春曲)
인내심을 시험하는 홋카이도의 봄은 오긴 왔다. 설마 했는데 4월에도 가끔 눈이 내렸고, 내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5월 초의 황금연휴엔 마침내 삿포로에서도 벚꽃 놀이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입고 싶었을 얇은 옷을 걸치고 나왔다. 15도가 넘는 일교차와 차가운 바람을 피할 재간을 부리기엔 나는 아직 서툴렀다.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믿음을 주는 바람이 크게 한몫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등을 밀고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반년째 잠을 자고 일어나는 이곳이 섬이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차로 삼십 분이면 바다에 닿을 수 있다.
‘오늘 날씨 참 좋네요.’로 시작하는 대화처럼 어색한 것도 없다. 하지만 홋카이도에 대해 쓸 때는 날씨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 삿포로는 일본 5대 도시로 꼽히지만, 자연과 맞닿은 삶이 있는 곳이다. 날씨와 자연은 순응한 만큼 누릴 것을 준다. 풀이 돋아났고, 낮도 길어졌다. 곤충 더듬이 마냥 발가락 열 개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발끝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산책하는 것이 밀린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삿포로에서의 ‘상춘곡(賞春曲)’을 시작했다. 여러 사람을 선운사로 향하게 했던 소설 제목을 빌려 붙인 이름이다.
빛과 소리라는 말은 어쩌면 '멀리'라는 뜻에서 온 것이 아닐는지요. 발소리만 듣고도 나는 그게 당신이란 걸 금방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야흐로 봄이 막 시작됐음을 뜻하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_윤대녕 「상춘곡」
‘상춘곡(賞春曲)’의 한자를 풀어 보면 ‘봄을 즐기는 노래’, 혹은 ‘봄이 주는 노래’다. 향기만 맡아도 취할 듯한 봄나물 같은 문장들은 이즈음의 기분과 잘 어울린다.
그 골목 어디쯤
‘소엔(桑園)’이란 이름을 가진 동네 어디쯤이었다. 파란 신호가 깜빡였다. 전력 질주하면 간신히 건너편에 닿을 수 있었지만, 자전거 속도를 줄였다. 신호를 기다리던 골목 어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몸통이 부서진 채로 볼이 터져라 웃고 있는 ‘호빵맨’ 장난감이었다. 다음 빨간 신호 앞에선 커다란 것의 기척을 느꼈다. ‘깜짝이야.’ 독수리였다. 엉거주춤 날개를 펼친 채 박제되어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길가의 모든 것은 생과 소멸의 가운데쯤에 있었다. 여기저기 매달린 꽃은 번식을 위해 치열하게 색을 내고 입을 벌렸다. 자신은 곧 사라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싱그러움은 극에 달했다. 후회 없이 아름다웠고, 오래 기다렸지만 침착했다. 몽우리 속에는 바람 부는 대로 씨앗을 떠나 보낼 수 있는 용기를 감추고 있었다.
휴일의 산책길엔 종종 목적지를 망각했다. 어느 해 질 녘, 엄청난 허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내 손에는 빵과 햄, 치즈, 감자 따위가 들려있었다.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 사러 나간 길이었다. 도중에 튤립이며 꽃 잔디를 심는 어린아이와 아빠가 있어 그 집 앞으로 조금 돌아가려고 했다. 다음엔 외발자전거 타는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사는 골목으로 가고 싶어졌다. 시선이 옮겨간 곳은 담장 틈새로 햇빛이 스며드는 바닥이었다. 거기에 ‘도라에몽’이 있었다. 누군가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그려 놓은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그러고 나서 담장 넘어 바깥을 탐하는 강아지와 눈인사를 했다. 결국은 원래 가려던 샌드위치 가게와는 열여섯 블록이나 떨어진 어두컴컴한 빵집에서 식빵을 샀다. 어쩌다 보니 직접 잼을 바르고 감자를 삶아 속을 채워 넣었다.
봄빛 아래를 걸으면 환각 상태를 경험한다. 「상춘곡」에서 말하는, ‘연둣빛 봄 햇살의 속삭임’ 같은 것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서 산책은, 골목에서 길을 잃는 것으로 종종 끝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문득 잠든 내 얼굴에 감겨드는 이상한 빛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지요. 그것은 아주 은은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느껴지는 빛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바늘 끝 같은 것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것이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둣빛 봄 햇살 소리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곧 나는 알게 됩니다. 그것이 멀리서 당신이 오고 있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_윤대녕 「상춘곡」
도시 속의 원시림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네.” 교문 앞에 서 있던 엄마가 했던 말이다. 햇볕이 쨍한 날 잠깐 오다 그치는 비에도, 엄마는 학교 앞으로 우산을 가지고 마중 나오곤 했다. 나는 엄마와 한 우산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우산 속의 모녀는 호랑이가 장가가서 행복하게 잘살라며 빌곤 했다. 아스팔트 위로 비가 증발하는 냄새를 맡고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녹슨 교문으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그 호랑이는 잘살고 있을까, 막연한 생각을 하며 홋카이도 대학교에 닿았다. 하늘은 다시 맑아지고 있었다. 비 냄새는 금방 사라졌다. 대신 가축의 분뇨와 풀 내음이 섞인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농업 대학이 전신인 홋카이도 대학의 서쪽 캠퍼스는 숲 속의 목장 같았다. 소와 양이 풀을 뜯고 있던 목장 옆으론 포플러 가로수 길이 곧게 나 있었다. 동아리 방에선 신입생 모집이 한창이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북적임을 지나자, 일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원시림이었다. 빛과 녹음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는 듯 새침을 떼고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의 원시림에서 봄 산책이 주는 환각 상태는 절정에 달했다.
부디 어여쁘시길
「상춘곡」의 마지막 문장을 읽다 울컥한다.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_윤대녕 「상춘곡」
어느 때보다 잔인한 봄이다. 살아 있는 게 죽을 만큼 소중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살아있는 덕분에 발끝이 아찔해질 정도로 걸으며 자전거 페달을 굴린다. 봄을 맛보고 냄새를 맡고, 계절이 주는 모든 것과 볼을 비벼댄다. 열 개 발끝으로 땅을 꾹 누르며 감각을 극대화한다. 오늘도 새로운 골목을 탐하며 환각에 빠져 바란다. 봄이여, 부디 내내 어여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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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감귤
2014.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