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도 절망도 없는 시대. 어떻게 우정을, 어떻게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나에게 불의 전차를>
우정과 사랑은 오늘 이 순간에 영원을 기약하게 되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다시 보고 싶고,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고, 계산이 정확하지 않은 선의도 기꺼이 베풀고 싶은 이 우정의 대상은 우리가 내일도 만나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도 함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20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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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절망, 헛된 기대와 욕망이 들끓던 일제 말기
배경은 1920년대, 조선의 한 지방 도시. 공연이 시작되면, 극장 입구에서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스무 명의 남사당패가 흥겹게 걸어 나온다. 꽹과리, 장구, 태평소 등 전통 악기 연주와 더불어 꼬리를 길게 뺀 상모를 힘차게 돌리며 신명 난 놀이가 한판 벌어진다. 일본 강점기, 수시로 사람들이 헌병에 끌려가고,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독립운동이 벌어지던 삼엄한 그 시절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기에 그곳에도 놀이가 있고 웃음이 있었다.
다만 시절이 좋지 않았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함부로 짓밟았고, 조선인은 일본인을 미워했다. 이런 때에 한국 문화와 전통에 애착을 둔 일본인 나오키(쿠사나기 츠요시 역)라든지, 그런 일본인에게 우정을 느끼고 의형제를 맺는 순우(차승원 역)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늘 일본인-조선인, 우리 편-나쁜 놈,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로 구성되었던 이 당시 세계에서 연출가 정의신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만남과 관계를 순우와 나오키를 통해 보여준다.
그곳에는 인생 역전을 꿈꾸고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몰래 마약 유통, 양귀비 재배 사업 등 불법행위를 하며 조마조마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본인이 있었다. 굶주림과 폭력에 죽어가는 조선인들의 슬픔과 절망과 더불어 한반도는 일본인들의 헛된 기대와 욕망이 득실거렸다. 그 가운데 자국민이 저지르는 만행에 상처받고, 꿈도 희망도 없이 세상만사에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키요히코(카가와 테루유키 역)같은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연극
떠돌이 유랑객 남사당패 순우는 할 줄 아는 거라곤 남사당 놀이뿐이다. 그 놀이로 하루 벌어 하루 잠잘 곳을 찾아 떠나는데, 오늘 하루를 마쳐도 내일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삶이다. 조선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나오키는 늘 정의감에 넘쳐 잘못된 일에 분노를 감추지 않지만, 언제나 거기까지다. 그의 분노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키요히코는 조선인, 일본인 부모에게 태어나 버림받고,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상처받은 삶을 살아왔다.
그야말로 꿈과 희망이 없는 그런 시대인데 이 시대의 분위기가, 사람들의 절망이 낯설지만은 않다. 일제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만 제외한다면, 하루 벌이 삶의 고단함, 사회 정치적 무능감, 소외감은 이 시대의 것과 맞닿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정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연출가는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효한 그 질문을 던진다. 2013년의 관객으로 무려 백 년 전 이야기를 보는데도 그들의 감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함께 웃고 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우정이라든지 신뢰는 내일이 전제되었을 때야 발생할 수 있는 감정이다. 만약 한번 보고 말 사람이라면, 스쳐 지나가고 말 사람 사이에서 우정과 신뢰 같은 건 무용지물일 테니까. 우정과 사랑은 오늘 이 순간에 영원을 기약하게 되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다시 보고 싶고,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고, 계산이 정확하지 않은 선의도 기꺼이 베풀고 싶은 이 우정의 대상은 우리가 내일도 만나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도 함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꿈과 희망도 없는 시대에는 우정도 사랑도 이루기 어려운 법. 우정과 사랑은 꿈과 희망, 미래와 무척이나 닮아있는 단어라는 것을 이 연극을 보여준다. 엄혹한 시대 속에서, 자신의 신분으로 가려진, 돈과 욕망으로 숨겨진 서로의 맨 얼굴을 확인하고, 이들 사이에 우정이 사랑이 피어날 때, 희망이라는 말 없이도, 꿈이라는 말 없이도 설레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출신학교, 다니는 회사, 사는 곳, 열등감, 질투, 이기고 싶은, 혹은 닮고 싶은 수만가지 욕망에 덧씌워진 지금 우리의 얼굴에서 그 사람 본연의 표정, 본연의 목소리를 발견할 때에만 우정이, 사랑이 가능하다.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희망이나 꿈 같은 것이 사회의 거대한 구조가 바뀌고 개혁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우리 둘 사이에, 이 집단과 저 집단 사이에,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진실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걸, 그건 생각보다 무척이나 큰 힘을 가진 것이라는 걸 이 연극은 3시간 반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을 설득한다.
남사당패 놀이, 줄타기, 배우들의 열연, 볼거리 풍부한 무대
<나에게 불의 전차를>을 연출한 정의신 감독은 재일교포 출신이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야끼니꾸 드래곤>부터 지난해 남산예술극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던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의 흐르고>까지 그의 작품에는 재일교포로 경험했던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과 아픔을 꾸준히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매번 작품 속에 절름발이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전히 나란히 똑바로 걷지 못하는 한일관계나 역사 문제를 환기하는 듯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공연은 한일 양국의 스텝과 배우들이 힘을 합쳐 제작되었고, 작년 11월부터 일본의 대극장에서 40여 회 상연되었다. 매번 1,500석의 객석이 매진되었고, 매회 기립박수가 나올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사람들의 근원적인 아픔과 고민의 지점에 닿아있는 그의 이야기가 무려 1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관객들에게 가 닿은 것이다. 물론 공연 내내 흥겹게 펼쳐지는 남사당패의 놀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줄타기, 한일 양국 배우들의 매력적인 연기 역시 이 공연의 주요한 성공 요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국립극장에서 짧은 시간 동안 상연된다. 아마 화려한 출연진만으로도 기대하고 있는 관객이 많을 터. 그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무대다. 무엇보다 극중 인물들 순우, 나오키, 마츠시로, 키요히코와 특별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배경은 1920년대, 조선의 한 지방 도시. 공연이 시작되면, 극장 입구에서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스무 명의 남사당패가 흥겹게 걸어 나온다. 꽹과리, 장구, 태평소 등 전통 악기 연주와 더불어 꼬리를 길게 뺀 상모를 힘차게 돌리며 신명 난 놀이가 한판 벌어진다. 일본 강점기, 수시로 사람들이 헌병에 끌려가고,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독립운동이 벌어지던 삼엄한 그 시절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기에 그곳에도 놀이가 있고 웃음이 있었다.
다만 시절이 좋지 않았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함부로 짓밟았고, 조선인은 일본인을 미워했다. 이런 때에 한국 문화와 전통에 애착을 둔 일본인 나오키(쿠사나기 츠요시 역)라든지, 그런 일본인에게 우정을 느끼고 의형제를 맺는 순우(차승원 역)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늘 일본인-조선인, 우리 편-나쁜 놈,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로 구성되었던 이 당시 세계에서 연출가 정의신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만남과 관계를 순우와 나오키를 통해 보여준다.
그곳에는 인생 역전을 꿈꾸고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몰래 마약 유통, 양귀비 재배 사업 등 불법행위를 하며 조마조마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본인이 있었다. 굶주림과 폭력에 죽어가는 조선인들의 슬픔과 절망과 더불어 한반도는 일본인들의 헛된 기대와 욕망이 득실거렸다. 그 가운데 자국민이 저지르는 만행에 상처받고, 꿈도 희망도 없이 세상만사에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키요히코(카가와 테루유키 역)같은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연극
떠돌이 유랑객 남사당패 순우는 할 줄 아는 거라곤 남사당 놀이뿐이다. 그 놀이로 하루 벌어 하루 잠잘 곳을 찾아 떠나는데, 오늘 하루를 마쳐도 내일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삶이다. 조선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나오키는 늘 정의감에 넘쳐 잘못된 일에 분노를 감추지 않지만, 언제나 거기까지다. 그의 분노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키요히코는 조선인, 일본인 부모에게 태어나 버림받고,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상처받은 삶을 살아왔다.
그야말로 꿈과 희망이 없는 그런 시대인데 이 시대의 분위기가, 사람들의 절망이 낯설지만은 않다. 일제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만 제외한다면, 하루 벌이 삶의 고단함, 사회 정치적 무능감, 소외감은 이 시대의 것과 맞닿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정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연출가는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효한 그 질문을 던진다. 2013년의 관객으로 무려 백 년 전 이야기를 보는데도 그들의 감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함께 웃고 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우정이라든지 신뢰는 내일이 전제되었을 때야 발생할 수 있는 감정이다. 만약 한번 보고 말 사람이라면, 스쳐 지나가고 말 사람 사이에서 우정과 신뢰 같은 건 무용지물일 테니까. 우정과 사랑은 오늘 이 순간에 영원을 기약하게 되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다시 보고 싶고,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고, 계산이 정확하지 않은 선의도 기꺼이 베풀고 싶은 이 우정의 대상은 우리가 내일도 만나고,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도 함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꿈과 희망도 없는 시대에는 우정도 사랑도 이루기 어려운 법. 우정과 사랑은 꿈과 희망, 미래와 무척이나 닮아있는 단어라는 것을 이 연극을 보여준다. 엄혹한 시대 속에서, 자신의 신분으로 가려진, 돈과 욕망으로 숨겨진 서로의 맨 얼굴을 확인하고, 이들 사이에 우정이 사랑이 피어날 때, 희망이라는 말 없이도, 꿈이라는 말 없이도 설레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출신학교, 다니는 회사, 사는 곳, 열등감, 질투, 이기고 싶은, 혹은 닮고 싶은 수만가지 욕망에 덧씌워진 지금 우리의 얼굴에서 그 사람 본연의 표정, 본연의 목소리를 발견할 때에만 우정이, 사랑이 가능하다.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희망이나 꿈 같은 것이 사회의 거대한 구조가 바뀌고 개혁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우리 둘 사이에, 이 집단과 저 집단 사이에,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진실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걸, 그건 생각보다 무척이나 큰 힘을 가진 것이라는 걸 이 연극은 3시간 반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을 설득한다.
남사당패 놀이, 줄타기, 배우들의 열연, 볼거리 풍부한 무대
<나에게 불의 전차를>을 연출한 정의신 감독은 재일교포 출신이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야끼니꾸 드래곤>부터 지난해 남산예술극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던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의 흐르고>까지 그의 작품에는 재일교포로 경험했던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과 아픔을 꾸준히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매번 작품 속에 절름발이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전히 나란히 똑바로 걷지 못하는 한일관계나 역사 문제를 환기하는 듯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공연은 한일 양국의 스텝과 배우들이 힘을 합쳐 제작되었고, 작년 11월부터 일본의 대극장에서 40여 회 상연되었다. 매번 1,500석의 객석이 매진되었고, 매회 기립박수가 나올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사람들의 근원적인 아픔과 고민의 지점에 닿아있는 그의 이야기가 무려 1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관객들에게 가 닿은 것이다. 물론 공연 내내 흥겹게 펼쳐지는 남사당패의 놀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줄타기, 한일 양국 배우들의 매력적인 연기 역시 이 공연의 주요한 성공 요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국립극장에서 짧은 시간 동안 상연된다. 아마 화려한 출연진만으로도 기대하고 있는 관객이 많을 터. 그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무대다. 무엇보다 극중 인물들 순우, 나오키, 마츠시로, 키요히코와 특별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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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댓글
필자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브루스
2013.02.28
진짜 보고싶네요 ㅠ
동네작가
2013.02.21
sh8509
201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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