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18]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처음부터 이 음악을 영화를 통해 접했더니, 지금은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만 흐르면, 아프리카가, 데니스와 카렌이 먼저 떠오른다. 그 둘이 매일 밤마다 근사한 저녁상을 차리고, 한쪽에 놓인 축음기의 바늘을 움직여 모차르트 음악을 틀던 순간. 그리고 카렌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데니스가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풍경. 엉킨 머리를 쥐고 실랑이를 하는 카렌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요.” 다가가서 머리를 감겨주는 명장면까지! 이 음악을 들을 때면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다.
2013.09.23
작게
크게
공유
다시 한번 더, 모차르트일 수 밖에 없는 까닭
영화 중
“수렵 여행 갈 때면 그는 축음기를 챙겼다. 세 자루의 소총, 한 달치 일용품과 모차르트 음악.” 영화는 여자가 아주 먼 과거의 일인 듯, 꿈결인 듯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짙은 노을이 덮인 광활한 아프리카 풍경이 펼쳐지면, 동시에 멀리서 아련하게 짐승 울음소리처럼 음악이 흘러나온다. 바로 오늘 함께 들을 곡,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클래식 초심자를 위한 20개 코스의 클래식 정찬을 준비하면서, 모차르트는 가장 빈번하게 식탁에 올라오는 이름이었다. 이미 그의 대작 <레퀴엠>이나 <피가로의 결혼>으로 두 번이나 소개했다. 하지만 클래식 가이드 뒷부분에 다다라 또 다시 모차르트 작품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클라리넷 협주곡> 외에도 <피아노 협주곡 20번, 21번> 등 사랑받는 명곡이 많아 20주차 코스 요리에 모차르트를 다시 한 번 올릴지, 대신 소개하지 않았던 다른 연주자의 음악을 올릴지 내심 고민이 많으셨다는 후문이다. 허나, 그가 다시 돌아왔다. 아니, 우리가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클래식 음악의 곡이나 작곡가가 복잡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듯 보이지만, 음악을 계속 듣다 듣다 보면 결국 다시 바흐나 모차르트, 베토벤 음악으로 돌아오게 된다니까. 이분들이 괜히 유명한 작곡가가 아닌 거지.”
그러니까 18주차에 선정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은 “또 모차르트야?”라고 되물을 게 아니라 “또 모차르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는 데부터 시작했다. 레퀴엠,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까지. 장르마다 특별하게 언급될 만큼의 명곡을 한 사람이 써낸 것도 놀랍지만(후후훗, 욕심쟁이!) 저마다 곡들이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는 것도 대단히 놀랍다. <레퀴엠>과 <피가로의 결혼>을 선배와 함께 들으면서 이제 나름 모차르트와 (심정적으로) 친해졌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이번 미션 곡을 듣자마자 흔쾌히 ‘콜’을 외쳤더랬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많이 알려지게 된 건 확실히 영화의 영향이 크지. 이 영화 속에는 모차르트의 곡이 여러 개 등장해. 음악감독이 모차르트의 팬이 아닐까 싶을 정도야. 그중에 특히 이 <클라리넷 협주곡>은 마치 이 영화를 위해 작곡된 것처럼 느껴져. 클라리넷의 부드러운 음색과 선율이 배경인 아프리카의 목가적인 분위기에 잘 녹아들어 있거든.”
용기있는 여자 ‘카렌’으로 기억되는 영화
1986년. 나는야 꼬꼬마 시절이었으나, 지금은 영화제에서 공로상 받는 어르신, 로버트 레드포드 할아버지는 레전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얼핏 브래드 피트를 연상시키는 금발 머리, 아이같은 미소. 번뜩이는 눈빛에서 엿볼 수 있는 젊음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때의 로버트는, 지금 내가 봐도 설렐 만큼 멋지다. 구속할 수 없이 자유로운 남자 데니스라는 멋진 캐릭터의 힘도 한몫했겠지만.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는 차가움과 뜨거움을 한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자 카렌으로 기억된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덴마크 재벌 카렌은 남작 부인이 되기 위해 친구인 브릭센 남작과 흔쾌히 결혼을 약속하고, 꿈에 들떠 아프리카로 떠난다. 하지만 아프리카 생활은 그녀가 꿈꾸던 것만큼 낭만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남작 부인으로서 사는 삶 역시 그렇다.
무언가 바랐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낭패를 당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간절히 바래서 뛰어들었는데, 막상 눈앞에 현실은 꿈꿀 때만큼 달콤하지 않을 때의 낭패감, 당혹스러움. 이때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카렌이 용기 있고 멋진 여자라는 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꿈의 좌표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겁에 질려 덴마크로 도망가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라던 것과 다른 잔인한 현실 속에 풀 죽은 채 순응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척박한 땅을, 척박한 현실을 두 팔 걷고 개간하기 시작했다. 원래 약속한 농장 재배 대신하게 된 커피 재배도 일꾼들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하고, 여자들은 함부로 카페 클럽에도 출입하지 못하던 시절임에도 그녀는 말을 타고 가고 싶은 데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 마는 여자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작에게도 그녀는 당당히 먼저 ‘사랑한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여자다. 그랬기에 자신의 진정한 사랑, 데니스와 조금 늦게 만났지만, 그때에도 카렌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자신에게 좋은 선택을 한다. 그녀의 삶 속에는 후회도 많고 실패도 있지만, 변명이나 후회가 없다. 그녀가 멋진 까닭은 그녀가 사랑과 삶에 있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과 꿈과 모험과 사랑이 펼쳐진 아프리카 위에 모차르트의 여러 음악이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극 중에서 데니스는 언제나 축음기와 모차르트 음악을 갖고 다니는, 모차르트 애호가로 등장한다. 카메라로 넘겨다 보는데에도 광대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대지가 펼쳐질 때, 카렌과 데니스 사이에 미묘한 눈빛이 건네질 때, 두 사람이 여행 중에 곳곳에서 마음을 나눌 때,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 벅차오름, 설렘, 아름다움, 낭만을 다양한 음으로 연주해낸다.
“영화에 주로 쓰인 부분은 2악장 아다지오(Adagio)야. ‘느리게’라는 뜻의 이 음악 용어는 보통 협주곡 구성에서 2악장에서 등장해. 힘찬 메인 주제를 연주하는 1악장의 뒤따라 흘러나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온하며 느릿느릿 아름다운 선율로 이루어져 있는 곡이 많아. 그런 연유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대목이기도 하고. 잔잔한 노래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떤 곡들의 2악장만 꼽아 듣기도 해. 아다지오만 따로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이 있을 정도니까.”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다시 보게 한 <클라리넷 협주곡>
모차르트 음악 안에는 특유의 명랑성이 있다. 어떤 음악이래도 ‘모차르트 인증’을 해두듯이 밝은 장조의 음들은 경쾌하고 건강한 활력이 넘친다. 장송곡이라고 불리는 <레퀴엠> 가운데서 모차르트 음악이 독보적인 까닭도 그 안에 비장미, 슬픔, 안타까움 등 죽음에 가까운 어둠의 감정을 모두 수렴하면서도 솟구쳐 오르는 강건한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클라리넷 협주곡 역시 마찬가지다. 피리 과에 해당하는 목관악기라 그런지, 얼핏 새들의 노랫소리를 연상케 하는 활달함, 싱그러움이 담겨 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은, 목관악기의 대표주자 플루트에 가려졌던 클라리넷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킨 곡이지. 바이올린에 가려졌던 첼로처럼, 클라리넷도 플루트에 가려진 악기였는데, 이 곡을 통해 플루트만큼이나 클라리넷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어.”
“바이올린으로 대표되는 현악기 족을 음역의 높이별로 보자면 이래.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콘트라베이스(더블베이스) 순이야. 플루트로 대표되는 목관악기 족을 높이별로 나열하자면, 피콜로 → 플루트 → 오보에 → 클라리넷 → 바순 순이지. 그러니까 현악기로 치면 정확히 음역이 일치하지는 않아도 비올라 정도에 해당해. 클라리넷의 사용 범위는 꽤 넓어서 실제 활동도는 비올라+첼로쯤 돼.”
플루트, 클라리넷 말고도 반가운 악기가 보인다. 오보에라면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젠틀맨 쿠로키군이 들고 다니던 그 악기다. 그 악기 소리가 좋아서 배워보고 싶어 알아봤는데, 오보에라는 악기가 피아노 못지 않게 고액이라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선배. 오보에 소리 참 좋아해요.” “엔리오 모리코네의 영화 <미션>에 등장하는 <가브리엘의 오보에> 알지? 오보에도 그 영화음악으로 유명해졌지. 오보에는 플루트보다는 낮은 음역대를 갖고 있고, 클라리넷보다 좁은 음역대를 커버하는 악기야. 좀 애매하지? 하지만 특유의 낭랑하고 조화로운 소리가 매력적이라, 오케스트라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쓰이지.”
죽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협주곡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곡은 죽기 2달 전인 10월에 작곡됐어.” 선배한테 이 얘길 듣기 전에도, 이 곡이 얼마나 명랑하고 자연의 건강한 에너지를 담고 있는지 실컷 예찬했는데, 죽기 직전에 작곡한 곡이라니, 정말 놀랍다.
“그렇지? 모차르트도 이게 자신의 마지막 협주곡이란 걸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가 병들어 죽기 직전의 가난하고 비참한 시기에 쓰인 곡이었어. 가산을 탕진하고 굶어 죽을 것 같은 모차르트를 곁에서 보던 친구가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특별히 주문한 곡이야. 그런데도 선율은 발랄하고 여유로우며 경쾌하지? 자신의 괴로움을 뒤로하고, 인류에게 이런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천재에게 새삼 경외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야.” 모차르트에게 음악이란, 우리가 듣고 느끼는 대로, ‘즐거운 것’이었나 보다.
“모차르트 곡의 특징은 악기건 사람이건 할 수 있는 능력을 음악에 다 짜낸다는 거야. 모차르트의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들은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음표에 덧붙여 인간의 목소리로 낼 수 있는 높이인지 궁금할 지경인 고음역의 연속에도 경악을 금치 못했어. 이런 특징은 기악곡인 클라리넷 협주곡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지.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으면, 정말 이 악기가 2인자였나 싶을 만큼 풍성하고 아름다운 클라리넷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지.”
이번 주 명반으로 선정된 앨범은 알프레드 프린츠, 칼 뵘의 연주다. “이 곡을 접할 때 기본 중의 기본인 앨범”이란다. 칼 뵘은 이전에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을 때 만났던 지휘자다. “칼 뵘은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양에서 인기가 많은데, 그의 여유롭고 부드러운 템포의 모차르트 선율이 동양인의 취향에 잘 맞는 듯해. 칼 뵘 지휘의 모차르트 음반은 일단은 믿고 들어볼 수 있는 연주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10년 전, 아프리카 가든 루트에서. 달이 커다랗게 뜬 밤, 저 의자에 앉아
“오늘 밤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부터 이 음악을 영화를 통해 접했더니, 지금은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만 흐르면, 아프리카가, 데니스와 카렌이 먼저 떠오른다. 그 둘이 매일 밤마다 근사한 저녁상을 차리고, 한쪽에 놓인 축음기의 바늘을 움직여 모차르트 음악을 틀던 순간. 그리고 카렌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데니스가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풍경. 엉킨 머리를 쥐고 실랑이를 하는 카렌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요.” 다가가서 머리를 감겨주는 명장면까지! 이 음악을 들을 때면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다.
이 영화가 유독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까닭은 나에게도 역시 그런 날이, 그런 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밤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던, 딱 이맘때. 나도 거기, 아프리카에 있었다. 사람들과 도란도란 별을 보고 앉아 불을 피우던 밤이 있었다.
그날의 바람, 그날의 어둠, 그날의 별만으로도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 하나 없이 풍요로운 밤이었다. 마치 영화를 돌려보듯, 살면서 몇 번이나 돌려본 영화 같은 장면들. 그랬기에 그 시절을 지나온 카렌의 회고에 더욱 애잔하게 아련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렌과 다니엘의 갈등. 과연 언제 떠나고 언제 머물러야 하는가. 사랑과 자유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참으로 묵직하게 다가왔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아다지오는 나의 아름답던 그 날의 기억에 덧입혀도 더없이 잘 어울린다. 어쩌면 그 음악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를 위한 음악이라기보다, 아프리카에 어울리는 음악이라기보다, 누구나 삶에 간직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회고하는 순간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죽기 직전에 이 음악을 작곡했던 모차르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아름다운 곡을 썼는지, 조금은 짐작이 되기도 한다. 그는 삶의 어떤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며 이 음악을 작곡했을까? 어느새 감상적이 되어버린 건지, 오늘 밤 창문을 타고 넘어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유달리 선선하다.
영화
“수렵 여행 갈 때면 그는 축음기를 챙겼다. 세 자루의 소총, 한 달치 일용품과 모차르트 음악.” 영화
클래식 초심자를 위한 20개 코스의 클래식 정찬을 준비하면서, 모차르트는 가장 빈번하게 식탁에 올라오는 이름이었다. 이미 그의 대작 <레퀴엠>이나 <피가로의 결혼>으로 두 번이나 소개했다. 하지만 클래식 가이드 뒷부분에 다다라 또 다시 모차르트 작품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클라리넷 협주곡> 외에도 <피아노 협주곡 20번, 21번> 등 사랑받는 명곡이 많아 20주차 코스 요리에 모차르트를 다시 한 번 올릴지, 대신 소개하지 않았던 다른 연주자의 음악을 올릴지 내심 고민이 많으셨다는 후문이다. 허나, 그가 다시 돌아왔다. 아니, 우리가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클래식 음악의 곡이나 작곡가가 복잡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듯 보이지만, 음악을 계속 듣다 듣다 보면 결국 다시 바흐나 모차르트, 베토벤 음악으로 돌아오게 된다니까. 이분들이 괜히 유명한 작곡가가 아닌 거지.”
그러니까 18주차에 선정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은 “또 모차르트야?”라고 되물을 게 아니라 “또 모차르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는 데부터 시작했다. 레퀴엠,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까지. 장르마다 특별하게 언급될 만큼의 명곡을 한 사람이 써낸 것도 놀랍지만(후후훗, 욕심쟁이!) 저마다 곡들이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는 것도 대단히 놀랍다. <레퀴엠>과 <피가로의 결혼>을 선배와 함께 들으면서 이제 나름 모차르트와 (심정적으로) 친해졌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이번 미션 곡을 듣자마자 흔쾌히 ‘콜’을 외쳤더랬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많이 알려지게 된 건 확실히 영화
용기있는 여자 ‘카렌’으로 기억되는 영화
1986년. 나는야 꼬꼬마 시절이었으나, 지금은 영화제에서 공로상 받는 어르신, 로버트 레드포드 할아버지는 레전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얼핏 브래드 피트를 연상시키는 금발 머리, 아이같은 미소. 번뜩이는 눈빛에서 엿볼 수 있는 젊음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때의 로버트는, 지금 내가 봐도 설렐 만큼 멋지다. 구속할 수 없이 자유로운 남자 데니스라는 멋진 캐릭터의 힘도 한몫했겠지만.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는 차가움과 뜨거움을 한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자 카렌으로 기억된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덴마크 재벌 카렌은 남작 부인이 되기 위해 친구인 브릭센 남작과 흔쾌히 결혼을 약속하고, 꿈에 들떠 아프리카로 떠난다. 하지만 아프리카 생활은 그녀가 꿈꾸던 것만큼 낭만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남작 부인으로서 사는 삶 역시 그렇다.
무언가 바랐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낭패를 당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간절히 바래서 뛰어들었는데, 막상 눈앞에 현실은 꿈꿀 때만큼 달콤하지 않을 때의 낭패감, 당혹스러움. 이때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카렌이 용기 있고 멋진 여자라는 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꿈의 좌표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겁에 질려 덴마크로 도망가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라던 것과 다른 잔인한 현실 속에 풀 죽은 채 순응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척박한 땅을, 척박한 현실을 두 팔 걷고 개간하기 시작했다. 원래 약속한 농장 재배 대신하게 된 커피 재배도 일꾼들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하고, 여자들은 함부로 카페 클럽에도 출입하지 못하던 시절임에도 그녀는 말을 타고 가고 싶은 데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 마는 여자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작에게도 그녀는 당당히 먼저 ‘사랑한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여자다. 그랬기에 자신의 진정한 사랑, 데니스와 조금 늦게 만났지만, 그때에도 카렌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자신에게 좋은 선택을 한다. 그녀의 삶 속에는 후회도 많고 실패도 있지만, 변명이나 후회가 없다. 그녀가 멋진 까닭은 그녀가 사랑과 삶에 있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과 꿈과 모험과 사랑이 펼쳐진 아프리카 위에 모차르트의 여러 음악이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극 중에서 데니스는 언제나 축음기와 모차르트 음악을 갖고 다니는, 모차르트 애호가로 등장한다. 카메라로 넘겨다 보는데에도 광대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대지가 펼쳐질 때, 카렌과 데니스 사이에 미묘한 눈빛이 건네질 때, 두 사람이 여행 중에 곳곳에서 마음을 나눌 때,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 벅차오름, 설렘, 아름다움, 낭만을 다양한 음으로 연주해낸다.
“영화에 주로 쓰인 부분은 2악장 아다지오(Adagio)야. ‘느리게’라는 뜻의 이 음악 용어는 보통 협주곡 구성에서 2악장에서 등장해. 힘찬 메인 주제를 연주하는 1악장의 뒤따라 흘러나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온하며 느릿느릿 아름다운 선율로 이루어져 있는 곡이 많아. 그런 연유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대목이기도 하고. 잔잔한 노래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떤 곡들의 2악장만 꼽아 듣기도 해. 아다지오만 따로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이 있을 정도니까.”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다시 보게 한 <클라리넷 협주곡>
모차르트 음악 안에는 특유의 명랑성이 있다. 어떤 음악이래도 ‘모차르트 인증’을 해두듯이 밝은 장조의 음들은 경쾌하고 건강한 활력이 넘친다. 장송곡이라고 불리는 <레퀴엠> 가운데서 모차르트 음악이 독보적인 까닭도 그 안에 비장미, 슬픔, 안타까움 등 죽음에 가까운 어둠의 감정을 모두 수렴하면서도 솟구쳐 오르는 강건한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클라리넷 협주곡 역시 마찬가지다. 피리 과에 해당하는 목관악기라 그런지, 얼핏 새들의 노랫소리를 연상케 하는 활달함, 싱그러움이 담겨 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은, 목관악기의 대표주자 플루트에 가려졌던 클라리넷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킨 곡이지. 바이올린에 가려졌던 첼로처럼, 클라리넷도 플루트에 가려진 악기였는데, 이 곡을 통해 플루트만큼이나 클라리넷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어.”
“바이올린으로 대표되는 현악기 족을 음역의 높이별로 보자면 이래.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콘트라베이스(더블베이스) 순이야. 플루트로 대표되는 목관악기 족을 높이별로 나열하자면, 피콜로 → 플루트 → 오보에 → 클라리넷 → 바순 순이지. 그러니까 현악기로 치면 정확히 음역이 일치하지는 않아도 비올라 정도에 해당해. 클라리넷의 사용 범위는 꽤 넓어서 실제 활동도는 비올라+첼로쯤 돼.”
플루트, 클라리넷 말고도 반가운 악기가 보인다. 오보에라면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젠틀맨 쿠로키군이 들고 다니던 그 악기다. 그 악기 소리가 좋아서 배워보고 싶어 알아봤는데, 오보에라는 악기가 피아노 못지 않게 고액이라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선배. 오보에 소리 참 좋아해요.” “엔리오 모리코네의 영화 <미션>에 등장하는 <가브리엘의 오보에> 알지? 오보에도 그 영화음악으로 유명해졌지. 오보에는 플루트보다는 낮은 음역대를 갖고 있고, 클라리넷보다 좁은 음역대를 커버하는 악기야. 좀 애매하지? 하지만 특유의 낭랑하고 조화로운 소리가 매력적이라, 오케스트라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쓰이지.”
죽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협주곡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곡은 죽기 2달 전인 10월에 작곡됐어.” 선배한테 이 얘길 듣기 전에도, 이 곡이 얼마나 명랑하고 자연의 건강한 에너지를 담고 있는지 실컷 예찬했는데, 죽기 직전에 작곡한 곡이라니, 정말 놀랍다.
“그렇지? 모차르트도 이게 자신의 마지막 협주곡이란 걸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가 병들어 죽기 직전의 가난하고 비참한 시기에 쓰인 곡이었어. 가산을 탕진하고 굶어 죽을 것 같은 모차르트를 곁에서 보던 친구가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특별히 주문한 곡이야. 그런데도 선율은 발랄하고 여유로우며 경쾌하지? 자신의 괴로움을 뒤로하고, 인류에게 이런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천재에게 새삼 경외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야.” 모차르트에게 음악이란, 우리가 듣고 느끼는 대로, ‘즐거운 것’이었나 보다.
“모차르트 곡의 특징은 악기건 사람이건 할 수 있는 능력을 음악에 다 짜낸다는 거야. 모차르트의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들은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음표에 덧붙여 인간의 목소리로 낼 수 있는 높이인지 궁금할 지경인 고음역의 연속에도 경악을 금치 못했어. 이런 특징은 기악곡인 클라리넷 협주곡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지.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으면, 정말 이 악기가 2인자였나 싶을 만큼 풍성하고 아름다운 클라리넷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지.”
이번 주 명반으로 선정된 앨범은 알프레드 프린츠, 칼 뵘의 연주다. “이 곡을 접할 때 기본 중의 기본인 앨범”이란다. 칼 뵘은 이전에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을 때 만났던 지휘자다. “칼 뵘은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양에서 인기가 많은데, 그의 여유롭고 부드러운 템포의 모차르트 선율이 동양인의 취향에 잘 맞는 듯해. 칼 뵘 지휘의 모차르트 음반은 일단은 믿고 들어볼 수 있는 연주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10년 전, 아프리카 가든 루트에서. 달이 커다랗게 뜬 밤, 저 의자에 앉아
“오늘 밤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부터 이 음악을 영화를 통해 접했더니, 지금은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만 흐르면, 아프리카가, 데니스와 카렌이 먼저 떠오른다. 그 둘이 매일 밤마다 근사한 저녁상을 차리고, 한쪽에 놓인 축음기의 바늘을 움직여 모차르트 음악을 틀던 순간. 그리고 카렌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데니스가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풍경. 엉킨 머리를 쥐고 실랑이를 하는 카렌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요.” 다가가서 머리를 감겨주는 명장면까지! 이 음악을 들을 때면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다.
이 영화가 유독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까닭은 나에게도 역시 그런 날이, 그런 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밤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던, 딱 이맘때. 나도 거기, 아프리카에 있었다. 사람들과 도란도란 별을 보고 앉아 불을 피우던 밤이 있었다.
그날의 바람, 그날의 어둠, 그날의 별만으로도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 하나 없이 풍요로운 밤이었다. 마치 영화를 돌려보듯, 살면서 몇 번이나 돌려본 영화 같은 장면들. 그랬기에 그 시절을 지나온 카렌의 회고에 더욱 애잔하게 아련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렌과 다니엘의 갈등. 과연 언제 떠나고 언제 머물러야 하는가. 사랑과 자유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참으로 묵직하게 다가왔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아다지오는 나의 아름답던 그 날의 기억에 덧입혀도 더없이 잘 어울린다. 어쩌면 그 음악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를 위한 음악이라기보다, 아프리카에 어울리는 음악이라기보다, 누구나 삶에 간직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회고하는 순간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죽기 직전에 이 음악을 작곡했던 모차르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아름다운 곡을 썼는지, 조금은 짐작이 되기도 한다. 그는 삶의 어떤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며 이 음악을 작곡했을까? 어느새 감상적이 되어버린 건지, 오늘 밤 창문을 타고 넘어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유달리 선선하다.
두 번째로 선택된 음반 데이빗 쉬프린 :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오중주
약간은 생소한 레이블 ‘DELOS’는 예전부터 섬세하고 풍부한 음질을 잘 표현해낸 레이블로 마니아들 사이에 유명했다. 델로스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이 음반은, 연주자들은 다 생소하지만 프린츠와 칼뵘의 음반만큼이나 필청 음반으로 손꼽인다. 약간은 여유로운 프린츠의 연주보다 조금은 빠르고 세밀하지만 섬세한 음질로 그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클라리넷의 여신, 23살에 카라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베를린 필 하모닉에 최초로 입성한 여성단원, 수많은 현란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가히 현존하는 최고의 클라리넷연주자라고 할만한 자비네 마이어의 음반을 듣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EMI 그레이트 레코딩 시리즈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현재 구할 수 있는 것은 위 버전이다. 모차르트는 그 선율의 특징 탓인지 명연에 여성연주자가 꼽히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고전에서 현대음악까지 기교, 도전정신 어느 하나 빠질 게 없는 연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주의 깊게 들어보자. | ||||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1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anna
201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