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거절당한 여인, 몇 년 뒤의 모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원작소설을 쓴 푸슈킨은 6년 뒤 실제로 자신의 아내를 연모하던 남자와 결투 끝에 서른여덟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차이코스프키는 여제자의 사랑고백을 오네긴처럼 사뿐히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만, 그 결혼생활은 불행했습니다. 삶이 이렇게 우리를 속여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201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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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의 <유진 오네긴>
타티아나의 명명축일. 지루한 데다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던 오네긴은 재미삼아 올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올가와 다정하게 춤을 추죠. 질투에 눈이 먼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오네긴은 친구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에 말을 건네지 못하고 결국 렌스키와의 결투에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시골을 떠나 수년을 방랑하게 되죠. 떠도는 생활에 지친 오네긴은 몇 년 후 퇴역한 그레민 공작의 파티에 초대됩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그곳에서 한껏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타티아나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공작의 아내인 타티아나를요. 방랑 생활에 지친 오네긴은 타티아나가 마지막 돌파구인 듯 타는 듯한 구애의 편지를 건네지만, 이번에는 타티아나가 그 마음을 거절합니다. 자신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이고 그 삶에 충실하고 싶다고요.
그 모든 몸짓, 발레 <오네긴>
발레 <오네긴>의 역사는 소설이나 오페라와 비교하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드라마 발레의 거장으로 불리는 존 크랑코(John Cranko)의 손을 거쳐 지난 196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의해 초연됐으니까요. 존 크랑코는 오페라와는 차별화된 발레 <오네긴>의 매력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무대에서도 오페라 음악은 물론 차이코프스키의 다른 음악 28곡을 편곡하여 사용합니다.
발레 <오네긴>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발레 <오네긴>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발레’를 뛰어넘어 ‘마음을 나누는 무대’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드라마발레의 특징이기도 할 텐데요.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야기와 주인공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오네긴의 첫 등장이 기다려집니다. 기다란 다리를 느릿느릿 뻗어나가는 그 오만하고 나른한 움직임에서 오네긴의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죠. 타티아나는 어떤가요? 오네긴에게 마음을 빼앗겨 종종걸음으로 무대를 휘젓는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사랑을 거절당해 비통해 하는 모습,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호소하는 모습이 모두 춤으로 표현되고 관객들은 그 움직임만으로 그녀의 애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오네긴과 타티아나가 다시 만나는 3막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저며 오죠. 타티아나를 갈구하는 오네긴과 그 마음을 애써 거절하며 돌아서는, 그러나 냉정히 뿌리치지 못하고 자꾸만 그에게 이끌려가는 타티아나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됩니다. 그 어떤 말이 이들의 춤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발레 <오네긴>의 경우 국내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공연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4년 발레리나 강수진 씨가 슈투트가르트발레단과 처음으로 선을 보였고, 2009년 이후 유니버설발레단이 무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7월에 유니버설발레단의 무대가 예정돼 있는데요. 저는 발레 <오네긴>을 볼 때마다 1막에서는 싱긋 웃고, 2막에서는 안타깝고, 3막에서는 애통함에 울곤 합니다. 1막과 3막, 두 주인공의 파드되를 비교해 보면 흘러간 시간과 달라진 감정선의 미묘한 간극이 고스란히 전해질 겁니다. 무대에서 구현되는 춤으로 이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드라마와 음악의 만남, 오페라
하지만 그 절절함은 어쩐지 간접적입니다. 음악과 함께 시각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발레와 달리 ‘노래’라는 청각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페라에서는 메시지 전달력이 현격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함축적인 발레에 비해 너무나 직접적인 대사를 읽으며 스토리에 대한 환상이 깨질 때도 있습니다. 몸짓으로만 보는 3막과 ‘나를 떠났던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원망하는 타티아나의 가사를 접하는 3막은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까요? 무언가 좀 더 통속적입니다. 또 1막과 3막 사이 등장인물들의 분장에 큰 차이가 없어 풋사랑에 들뜬 풋풋한 타티아나도, 그림자까지 거들먹거리는 오네긴의 오만함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발레의 ‘자태’를 대신할 오페라의 ‘노래’에서 가창력 이상의 감동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발레 무대에 마음이 기우는 것 같죠?!
<오네긴>, 뜻대로 되지 않은 모든 사랑을 위로하며
모든 예술의 불멸의 화두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슬프고, 안타깝고 애통한 모든 예술작품은 누구나 겪는 제각각의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이겠죠. 푸슈킨 시절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들이 겪었던 갈등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오네긴과 타티아나가 겪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뜻대로 되지 않은 삶과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공감하죠. 타티아나가 오네긴처럼 미련 없이 그를 뿌리쳤다면 이렇게 큰 애절함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과거 무참히 짓밟혔던 그녀의 마음은 불완전 연소된 사랑이기에 그 모멸감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다시금 타오릅니다. 하지만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인이기에 뒤늦은 사랑을 따라갈 수도 없죠. 그래서 <오네긴>에는 감동이 있고, 모든 어긋난 사랑을 위로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원작소설을 쓴 푸슈킨은 6년 뒤 실제로 자신의 아내를 연모하던 남자와 결투 끝에 서른여덟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차이코스프키는 여제자의 사랑고백을 오네긴처럼 사뿐히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만, 그 결혼생활은 불행했습니다. 삶이 이렇게 우리를 속여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진출처: <로열 오페라 하우스> www.roh.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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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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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앙ㅋ
2014.07.06
오페라보다는 발레의 몸짓이 더좋아요.
rostw
2013.04.23
did826
201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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