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우드 DNA를 알기 위하여
스크린 밖에 존재하는 실제 클린트와 스크린에 구현된 클린트의 페르소나를 분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창조적인 DNA와 실생활의 DNA가 꼬여 형성한 그 이중나선 구조는 어떤 할리우드 배우들보다 더 복잡하게 꼬여 있다. 실제 클린트와 스크린의 페르소나는 서로 철저하게 피드백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삶이 어디서 끝나고, 그것들을 연기한 남자의 인생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201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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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금껏 할리우드가 배출한 스타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 온 인물로 우뚝 서 있다. 그는 50년이 넘게 영화에 출연하거나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 영화들은 유니버설 스튜디오 전속 배우로 변변찮고 쉽게 잊힐 단역들을 연기한 작품에서부터 그가 직접 제작하고 연출한, 머지않아 가장 많이 사랑받는 미국 영화의 반열에 올라 수많은 오스카상을 타게 될 블록버스터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클린트는 경력 초기에 TV 시리즈 「로하이드」에 출연하며 7년 반을 보냈다. 그가 연기한 로우디 예이츠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가장 인기 많은 TV 속 카우보이 중 하나였다.(이 시리즈는 총 여덟 시즌이 방영됐는데, 시즌 중에 대체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데뷔 첫해에는 스물두 개 에피소드가 방영됐고, 마지막 시즌에는 열세 개 에피소드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 시즌부터 일곱번째 시즌까지는 풀 시즌으로 방영됐다.) 「로하이드」의 여덟 번째 시즌 방영이 끝날 무렵, 유럽에서 제작되고 배급되어 폭넓은 인기를 누린 스파게티 웨스턴 세 편에 출연하면서 클린트는 이미 국제적인 스타가 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만든 이 영화들이 미국에서 개봉되자 그는 미국 내에서도 빅 스크린 스타가 됐다. 이후 25년 동안 클린트는 오락 영화 수십 편에 출연했고,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어디에서나 그의 이름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중을 즐겁게 해 주는 배우였지만, 그 시절 할리우드 엘리트들은 그의 영화가 오스카를 수상하기에는 지나치게 장르적이라고 판단했다.
1992년에 클린트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제작, 연출하고 출연했다. 웨스턴 영화에 (말 그대로) 종지부를 찍은 이 영화는 그가 소유한 제작사 말파소에서 만들었다. 말파소는 클린트가 할리우드 터줏대감 스타인 자신을 위한 미니 스튜디오를 운영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든 회사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제6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클린트가 직접 수상한 두 부문(감독상과 작품상)을 포함한 네 부문에서 수상했고, 동시에 미다스의 손이라 할 수 있는 ‘오스카 스타일(오스카의 인정)’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5년 동안, 아카데미는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작품을 수상 가능성 있는, 혹은 수상 후보로 지명할 만한 작품으로 인정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미스틱 리버」,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체인질링」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할리우드의 ‘포스트 스튜디오(Post-Studio)’ 시기 내내, 영화 제작의 첫째 법칙은 젊은 관객의 규모와 박스오피스의 규모가 같다는 것이었다.(젊은 사람들은 영화를 보러 가고, 늙은 관객들은 집에서 케이블과 DVD로 영화를 감상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가 이러한 작품 전부를 환갑을 넘긴 나이에 만들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스크린 밖에 존재하는 실제 클린트와 스크린에 구현된 클린트의 페르소나를 분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창조적인 DNA와 실생활의 DNA가 꼬여 형성한 그 이중나선 구조는 어떤 할리우드 배우들보다 더 복잡하게 꼬여 있다. 실제 클린트와 스크린의 페르소나는 서로 철저하게 피드백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삶이 어디서 끝나고, 그것들을 연기한 남자의 인생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가 지금까지 출연했거나 제작이나 연출을 했거나 또는 그중 한 가지 이상을 다양하게 겸하여 참여했던 영화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본질적인 스크린 페르소나 세 가지가 꾸준히 등장한다. 첫 번째 페르소나는 고독 속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는, 과거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에 싸인 남자, ‘이름 없는 사나이’다. 이 캐릭터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 세 편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석양의 건맨 2-석양의 무법자」에 등장했다가, 「집행자」와 「무법자 조시 웨일즈」에서 약간 다른 모습으로 재등장한 후, 몇 가지 외양이 바뀌고 변형된 다음 「용서받지 못한 자」로 곧장 이어졌다. 두 번째 페르소나는 「더티 해리」의 해리 캘러핸으로, 본질적으로 허무한 이 캐릭터의 외톨이 성격은 「그랜 토리노」를 포함한 이후 작품들에 꾸준히 재등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르소나는 마음씨 착한 레드넥(Redneck, 미국 남부의 교양 없는 백인 노동자옮긴이)으로, 이 캐릭터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말로 해결하는 문제를, 주먹을 휘둘러 해결하려 든다. 이 페르소나는 「더티 파이터」의 파일로 베도에로 처음 등장한 후 「핑크 캐딜락」에 이르기까지 스크린으로 거듭 돌아왔다.
다양한 모습으로 구체화된 이 세 캐릭터는 전부 현실의 클린트와 근본적으로 연관돼 있다. 모두 미국 영화계가 규범적으로 내세우는 그 어떤 캐릭터와도 닮지 않은 전형적인 외톨이들이다. 외톨이라고 하면 우리 뇌리에 즉각 떠오르는 영화 속 ‘고독한 사나이들’은 실제로는 전혀 외톨이가 아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이상화된 이미지로부터 보호받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외톨이들이다. 주류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외톨이’는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1952)에 등장하는 고립된 보안관 게리 쿠퍼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게리 쿠퍼가 연기하는 윌 케인은 악당들과 대적하기 위해 영웅처럼 홀로 나선다. 그러나 사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는 아내의 사랑에 의지한다. 그리고 아내가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마지못해 사용한 총에 의지한다. 모든 결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함께 말에 올라 석양으로 향한다. 머리에 떠오르는 또 다른 외톨이 캐릭터는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카사블랑카」(1942)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2차 대전이라는 광풍에 휘말린 중립적인 미국인 릭 블레인이다. 그는 “나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라고 자랑스레 떠벌린다. 그러던 그도 결국 사랑하는 여인 잉그리드 버그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이 영화에서 그가 하는 행위는 너무도 이타적이고 숭고하여, 그가 외톨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제임스 본드는 으뜸가는 외톨이처럼 보이지만, 일찍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그의 내면이 복수심과 육욕을 향한 갈망으로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여자 한 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 전부를 원하고 있다. 좀 더 고상한 수준으로 올라가 보자.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1956)에서 찰턴 헤스턴은 그의 가족으로부터, 동족으로부터, 대지로부터, 전통으로부터 고립돼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기대고 싶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이 경우 그 대상은 사랑과 인도, 윤리적으로 지탱할 힘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심원하기에, 심지어 모세조차도 역경을 혼자서 헤쳐 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클린트의 영화 캐릭터들은 캐릭터 자체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사나이’와 더티 해리, 파일로 베도에는 그들이 사악한 킬러들이나 사나운 여자들(종종 그 두 가지 특징은 하나의 캐릭터에 구현되기도 한다.)에 둘러싸였든, (‘이름 없는 사나이’에 맞서는) 개성 없는 적수들에 둘러싸였든, 자신들보다 더 비열한 (그렇기에 더 강한) 상대에게 추적을 당하다가 결국 패배하고 마는 연쇄 살인마에 둘러싸였든, 대단히 친근한 오랑우탄들에게 에워싸였든 간에 모두 홀로 도착했다가 홀로 떠난다. 그들이 여자의 마음을 얻는 일은 드물다. 그러려는 의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마지못해 여자와 엮이는 몇 안 되는 경우, 두 사람의 관계는 서먹하고 냉소적이며 로맨틱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일도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어느 영화를 보더라도 소위 말하는 러브 스토리는 항상 가장 흥미롭지 않은 부분이다. 그가 연기하는 외톨이는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나 여자들의 소망을 실현해 줄 능력이 없고, 그러려는 의향도 없으며, 따라서 그런 소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꿈꾸는 관객들의 소망은 부정적인 상황에 부닥치지 않는다. 클린트는 그의 고유 브랜드라 할 만한 이런 캐릭터를 통해 미국 영화에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무엇인가를 기여했다.
클린트는 실생활에서도 외톨이 비슷한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초창기에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영화에 출연했을 때는 물론,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 할리우드의 행복한 남편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던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첫 결혼 기간인 31년 내내 그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가정적인 남자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시끌벅적하게 떠돌았다. 사실 바람피우는 것을 매력적인 일로, 심지어는 영웅적인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라커룸에서 맥주를 마시며 떠들어 대는 허풍들이 음탕한 시(詩)의 경지에까지 오르는 일이 잦은 할리우드라는 동네에서, 바람둥이가 된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에게 바람둥이 딱지가 단단히 붙은 것은 그가 스크린에서 보여 준 몇 안 되는 로맨스가 실생활에서 벌인 수많은 로맨스와 대단히 밀접하게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클린트의 스크린 밖 생활은 항상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여자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제대로 따진다면 여자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매기 존슨과 결혼한 상태에서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혼외정사로 낳은 네 아이 중 첫째였다. 그는 애인이 많았다. 그중 몇몇은 배우들이었는데, 그들과 벌이는 애정 행각은 영화를 제작하면서 시작됐다가 마지막 촬영을 마친 후에 끝났다. 상대적으로 이런 사랑 놀음의 후반기라고 볼 수 있는 예순여섯 살에, 그는 드디어 결혼했다. 매기와의 이혼 절차가 완료된 지 12년이 지나서 올린 겨우 두 번째 결혼이었다. 상대는 그보다 서른다섯 살 어린 여자였는데, 그는 이 결혼으로 어느 정도 평온과 행복을 찾았다.
그는 철들지 않은 청년 시절을 샌프랜시스코 시내와 외곽의 싸구려 술집들을 들락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술집에 비치된 피아노로 재즈를 연주하며 지냈다. 술집에서 벌어지는 언쟁은 그 시절과 그 장소의 고유한 분위기에 따라 주먹다짐으로 곧잘 이어졌는데, 이런 환경과 그의 대담한 기질은 훗날 그가 참여한 많은 작품에서 되풀이됐다. 그는 실생활에서 터프가이였으므로 영화에서도 터프가이 역할을 쉽고 현실감 있게 연기했다. 클래식 영화 특유의 이야기 전개 과정을 그대로 따르면서 주먹싸움이 승부를 결정짓는 총격전으로 이어지는 「황야의 무법자」와 「더티 해리」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그는 처절한 싸움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터프가이였다.
영화에서 클린트가 연기한 역할들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것은 (그러면서 그 역할들을 너무도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실생활에서도 외톨이인 클린트가 자신의 황폐한 정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내려 기를 쓰는 모습이다. 그는 대공황이 낳은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생계를 꾸리려 애쓰면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군에 징집됐다가 한 무리의 터프한 배우 지망생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스튜디오가 영화계를 지배하던 시절이 내리막길을 타던 무렵, 캘리포니아 남부나 그 인근에서 자란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타고난 선 굵은 외모로 스튜디오 전속 배우가 돼 돈을 버는 것이 주유소에서 손님들 차에 기름을 넣어 돈을 버는 것보다 쉽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제대한 그는 그들의 리드를 따랐다. 그러나 자신에게 새로운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가까운 두 친구, 마틴 밀너와 데이비드 잰센을 비롯한 나머지 무리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밀너의 평범한 영화계 경력은 평범한 수준을 밑도는 TV 경력으로 이어졌다. 그의 안정적인 TV 경력은 「루트 66」(1960~1964)과 「아담-12」(1968~1975) 정도였다. 잰센은 1960년대 중반(1963~1967) TV에서 「도망자」의 닥터 리처드 킴블 역할로 짧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 이후로는 점차 평범한 작품들로 밀려났다. 반면 클린트는 TV 활동으로 보내는 시간을 필름 스쿨을 다니는 것처럼 활용했다. 유니버설의 촬영 스튜디오 안팎으로 짐차를 몰고 다니는 피곤함에 지치고 따분해하는 조합원들 틈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상황을 연구했고, 영화를 만드는 방법(1시간짜리 TV 웨스턴 시리즈인 「로하이드」는 매해 39주 동안, 한 주마다 소형 영화 한 편 분량으로 기계적으로 제작됐다.)뿐 아니라 그것들을 빠르고 싸게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 그 영화들은 간결한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게 들려줬는데, 이따금 같은 이야기를 살짝 변형해 들려주기도 했다. 이 이야기들은 논리적인 도입부와 액션이 가득한 중반부, 그리고 도덕적으로 고양된, 플롯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결말로 구성됐다.
세월이 흘러 빅 스크린의 흥행 보증 수표로 입지를 굳힌 후, 클린트는 드디어 연출 기회를 잡았다. 그는 경력 초기부터 영화의 진짜 액션은 연출에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창조주 역할을 하는 것이 배역을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돈 시겔을 만났다. 시겔은 「일망타진」(1968), 「수녀와 무법자」(1970), 「매혹당한 사람들」(1971), 「더티 해리」(1971), 「알카트라즈 탈출」(1979) 등 다섯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이 작품들은 클린트의 초창기 연출 스타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인간의 숭고함이야말로 인간을 궁극적으로 속죄하고 구원하는 힘이라는, 집단적인 믿음을 다룬 주제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클린트는 결국 자신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숭고함과 속죄라는 주제에서 벗어났다. 그는 시겔이 다룬 주제들이 다른 작품들을 지나치게 모방한 독창적이지 않은 주제였을 뿐 아니라, ‘플롯에 덜 의존한 영화들’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흥미가 떨어지는 주제임을 깨달았다. 그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그 자신이 연기하는 주인공들처럼 초연하고 (여자들이나 더 큰 사회적 질서와) 소원해졌으며 사회의 쓴맛을 본 사내들의 캐릭터를 복잡하게 탐구하는 장편영화 길이의 ‘캐릭터 스터디’였다. 그런 캐릭터에는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가 연기한 월트 코왈스키도 포함되는데, 암울하고 서늘한 이 영화에서 자기 용서와 위안은 다른 인간을 구하기 위해 관계를 맺으려는 압도적인 (그리고 충격적인) 단 한 번의 시도에서 자기희생의 형태로 찾아온다. 이 영화는 클린트의 연출 스타일, 그리고 배우로서 그가 다다른 성숙함그는 이 영화를 만들 때 일흔여덟 살이었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로맨틱한 여자 주인공이 한 명도 없고, 긴장을 풀어 주는 코믹한 장면도 없으며, 결말에 이를 때까지는 주인공 캐릭터가 구원을 받을 만한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클린트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과 연출 스타일의 궤적을, 그리고 심지어 (또는 특히) 나이를 먹어서도 외톨이를 궁극적인 영웅으로 찬양하려는 그의 작가주의적 탐색 과정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클린트는 그가 항상 당대의 다른 감독들이나 연기자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였는지를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자신의 영화들을 오락물 이외의 다른 것으로 얘기하는 것을 항상 내켜 하지 않았고, 최신작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언론을 향해 판에 박힌 대답들을 내놓는 것 이상으로 사생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꺼린 그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단서들은 그가 만든 영화들의 내용뿐 아니라, 자기 홍보 울타리 너머에서 이끌어 온 인생의 맥락 안에서도, 결국은 그 둘이 맺고 있는 공생적인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영화는 그라는 존재를 만들어 줬고, 그는 그 영화들을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꾸린 사람이다. 그는 위대한 오락물인 동시에 교훈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영화를, 모든 위대한 영화들처럼 창문이자 거울인 작품을 만든 미국의 예술가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세계 전역의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진리를 반영해 보여 주며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심사숙고도 언뜻언뜻 내비친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글은 그의 인생이라는 창문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이제껏 만들어진 미국 영화들 중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불온하며 도발적이고 오락적이라 할 만한 작품들에 반영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예술가로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클린트는 경력 초기에 TV 시리즈 「로하이드」에 출연하며 7년 반을 보냈다. 그가 연기한 로우디 예이츠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가장 인기 많은 TV 속 카우보이 중 하나였다.(이 시리즈는 총 여덟 시즌이 방영됐는데, 시즌 중에 대체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데뷔 첫해에는 스물두 개 에피소드가 방영됐고, 마지막 시즌에는 열세 개 에피소드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 시즌부터 일곱번째 시즌까지는 풀 시즌으로 방영됐다.) 「로하이드」의 여덟 번째 시즌 방영이 끝날 무렵, 유럽에서 제작되고 배급되어 폭넓은 인기를 누린 스파게티 웨스턴 세 편에 출연하면서 클린트는 이미 국제적인 스타가 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만든 이 영화들이 미국에서 개봉되자 그는 미국 내에서도 빅 스크린 스타가 됐다. 이후 25년 동안 클린트는 오락 영화 수십 편에 출연했고,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어디에서나 그의 이름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중을 즐겁게 해 주는 배우였지만, 그 시절 할리우드 엘리트들은 그의 영화가 오스카를 수상하기에는 지나치게 장르적이라고 판단했다.
1992년에 클린트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제작, 연출하고 출연했다. 웨스턴 영화에 (말 그대로) 종지부를 찍은 이 영화는 그가 소유한 제작사 말파소에서 만들었다. 말파소는 클린트가 할리우드 터줏대감 스타인 자신을 위한 미니 스튜디오를 운영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든 회사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제6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클린트가 직접 수상한 두 부문(감독상과 작품상)을 포함한 네 부문에서 수상했고, 동시에 미다스의 손이라 할 수 있는 ‘오스카 스타일(오스카의 인정)’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5년 동안, 아카데미는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작품을 수상 가능성 있는, 혹은 수상 후보로 지명할 만한 작품으로 인정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미스틱 리버」,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체인질링」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할리우드의 ‘포스트 스튜디오(Post-Studio)’ 시기 내내, 영화 제작의 첫째 법칙은 젊은 관객의 규모와 박스오피스의 규모가 같다는 것이었다.(젊은 사람들은 영화를 보러 가고, 늙은 관객들은 집에서 케이블과 DVD로 영화를 감상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가 이러한 작품 전부를 환갑을 넘긴 나이에 만들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스크린 밖에 존재하는 실제 클린트와 스크린에 구현된 클린트의 페르소나를 분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창조적인 DNA와 실생활의 DNA가 꼬여 형성한 그 이중나선 구조는 어떤 할리우드 배우들보다 더 복잡하게 꼬여 있다. 실제 클린트와 스크린의 페르소나는 서로 철저하게 피드백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삶이 어디서 끝나고, 그것들을 연기한 남자의 인생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가 지금까지 출연했거나 제작이나 연출을 했거나 또는 그중 한 가지 이상을 다양하게 겸하여 참여했던 영화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본질적인 스크린 페르소나 세 가지가 꾸준히 등장한다. 첫 번째 페르소나는 고독 속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는, 과거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에 싸인 남자, ‘이름 없는 사나이’다. 이 캐릭터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 세 편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석양의 건맨 2-석양의 무법자」에 등장했다가, 「집행자」와 「무법자 조시 웨일즈」에서 약간 다른 모습으로 재등장한 후, 몇 가지 외양이 바뀌고 변형된 다음 「용서받지 못한 자」로 곧장 이어졌다. 두 번째 페르소나는 「더티 해리」의 해리 캘러핸으로, 본질적으로 허무한 이 캐릭터의 외톨이 성격은 「그랜 토리노」를 포함한 이후 작품들에 꾸준히 재등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르소나는 마음씨 착한 레드넥(Redneck, 미국 남부의 교양 없는 백인 노동자옮긴이)으로, 이 캐릭터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말로 해결하는 문제를, 주먹을 휘둘러 해결하려 든다. 이 페르소나는 「더티 파이터」의 파일로 베도에로 처음 등장한 후 「핑크 캐딜락」에 이르기까지 스크린으로 거듭 돌아왔다.
다양한 모습으로 구체화된 이 세 캐릭터는 전부 현실의 클린트와 근본적으로 연관돼 있다. 모두 미국 영화계가 규범적으로 내세우는 그 어떤 캐릭터와도 닮지 않은 전형적인 외톨이들이다. 외톨이라고 하면 우리 뇌리에 즉각 떠오르는 영화 속 ‘고독한 사나이들’은 실제로는 전혀 외톨이가 아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이상화된 이미지로부터 보호받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외톨이들이다. 주류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외톨이’는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1952)에 등장하는 고립된 보안관 게리 쿠퍼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게리 쿠퍼가 연기하는 윌 케인은 악당들과 대적하기 위해 영웅처럼 홀로 나선다. 그러나 사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는 아내의 사랑에 의지한다. 그리고 아내가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마지못해 사용한 총에 의지한다. 모든 결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함께 말에 올라 석양으로 향한다. 머리에 떠오르는 또 다른 외톨이 캐릭터는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카사블랑카」(1942)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2차 대전이라는 광풍에 휘말린 중립적인 미국인 릭 블레인이다. 그는 “나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라고 자랑스레 떠벌린다. 그러던 그도 결국 사랑하는 여인 잉그리드 버그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이 영화에서 그가 하는 행위는 너무도 이타적이고 숭고하여, 그가 외톨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제임스 본드는 으뜸가는 외톨이처럼 보이지만, 일찍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그의 내면이 복수심과 육욕을 향한 갈망으로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여자 한 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 전부를 원하고 있다. 좀 더 고상한 수준으로 올라가 보자.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1956)에서 찰턴 헤스턴은 그의 가족으로부터, 동족으로부터, 대지로부터, 전통으로부터 고립돼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기대고 싶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이 경우 그 대상은 사랑과 인도, 윤리적으로 지탱할 힘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심원하기에, 심지어 모세조차도 역경을 혼자서 헤쳐 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클린트의 영화 캐릭터들은 캐릭터 자체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사나이’와 더티 해리, 파일로 베도에는 그들이 사악한 킬러들이나 사나운 여자들(종종 그 두 가지 특징은 하나의 캐릭터에 구현되기도 한다.)에 둘러싸였든, (‘이름 없는 사나이’에 맞서는) 개성 없는 적수들에 둘러싸였든, 자신들보다 더 비열한 (그렇기에 더 강한) 상대에게 추적을 당하다가 결국 패배하고 마는 연쇄 살인마에 둘러싸였든, 대단히 친근한 오랑우탄들에게 에워싸였든 간에 모두 홀로 도착했다가 홀로 떠난다. 그들이 여자의 마음을 얻는 일은 드물다. 그러려는 의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마지못해 여자와 엮이는 몇 안 되는 경우, 두 사람의 관계는 서먹하고 냉소적이며 로맨틱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일도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어느 영화를 보더라도 소위 말하는 러브 스토리는 항상 가장 흥미롭지 않은 부분이다. 그가 연기하는 외톨이는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나 여자들의 소망을 실현해 줄 능력이 없고, 그러려는 의향도 없으며, 따라서 그런 소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꿈꾸는 관객들의 소망은 부정적인 상황에 부닥치지 않는다. 클린트는 그의 고유 브랜드라 할 만한 이런 캐릭터를 통해 미국 영화에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무엇인가를 기여했다.
클린트는 실생활에서도 외톨이 비슷한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초창기에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영화에 출연했을 때는 물론,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 할리우드의 행복한 남편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던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첫 결혼 기간인 31년 내내 그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가정적인 남자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시끌벅적하게 떠돌았다. 사실 바람피우는 것을 매력적인 일로, 심지어는 영웅적인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라커룸에서 맥주를 마시며 떠들어 대는 허풍들이 음탕한 시(詩)의 경지에까지 오르는 일이 잦은 할리우드라는 동네에서, 바람둥이가 된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에게 바람둥이 딱지가 단단히 붙은 것은 그가 스크린에서 보여 준 몇 안 되는 로맨스가 실생활에서 벌인 수많은 로맨스와 대단히 밀접하게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클린트의 스크린 밖 생활은 항상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여자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제대로 따진다면 여자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매기 존슨과 결혼한 상태에서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혼외정사로 낳은 네 아이 중 첫째였다. 그는 애인이 많았다. 그중 몇몇은 배우들이었는데, 그들과 벌이는 애정 행각은 영화를 제작하면서 시작됐다가 마지막 촬영을 마친 후에 끝났다. 상대적으로 이런 사랑 놀음의 후반기라고 볼 수 있는 예순여섯 살에, 그는 드디어 결혼했다. 매기와의 이혼 절차가 완료된 지 12년이 지나서 올린 겨우 두 번째 결혼이었다. 상대는 그보다 서른다섯 살 어린 여자였는데, 그는 이 결혼으로 어느 정도 평온과 행복을 찾았다.
그는 철들지 않은 청년 시절을 샌프랜시스코 시내와 외곽의 싸구려 술집들을 들락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술집에 비치된 피아노로 재즈를 연주하며 지냈다. 술집에서 벌어지는 언쟁은 그 시절과 그 장소의 고유한 분위기에 따라 주먹다짐으로 곧잘 이어졌는데, 이런 환경과 그의 대담한 기질은 훗날 그가 참여한 많은 작품에서 되풀이됐다. 그는 실생활에서 터프가이였으므로 영화에서도 터프가이 역할을 쉽고 현실감 있게 연기했다. 클래식 영화 특유의 이야기 전개 과정을 그대로 따르면서 주먹싸움이 승부를 결정짓는 총격전으로 이어지는 「황야의 무법자」와 「더티 해리」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그는 처절한 싸움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터프가이였다.
영화에서 클린트가 연기한 역할들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것은 (그러면서 그 역할들을 너무도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실생활에서도 외톨이인 클린트가 자신의 황폐한 정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내려 기를 쓰는 모습이다. 그는 대공황이 낳은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생계를 꾸리려 애쓰면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군에 징집됐다가 한 무리의 터프한 배우 지망생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스튜디오가 영화계를 지배하던 시절이 내리막길을 타던 무렵, 캘리포니아 남부나 그 인근에서 자란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타고난 선 굵은 외모로 스튜디오 전속 배우가 돼 돈을 버는 것이 주유소에서 손님들 차에 기름을 넣어 돈을 버는 것보다 쉽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제대한 그는 그들의 리드를 따랐다. 그러나 자신에게 새로운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가까운 두 친구, 마틴 밀너와 데이비드 잰센을 비롯한 나머지 무리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밀너의 평범한 영화계 경력은 평범한 수준을 밑도는 TV 경력으로 이어졌다. 그의 안정적인 TV 경력은 「루트 66」(1960~1964)과 「아담-12」(1968~1975) 정도였다. 잰센은 1960년대 중반(1963~1967) TV에서 「도망자」의 닥터 리처드 킴블 역할로 짧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 이후로는 점차 평범한 작품들로 밀려났다. 반면 클린트는 TV 활동으로 보내는 시간을 필름 스쿨을 다니는 것처럼 활용했다. 유니버설의 촬영 스튜디오 안팎으로 짐차를 몰고 다니는 피곤함에 지치고 따분해하는 조합원들 틈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상황을 연구했고, 영화를 만드는 방법(1시간짜리 TV 웨스턴 시리즈인 「로하이드」는 매해 39주 동안, 한 주마다 소형 영화 한 편 분량으로 기계적으로 제작됐다.)뿐 아니라 그것들을 빠르고 싸게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 그 영화들은 간결한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게 들려줬는데, 이따금 같은 이야기를 살짝 변형해 들려주기도 했다. 이 이야기들은 논리적인 도입부와 액션이 가득한 중반부, 그리고 도덕적으로 고양된, 플롯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결말로 구성됐다.
세월이 흘러 빅 스크린의 흥행 보증 수표로 입지를 굳힌 후, 클린트는 드디어 연출 기회를 잡았다. 그는 경력 초기부터 영화의 진짜 액션은 연출에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창조주 역할을 하는 것이 배역을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돈 시겔을 만났다. 시겔은 「일망타진」(1968), 「수녀와 무법자」(1970), 「매혹당한 사람들」(1971), 「더티 해리」(1971), 「알카트라즈 탈출」(1979) 등 다섯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이 작품들은 클린트의 초창기 연출 스타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인간의 숭고함이야말로 인간을 궁극적으로 속죄하고 구원하는 힘이라는, 집단적인 믿음을 다룬 주제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클린트는 결국 자신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숭고함과 속죄라는 주제에서 벗어났다. 그는 시겔이 다룬 주제들이 다른 작품들을 지나치게 모방한 독창적이지 않은 주제였을 뿐 아니라, ‘플롯에 덜 의존한 영화들’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흥미가 떨어지는 주제임을 깨달았다. 그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그 자신이 연기하는 주인공들처럼 초연하고 (여자들이나 더 큰 사회적 질서와) 소원해졌으며 사회의 쓴맛을 본 사내들의 캐릭터를 복잡하게 탐구하는 장편영화 길이의 ‘캐릭터 스터디’였다. 그런 캐릭터에는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가 연기한 월트 코왈스키도 포함되는데, 암울하고 서늘한 이 영화에서 자기 용서와 위안은 다른 인간을 구하기 위해 관계를 맺으려는 압도적인 (그리고 충격적인) 단 한 번의 시도에서 자기희생의 형태로 찾아온다. 이 영화는 클린트의 연출 스타일, 그리고 배우로서 그가 다다른 성숙함그는 이 영화를 만들 때 일흔여덟 살이었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로맨틱한 여자 주인공이 한 명도 없고, 긴장을 풀어 주는 코믹한 장면도 없으며, 결말에 이를 때까지는 주인공 캐릭터가 구원을 받을 만한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클린트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과 연출 스타일의 궤적을, 그리고 심지어 (또는 특히) 나이를 먹어서도 외톨이를 궁극적인 영웅으로 찬양하려는 그의 작가주의적 탐색 과정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클린트는 그가 항상 당대의 다른 감독들이나 연기자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였는지를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자신의 영화들을 오락물 이외의 다른 것으로 얘기하는 것을 항상 내켜 하지 않았고, 최신작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언론을 향해 판에 박힌 대답들을 내놓는 것 이상으로 사생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꺼린 그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단서들은 그가 만든 영화들의 내용뿐 아니라, 자기 홍보 울타리 너머에서 이끌어 온 인생의 맥락 안에서도, 결국은 그 둘이 맺고 있는 공생적인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영화는 그라는 존재를 만들어 줬고, 그는 그 영화들을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꾸린 사람이다. 그는 위대한 오락물인 동시에 교훈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영화를, 모든 위대한 영화들처럼 창문이자 거울인 작품을 만든 미국의 예술가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세계 전역의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진리를 반영해 보여 주며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심사숙고도 언뜻언뜻 내비친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글은 그의 인생이라는 창문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이제껏 만들어진 미국 영화들 중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불온하며 도발적이고 오락적이라 할 만한 작품들에 반영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예술가로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크 엘리엇 저/윤철희 역 | 민음인
이 책은 마초 이미지를 대표하는 스타 배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 감독,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역할 모델로 추앙받는 세계적인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평전이다. 50여 년간 출연하고 만들어 온 영화와 뒷이야기는 물론,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불륜, 각종 소송에 대한 비화, 그리고 아이스크림콘을 거리에서 먹지 못하게 하는 시 당국의 조례 제정에 분노하여 카멜의 시장에 선출되는 의외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용직을 전전하던 목표 없는 청년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난 80년간의 일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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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키
2013.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