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guefile By sideshowmom
학교에만 가면 윤희는 마네킹이 됐다. 누구에게도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았고 늘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중학생이 된 후 1년 반이 지나도록 7교시 내내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영어, 수학은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지만 수업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그것이 학교생활의 전부였다. 점심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학교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야 했지만 함께 갈 친구가 없는 윤희는 식사를 걸렀다. 그렇지만 윤희가 점심을 먹지 않고 혼자 교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학급 친구들은 ‘윤희가 말을 못하는 아이다’ ‘아니다’로 나뉘어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확인해보겠다며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없자 드러내놓고 윤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프면 말할지도 모른다며 꼬집고 때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자 “진짜 벙어리잖아!” 하고 소리치는 친구도 있었다. 교실 뒤에서는 윤희의 이름을 거론하며 쑥덕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상담실에 들어온 윤희와 어머니는 다정한 모녀와는 아주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낯선 곳에 상담을 받으러 온 불안한 딸을 염려하며 배려하는 엄마도, 엄마에게 의지하며 두려움을 달래려는 딸도 없었다. 두 사람 다 표정 없는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윤희는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웃으면서 첫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얘가 정말!” 인사를 건넨 어머니가 아무런 말도 없는 윤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인사하라는 고갯짓을 했다. 그래도 딸이 반응하지 않자 화난 표정으로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얘가 이래요. 창피해서 같이 다닐 수가 없어요.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왜 이러는지……”
어머니는 옆에 있는 딸은 신경도 쓰지 않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래도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듯해, 어머니의 거침없는 말을 멈추게 하고 윤희에게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기표현을 하지 못하는 딸이 답답하고 화까지 난다는 윤희 어머니의 긴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윤희와의 상담은 한참 후에야 시작되었다.
“윤희야! 더운데 오느라 힘들었겠다. 괜찮아?”
“잘 모르겠어요.”
“기분은 어때?”
“잘 모르겠어요.”
“여기가 어딘지 알아?”
“잘 모르겠어요.”
상담이 시작되고 마주앉은 윤희는 어떤 질문에도 똑같은 대답만 했다. 자기 생각을 묻는 간단한 질문에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상담실에서는 윤희처럼 자기 생각을 물어보는 질문에 답을 못 하는 청소년들을 자주 만난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청소년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자녀의 생각을 물어봐주고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부모의 판단대로 명령하며 양육했거나, 자녀의 생각을 물어보긴 하지만 부모가 바라는 대답이 아니면 무시하거나 비난했던 경우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 생각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좀더 흐르면 ‘생각하기’ 자체를 멈춘다. 나중에는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윤희는 가족과도 대화를 하지 않고 지냈다. 때가 되면 방에서 나와 말없이 식사만 했고, 식사가 끝나면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또래가 열광하는 아이돌한테도 관심이 없었고 드라마도 보지 않았다. 더더구나 책을 보는 일도 없었다. 그냥 방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시작은 몇 년 전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학습진도를 따라가기 힘들어지면서 윤희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말수가 줄었다. 질문을 해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딸이 답답해서 부모는 일방적으로 명령하기 시작했다. 모든 판단을 부모가 대신하고 아이에겐 무조건 그 지시를 따르도록 했다. 그럴수록 윤희는 점점 더 수동적인 아이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윤희는 스스로 무언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늘 힘들어했다. 좋아하는 게임을 골라보라고 해도, 순서를 정하라고 해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내가 권하는 게임을 숙제하듯 표정 없이 함께했다. 윤희는 언제나 순응했다. 늘 하자는 대로 따랐다. 어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중2 아이들 특유의 반항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즐겁게 참여하는 것도 아닌데 전혀 거부하지 않고 그저 하자는 대로 응했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니, 아주 부자연스러웠다. 아이는 제 나이답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윤희는 집에서는 부모가 하라는 대로, 상담실에서는 상담사가 하자는 대로 했다. 학교에 가면 자기 자리에 앉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이 되었다.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이 윤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흥미를 잃은 아이는 타인과 세상에도 무관심해지는 법이다. 소통하려는 욕구가 전혀 없는 아이들에게는 충격요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세상 밖으로 한발만 내디디면 신기하고 재미난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무인도에 갇혀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고 살다보면 그날이 늘 그날 같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얼마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매일매일이 새롭게 느껴지면 활기를 찾을 수 있다.
윤희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길라잡이는 바로 신문이었다. 전 세계에서 순간순간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발생하는지 알게 되면 분명 윤희가 달라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윤희는 활자로 된 어떤 것도 읽으려 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귀띔했다. 그래서 그림이나 사진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다행히 신문에는 글자뿐 아니라 멋진 그림과 다양한 사진도 실려 있었다. 윤희는 신문을 통해 관심의 분야가 넓어졌다. 제법 긴 기사도 부담 없이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문은 집에서 읽어오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신문을 읽고 관심이 있었던 기사를 노트에 붙여서 오게 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질문이 많아졌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표현하기 시작했다. 기사를 선택한 이유를 물어봐도 “그냥……”이 아니라 “정말 아름다워서요. 다음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라며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아직 윤희가 갈 길은 멀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도 서툴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자기 생각을 들여다보게 된 아이는 타인의 생각도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관심을 갖다보면 조금씩 다가가는 법도 배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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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엉킨 마음을 풀어주는 법 이경자 저 | 아우름
이 책에는 부모와 친구들 그리고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리고 혼자 힘들어하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는 학부모, 교사에게 아이의 마음속 실타래를 푸는 방법을 보여준다”는 안병만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추천처럼, 20여 년간 특수교사와 심리상담가 등으로 일해온 저자는 아동심리 전문가로서 또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간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말하지 못한 마음’을 들어주고, ‘아이의 엉킨 마음’을 풀어주는 방법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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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이경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그간 1천 여 명이 넘는 교사와 학부모를 대상으로 아이들의 문제를 어떻게 어루만져줄 수 있는지에 대한 강의를 진행해왔다. 이화여자대학교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고 20여 년간 조기교육실, 특수학교, 발달클리닉 등에서 특수교사로 재직했다. 용인교육지원청 Wee센터에서 특수상담사로 학교부적응 청소년들을 상담했다. 라임오렌지나무아동청소년센터에서 상담실장으로 재직하다 현재는 분당에 위치한 이경자심리상담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시형 박사가 운영하는 '세로토닌 키즈'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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