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4월 이야기>를 봐야 한다
어느 날, 우즈키는 용기를 낸다. 야마자키 선배가 아르바이트하는 서점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선배가 “혹시?” 하고 말을 걸어올 때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다. 거리에는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그가 빌려주는 빨간 우산을 손에 들고서 그녀는 몇 번이나 되뇐다. “꼭 돌려 드리러 올게요.”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ㆍ사진 정이현(소설가)
2014.03.04
작게
크게

봄, 이라는 발음을 좋아한다. 봄이 되면 <4월 이야기>를 봐야 한다. 오랫동안 학생으로 살았던 관성 탓일까. 내게 진짜 봄은 3월 초 새 학기와 함께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짜 새해도 바로 그때 시작되는 느낌이다. 삼일절이 지나고, 3월 2일 혹은 3일. 기온은 따뜻해봐야 영상 3도를 넘지 않지만, 바람은 분명히 2월과 다르다.

입학식 다음 날, 나도 대학이라는 곳에 첫 등교를 했다. 귀에는 달랑거리는 귀걸이를 했고 책가방이 아님을 온몸으로 강변하는 숄더백을 맸다. 청바지에 새로 장만한 봄 재킷을 걸쳤고, 살짝 굽 있는 구두를 신었던 것도 같다. 학교 이름을 딴 지하철역에서부터 학교 정문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정문에 도착하자 가파른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새 구두 탓에 조금 절뚝거리며, 절뚝거림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애쓰며 언덕을 올랐다. 설렜고, 설렘만큼 두려웠다. 그러니까 그건 막 사랑에 빠진 때의 느낌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나를 향한 상대의 마음은 전혀 모를 때, 그러나 상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너무도 확실하게 알아버렸을 때 말이다.


영화 <4월 이야기>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스무 살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갓 스물이 된, 아가씨라기보다는 아직 소녀에 가까운 대학 신입생 우즈키다. 무사시노 미대에 입학하기 위해 고향인 홋카이도를 떠나 혼자 도쿄에 왔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미숙하지만 그녀는 늘 두근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녀를 보며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건 우리도 한때 그런 ‘진짜 봄’을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즈키의 하루하루는 조용한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새로 사귄 괴짜 친구를 따라 플라잉 낚시 동아리에 가입해 벌판의 허공에다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혼자 만든 카레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이웃에게 나눠주려다 거절당하기도 하고, 아마도 처음으로 혼자서 갔을 영화관에서 지루한 사무라이 영화를 오랫동안 가만히 관람하기도 한다. 허공의 물고기를 낚으며 흘려보내버려도 되는 시간, 흔쾌히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은 스무 살 무렵뿐인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그녀가 머나먼 도쿄까지 유학 온 것도, 하필이면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한 것도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몰래 짝사랑하던 고등학교 때의 선배가 바로 그 대학에 갔다는 얘기를 듣고 거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인생 전체를 뒤바꿀 중요한 선택을 그런 황당하고 사소한 이유로 결정하는 것도 그 나이만의 만용 혹은 특권이다.


4월은, 3월과는 또 조금 다른 시간이다. 봄은 더 깊었고 낮 햇살은 완연히 따사롭다. 낯설기만 하던 캠퍼스도 어느새 눈에 익었다. 그 어느 날, 우즈키는 용기를 낸다. 야마자키 선배가 아르바이트하는 서점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선배가 “혹시?” 하고 말을 걸어올 때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다. 거리에는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그가 빌려주는 빨간 우산을 손에 들고서 그녀는 몇 번이나 되뇐다. “꼭 돌려 드리러 올게요.”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즈키가 나중에 우산을 돌려주러 왔는지, 그녀의 설레는 짝사랑은 이루어졌는지, 궁금하지 않다. 우즈키와 야마자키가 첫사랑을 시작했는지, 그 사랑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둘이 진짜로 사랑을 시작했다면, 그건 나도 당신도 모두 충분히 예측 가능한 평범한 청춘물이 될 테니까. 그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갈림길일 것이다. 청춘은 조금씩 시들어가고 풋풋하던 모든 사랑은 생로병사를 따라 지는 법이니까. 이 영화에 유일한 남자 주인공인 야마자키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우즈키도 실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게 묻는다면, 그들의 사랑에 반대한다고 대답하겠다. 소녀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첫사랑 선배는, 다만 그 환상 속에만 머무는 편이 적절하다. 봄날의 환상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건 우리 인생에 별로 없을지도 모르니까.


[관련 기사]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그 남자
-바보야,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특별한 남자, 10년 후 모습도 알고 싶다면...
-사랑, 사람의 마음은 해독 불가능한 언어
-명예도, 가족도 잃은 한 남자의 외로운 투쟁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4월 이야기 #이와이 슌지 #다나베 세이치 #마츠 다카코
6의 댓글
User Avatar

amorfati2

2014.03.15

봄이라는 발음이 좋다는 첫 문단, 새 학기와 함께 나의 진짜 봄이 시작된다라는 느낌. 얼마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한 터라 첫 문단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습니다. 굉장히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봤었는데 그 당시의 느낌들, 영화를 볼 당시의 상황등이 아련하게 떠올라 나 또한 '진짜 봄'을 한참 지나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구체적이고 명확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좀 맥빠지는 결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거기서 끝난게 저는 좋았어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이제 막 시작되는 풋풋한 설렘의 한 가운데에서 끝난게 무척 마음에 들었었죠. 오로지 설레는 그 감정에만 집중해서 설레는 감정 그 자체를 완성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것이 우리가 금방 사라질 봄을 바라보는 기분과도 비슷해서 좋았습니다. 혹시라도 더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문득 건축학개론이 생각나네요. 이 작품도 첫사랑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답글
0
0
User Avatar

siyak8677

2014.03.11

내 스무살 3월의 봄이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마지막 문장처럼 봄날의 환상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건 우리 인생에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매일 매일이 설레임의 연속이었고 공기 꽉 찬 풍선처럼 늘 부풀어 있었어요. 터지기도 얼마나 잘 터졌던지 급 설레임과 급 허무함이 하루에도 여러도 반복했던 것 같아요. 설레임이 기대로 무기력함으로 뒤범벅되었던 시절이었지만 봄은 늘 기다려졌어요. 작가님의 글을 통해 왜 그토록 봄을 기다렸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샨티샨티

2014.03.06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봄날의 설렘과 그리움으로 4월 이야기를 들춰보고 싶네요. 스무 살은 보기만 해도 풋풋함이 살아납니다.
답글
0
0

더 보기

arrow down
Writer Avatar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