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는 취하는 것이고, 글쓰기는 토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글쓰기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모퉁이에서나 이옥을 만나게 된다. 당대 이름을 떨친 것도 아닌 이옥과 그의 글이 이렇듯 꾸준한 관심을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이옥이 문체반정을 정면으로 통과하며 글쓰기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때문일 것이다. 지난 6월 4일, 이옥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최근 신간『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를 출간한 저자 채운은 시대를 넘어 글쓰기가 가지는 의미를 독자들에게 들려주었다. 글쓰기가 가지는 ‘동시대적 공감’과 ‘반시대성’을 이옥을 통해 찬찬히 풀어낸 의미 있는 시간을 지면에 옮겨본다.
글ㆍ사진 정연빈
201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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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의 저자 채운은 강의를 시작하기 전, 이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 중에도 이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독자들은 괜히 머쓱해했지만 채운은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강의를 시작했다. 저자는 제일 먼저, 동아시아에서 글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짚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독서하는 자가 관리라는 점,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이 굉장히 첨예한 정치적 문제가 되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문’과 ‘치’는 언제나 함께 붙어 다녔다. 글을 쓴다는 정체성은 관리라는 정체성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 문인들은 당색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를 떠올려 보면, 연암 박지원은 주된 집권층 노론이었고 다산의 경우는 남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 이옥은 서얼 집안인데다 마땅히 당색도 없었다. 가문 자체도 무관출신이 조금 있는 보잘것없는 가문이었다고 한다.

객관적 조건들을 따져보면 이옥은 굉장히 불우한 문인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8세기 글쓰기를 이야기할 때 이옥을 빠트리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인데 전집까지 발간 되어있어 있다. 저자는 이 기묘한 인물 이옥에게서 ‘반시대성’을 읽어낸다. 이옥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정조의 문체반정을 빠트릴 수 없다. 문체반정은 정조가 문체를 순정한 것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이 사건에 딱 걸려든 인물이 바로 이옥이었다. 정조는 글쓰기에 대해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왕이다. 채운은 우리나라를 ‘문’으로 다스리려 했던 왕으로 세종과 정조를 꼽으며 ‘문치’가 아름답게 들리지만 사실은 사상적 검열이라고 지적했다. ‘문치’란 문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이라며 말이다.

특히 정조는 ‘문치’를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생각했던 왕이었다. 그리고 ‘문치’를 할 수 있는 왕이었다. 규장각에서 자주 열린 세미나도 그렇지만 중국에서 책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읽는 것도 정조였다. 1770년대 당시에는 청나라 왕은 사고전서를 만든 건륭제였다. 정조는 이 목록을 구해서 가능한 책은 모두 볼 정도로 어마어마한 책벌레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글쓰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글을 보면 그 근본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왕이었다.

어느 날, 정조는 노론 최고 집안 젊은 자제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렀다가 그들이 소설, 그 중에서도 일종의 하이틴 로맨스를 읽는 걸 목격한다. 견고한 주자학자인 정조는 ‘소설’을 참을 수 없었다. 어쩌면 소설 좀 읽는 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 정조에게 소설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정조를 이해하려면 조선후기 책 읽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사대부들에게 독서라는 건 문화와 문명의 포괄적 개념이었다. 공자의 논어를 보면 공자가 말년에 자신을 해치려는 자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문이 닿아있는데 나를 하늘이 어찌하겠느냐.”여기서 문이 닿아있다는 말은 ‘모든 문화가 나에게 있는데’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문명과 문화의 핵심이 자신을 통해 흐르고 있다는 뜻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이렇게 문이라는 것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적 의미다. 그들은 텍스트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기록되는 순간, 기록은 계속 살아서 역사가 된다. 글이 되는 순간 전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아시아에서 글을 안다는 건 이 문명 안에 있다는 자부심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지배하는 능력, 문화를 이어받는 능력, 역사의 연속성 등을 포함하는 엄청난 특권이었다. 이런 역사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는 사마천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내 비록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천년 뒤의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리라, 생각했던 사마천은 누구보다 글이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던 인물이다.

이 세계에서 ‘문’과 ‘도’는 항상 함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도’다. 말하자면 ‘치세의 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세상의 도가 어그러져 문제가 생기면 글로 그것을 바로잡으려 한다. 이런 문화가 흔들린 것이 바로 18세기였다. 인쇄문화가 발달해서 다양한 책이 나오기 시작했던 거다. 정조는 당시 문고판 같이 작은 사이즈의 책 수입을 금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꾸 책을 누워서 보기 때문이었다. 누워서 책을 보니 어지러운 생각을 하게 되고 세도가 무너지는 거다. 정조의 생각은 그랬다. 정조가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세상의 문제는 정학이 흔들려서 생기는 것이니 성리학적 사상체계에 무장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주자학적 이상을 이 땅에 구현하면 세상이 잘 다스려질 거라 생각했던 정조에게 고문을 따르지 않는 소품체는 법도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고문체라고 문장이나 시, 모든 글에 써야 하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소품체는 성리학적 이상과는 상관없는 문체였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서 적는 패관이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전설을 적었다. 이런 글에는 구어체도 많고 법도와 상관없는 어휘, 독특한 한자와 리듬이 많이 들어갔다. 여기서 출발한 문체가 소설체나 소품체다. 그러니 정조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부터 이옥의 비극이 시작된다.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모의고사를 봤다.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때때로 그 답안들을 보곤 했는데, 어느 날 답안을 보다 소품체로 쓴 이옥의 글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정조실록에 이옥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정조는 정격문체로 시를 50수 짓는 벌을 주었다. 그런데 뒤에 본 시험에서 이옥이 정조의 눈에 다시 걸린다. 이옥은 한 세 번쯤 정조에게 문체로 인해 수난을 당한다. 과거시험을 금지 당하기도 했다가 결국 지방 방위수비대로 가게 된다. 이옥은 문인인데 느닷없이 충청도 천안에 지역방위대가 된 것이다. 이는 유폐와 비슷한 것이다. 이옥은 벌을 모두 마치고 다시 과거를 치르지만, 다시 또 정조의 눈 밖에 나 지방으로 유배를 간다.


저자 채운은 처음 이옥의 일대기를 봤을 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옥의 글이 대단히 깊은 사유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당대 문인을 능가할 정도로 화려한 문체를 가진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옥이 자신을 사로잡은 이유는 바로 이옥이 가진 독특함 때문이라 했다. 관리가 돼서 몰래 글을 쓸 수도 있는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일개 문인이 무슨 이유로 왕명을 듣지 않는 걸까. 대체 이 사람에게 글쓰기는 뭘까? 어째서 단 한 번도 자신의 글쓰기를 놓으려 하지 않을까? 저자는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고 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해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활동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옥에 대해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저자는 물론 문체반정에 정치적 고려는 있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유독 정조의 문체에 대한 히스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체만으로 곤혹을 치른 것이 이옥이라고 말한 저자는 결국 이옥은 문체 때문에 30대를 몽땅 길에서 보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남은 십몇 년의 시간을 경기도 화성에서 글을 쓰며 보낸다. 이옥이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정조가 죽었지만 이옥은 과거를 포기한다. 그 이후로 소품체로 된 글을 꾸준히 쓰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는다.

이옥의 글이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친구 ‘김려’ 때문이다. 정조 치하에서 서학과 연류된 문제로 유배를 갔던 사람인데, 다시 돌아온 이후로 10여 년 동안 자기 친구들의 글을 모아서 문집으로 엮는 일이었다. 이옥의 글 역시 김려를 통해서 편집된다. 주제별로 글을 뽑아서 후기를 달아 책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김려가 없었으면 우리는 이옥을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옥의 삶 자체가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이야기했다. 이옥의 글 중에 독서론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 있는데 그의 독서론은 바로 ‘취’라고 했다. 그리고 글쓰기론은 ‘토’라고 덧붙였다. 간단히 말하면 취하고 토한다는 이야기다. 이옥은 자신이 술을 좋아해서 한번 마시면 꼬꾸라질 때까지 마신다며 책도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게 바로 독서론인 ‘취’다. 글쓰기론인 ‘토’는 술에 취하면 온 몸에서 술 냄새가 나고 토하게 되는데 바로 그게 글쓰기라고 했다. 이건 과거 성리학 체계 속 글쓰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옥이 이 모든 걸 생각해 낸 건 아니다. 고문에 대한 부정은 연암도 했었다. 고문의 기준을 누가 만들었느냐 따지며 지금은 고문이 된 글도 이전에는 새로운 글이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또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를 거치면서 ‘도’와 ‘문’의 일치를 의심하는 생각들도 있었다. 그러니 온전히 독창적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옥의 글쓰기론이 조선에서 아주 극단적인 생각이었던 건 틀림없다.

글쓰기는 하나의 문체를 가지는 것이고, 그건 스타일을 갖는 문제다. 저자는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늘 새로운 것과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 말했다. 그리고 이옥을 바로 이런 인물로 소개했다. 이옥은 자신이 만난 모든 것을 글에 풀었다. 『백운필』이라는 글 모음집을 보면 풀, 꽃, 벌레, 물고기를 백과사전처럼 분류해서 그걸 다 기록한 것이다. 그는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를 기록하고 벌레에 대한 전설이 있으면 그것을 기록했다.

저자는 이런 이옥에게서 동시대성적 공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옥은 중심에 있는 사대부남성의 삶을 지향했던 적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식물에 대해 쓸 때도 사대부들은 ‘매난국죽’ 등을 주로 사용하는데 비해 이옥은 잡초에 대해 쓴다. 또 수수대 안에 있는 벌레 이야기를 한다. 유배지에서도 유배를 왔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은 없고 그곳에서 본 걸 끊임없이 쓴다. 시장에서 만난 싸움, 사투리, 오가다 본 여자들의 이름. 이는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과 형제들에게 편지를 꾸준히 썼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이옥은 자주 여성으로 오해 받는다. 여성의 상황과 심정에 이입한 글을 많이 쓴 때문이기도 하다. 난봉꾼의 아내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슬픔을 풀어내거나 자신과 맞는 남성을 만나지 못하는 한에 대해 말하는 기생의 이야기에 이입한다. 그는 심지어 여인이 마음이 맞는 남성을 만나는 일을 왕과 신하의 만남과 다르지 않다 말하기도 한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저자는 끝까지 자신의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옥의 ‘반시대성’을 언급했다. 그리 비장한 것도 단호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옥은 자기 글에 대한 충실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글은 모름지기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끝내 지켰던 것이다. 저자는 이옥의 ‘반시대성’이 단지 시대에 반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기 시대로부터 질병의 징후를 읽어내는 민감성과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고통 모두가 ‘반시대성’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반시대성’은 ‘동시대성’과 통하게 된다. 저자는 “동시대인이란 반시대적인 자이다.”라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려 주변부의 사람들과 언제든 접속할 수 있었던 이옥의 글쓰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가 조선후기 글쓰기 공간에서 보여준 글에 대한 태도가 여전히 유효함을 말했다. 자신이 살아온 만큼을 썼고, 쓴 만큼을 살아냈으며, 넘어질지언정 원망하지 않았고, 원망스러우면 원망스러운 대로 또 써나간 작가 이옥의 태도는 그가 그려 보인 세계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감동적이었다. 강연이 시작하기 전, 이옥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던 독자들은 이 정도면 우리가 이옥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말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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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채운 저 | 북드라망
문체를 고치라는 왕(정조)의 명령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이옥의 글을 읽는다. 자신의 문체를 지키기 위해 왕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으나 버려진 그 자리에서 자신이 버려졌다는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또 버려진 다른 사물/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읽고 썼던 자, 이옥. 이목구심(耳目口心)으로 토해진 그의 글을 읽으며 읽는다는 것, 쓴다는 것, 저항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소신을 굽히지 않는 뚝심 하나는 제대로 갖춘 외골수 아티스트”와 같은 새로운 이름으로 그를 호명하는 자리도 아마 이 책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가 처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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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이옥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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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sslqkqn

2013.07.04

책 읽기는 취하는 것이고, 글쓰기는 토하는 것이다. 정말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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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1318

2013.06.30

책읽기는 취하는 것이고, 글쓰기는 토하는 것이다!
완전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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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꼬

2013.06.30

멋있네요! 저는 왜 이렇게 취하기가 싫은 걸까요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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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빈

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