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연애할 수 있는 여자
실연하고 머리를 바꾸고, 갑자기 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가 당신을 사랑했던 모습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게 사랑받는 여자의 수순이다.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다는 건 과거를 부정하는 행위로 읽혀지기 쉽다. 안쓰러워 보인다. 바꾸려면 진화하고, 유지하려면 도태되지 말 것. 우연히 신호등에 서 있는 당신을 알아보고 그가 다시 가슴이 뛸 수 있어야 한다. 헤어져서도 누군가의 심장을 움찔하게 하는 여자, 팜므파탈의 새로운 정의다.
201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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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성공한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
그녀는 내 취재원이었다. 한 번의 취재 후에 남산에 위치한 호텔의 그랜드 볼룸에서 열린 어떤 파티에서 다시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일상적이고 뻔한 인터뷰용 대화가 오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파티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알던 천진하고 고운 여자가 아니었다. 길고 검은 선 하나가 물결치듯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큰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와 군살 없는 몸매, 옆으로 크고 긴 눈과 까만 눈동자는 이미 아름다웠지만, 아니 그보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녀가 가진 독특한 분위기에 단박에 매료됐다. 이 세계에선 유리된 듯한 식물성이었다. 검은 생머리를 하나로 가지런히 묶고 메이크업도 별로 하지 않은 검은 미니드레스 차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웃음은 크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분명했다. 배우가 아니었는데 그 자리에 모인 어떤 톱배우보다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엔 결기가 넘쳤다. 검은 비단이 가진 투명함이랄까. 그녀에게선 쉽지 않은 우아함이 휘돌았다.
이런 여자라면 남자를 첫 눈엔 아니어도 일단 눈에 들면 오래도록 결박하지 않을까. 색기가 넘치거나 선명하고 쨍한 매력으로 상대를 휘감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무감각하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화악 감싸버리는 장막처럼 도저한 아름다움이라니. 나로선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매력이었다. 이런 여자에겐 나 같은 스타일은 게임이 안 된다. 깊고 검은데 습하지 않은 온기. 여자에게 남자가 기대하는 낮과 밤의 모든 것이라고 나는 혼잣말을 했었다.
상상해보자. 이런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일반적으로 남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위치에 올라 있으면서 속물스럽지 않은 남자라야 하겠다. 고유한 취향을 갖고 있어서 물건이며 사람을 대할 때 몸에 밴 습성이 슬몃 엿보이는 남자. 이를테면 조용하면서 빠른, 경박하지 않은 기민함 같은 것. 갖지 않은 것에 안달하지는 않지만 갖고 싶은 것은 욕망하는 남자, 그렇게 성공하게 된 남자.
대한민국의 성공한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이렇다. 또래의 기준을 상회하는 사회적 지위, (아내와 아이를 비롯해) 균형감을 갖춘 가족들, 상대를 포획하는 노련한 말솜씨와 매력적인 미소. 하지만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퇴폐적 지성미다. 그게 아쉬웠다. 다정한 마초, 믿음직한 선동자, 물질적 여유가 주는 섹시함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완벽한 숨을 불어넣는 것이 ‘텅 빈 듯 가득찬 우수’ 바꿔 말하면 ‘정복욕을 부르는 우아한 남자의 면모’다.
이렇게, 팜므파탈의 매력을 가진 여자와 견고한 인생의 룰대로 살아온 남자가 만나 파도처럼 부딪히고, 거품처럼 산화한 이야기가 있다. 『데미지』다.
『데미지』는 다 가진 남자와 다 욕망하는 여자가 만난 욕망의 이중주를 그린다. 영화가 먼저였고 이를 바탕으로 책이 나왔는데, 책은 영화의 전개를 충실히 따라가면서 되레 영화가 주지 못하는 이차원적 감상으로 독자를 매혹한다. 이런 식이다.
운명적인 사랑의 서막과 파국을 드러내는 『데미지』
오십 줄의 성공한 남자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의사이자 이름 있는 정치가다. 여전한 실력파 정치인을 장인으로 뒀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금발의 아내 잉그리드가 그의 스펙을 드높이고 있다. 아들 마틴은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신문사 정치부에 막 입사했고 대학생 딸 샐리는 어여쁘기가 밖에 내놓기 위태로울 정도다.
이만큼 가진 남자에게 또 다른 욕망을 허락한다면 이 세상에 신은 없는 것이 된다. 온당치 않은 편파다. 그러나 남자는 이전까지 욕망을 추구한 적 없었다. 난데로 살아온 데로 어느새 자리 잡혀진 자신의 지위를 자랑스러워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늘 누군가의 의지대로 살아온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간혹 괴로웠다.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욕망한 것이 이 여자 안나였다.
이전에 몰랐던 독한 향기에 취한 이 남자, 멈추지 않는다. 책에는 ‘그녀의 모든 부분이 내 욕구를 충족시켰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화나서 울컥했다’고 적혀있다. 나는 이 문장이 신랄했다. 지금껏 다 당신이 원해서 가진 거잖아 라고 말하지 못할 결핍, 고독이 응집돼있다. 원하는 것을 가지는 건 어릴 적부터 쉬웠을 텐데, 울거나 땡깡을 부리면 되는데, 집도 잘 살면서 뭐가 어렵다는 거야. 하지만 이 남자는 나 이게 좋아요, 이렇게 살래요 라고 말한 적 없다는 얘기다.
자의식 과잉의 남자는 이래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 남들의 우러름을 받으며 살다가도 한 순간의 도취와 매혹으로 인생 전체를 큰 축으로 좌회전한다. 그것이 나락일지 제 길일지는 본인만 알겠지.
그렇다면 안나는 누구냐. 과연 이런 남자에게 어울리는 여자다. 지성과 미모, 재력은 기본이고 웬만해선 노력해도 안 된다는 서늘하고 습한 기운까지 갖고 있다. 이게 남자를 미치게 한다. 난해한 가족사와 상처를 딛고 일어선 여자답게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상처입은 사람은 위험해요’라며 대놓고 경고한다. 나란 여자, 쉽지 않고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니까 이쯤에서 떨어지시던지, 라는 거다. 건방일까? 아니다. 매사에 진심이고 진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톤 앤 매너는 늘 사려 깊다. 속눈썹하나부터 발톱까지 의도하지 않고 타고나길 섹시하다. 똑딱이로 살아온 엘리트 인생이 이런 여자에게 눈이 뒤집힌다고 치자. 헤어 나올 방책이 당최 무엇이냐.
‘새파란’ 여인을 격랑에 빠트릴 중년 남자라면 그 자신도 물거품으로 산화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뻔한 남자여선 안 되겠지. 뻔한 남자는 결혼한 채 딴 여자를 사랑하는 대목에서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뻔하지 않은 남자는 자기연민을 가장 먼저로 친다. 넘치는 지성이 달큰한 퇴폐를 만나니 어마무시한 폭발력이 생긴다.
‘나는 어쩌다 이리 되었는가, 너는 어쩌다 내게로 왔는가, 오 불쌍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자들, 그러고 보면 참 뻔뻔한 동물이다.
뜨거운 사랑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을 때
보통 영화로 먼저 만난 다음 책을 보면 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상쾌하다. 감정 묘사들이 과하지 않고 적당히 가슴 저리고 뻐근하다. 감격을 위해 자극적인 단어들로 몰아치지 않고 담담하되 섹시하다. 작품을 끌고가는 주체는 남자다. 남자의 위선과 고뇌 없이 영화건 책이건 작품을 이해하기란 어불성설이다. 지구상에 유일한 서정적 섹시미의 소유자 제레미 아이언스가 완벽하게 빙의했다. 그가 누군가. 영화 좀 봤고 취향 좀 키웠다 싶은 대한민국 중년 남자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외국 배우 1순위다. 외모에서 풍기는 지성미는 둘째치고 요가와 불교문화, 아시아에 대한 관심까지 곁들여 심리적으로 친근한 거리감이 우선이다. 근육을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스무살 이상 차이나는 배우들과 격정적인 로맨스를 120% 소화하는 남성성은 흉내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화 <데미지>에 최적화된 배우라 하겠다.
책이 주는 미덕이 상당했지만 유난히 영화에서 더 나를 울렸던 느린 장면이 있다. 명배우가 던지는 연기의 여백 덕분이다. 파국을 겪은 뒤 극중 제레미 아이언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유럽의 시골에 찾아든다. 가게에서 한 덩이의 치즈를 사와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동안 조용히 시간이 흐른다. 장담도 낙담도 하기 이른 오후 네 시. 해는 아직 찬란하다. 부엌 맞은 편 회벽에 안나 즉 줄리엣 비노쉬의 사진을 빔 프로젝트로 띄운다. 독백이 흐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연히 백화점에서 안나를 보았다. 피터와 함께 아이를 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여염집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다를 줄 알았다. 내가 욕망했으니, 남달리 사랑했으니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했다. 인생을 이렇게 뒤흔들 만큼 대단한 여자여야 했다. 그 매력이 쉽게 휘발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야 남은 인생을 살아갈 최소한의 변명거리라도 될 테니까. 지성과 퇴폐가 만나 자초한 파국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한 번도 의지를 꺾어본 적 없는 남자의 자존심은 챙겨야 했으니까.
나는 연애가 끝날 때마다 이 말을 되뇌었다. ‘너(나)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고. 실제로 내가 특별한 존재였다면 이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뜨거운 사랑, 끝까지 지켜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것이 그에겐 다행일까 불행일까. 나는 몰랐으면 나았을 것 같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의 모습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처럼 이기적인 게 없으니까.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니까. 심지어 몸 냄새와 몸짓까지도.
팜므파탈인 줄 알았는데 여염집 아낙의 모습으로 껍질을 벗으면 그녈 연모한 남자의 낯은 홧홧 달아오른다. 한 남자에게 여자는 그저 여자인 채여야 한다. 모습을 바꾸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상대가 기억하는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에 충실했던 자존감을 잃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실연하고 머리를 바꾸고, 갑자기 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가 당신을 사랑했던 모습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게 사랑받는 여자의 수순이다.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다는 건 과거를 부정하는 행위로 읽혀지기 쉽다. 안쓰러워 보인다. 바꾸려면 진화하고, 유지하려면 도태되지 말 것. 우연히 신호등에 서 있는 당신을 알아보고 그가 다시 가슴이 뛸 수 있어야 한다. 헤어져서도 누군가의 심장을 움찔하게 하는 여자, 팜므파탈의 새로운 정의다.
그녀는 내 취재원이었다. 한 번의 취재 후에 남산에 위치한 호텔의 그랜드 볼룸에서 열린 어떤 파티에서 다시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일상적이고 뻔한 인터뷰용 대화가 오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파티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알던 천진하고 고운 여자가 아니었다. 길고 검은 선 하나가 물결치듯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큰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와 군살 없는 몸매, 옆으로 크고 긴 눈과 까만 눈동자는 이미 아름다웠지만, 아니 그보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녀가 가진 독특한 분위기에 단박에 매료됐다. 이 세계에선 유리된 듯한 식물성이었다. 검은 생머리를 하나로 가지런히 묶고 메이크업도 별로 하지 않은 검은 미니드레스 차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웃음은 크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분명했다. 배우가 아니었는데 그 자리에 모인 어떤 톱배우보다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엔 결기가 넘쳤다. 검은 비단이 가진 투명함이랄까. 그녀에게선 쉽지 않은 우아함이 휘돌았다.
이런 여자라면 남자를 첫 눈엔 아니어도 일단 눈에 들면 오래도록 결박하지 않을까. 색기가 넘치거나 선명하고 쨍한 매력으로 상대를 휘감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무감각하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화악 감싸버리는 장막처럼 도저한 아름다움이라니. 나로선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매력이었다. 이런 여자에겐 나 같은 스타일은 게임이 안 된다. 깊고 검은데 습하지 않은 온기. 여자에게 남자가 기대하는 낮과 밤의 모든 것이라고 나는 혼잣말을 했었다.
상상해보자. 이런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일반적으로 남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위치에 올라 있으면서 속물스럽지 않은 남자라야 하겠다. 고유한 취향을 갖고 있어서 물건이며 사람을 대할 때 몸에 밴 습성이 슬몃 엿보이는 남자. 이를테면 조용하면서 빠른, 경박하지 않은 기민함 같은 것. 갖지 않은 것에 안달하지는 않지만 갖고 싶은 것은 욕망하는 남자, 그렇게 성공하게 된 남자.
대한민국의 성공한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이렇다. 또래의 기준을 상회하는 사회적 지위, (아내와 아이를 비롯해) 균형감을 갖춘 가족들, 상대를 포획하는 노련한 말솜씨와 매력적인 미소. 하지만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퇴폐적 지성미다. 그게 아쉬웠다. 다정한 마초, 믿음직한 선동자, 물질적 여유가 주는 섹시함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완벽한 숨을 불어넣는 것이 ‘텅 빈 듯 가득찬 우수’ 바꿔 말하면 ‘정복욕을 부르는 우아한 남자의 면모’다.
이렇게, 팜므파탈의 매력을 가진 여자와 견고한 인생의 룰대로 살아온 남자가 만나 파도처럼 부딪히고, 거품처럼 산화한 이야기가 있다. 『데미지』다.
『데미지』는 다 가진 남자와 다 욕망하는 여자가 만난 욕망의 이중주를 그린다. 영화가 먼저였고 이를 바탕으로 책이 나왔는데, 책은 영화의 전개를 충실히 따라가면서 되레 영화가 주지 못하는 이차원적 감상으로 독자를 매혹한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30년이나 같이 산 아내를 속일 수 있는 눈빛과 3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그렇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아내. 우리의 습관 같은 몸짓은 잘 아는 옛날 노래처럼 쾌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자 아무 것도 아닌 마지막 떨림에 무릎 꿇으면서 나는 알았다. 잉그리드는 싸우는 줄도 모르는 전투에서 마지막 패배를 거두었음을. 그리고 싸운 적조차 없는 안나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 ||
운명적인 사랑의 서막과 파국을 드러내는 『데미지』
오십 줄의 성공한 남자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의사이자 이름 있는 정치가다. 여전한 실력파 정치인을 장인으로 뒀고, 아름답고 교양 있는 금발의 아내 잉그리드가 그의 스펙을 드높이고 있다. 아들 마틴은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신문사 정치부에 막 입사했고 대학생 딸 샐리는 어여쁘기가 밖에 내놓기 위태로울 정도다.
이만큼 가진 남자에게 또 다른 욕망을 허락한다면 이 세상에 신은 없는 것이 된다. 온당치 않은 편파다. 그러나 남자는 이전까지 욕망을 추구한 적 없었다. 난데로 살아온 데로 어느새 자리 잡혀진 자신의 지위를 자랑스러워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늘 누군가의 의지대로 살아온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간혹 괴로웠다.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욕망한 것이 이 여자 안나였다.
이전에 몰랐던 독한 향기에 취한 이 남자, 멈추지 않는다. 책에는 ‘그녀의 모든 부분이 내 욕구를 충족시켰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화나서 울컥했다’고 적혀있다. 나는 이 문장이 신랄했다. 지금껏 다 당신이 원해서 가진 거잖아 라고 말하지 못할 결핍, 고독이 응집돼있다. 원하는 것을 가지는 건 어릴 적부터 쉬웠을 텐데, 울거나 땡깡을 부리면 되는데, 집도 잘 살면서 뭐가 어렵다는 거야. 하지만 이 남자는 나 이게 좋아요, 이렇게 살래요 라고 말한 적 없다는 얘기다.
자의식 과잉의 남자는 이래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 남들의 우러름을 받으며 살다가도 한 순간의 도취와 매혹으로 인생 전체를 큰 축으로 좌회전한다. 그것이 나락일지 제 길일지는 본인만 알겠지.
그렇다면 안나는 누구냐. 과연 이런 남자에게 어울리는 여자다. 지성과 미모, 재력은 기본이고 웬만해선 노력해도 안 된다는 서늘하고 습한 기운까지 갖고 있다. 이게 남자를 미치게 한다. 난해한 가족사와 상처를 딛고 일어선 여자답게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상처입은 사람은 위험해요’라며 대놓고 경고한다. 나란 여자, 쉽지 않고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니까 이쯤에서 떨어지시던지, 라는 거다. 건방일까? 아니다. 매사에 진심이고 진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톤 앤 매너는 늘 사려 깊다. 속눈썹하나부터 발톱까지 의도하지 않고 타고나길 섹시하다. 똑딱이로 살아온 엘리트 인생이 이런 여자에게 눈이 뒤집힌다고 치자. 헤어 나올 방책이 당최 무엇이냐.
‘새파란’ 여인을 격랑에 빠트릴 중년 남자라면 그 자신도 물거품으로 산화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뻔한 남자여선 안 되겠지. 뻔한 남자는 결혼한 채 딴 여자를 사랑하는 대목에서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뻔하지 않은 남자는 자기연민을 가장 먼저로 친다. 넘치는 지성이 달큰한 퇴폐를 만나니 어마무시한 폭발력이 생긴다.
‘나는 어쩌다 이리 되었는가, 너는 어쩌다 내게로 왔는가, 오 불쌍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자들, 그러고 보면 참 뻔뻔한 동물이다.
뜨거운 사랑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을 때
보통 영화로 먼저 만난 다음 책을 보면 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상쾌하다. 감정 묘사들이 과하지 않고 적당히 가슴 저리고 뻐근하다. 감격을 위해 자극적인 단어들로 몰아치지 않고 담담하되 섹시하다. 작품을 끌고가는 주체는 남자다. 남자의 위선과 고뇌 없이 영화건 책이건 작품을 이해하기란 어불성설이다. 지구상에 유일한 서정적 섹시미의 소유자 제레미 아이언스가 완벽하게 빙의했다. 그가 누군가. 영화 좀 봤고 취향 좀 키웠다 싶은 대한민국 중년 남자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외국 배우 1순위다. 외모에서 풍기는 지성미는 둘째치고 요가와 불교문화, 아시아에 대한 관심까지 곁들여 심리적으로 친근한 거리감이 우선이다. 근육을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스무살 이상 차이나는 배우들과 격정적인 로맨스를 120% 소화하는 남성성은 흉내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화 <데미지>에 최적화된 배우라 하겠다.
책이 주는 미덕이 상당했지만 유난히 영화에서 더 나를 울렸던 느린 장면이 있다. 명배우가 던지는 연기의 여백 덕분이다. 파국을 겪은 뒤 극중 제레미 아이언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유럽의 시골에 찾아든다. 가게에서 한 덩이의 치즈를 사와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동안 조용히 시간이 흐른다. 장담도 낙담도 하기 이른 오후 네 시. 해는 아직 찬란하다. 부엌 맞은 편 회벽에 안나 즉 줄리엣 비노쉬의 사진을 빔 프로젝트로 띄운다. 독백이 흐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연히 백화점에서 안나를 보았다. 피터와 함께 아이를 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여염집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다를 줄 알았다. 내가 욕망했으니, 남달리 사랑했으니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했다. 인생을 이렇게 뒤흔들 만큼 대단한 여자여야 했다. 그 매력이 쉽게 휘발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야 남은 인생을 살아갈 최소한의 변명거리라도 될 테니까. 지성과 퇴폐가 만나 자초한 파국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한 번도 의지를 꺾어본 적 없는 남자의 자존심은 챙겨야 했으니까.
나는 연애가 끝날 때마다 이 말을 되뇌었다. ‘너(나)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고. 실제로 내가 특별한 존재였다면 이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뜨거운 사랑, 끝까지 지켜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것이 그에겐 다행일까 불행일까. 나는 몰랐으면 나았을 것 같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의 모습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처럼 이기적인 게 없으니까.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니까. 심지어 몸 냄새와 몸짓까지도.
팜므파탈인 줄 알았는데 여염집 아낙의 모습으로 껍질을 벗으면 그녈 연모한 남자의 낯은 홧홧 달아오른다. 한 남자에게 여자는 그저 여자인 채여야 한다. 모습을 바꾸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상대가 기억하는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에 충실했던 자존감을 잃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실연하고 머리를 바꾸고, 갑자기 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가 당신을 사랑했던 모습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게 사랑받는 여자의 수순이다.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다는 건 과거를 부정하는 행위로 읽혀지기 쉽다. 안쓰러워 보인다. 바꾸려면 진화하고, 유지하려면 도태되지 말 것. 우연히 신호등에 서 있는 당신을 알아보고 그가 다시 가슴이 뛸 수 있어야 한다. 헤어져서도 누군가의 심장을 움찔하게 하는 여자, 팜므파탈의 새로운 정의다.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몇 가지 tip_ 영상이 먼저여서 좋은 점은 책을 읽으면서 줄리엣 비노시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벽에 두 팔을 붙인 채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는 점. 영상과 활자가 쌍생하는 좋은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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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인생 충전기 안은영 저 | 해냄
베스트셀러 『여자생활백서』를 통해 40만 독자들에게 일과 사랑에 관한 멘토로 활동해온 안은영 작가가 신작 『여자 인생 충전기』를 내놓는다. 18년이라는 오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작가 스스로도 충전의 시간을 보내며 써내려간 이 책 속에는 "뭘 하기보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성장과 치유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 찾기'를 해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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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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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은영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큼발랄한 조언서 『여자생활백서』로 40만 독자를 사로잡으며 2030 여성들의 멘토로 자리잡았다. 남자와 연애에 관한 지침서 『여자생활백서2』, 연애와 결혼의 갈림길에서 좌충우돌하는 이 시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충고와 따듯한 위로를 담은『여자공감』이 있으며, 소설로는 『이지연과 이지연』이 있다.
샨티샨티
2014.05.06
chang0307
2013.03.28
꼭 봐야겠어요 :)
엠제이
201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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