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에는 첫 번째 독자가 있습니다. ‘책의 또 다른 작가’로 불리는 편집자가 바로 그 행운의 주인공입니다. 저자의 좋은 글을 발견하고 엮어 독자에게 소개하는 편집자들을 <채널예스>가 만나봅니다. 저자와의 특별한 인연, 책이 엮이기까지의 후일담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 ||
『양춘단 대학탐방기』. 소설 제목도 심상치 않은데, 작가의 이력 또한 재미있다. 1985년 해남에서 태어난 박지리 작가는 대학에서는 역사컨텐츠학을 전공, 한창 유행에 민감할 나이지만 여전히 2G폰을 쓰고, 메일도 거의 확인하지 않고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 데뷔작 『합체』 로 ‘제8회 사계절문학상’을 수상하고, 지난 2012년에는 첫 작품과 너무나 대조적인 『맨홀』 을 펴냈고 올해 2월, 대한민국 사회를 촘촘하게 들여다본 풍속소설 『양춘단 대학탐방기』 를 출간했다. 스스로를 작가라기보다 백수로 생각한다는 박지리 작가. 『양춘단 대학탐방기』 를 읽다 보면, 과연 스물아홉의 작가가 쓴 작품이 맞는지? 아리송할 뿐이다.
“대학 다닐 때, 미화원 아주머니 한 분이 강의실을 청소하시는 걸 봤다. 비질을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칠판을 닦고. 특별한 모습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아마 그때 느낀 감정이 이 이야기의 모태가 되었을 것이다.” 『양춘단 대학탐방기』 작가의 말 中 | ||
양춘단은 왜 굳이 ‘대학’의 청소노동자가 되고자 했으며, 대한민국 사회에는 왜 이름 없이 성씨로만 불리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으며, 박지리 작가는 왜 『양춘단 대학탐방기』 를 쓰게 됐을까. 3년 전 다수의 출판사로부터 거절 당했던 원고를 받아 들고, 책을 완성시킨 사계절출판사 김태희 편집자에게 물었다. 씁쓸하지만은 않은, 그러나 무척 강렬한 『양춘단 대학탐방기』 의 뒷이야기를.
박지리 작가 |
변화무쌍한 작품만큼이나 미스터리한 작가
2011년 여름, 김태희 편집자는 택배 박스를 하나 받았다. “원고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 이렇게 보내는 게 맞는 건지 모른다”고 적힌 코끼리 그림이 그려진 엽서와 함께. 발신자는 박지리 작가였다. 누구나 이메일로 간편하게 원고를 보내는 이 시대, 박지리 작가는 A4용지에 출력한 원고 두 뭉치, 『맨홀』 과 『양춘단 대학탐방기』 를 보내왔다. 이미 스물다섯의 나이에 『합체』 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등단한 박지리 작가의 두 번째 작품 『맨홀』 은 2012년에 출간됐다.
“원고를 받은 당시 『양춘단 대학 탐방기』 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어요. 하필이면(?) 그때가 홍대 청소노동자 사건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때였으니까요. 교정을 보고 편집하고 어찌 어찌해서 책을 내면, 마치 홍대 청소노동자 사건을 취재해 바로 쓴 소설처럼 비칠까봐 살짝 걱정스러웠어요. 또 하나는 사계절출판사는 성인 소설(?)을 내는 출판사가 아니어서 이 작품이 아무리 탐이 나도 가질 수가 없다는 거였죠. 하지만 작가가 이 좋은 작품을 그대로 묻으려는 게 안타까워, 오랜 시간 묵혀만 뒀다가 이제야 출간됐어요.”
심상치 않은 작품의 필자가 심상할 리는 없다. 김태희 편집자는 2010년 초, 박지리 작가를 처음 대면했을 때 적잖이 놀란 기억이 있다. 앳된 얼굴, 문학 공부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스물다섯의 초짜 작가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연히 문학판에 발을 디딘 작가 박지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는 시점에 몸이 아파 취업을 포기하고, ‘심심한데 글이나 써볼까’ 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고, 청소년소설 『합체』 로 등단했다.
“박지리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면, 너무 쑥스러워 해요. 편집자도 잘 만나지 않고, 메일도 잘 확인하지 않고, 말도 별로 없는 사람이죠. 햇수로 5년째 같이 작업하는 사이지만, 그가 써내는 변화무쌍한 작품만큼이나 미스터리 그 자체인 사람이에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아직 소설이 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 하지만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잘 쓰고 싶어’ 노력하는 작가죠.”
『양춘단 대학 탐방기』 는 뼈대만 놓고 보자면 청소노동자 이야기지만, 그 곁가지로 뻗어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결국엔 하나로 통한다. 어찌 보면 산만함이 매력인 작품이지만, 너무 산만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편집자의 숙제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양춘단으로 하여금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부모에게 말을 걸게 하고, 남편 김영일과 짧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게 한다. 또 대자보, 담화문, 사건경위서, 뉴스, 일기 등 다양한 형식의 담론들을 통해, 그 담론의 주체인 조직이 어떤 식으로 판을 만드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양춘단이 일하는 대학에서 대자보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들이 화장실 벽에 그 사건을 옮겨 적으며 ‘구시대의 게시판’으로 풀어가는 내용이 있어요. 지금은 온갖 SNS가 난무하는데 말이죠.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 보니, 작품의 배경인 2009년에는 막상 페이스북이니 트위터니 하는 기능들이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페이스북에 ‘좋아요’ 기능이 생긴 것도 2010년이더라고요.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작년 겨울 ‘안녕하세요’ 대자보 사건이 터졌고,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죠. 결국 『양춘단 대학 탐방기』 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 걸 보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어요. 또 한 가지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과 작품 속의 시간강사 한도진이 자꾸 겹쳐 보이는 점이었어요. 한도진이 도민준처럼 초능력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도민준 만큼 멋있는 것은 사실이죠. 양춘단을 천송이처럼 대해줬으니(웃음).”
가볍게 읽다가 작가의 통찰력에 놀라게 되는 소설
김태희 편집자에게 『양춘단 대학 탐방기』 는 “읽는 이의 뒤통수를 치는 책”이다. “뭐야? 이게? 할머니가 수능 봐서 대학 가나?” 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학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하고, 양춘단이 코끼리상과 맞짱을 뜰 때는 아버지 양호익의 예수상 이야기가 힘을 실어주면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사실처럼 믿게 한다. 김태희 편집자는 “재미 삼아 가볍게 읽다 보면 작가의 통찰력에 놀라게 된다. 어떤 정치색도 띠고 있지 않지만, 강하게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라고 『양춘단 대학 탐방기』 를 평했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 25장에는 양춘단과 26인의 환경미화원이 자신들의 생사가 걸린 시급 문제를 놓고, 대자보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마음을 모아 한자 한자 글을 쓰고, 고심하며 문구를 고치고, 이것을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몰라 토론을 벌이는 그들의 모습은 독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배움에 목말라 환경미화원이 된 춘단이 ‘사람들’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장면은 김태희 편집자가 꼽은 『양춘단 대학 탐방기』 의 명장면이다.
춘단은 걸음을 멈추고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는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형체지만 분명 살아 있기는 한데 말을 걸어오지는 않고,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다들 밟고 다니니…… 나로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 나이 들지 않을, 영원히 젊고 배운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을 이곳에서 쓰레기 봉지를 어깨에 멘 채 복도를 오가는 춘단은 벽에, 바닥에, 때로는 누군가의 발등 위에 겹쳐지는 작은 그림자였다. (『양춘단 대학탐방기』 p. 305~306) | ||
『양춘단 대학 탐방기』 는 누가 읽어도 좋을 책이지만, 대학생들이 읽으면 더없이 좋은 작품이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 문에 들어섰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상상과 다른 대학. 모두가 ‘취업’을 바라고, 스펙을 쌓느라, 평균 4년 6개월에서 5년을 보내야 하는 대학,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사교육을 받아야만 갈 수 있는 곳이 되어 버린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양춘단 대학 탐방기』 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과연 무엇 때문에 대학을 가려고 하는지?
“작가는 너무나 현명해서 세상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통해서 증명해요. 하지만 때로는 양춘단 같은 할머니도 있는 법이에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돌을 던지는 사람. 부디 많은 사람이 『양춘단 대학 탐방기』 를 읽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똥침을 놔줄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내면 좋겠어요.”
김태희 편집자가 추천한 또 다른 책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소년 이야기로, 우리가 어찌 해볼 도리 없는 삶의 곳곳에 놓인 맨홀을 보여줍니다. 편집하는 내내, 몹시도 저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한, 어둡지만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과 시를 좋아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대변해준 이 작품은 추리소설 같은 구성도 좋았고, 문장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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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umji01@naver.com
또르르
2014.07.12
좋은 책일 것 같습니다. 박지리 작감님, 꼭 읽어 볼게요!
kjkjsky
2014.03.20
하늘하늘
201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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