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주 “‘라라라’는 해수욕장에서 만난 여학생을 위해 만든 노래”
청바지에 통기타가 대학 문화의 정점이자 로망으로 불리는 때가 있었다. 그 중심에는 트윈 폴리오 출신의 윤형주도 있었다. 지난 1월 17일, 예술의 전당 컨퍼런스 홀에서 윤형주의 미니 콘서트가 있었다. 자서전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의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콘서트에는 많은 팬이 찾아왔다. 몇몇 관객은 팬 카페 가입을 권유하는 명함을 만들어 오는 등의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201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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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주의 재기를 도와준 노래 ‘바보’
“저는 앞으로도 할 일이 창창합니다. 다 산 사람처럼 에세이를 쓰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쓰지 않으면 평생 쓰지 않을 것 같아서 썼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참 두려운 일입니다. 세시봉 콘서트가 아니라 제 이름을 건 콘서트도 두렵습니다. 그래도 사랑 받는 다는 것. 기억되고 있다는 건 축복 받은 일입니다.”
콘서트의 첫 곡은 ‘비의 나그네’였다. ‘비의 나그네’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곡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라디오에서 틀지 못한다고 한다. 윤형주는 노래와 관련된 일화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비가 와도 너무 많이 오던 날. 무슨 무슨 주의보란 주의보는 다 발령되는 날. 당시 동아방송에서 라디오 DJ를 맡고 있던 이장희가 ‘비의 나그네’를 틀었다.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주룩주룩 내려라 끝없이 내려라 윤형주-「비의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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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주의 노래는 친숙하다.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만든 노래가 아닌 예전부터 흘러내려 오는 노래로 착각하곤 한다. 대표적인 노래가 '라라라'다. 우리에게는 ‘조개 껍질 묶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라라라’는 윤형주가 대천 해수욕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다. 자리를 떠나려는 여학생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비록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지만, 윤형주가 부르는 ‘라라라’는 경쾌했다. 관객석에서는 자연스럽게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 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지 않네 윤형주-「라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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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를 두고 갈까 다신 못 만날까 내가 그렇게도 좋아 이 세상이 모두 내 것 같다더니 윤형주-「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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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주의 별명은 ‘조영남 잡는 사람’
윤형주하면 트윈 폴리오가 떠오르고, 트윈 폴리오 하면 윤형주의 파트너 송창식이 떠오른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트윈 폴리오의 재결합을 원한다. 아쉽게도 윤형주의 말을 들어보면 트윈 폴리오의 재결합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송창식과의 재결합을 원하지만 어렵습니다. 우선 둘이 생각하는 연습의 개념이 다릅니다. 송창식은 새벽 5시까지 연습을 하고 6시에 잠에 듭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일어나죠.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전에 돕니다. 구들장이 패일 정도로 돕니다. 아마 오늘도 돌았을 겁니다. 송창식은 음악 속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정상적이지는 않잖아요? 제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럽니다. 송창식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송창식하고 45년 동안 친구를 하고 있는 윤형주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윤형주의 괴짜 친구 중에는 이장희도 있다. 언젠가 윤형주가 이장희의 초대로 미국을 갔을 때였다. 미국을 너무 잘 아는 이장희는 윤형주를 색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라스베거스의 사막 어딘가에 있는 온천이었다. 본래 인디언들이 목욕을 하는 장소였는데, 그곳에서 윤형주와 이장희는 알몸으로 함께 물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런 이장희가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곳은 울릉도다. 이장희는 울릉도에 연못을 만들어 놓고 물고기를 낚는 재미로 산다고 한다.
MBC <놀러와>에서 한 세시봉 특집 이후 윤형주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바로 조영남 잡는 사람이다. 세시봉 콘서트에서 윤형주가 조용히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왜 조영남을 공격하지 않냐며 아쉬움을 표할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윤형주는 조영남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영남의 출판 기념 콘서트에 자발적으로 가서 백 코러스를 해주는 열의도 보였다. 다만 자신의 출판 기념 콘서트에 조영남이 오지 않았다며 귀엽게 툴툴대기도 했다.
윤동주는 신앙 시인이다
윤형주의 아버지 윤영춘은 가족보다는 자신의 제자에게 더욱 따뜻한 사람이었다. 제자를 챙기느라 바빠 가족에게는 변변한 유산조차 남겨주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받은 윤형주가 받은 유일한 유산은 책이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2만 5천 여권의 장서는 윤형주에게 피와 살이 되었다.
윤영춘은 뛰어난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런 윤영춘이 아꼈던 시인은 자신의 조카였던 윤동주였다. 자신이 학비를 내어 윤동주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윤영춘은 윤동주의 시를 사랑했고 시인으로 존경했다. 윤동주가 일본에서 죽었을 때 그 시신을 수습한 것도 윤영춘이었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민족 시인, 투쟁 시인, 저항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형주는 윤동주를 신앙 시인으로 바라본다. 윤형주의 말에 따르면 윤동주는 역사를 성경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사람이며, 세상 모든 일을 성경에 따라서 행동하려 한 사람이다. 그래서였을까? 윤동주는 사소한 일에도 부끄러움을 가지는 인물이었다. 윤형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를 기타 반주를 곁들여 낭송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별 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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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늘은 무슨 빛이었길래 당신의 바람은 어디로 불었길래 당신의 별들은 무엇을 말했길래 당신의 詩들이 이토록 숨을 쉬나요 윤형주-「윤동주님께 바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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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젊은 그대에게
콘서트는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윤형주는 말했다.
“올해가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입니다. 저는 가장 싱싱한 젊은이입니다.”
절대적인 숫자로 본다면 윤형주도, 이날 콘서트를 찾아온 관객들도 젊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젊음이란 객관적인 숫자가 아니라 주관적인 마음 가짐에 달린 것은 아닐까?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기에 윤형주와 그의 팬들은 여전히 젊다. 윤형주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밤 하늘의 별 만큼이나 수 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테요 윤형주-「우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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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 윤형주 저 | 삼인
가수가 자본으로 만들어 낸 ‘기획 상품’이 아니라 가수 스스로 주체가 되어 대중과 감수성으로 소통하고 교감하며 이야기하듯 노래를 만들고, 함께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60~70년대 통기타와 포크송으로 발현한 청년 문화를 말할 때 그 대표적인 선두주자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트윈 폴리오’다. 이 책은 트윈 폴리오의 한 축이자 한평생 기타를 놓아본 적 없이 살아온 윤형주의 이야기다. 책에는 방송인으로, 가수로 밟아온 길과, 그 목소리처럼 맑아 보이기만 하던 그의 인생에 드리워졌던 힘겨운 고비, 그리고 속앓이를 겪고서 다시금 환한 삶을 펼쳐 나간 과정이 ‘열 가지 풍경’으로 그려진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8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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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준민
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있는
뭐꼬
2013.05.30
djwon23
2013.02.02
노래 소리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십 년 뒤 나를 생각하면 감히 비교불가일 듯하다.
내또래 팬클럽? 회원들의 모습은 신기하기 조차했다. 수십 년을 함께하면서 그들이 같이 그린 그림이 명화가 아니고 무엇일까!
sind1318
201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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