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를린의 하정우, 현실에서는 난민 - 욤비 토나 『내 이름은 욤비』
요즘 하정우와 한석규, 전지현 등이 출연한 영화 「베를린」이 화제다. 영화에서 하정우는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다, 모국에 배신당하며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에게 쫓긴다. 세세한 면에서는 다르겠지만, 욤비 토나 씨의 인생은 「베를린」에서의 하정우와 비슷하다. 콩고 공화국 출신인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이라 할 수 있는 콩고비밀정보국(ANR) 요원으로 일한다.
글ㆍ사진 손민규(인문 PD)
201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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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의 「하정우」, 현실이라면 난민 신청했을 터

 

2월 1일 금요일,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홀에서 욤비 토나 씨와 박진숙 씨가 독자와 만났다. 욤비 토나 씨와 박진숙 씨는 최근에  『내 이름은 욤비』라는 책을 함께 썼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욤비 씨의 인생을 담았다.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욤비 씨의 이야기를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박진숙 씨가 한국어로 옮겼다. 박진숙 씨는 이주여성의 자립을 추구하는 NGO 단체 에코팜므를 이끌고 있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하정우와 한석규, 전지현 등이 출연한 영화 「베를린」이 화제다. 영화에서 하정우는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다, 모국에 배신당하며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에게 쫓긴다. 세세한 면에서는 다르겠지만, 욤비 토나 씨의 인생은 「베를린」에서의 하정우와 비슷하다. 콩고 공화국 출신인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이라 할 수 있는 콩고비밀정보국(ANR) 요원으로 일한다.

 

콩고 공화국은 한국과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식민지 시기를 거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립했다. 기쁨도 잠시, 주변국과 분쟁에 휘말린다. 아프리카 국가 중 많은 나라가 독립한 뒤 내전을 겪었다.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어진 국경선 탓도 있다. 르완다 내전도 그중 하나다. 수적으로는 소수이나 지배층인 투치족과 다수이나 피지배계층인 후투족 사이에 벌어진 르완다 내전은 주변국에도 영향을 끼친다.

 

르완다 내전에서 많은 난민이 발생하며, 이중 일부가 콩고 공화국으로 이동한다. 후투족 출신의 구 르완다 정부군은 콩고 공화국 내 반군과 합세하여 콩고 공화국 내전에 개입했다. 콩고 공화국은 모부뚜 대통령의 오랜 독재를 막 끝낸 뒤였다. 자신이 집권하게 도와준 대가로 리스 까빌라 대통령은 르완다 출신 인사를 대거 요직에 앉혔다. 이런 와중에 리스 까발라 대통령은 임기 중 살해되고, 콩고 공화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혼돈으로 빠져든다.

 

요원으로 활동하던 욤비 씨는 이런 시기에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겉으로 정부를 반대하는 반군이 실제로는 정부와 모종의 협상을 벌였고, 이는 콩고 공화국의 앞으로 존망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집권 정당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내용이었다. 사실대로 상부에 보고한다면 위험에 처하리라 예상했지만, 그는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한다. 이 사건으로 욤비 씨는 체포되지만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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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난민 처우에 관해서는 후진국

 

중국을 거쳐 그가 도착한 곳은 한국. 콩고 공화국의 감시로부터 멀어지기는 했지만 한국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민 처우에 관해서는 후진국인 이곳에서 난민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다.

 

1992년 '난민협약'을 비준한 이래, 한국 정부에서 난민 신청자 수 대비 난민 인정비율은 10%도 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난민을 바라보는 인식도 문제다. 한국에서 난민은 빈곤, 기아 등의 단어와 연결된다. 즉, 난민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인식. 실제로 난민이 되는 경우는 훨씬 복잡하다. 정치나 종교적인 문제로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욤비 씨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날 강연회의 플래카드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난민은 불쌍한 사람도,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닙니다. 난민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난민을 인정받기까지 걸린 세월은 무려 6년.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난민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몰래 일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처지. 월급을 못 받을 때도 있었고, 손찌검을 당할 때도 있었다. 차라리 난민 인정을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는 캐나다와 같은 곳으로 갈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욤비 씨는 버텼다. 자기가 무너지면 다른 사람이 한국에서 난민 인정받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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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이 자립하도록 도와달라

 

독자와 만난 자리에서 욤비 씨는 책에 적힌 내용을 영어로 이야기했고 박진숙 씨가 한국어로 통역했다. 강연회에서 박진숙 씨는 그가 운이 좋았던 사례였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수차례 하기도 했고, 결국 난민으로 인정받은 덕택이다. 욤비 씨도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나처럼 운 좋은 난민이 다시없기를 바란다. 나처럼 운이 좋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이 한국 사회가 바뀌길 바라기 때문이다. 후원금 몇 푼 주는 것보다 난민 스스로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회가 더 건강하고 유연한 사회라고 믿는다. 그리고 난민 역시 그런 사회에서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늘 내 경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난민들이 스스로를 돕도록 도와주세요!” - 307쪽

 

실제로 이날 행사에서도 그는 독자에게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당부했다. 물질적인 원조도 좋지만, 자립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더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국은 난민이 발생하던 곳에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곳으로 변했다. 한국전쟁 때, 난민이 많이 생겼다. 지금은 많은 곳에서 난민으로 대접받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대지진 이후, 다른 나라로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이른바 환경 난민이다. 이렇듯 난민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국제 사회가 난민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할 때, 지구 공동체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회도 이제는 난민을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볼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할 때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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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박진숙 공저 | 이후
‘난민’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렇다. 구호물품을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앙상하게 뼈마디만 남은 아이와 그 아이를 안고 눈물 흘리는 어머니, 얼기설기 만들어진 텐트 아래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젊은이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이미지에 갇혀 우리는 우리 곁에 살아가는 난민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무관심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야 하는 한국의 난민, 이 책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욤비토나 #내이름은욤비 #난민
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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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꼬

2013.05.30

이런 책 너무 좋습니다ㅜㅜ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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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2013.02.28

아니오 라고.말할수 있는.사람...
저 역시.난민이 되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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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eau2013

2013.02.18

욤비씨에 스토리 감동적이였구요.한국에도 난민이 있다는생소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우리들 주변에 있는 분들을 다시돌아보는시간이였답니다. 욤비의 가정가운데 더 절실한문제들이 해결되어지길 바랍니다.특히 아내분에 우울증이 가족의 따뜻한 사랑으로 녹여질수있길바랍니다
그리고 이가정에 따뜻한 식사한번 나누고싶은데 연락주시면 고맙겠네요
crebeau20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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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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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비 토나

1967년 10월 15일, 콩고민주공화국 반둔두 주 키토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배고플 땐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외로울 땐 동물들 뒤를 쫓으며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대학을 가는 게 특권인 나라에서 킨샤사 국립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콩고비밀정보국(ANR)에서 일했다. 2002년, 정보국 작전을 수행하다가 조셉 카빌라 정권의 비리를 알아채고 이 정보를 최대 야당인 〈민주사회진보연합〉에 전달하려다 발각돼 체포됐다. 국가 기밀 유출죄로 비밀 감옥에 수감돼 갖은 옥고를 치르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한국에 들어왔고 난민 신청을 했다. 5년 동안 인쇄 공장, 사료 공장, 직물 공장을 전전하며 일했다. 탈장으로 쓰러지고, 팔이 기계에 끼이고, 숱하게 월급을 떼였다. 운 좋게 국내 난민 지원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게 돼 공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난민 신청을 했지만 불허 처분을 받았고, 이의 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 결국 행정 소송까지 가서 겨우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한국에 온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서야 오두막에서 피난민처럼 살아가던 가족들을 한국에 불러올 수 있었다. 너무 어렸을 때 헤어진 아이들은 아빠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성공회대학교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지금은 인천에 있는 〈UIC시카고병원〉에서 일을 한다. 틈틈이 한국 사회에 있는 국제 난민 문제와 콩고 문제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는 〈아시아태평양 난민권리네트워크(APRN)〉 국제회의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어드바이저’로 선출됐다. 얼마 전, 막내 딸 아스트리드가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