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곤 최양락 김병조, 시사코미디의 시대
1987년의 6월 항쟁은 철옹성과도 같던 5공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고,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민주화의 열기는 방송계에까지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공정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어용으로 전락한 공영방송사는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이라는 시민사회의 저항에 부딪쳤다. 방송계 내부에서도 각 방송사의 노조 결성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분리에 관한 열망으로 표출된 자성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201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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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6월 항쟁은 철옹성과도 같던 5공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고,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민주화의 열기는 방송계에까지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공정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어용으로 전락한 공영방송사는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이라는 시민사회의 저항에 부딪쳤다. 방송계 내부에서도 각 방송사의 노조 결성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분리에 관한 열망으로 표출된 자성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각 방송사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의 성격 또한 일련의 변화를 겪는다.
노태우 정부 집권 첫해인 1988년, KBS의 일부 취재진들은 사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6.10 남북학생회담, 현대중공업 노동쟁의, 전민련 결성대회 등 주류 언론에서 좀처럼 다루지 않던 민감한 사안들을 보도하였다. 1980년부터 MBC에서 방영되었던 인기드라마 <전원일기>는 당대의 사회문제를 외면한 ‘새마을운동’ 홍보 드라마가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쇄신하고자 보다 다양한 사회적 소재를 다뤘다. 1989년 MBC <베스트셀러 극장>에서는 신군부독재 체제에 부역하였던 어용언론의 행태를 통렬하게 비판한 단막극 <신 용비어천가>를 방영하기도 했다. <신 용비어천가>의 경우 소설가 현길언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는데, 훗날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이 수배 시절 이 드라마의 각본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당시 시사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에 엿보인 변화의 조짐은 최고의 활황을 누리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일찌감치 감지되었다. 기득세력의 허물을 빗대어 꼬집고 풍자함으로써 민초들의 억눌린 애환을 달래는 것이 코미디의 미덕 가운데 하나라지만, 군사정권 시기의 희극인들은 서슬 퍼런 위정자들의 위세에 짓눌려 스스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한국 코미디계에 본격적인 시사풍자를 도입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코미디언 故 김형곤이다.
김형곤은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에 입상하며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였다. 데뷔 초기, 육중한 체구로 인해 ‘공포의 삼겹살’이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알린 그가 본격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KBS <유머 일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를 통해서였다. 비룡그룹이라는 가상의 대기업을 무대로 한 이 코너는 비룡그룹 회장 김형곤을 필두로 한 이사진들의 중역회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 코너는 비룡그룹으로 상징되는 정재계의 기득계층을 희화화하여 풍자함으로써 해학적인 웃음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고, 비슷한 시기 극장판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던 기득계층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인사비리, 검열제도, 불법선거자금 등의 문제점들을 비틀어 꼬집는 시사풍자 코미디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음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의 한 장면이다. 비룡그룹의 이사진들은 그룹 회장의 생일을 맞이하여 값비싼 도자기를 선물하려 한다. 하지만 한 이사가 실수로 도자기를 깨뜨리고 만다. 격노할 것이 분명한 회장의 반응이 두려운 이사진들은 다음과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도자기가 ‘퍽’하고 깨졌어요.”
때는 1987년, 안기부에 의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아직 시민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이다.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더라’는 안기부의 어처구니없는 변명은 그해 여름 대대적인 민주화 항쟁을 불러일으킨 촉매가 되었고, 독재정권의 잔학성과 무책임한 일면을 드러낸 일화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공권력의 행태를 희화화함으로써 웃음거리로 만든 코미디 프로그램은 당국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정치권과 전경련의 고위인사로부터 잦은 외압설에 시달리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첫 방영을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종영되었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한 방송 민주화 분위기 속에 재편성되어 90년대 초반까지 방영되었다.
80년 대 중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못지않게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코너는 KBS <쇼 비디오 쟈키>의 ‘네로 25시’였다. 독재자 네로 황제가 집권했던 제정 로마 시대를 당대 한국의 실정에 접목시켜 패러디한 이 코너는 코미디언 최양락의 능청맞은 황제 연기와 더불어 재벌과 집권세력에 대한 풍자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네로 25시’ 모두 코너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당대의 기득계층을 대변하는 유형의 캐릭터들이라는 점이다. 네로 황제와 비룡그룹 회장은 각각 정재계의 고위급 인사를 상징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지닌 권위는 그 자신과 측근들이 지닌 치부와 허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일말의 권위를 지키려는 이들의 우스꽝스런 행동은 기득계층의 위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코미디 전망대>는 1991년 개국한 신생방송국 SBS가 본격 시사풍자 코미디를 지향하며 내놓은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코너 가운데 하나였던 ‘코미디 모의국회특위’는 국회를 아예 그 무대로 삼아 국회의원을 풍자한 꽁트였다. SBS의 개국과 함께 타방송사에서 이적한 이봉원, 최형만, 김종국 등의 코미디언들이 이 코너에서 국회의원으로 분해 소모성 공방을 일삼는 당시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풍자하였다. ‘배추머리’로 유명한 코미디언 김병조는 ‘지구를 떠나거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날카로운 해학을 선보이기도 했다. 90년 대 후반까지 방영되었던 <코미디 전망대>는 종전까지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의 몇몇 코너에만 국한되었던 시사 코미디 장르를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 표방하여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90년 대 중반까지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90년 대 후반 이후, 예능 프로그램의 판도가 버라이어티쇼로 기울기 시작하며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각 방송사를 대표하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시청률 저조로 인해 잇따라 폐지되며, 시사코미디의 명맥 또한 자연스레 끊기게 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던 꽁트식 코미디 프로그램은 2000년 대 이후 KBS <개그콘서트>,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 등으로 대표되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고 현재까지도 안정적인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서 1990년 대 초까지 코미디 프로그램이 누렸던 범사회적인 영향력을 되찾진 못하고 있다. 웃음 뒤에 숨겨진 해학과 풍자의 실종. 수많은 코미디의 애호가들은 시사코미디의 통쾌한 맛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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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사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에 엿보인 변화의 조짐은 최고의 활황을 누리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일찌감치 감지되었다. 기득세력의 허물을 빗대어 꼬집고 풍자함으로써 민초들의 억눌린 애환을 달래는 것이 코미디의 미덕 가운데 하나라지만, 군사정권 시기의 희극인들은 서슬 퍼런 위정자들의 위세에 짓눌려 스스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한국 코미디계에 본격적인 시사풍자를 도입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코미디언 故 김형곤이다.
김형곤은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에 입상하며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였다. 데뷔 초기, 육중한 체구로 인해 ‘공포의 삼겹살’이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알린 그가 본격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KBS <유머 일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를 통해서였다. 비룡그룹이라는 가상의 대기업을 무대로 한 이 코너는 비룡그룹 회장 김형곤을 필두로 한 이사진들의 중역회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 코너는 비룡그룹으로 상징되는 정재계의 기득계층을 희화화하여 풍자함으로써 해학적인 웃음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고, 비슷한 시기 극장판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던 기득계층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인사비리, 검열제도, 불법선거자금 등의 문제점들을 비틀어 꼬집는 시사풍자 코미디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음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의 한 장면이다. 비룡그룹의 이사진들은 그룹 회장의 생일을 맞이하여 값비싼 도자기를 선물하려 한다. 하지만 한 이사가 실수로 도자기를 깨뜨리고 만다. 격노할 것이 분명한 회장의 반응이 두려운 이사진들은 다음과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도자기가 ‘퍽’하고 깨졌어요.”
때는 1987년, 안기부에 의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아직 시민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이다.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더라’는 안기부의 어처구니없는 변명은 그해 여름 대대적인 민주화 항쟁을 불러일으킨 촉매가 되었고, 독재정권의 잔학성과 무책임한 일면을 드러낸 일화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공권력의 행태를 희화화함으로써 웃음거리로 만든 코미디 프로그램은 당국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정치권과 전경련의 고위인사로부터 잦은 외압설에 시달리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첫 방영을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종영되었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한 방송 민주화 분위기 속에 재편성되어 90년대 초반까지 방영되었다.
80년 대 중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못지않게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코너는 KBS <쇼 비디오 쟈키>의 ‘네로 25시’였다. 독재자 네로 황제가 집권했던 제정 로마 시대를 당대 한국의 실정에 접목시켜 패러디한 이 코너는 코미디언 최양락의 능청맞은 황제 연기와 더불어 재벌과 집권세력에 대한 풍자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네로 25시’ 모두 코너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당대의 기득계층을 대변하는 유형의 캐릭터들이라는 점이다. 네로 황제와 비룡그룹 회장은 각각 정재계의 고위급 인사를 상징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지닌 권위는 그 자신과 측근들이 지닌 치부와 허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일말의 권위를 지키려는 이들의 우스꽝스런 행동은 기득계층의 위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코미디 전망대>는 1991년 개국한 신생방송국 SBS가 본격 시사풍자 코미디를 지향하며 내놓은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코너 가운데 하나였던 ‘코미디 모의국회특위’는 국회를 아예 그 무대로 삼아 국회의원을 풍자한 꽁트였다. SBS의 개국과 함께 타방송사에서 이적한 이봉원, 최형만, 김종국 등의 코미디언들이 이 코너에서 국회의원으로 분해 소모성 공방을 일삼는 당시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풍자하였다. ‘배추머리’로 유명한 코미디언 김병조는 ‘지구를 떠나거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날카로운 해학을 선보이기도 했다. 90년 대 후반까지 방영되었던 <코미디 전망대>는 종전까지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의 몇몇 코너에만 국한되었던 시사 코미디 장르를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 표방하여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90년 대 중반까지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90년 대 후반 이후, 예능 프로그램의 판도가 버라이어티쇼로 기울기 시작하며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각 방송사를 대표하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시청률 저조로 인해 잇따라 폐지되며, 시사코미디의 명맥 또한 자연스레 끊기게 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던 꽁트식 코미디 프로그램은 2000년 대 이후 KBS <개그콘서트>,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 등으로 대표되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고 현재까지도 안정적인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서 1990년 대 초까지 코미디 프로그램이 누렸던 범사회적인 영향력을 되찾진 못하고 있다. 웃음 뒤에 숨겨진 해학과 풍자의 실종. 수많은 코미디의 애호가들은 시사코미디의 통쾌한 맛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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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필자
문성훈
평범한 독자 혹은 관객, 그리고 시청자입니다.
sasim
201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