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안 오는 셈 치고 소풍을 가면 어떨까?"
벨기에의 그림책 작가 가브레엘 벵상의 ‘비오는 날의 소풍’(시공주니어)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비 안 오는 셈 치고 소풍을 떠난다. 그리고 멋진 하루를 보낸다. 만약 이들이 비가 온다고 집에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한 것은 이렇게 멋진 하루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일이 마음대로 안될 때, 이렇게 일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번뇌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번뇌는 사람의 마음 전체에 비하면 우파니사타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이라 한다. 우파니사타분의 일이란 '화엄경'에 나오는 말로 극미소한 양을 나타낼 때 쓰인다. 숫자로 표현하면 0 다음에 소수점을 찍고 그 뒤에 0을 수없이 붙이고 나서 마침내 1로 마무(0.00000000...1)하면 되는 아주 작은 양이다. 마음이 우주라면 번뇌는 가는 먼지 하나보다 작고, 마음이 바다라면 번뇌는 물방울 하나보다 작다는 얘기다."
지안스님이 얼마 전 내놓은 책 '마음의 정원을 거닐다'(불광출판사)에 쓴 한 구절이다. 우파니사타분의 일. 우리가 발붙이고 서 있는 좁은 땅을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그 멀리 펼쳐진 우주를 생각하면, 또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 먼 과거 그리고 먼 미래로 연결된 나의 삶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민들이 우파니사타분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여유 없이 쫓기다보면, 걱정이 걱정을 낳고, 스트레스가 스트레스를 낳아 어느새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이럴 땐,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우리가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바꿔보겠지만)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분야에선 그림책 '비오는 날의 소풍'의 주인공 꼬마 셀레스틴느와 아저씨 에르네스트가 '선수'이다
사랑스런 꼬마 아가씨 셀레스틴느는 다음 날 소풍갈 생각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죠? 신난다! 드디어 출발이야!"
셀레스틴느와 에르네스트는 하루 종일 먹을 엄청난 량의 먹을 것을 싸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는다. 드디어 소풍날. 어린 시절, 소풍 떠나기 전날 항상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비가 오는 것.
"할 수 없잖니. 셀레스틴느! 그러지마....너무 속상해 하지 마!"
에르네스트의 위로에도 셀레스틴느는 창밖을 보면 울기만 한다. 이때 에르네스트 아저씨는 매우 색다른 결정을 한다.
"셀레스틴느야 아저씨에게 놓은 생각이 있어! 비 안 오는 셈 치고 소풍을 가면 어떨까?"
이 얼마나 통쾌한 말인가. 벨기에가 사랑하는 작가 가브레엘 벵상의 이 사랑스런 그림책을 볼 때마다 이 부분에서 항상 짜릿함을 느낀다. 비 안 오는 셈치고 소풍을 떠나자니. 비 안 오는 셈치고....에르네스트 아저씨로서는 실망하는 셀레스틴느를 달래고 싶기도 하고, 정말 소풍을 못가서 애닳은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서 이런 말을 했겠지만, 우리는 때때로 이럴 필요가 있다. 비가 오면 소풍을 못가는 아이처럼, 사람들과의 관계, 일, 사랑, 크고 작은 일상의 일들에서 뭔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답답한 마음에 화를 내며 옆에 있는 종이뭉치라도 던지고 싶을 때, 종이뭉치를 던지는 대신 조금 다른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일 말이다.
그래서 에르네스트와 셀레스틴느는 준비한 음식을 모두 들고 밖으로 나간다. 비가 안 온 셈 치는 것이니까 밀짚모자도 쓰고.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나가며서도 셀레스틴느는 "아저씨, 쨍쨍 내리 쬐는 저 햇빛 좀 보세요"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 둘은 정말 기막히게 멋진 소풍이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신나게 소풍을 떠난 이들은 도중에 에르네스트의 친구를 만난다. 그 친구는 에르네스트에게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이런 날씨에 아이를 데리고 나서다니!"라고 꾸짖지만 에르네스트의 답을 이렇다.
"어이 친구. 비 좀 맞는다고 어떻게 되겠나!"
이 대사도 참 좋아한다. "비 좀 맞는다고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비가 쏟아지면, 스스로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지 않는지.
"길 위로 비가 내려도 방랑자는 멈추지 않는다네. 라. 라. 라....."
두 사람은 마치 진 켈리 주연의 오래된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의 그 명장면처럼 쏟아지는 비속에서 춤을 춘다. 둘은 숲속에 자리를 잡고, 작은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준비해온 모든 음식을 펼쳐놓고 먹는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지.
"아저씨 우리 오두막이 너무너무 멋져요! 너무 재밌어요!"
그 뒤 이들이 캠프를 친 곳의 땅 주인이 나타나, ‘내 땅에서 뭐하냐’며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에르네스트와 셀레스틴느는 이 사람도 자신들의 텐트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고, 친구가 된다. 참 멋진 하루가 아닐 수 없다. 비가 온다고, 그냥 집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셀레스틴느는 계속 뾰루퉁 했을 거고, 에르네스트는 셀레스틴느를 달래기 바빴을 거다. 어쩌면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듯 달래다 달래다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쉬운 것은 그냥 집에 있었다면 이렇게 멋진 하루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생의 고비고비 멋진 시간을 만드는 것은 때로는 "자 우리 비 안오는 셈 치고 소풍갈까"라는 그런 생각인지 모른다.
※같이 보면 좋은 책
지안 저 | 불광출판사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나 스스로에 대해, 우리 삶에 대해 찬찬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현대인은 마음이 차가운 냉장고 인간”, “인심이 메마른 사회”, “모방만 하며 살아가려는 서글픈 현실” 등 스님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돌아보는 성찰이 힘이라면, 이런 성찰의 근육을 기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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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1992년부터 일간지 기자로 일하고 있다.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그림책 세계에 매료됐다. 그림책 『불할아버지』 어린이책 『알고 싶은 게 많은 꼬마 궁금이』 『1가지 이야기 100가지 상식』 등을 썼고,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을 공저로 출간했다. 현재 문화일보 문화부에서 영화와 어린이ㆍ청소년책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빛나는보석
201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