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제일 좋은 부모는 ‘만만한 부모’ 입니다”
『삶은 홀수다』 출간 기념, 독자와의 만남이 열린 11월은 인디언 아라파호 족에게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이다. 김별아 작가는 말한다. 한 사람이 만나 둘이 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살면 새롭고 더 큰 ‘11’이라는 숫자가 되고, 또 다른 홀수를 만들 수 있다. ‘삶은 짝수’라고 주장하고 싶은 커플에게도, 삶은 홀수여야 한다. 혼자(홀수)일 때, 잘 설 수 있는 사람이 둘(짝수)일 때도 잘 설 수 있다.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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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난다. 아들만 덩그러니 내려놓는다. 자전거를 내려 자전거에 타라고 말한다. 아들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한 부모다.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네 인생에 끼어들게 하지 마. 이런 말, 건넨다. “We all love you. Now go out there and make a difference, your mother and I tried. And don't let anybody tell any different.” 도피 중인 반전운동가 부모는 히피처럼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아들은 그런 부모를 어쩔 수 없이 따라야했다. 그러나 어느덧 10대 후반이 된 아들, 부모는 아들을 세상 속으로 방생한다.
나는 그 아들의 미래가 궁금했다. 그러나 불안하진 않았다. 그는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니까. 지난 11월 28일, 김별아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허공에의 질주>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19년 전, 10월의 마지막 날 떠났던 리버 피닉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홀수여도 괜찮아!’ 최근 개봉했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아이>도 겹쳐진다. <늑대아이>는 또 다른 홀수적 삶을 이야기한다. 늑대와 사람 사이에서 늑대로 살기를 선택한 아이, 엄마를 떠난다. ‘헬리콥터 부모’가 판을 치는 지금, <늑대아이>는 동물의 감수성이 본디 홀수임을 거듭 확인한다. 제 몫의 사냥을 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는 것.
부모를 극복하는 것, 홀수의 삶을 위해 필요하다
김별아 작가는 최근 『4천원 인생』을 읽었다. 기자들이 최저임금을 받는 공장, 식당 등에 ‘위장취업’을 하고 쓴 수기다.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전기밥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납땜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공장에 동갑내기가 있었다. 생일잔치 한다고 집에 놀러갔는데, 역시 동갑인 동네 점쟁이도 왔다. 8세에 무당이 됐고, 예쁘고 눈이 말간 친구였다. 그 친구가 나에게, ‘넌 여기 있을 애가 아닌 것 같다’고 하는 거다. 들키는 줄 알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부모가 이혼했고, 집안이 파탄 났다는 엉터리 이야기를 지었다(웃음). 뭘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손으로 하는 일을 하라고 하더라. 미용을 해보라고 하더라. 올해 작가 20주년을 맞았다. 머리를 예쁘게 해줘서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닌지 가끔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그런 기쁨을 줄 수 있는지 늘 고민이다.”
『삶은 홀수다』는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으고, 덧붙였다. 그는 제목을 달면서 자신을 돌이켜보니, 어렸을 때는 외톨이였고, 자폐증적인 면도 있었다. 한 마디로, ‘어두운 아이’였다. 유일한 친구가 책이었고, 열일곱에 문학을 만나면서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졌다. 문학을 알게 됐다는 건, 세상에 홀로 서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성격적으로 아버지를 많이 닮았었는데, 부딪히기도 엄청 부딪혔다.
“딸들은 아버지의 지지가 절대적인 것 같다. 딸이 자기 이름과 목소릴 갖고 사는 데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중요하다. 딸을 옹호하고 지지하는지, 상처를 주는 존재인지에 따라 차이가 드러난다. 부모와의 문제를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 홀수라는 건,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되니, 부모한테 고마운 부분이 있다. 어머니는 내게 감정의 쓰레기통과도 같았다. 학교에서는 나는 학교에선 모범생이었지만, 내 안에서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어머니에겐 폭군으로 군림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허들과 같은 존재다. 너무 높으면 걸려 넘어지기 쉽다. 부모에게 효녀효자들 중에 실은 괴롭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다.”
그는 반항하는 아이들이 건강하다고 강조한다. 통과의례를 잘 거치기 때문이다. 마흔 넘어 회사에서 쫓겨날 지경인데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황하는 사람 부지기수다. 그가 만난 칠십 넘은 독자 중에도 방황하는 분이 있었다고 전한다. 공통점? 착한 아이였다는 것! 그런 많은 경우, 부모는 강한 분들이거나 자식에게 죄책감을 주거나 다른 아이와 비교를 했다. 아이들의 많은 문제는 부모에서 비롯된다.
“제일 좋은 부모는 ‘만만한 부모’다. 내 부모도 나를 꺾지 않았다. 아버지와 여러 번 싸움을 하고 박차고 나왔지만, 내 자리를 부모가 치우지 않았다. 나를 지지했던 거다. 건강한 홀수의 삶을 위해 부모를 극복해야 한다. 각자의 이야기나 상처가 다를 테니, 그건 평생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인간은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 원하는 건 인정받는 것 하나다. 최초의 양육자가 그래서 중요하다. 한 사람이 믿고 지지해주면, 그 사람은 훼손되지 않는다. 그게 대부분 부모인데,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끊임없이 흔들린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옆에 사람이 있어도 외롭다. 친구 속에서, 군중 속에서, 연애하면서도 그렇다.”
글을 쓰는 두 가지 욕망
김별아 작가는 글을 쓰는 두 가지 욕망을 언급한다. 하나는 자백의 욕구. 많은 사람들, 말한다. 죽기 전 내 얘기를 책 한 권으로 써보고 싶다고. 내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 등을 고백하고 싶은 자백의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 다른 하나는 발언의 욕구이자 소통의 욕구이다. 그에겐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구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생겼다. 물론, 그땐 몰랐다. 역사소설을 쓰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좌충우돌한 게 이런 식으로 흔적이 남았음을 느끼고 있다.
“독자들이 왜 역사소설, 즉 과거를 쓰냐고 묻는다. 1991년, 대학 4학년 때 총학생회 간부였다. 열사 추모 집회가 있었는데, 나는 못가고 총학생회실을 지키고 있었다. 저녁에 전화가 왔다. 학교병원에 시신이 들어가는데 받으라고 하더라.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였다. 그것으로 분신정국이 시작됐다. 강경대는 학원자주화 투쟁을 했는데, 백골단(사법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서 사망했다. 시신을 탈취 당할까봐 영안실을 지켰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연쇄적으로 11명이 죽었다. 분신정국이었다. 난리가 났다. 자고 일어나면 영정사진이 하나씩 들어오는데, 23~24살의 나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우리들끼리도 서로 죽을까봐 감시를 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왜 이런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랬다. 당시에는 서로의 영혼을 돌볼 틈이 없었다. 적은 너무 강했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가 없어서, 어루만지는 법을 몰라서, 서로 사고 칠까봐 감시만 했다. 그도 그랬다. 전날 봤던 사람이 투신을 하고 시신으로 돌아오는 나날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뒤 ‘문학이냐, 운동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상태였던 그에게 결정적 계기가 다가왔다.
어느 날 새벽, 자신과 동갑이던 강경대 열사의 누나가 뭔가를 줍고 있는 모습을 봤다. 강경대 생전과 사후 사진이 함께 들어간 유인물을 바닥에서 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도 다시 흩어지지 않을까? 그러면 역사에 어떻게 남고,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내가 느끼는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은 어떻게 될까. 그걸 쓸 수 있는 건 문학이지 않을까.’ 그는 다시 문학으로 갔다. “나는 역사소설을 쓰면서 과거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지나면 역사이겠고, 내가 쓸 수 있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에게 “저항하고 반항하라”
과연 지금 젊음은 어느 자리에 있는 것일까. 그도 요즘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패기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꼰대 같은 얘긴데, 우리 때는 23~24살에 혁명을 할 거라고 여겼다. 지금은 그런 생각은 없고, 스펙을 쌓아 잘 살겠다는 모습을 주로 본다. 무기력증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이 만든 서열주의에 길들여진 까닭이다. 심리학책이 한때 많이 팔렸다. 지금 30대 초반은 조기교육 1세대로, 사교육이 일상화됐었는데, 마음이 가장 약한 세대라고나 할까. 영혼이 허기지니까, 심리학책에 기댔던 거다. 반항해라. 부모와 어른에게 저항해라. 그들이 틀리고 내가 옳아서가 아니다. 허들을 넘을 시도조차 안 하면 세상과, 내 삶과 싸우기 힘들다.”
말이 좋아 기성세대지, 꼰대세대가 ‘멘토링’이랍시고 위로하는 것들, 청춘은 개무시 해야 한다. 시큼한 냄새나 풍기는 세대들의 수작에 넘어가선 안 된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백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 따위 집어치우라고 외쳐야 한다. 아프니카 청춘이고 백번을 흔들리니 머리가 아파 죽겠다고, 그동안 잘 먹고 잘 싸고 다닌 꼰대들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세상이 이리 힘들게 된 것엔 청춘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의아한 것이다. 왜 청춘은 분노하지 않는가. 지금 청춘은 왜 이리 싸가지가 있는가. 돌직구를 던져야 한다.
김별아 작가는 작가 외에 다른 꿈을 안 꿨는데도 등단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른바 ‘코스’를 밟지 않았다. 앞선 세대들이 만든 길을 꼭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먼저 냈다. 졸업 직전, 『신촌블루스』라는 단편 소설집을 내고, 글을 썼다. 권위나 절차를 거부하고 싶었다. 돌직구를 던졌다. 그러나 한 선배 문인이 별아 작가가 ‘독고다이’ 짓 하는 것이 안 돼 보였는지, 작품을 빼앗아 문학상에 제출했고, 그 작품은 수상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리얼리즘은 불신에서 온다. 나는 아무 것, 아무 사람도 안 믿는다. 그래서 실망이라는 걸 하지 않는다. 기대를 안 해서. 문학은 시대와 불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불화해왔다. 10년을 무명작가로 살았는데, 굉장히 힘들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어느 장르나 냉정하게 1%와 99%는 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선 발버둥을 쳐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데,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도 초판을 소화하기 힘들었다. 연봉 이래봐야 200~300만 원이었다.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문학을 포기 않으려고 다른 걸 하면서. 직장이라고 딱 하루 아니, 반나절을 다녔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나갔는데, 점심시간 전에 알았다. 나는 남의 지시를 받을 게 아니라, 내 질서와 속도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나왔다(웃음).”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여성지 프리랜서, 고스트라이터(대필작가)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렇게 10년을 버텼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작가들 중 뛰어난 작가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생활고 등으로 못 견딘 것이다. 루쉰이 그랬다. “반향이 없는 작품을 쓰는 게 얼마나 공허한가.” 확신 없이 글 쓰는 것, 굉장히 힘이 든다. 그렇게 다 떨어져나갔다.
“나는 재주가 없어서 이게 아니면 할 것이 없어서 버텼다. ‘1만 시간의 법칙’이니 뭐니 하는데, 문학도 10년을 버티면 뭐가 되긴 한다. 10년을 계속 쓰니, 이 작가가 뭐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 하고, 10년이 지나면 더 이상 다른 것을 할 수가 없다. 배수진을 치는 거지.”
이때 중요한 것은 욕망의 다이어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남들처럼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가 택한 방법이었다. 청년들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이 돈이 안 된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다. 그는 늘 같은 답을 해준다. 포기하라! 다만 그걸 못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면 하라고 말해준다. 누군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말린다.
“안톤 체홉의 글에도 나온다. 아이가 나오면 글을 쓰게 하지 마라, 작가가 되면 안 된다(웃음). 남들 가지는 가방, 집, 차 등을 다 가지고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돈이 되고 성공하는 경우는 있지만, 성공하기 위해 달려간다고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게 달려가서 성공한다 해도 세상은 다른 식의 보상을 요구한다. 성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기준을 갖고 세상을 만날 것
김별아 작가는 문단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만의 리그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해야 한다고 권유했지만, 그렇게 못해서 그쪽 끈 놓았다. 남는 건 독자들뿐이었다. 그게 그의 자산이다. 변하는 유행, 작가도 그 물결을 탈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예전에 상을 휩쓴 작가도 퇴물이 되거나, 청탁이 안 들어오니 글도 안 쓰는 경우도 봤다. 그가 보기에, 작가는 과거형이 없다. 현역작가만 있을 뿐이다. 작가란 이름을 갖고 있어도, 더 이상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별아 작가는 그래서 이런 바람을 갖고 있다.
“독자들이 최소한 자기 세대의 작가를 같이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 같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백만 부를 파는 한 명의 작가보다 만 부를 파는 백만 명의 작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다. 모두의 손해다. 한 작가가 하나의 세계거든. 그걸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은 독자밖에 없다. 외로웠던 시간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꿈꾸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잘 견뎠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의 30대가 무척 중요하다는 말을 건넨다. 바깥에서 제시된 성공이 아닌 내가 지금 가진 것에서 내 꿈에 얼마나 근접하느냐의 문제. 꿈을 향한 촉수나 방향을 놓치지 않으면 갈 수 있다는 응원을 보낸다. 하는 일 사이에 다른 길이 있음을 찾으라는 것. 홀수여도 괜찮아!
“홀수는 싱글로 잘 살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 기준으로 서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부모에게 의존하면서 성인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라가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불행해진다. 유행의 심리는 남들이 가진 것을 갖고 싶은 것과 남들이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싶은 두 마음이 공존한다. 두 개의 욕망이 동시에 자극하는데, 그건 남의 욕망이다. 그때 힘이 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실용적인 게 아니고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힘을 만들어준다.”
김별아 작가, 요즘 하고 있는 현장인문학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탈성매매여성 자활센터에서 인문학 강의를 듣는데,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분포의 사람들이 있다. 탈성매매여성들을 상대로 하는 니체와 스피노자 강의? 누군가는 그게 가능하냐고 쉽게 단정을 하지만, 그렇지가 않단다. 까다로울 수도 있는 그것을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해를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브레히트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노숙인, 빈민 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 빵? 아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게 할 순 있어도 빵으로 그들을 일으킬 수는 없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힘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인문학이다. 누군가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데 천 번을 흔들리면 토하지. 마음의 힘이, 홀수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자유롭게, 여러 사람과도 잘 살 수 있다. 혼자 놀면 재밌다.”
체로키족은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이라고 했다. 다른 세상을 위해 청년들이 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별아 작가, 신문을 통해 그 방법을 제시했다. “젊은 벗들이여, 그대들의 미래에 투표하라! 그것이 바로 과거의 망령과 현재의 굴레가 침범하지 못할 그대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리라.” 그는 고립을 통해 저항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필사적으로 세상 속의 나를 증명하자고 권한다.
별아 작가에게 묻고, 별아 작가 답하다
역사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건, 많이 다른가? 글쓰기를 잘하려면?
많이 다르다. 장르도 다르고. 소설이 좋은 게, (작가가) 숨을 수 있다. 내 얘길 쓰면서도, 시치미를 뗄 수가 있다. 역사소설은 다른 소설과도 다른데, 나는 사실을 중시해서 자료를 수집?분석하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 에세이는 가장 솔직한 글일 수 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생활인과 가장 가까운 장르다. 글쓰기 비법은 없다. 있으면 알려줘(웃음). 나도 커서가 깜빡거릴 때 막막하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건 생각이다.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쓴다. 책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내게 생각을 정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기다.
순우리말 어휘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
『미실』이 내겐 첫 번째 역사소설이고 이른바 출세작인데, 그때 난 자유로웠다. 청탁도 없으니 혼자 기획하고 쓰고. 안 해본 일에 도전한 거다. 내가 풀숲을 헤쳐서 내 길을 만든 거지. 1500년 전의 이야기인데, 고대사 자료도 별로 없었다. 순우리말 표현을 많이 쓰려는 게, 독자들이 그 순간에 간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어서다. 의태어, 의성어를 많이 쓰다 보니 감각적인 표현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말을 더 잘 쓰고 싶다. 싫어하는 독자도 있다. 모르는 단어 쓴다고. 나는 사전을 여러 개 띄워놓고 쓴다. 한 문장을 50번만 읽고, 50번 고친다. 요즘 공모전을 종종 심사하는데, 맞춤법이 비어 있다. 문장에 대한 자의식도 없이 1,000매를 어떻게 쓸까 싶다. 나는 한 문장을 내 리듬을 만들 때까지 쓴다. 사전을 많이 활용하면 좋다.
역사 속 여성을 계속 표현할 생각 있나? 그런 소재를 선택하는 이유는?
역사소설은 대부분 남성 작가들이 해서, 나름 블루오션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고, 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조선시대 여성 3부작을 생각하고 있다. 처음이 『채홍』의 봉빈이었고, 지금 마무리 중인 것은 순애보를 다룬다. 사랑 때문에 죽은 여자이야기다. 조선시대엔 사랑이 법적으로 금지됐다. 유일하게 인정받은 남녀관계는 집안이 정혼해서 결혼한 것밖에 없었다. 나머진 다 간통이었다. 국법에 의해 처벌당했다. 그 시절, 기준으로 지금 우린 다 간통이지. 세종 때가 배경인데, 그때 실은 참형이 많았다. 그 와중에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여자이야기다. 다만, 연애세포가 다 죽어서 죽을 뻔 했다. 세 번째론 『미실』보다 더 야한소설을 생각 중이다. 여성이라고 하나의 모습이 아니고, 한 여성 안에도 여러 모습이 있다. 옛날에도 분명 나쁜 여자들이 있었을 텐데, 왜 착한 여자만 나오는지 궁금했다.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싶다.
홀수, 외롭지 않을까?
외로운 것이 나쁜 게 아니다. 심리학에선, 우울이 인류가 진화하면서 꼭 필요한 감정이었다고 한다. 스페인 속담에 ‘365일 태양이 비치는 날만 된다면 그것은 사막이 될 것이다’라는 게 있다. 정호승 시인의 詩(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시구가 있다. 그늘, 비 오는 날도 인생에 필요하다.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위나 장이 나쁜 것과 같다. 나는 우울이 오면 운동화를 신고 나가서 햇빛을 맞는다. 여러 방법을 쓴다. 우울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나를 잘 알면 조절할 수 있다.
나는 그 아들의 미래가 궁금했다. 그러나 불안하진 않았다. 그는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니까. 지난 11월 28일, 김별아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허공에의 질주>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19년 전, 10월의 마지막 날 떠났던 리버 피닉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홀수여도 괜찮아!’ 최근 개봉했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아이>도 겹쳐진다. <늑대아이>는 또 다른 홀수적 삶을 이야기한다. 늑대와 사람 사이에서 늑대로 살기를 선택한 아이, 엄마를 떠난다. ‘헬리콥터 부모’가 판을 치는 지금, <늑대아이>는 동물의 감수성이 본디 홀수임을 거듭 확인한다. 제 몫의 사냥을 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는 것.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자유로운 일인지를 알지 못한다. 혼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기쁨과 그것을 통해 풍요로워지는 삶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다.”(p.16~17) | ||
부모를 극복하는 것, 홀수의 삶을 위해 필요하다
김별아 작가는 최근 『4천원 인생』을 읽었다. 기자들이 최저임금을 받는 공장, 식당 등에 ‘위장취업’을 하고 쓴 수기다.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전기밥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납땜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삶은 홀수다』는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으고, 덧붙였다. 그는 제목을 달면서 자신을 돌이켜보니, 어렸을 때는 외톨이였고, 자폐증적인 면도 있었다. 한 마디로, ‘어두운 아이’였다. 유일한 친구가 책이었고, 열일곱에 문학을 만나면서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졌다. 문학을 알게 됐다는 건, 세상에 홀로 서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성격적으로 아버지를 많이 닮았었는데, 부딪히기도 엄청 부딪혔다.
“딸들은 아버지의 지지가 절대적인 것 같다. 딸이 자기 이름과 목소릴 갖고 사는 데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중요하다. 딸을 옹호하고 지지하는지, 상처를 주는 존재인지에 따라 차이가 드러난다. 부모와의 문제를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 홀수라는 건,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되니, 부모한테 고마운 부분이 있다. 어머니는 내게 감정의 쓰레기통과도 같았다. 학교에서는 나는 학교에선 모범생이었지만, 내 안에서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어머니에겐 폭군으로 군림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허들과 같은 존재다. 너무 높으면 걸려 넘어지기 쉽다. 부모에게 효녀효자들 중에 실은 괴롭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다.”
그는 반항하는 아이들이 건강하다고 강조한다. 통과의례를 잘 거치기 때문이다. 마흔 넘어 회사에서 쫓겨날 지경인데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황하는 사람 부지기수다. 그가 만난 칠십 넘은 독자 중에도 방황하는 분이 있었다고 전한다. 공통점? 착한 아이였다는 것! 그런 많은 경우, 부모는 강한 분들이거나 자식에게 죄책감을 주거나 다른 아이와 비교를 했다. 아이들의 많은 문제는 부모에서 비롯된다.
“제일 좋은 부모는 ‘만만한 부모’다. 내 부모도 나를 꺾지 않았다. 아버지와 여러 번 싸움을 하고 박차고 나왔지만, 내 자리를 부모가 치우지 않았다. 나를 지지했던 거다. 건강한 홀수의 삶을 위해 부모를 극복해야 한다. 각자의 이야기나 상처가 다를 테니, 그건 평생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인간은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 원하는 건 인정받는 것 하나다. 최초의 양육자가 그래서 중요하다. 한 사람이 믿고 지지해주면, 그 사람은 훼손되지 않는다. 그게 대부분 부모인데,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끊임없이 흔들린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옆에 사람이 있어도 외롭다. 친구 속에서, 군중 속에서, 연애하면서도 그렇다.”
글을 쓰는 두 가지 욕망
김별아 작가는 글을 쓰는 두 가지 욕망을 언급한다. 하나는 자백의 욕구. 많은 사람들, 말한다. 죽기 전 내 얘기를 책 한 권으로 써보고 싶다고. 내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 등을 고백하고 싶은 자백의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 다른 하나는 발언의 욕구이자 소통의 욕구이다. 그에겐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구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생겼다. 물론, 그땐 몰랐다. 역사소설을 쓰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좌충우돌한 게 이런 식으로 흔적이 남았음을 느끼고 있다.
그랬다. 당시에는 서로의 영혼을 돌볼 틈이 없었다. 적은 너무 강했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가 없어서, 어루만지는 법을 몰라서, 서로 사고 칠까봐 감시만 했다. 그도 그랬다. 전날 봤던 사람이 투신을 하고 시신으로 돌아오는 나날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뒤 ‘문학이냐, 운동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상태였던 그에게 결정적 계기가 다가왔다.
어느 날 새벽, 자신과 동갑이던 강경대 열사의 누나가 뭔가를 줍고 있는 모습을 봤다. 강경대 생전과 사후 사진이 함께 들어간 유인물을 바닥에서 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도 다시 흩어지지 않을까? 그러면 역사에 어떻게 남고,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내가 느끼는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은 어떻게 될까. 그걸 쓸 수 있는 건 문학이지 않을까.’ 그는 다시 문학으로 갔다. “나는 역사소설을 쓰면서 과거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지나면 역사이겠고, 내가 쓸 수 있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에게 “저항하고 반항하라”
과연 지금 젊음은 어느 자리에 있는 것일까. 그도 요즘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패기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꼰대 같은 얘긴데, 우리 때는 23~24살에 혁명을 할 거라고 여겼다. 지금은 그런 생각은 없고, 스펙을 쌓아 잘 살겠다는 모습을 주로 본다. 무기력증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이 만든 서열주의에 길들여진 까닭이다. 심리학책이 한때 많이 팔렸다. 지금 30대 초반은 조기교육 1세대로, 사교육이 일상화됐었는데, 마음이 가장 약한 세대라고나 할까. 영혼이 허기지니까, 심리학책에 기댔던 거다. 반항해라. 부모와 어른에게 저항해라. 그들이 틀리고 내가 옳아서가 아니다. 허들을 넘을 시도조차 안 하면 세상과, 내 삶과 싸우기 힘들다.”
“젊은 친구들이 조로한 얼굴로 “꿈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라고 되물어올 때 여전히 철없는 나는 가슴이 아프다. 꿈은 망연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p.105) | ||
김별아 작가는 작가 외에 다른 꿈을 안 꿨는데도 등단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른바 ‘코스’를 밟지 않았다. 앞선 세대들이 만든 길을 꼭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먼저 냈다. 졸업 직전, 『신촌블루스』라는 단편 소설집을 내고, 글을 썼다. 권위나 절차를 거부하고 싶었다. 돌직구를 던졌다. 그러나 한 선배 문인이 별아 작가가 ‘독고다이’ 짓 하는 것이 안 돼 보였는지, 작품을 빼앗아 문학상에 제출했고, 그 작품은 수상을 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여성지 프리랜서, 고스트라이터(대필작가)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렇게 10년을 버텼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작가들 중 뛰어난 작가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생활고 등으로 못 견딘 것이다. 루쉰이 그랬다. “반향이 없는 작품을 쓰는 게 얼마나 공허한가.” 확신 없이 글 쓰는 것, 굉장히 힘이 든다. 그렇게 다 떨어져나갔다.
“나는 재주가 없어서 이게 아니면 할 것이 없어서 버텼다. ‘1만 시간의 법칙’이니 뭐니 하는데, 문학도 10년을 버티면 뭐가 되긴 한다. 10년을 계속 쓰니, 이 작가가 뭐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 하고, 10년이 지나면 더 이상 다른 것을 할 수가 없다. 배수진을 치는 거지.”
이때 중요한 것은 욕망의 다이어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남들처럼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가 택한 방법이었다. 청년들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이 돈이 안 된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다. 그는 늘 같은 답을 해준다. 포기하라! 다만 그걸 못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면 하라고 말해준다. 누군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말린다.
“안톤 체홉의 글에도 나온다. 아이가 나오면 글을 쓰게 하지 마라, 작가가 되면 안 된다(웃음). 남들 가지는 가방, 집, 차 등을 다 가지고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돈이 되고 성공하는 경우는 있지만, 성공하기 위해 달려간다고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게 달려가서 성공한다 해도 세상은 다른 식의 보상을 요구한다. 성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기준을 갖고 세상을 만날 것
김별아 작가는 문단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만의 리그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해야 한다고 권유했지만, 그렇게 못해서 그쪽 끈 놓았다. 남는 건 독자들뿐이었다. 그게 그의 자산이다. 변하는 유행, 작가도 그 물결을 탈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예전에 상을 휩쓴 작가도 퇴물이 되거나, 청탁이 안 들어오니 글도 안 쓰는 경우도 봤다. 그가 보기에, 작가는 과거형이 없다. 현역작가만 있을 뿐이다. 작가란 이름을 갖고 있어도, 더 이상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별아 작가는 그래서 이런 바람을 갖고 있다.
“독자들이 최소한 자기 세대의 작가를 같이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 같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백만 부를 파는 한 명의 작가보다 만 부를 파는 백만 명의 작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다. 모두의 손해다. 한 작가가 하나의 세계거든. 그걸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은 독자밖에 없다. 외로웠던 시간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꿈꾸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잘 견뎠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의 30대가 무척 중요하다는 말을 건넨다. 바깥에서 제시된 성공이 아닌 내가 지금 가진 것에서 내 꿈에 얼마나 근접하느냐의 문제. 꿈을 향한 촉수나 방향을 놓치지 않으면 갈 수 있다는 응원을 보낸다. 하는 일 사이에 다른 길이 있음을 찾으라는 것. 홀수여도 괜찮아!
“홀수는 싱글로 잘 살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 기준으로 서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부모에게 의존하면서 성인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라가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불행해진다. 유행의 심리는 남들이 가진 것을 갖고 싶은 것과 남들이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싶은 두 마음이 공존한다. 두 개의 욕망이 동시에 자극하는데, 그건 남의 욕망이다. 그때 힘이 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실용적인 게 아니고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힘을 만들어준다.”
김별아 작가, 요즘 하고 있는 현장인문학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탈성매매여성 자활센터에서 인문학 강의를 듣는데,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분포의 사람들이 있다. 탈성매매여성들을 상대로 하는 니체와 스피노자 강의? 누군가는 그게 가능하냐고 쉽게 단정을 하지만, 그렇지가 않단다. 까다로울 수도 있는 그것을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해를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브레히트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노숙인, 빈민 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 빵? 아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게 할 순 있어도 빵으로 그들을 일으킬 수는 없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힘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인문학이다. 누군가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데 천 번을 흔들리면 토하지. 마음의 힘이, 홀수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자유롭게, 여러 사람과도 잘 살 수 있다. 혼자 놀면 재밌다.”
체로키족은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이라고 했다. 다른 세상을 위해 청년들이 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별아 작가, 신문을 통해 그 방법을 제시했다. “젊은 벗들이여, 그대들의 미래에 투표하라! 그것이 바로 과거의 망령과 현재의 굴레가 침범하지 못할 그대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리라.” 그는 고립을 통해 저항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필사적으로 세상 속의 나를 증명하자고 권한다.
별아 작가에게 묻고, 별아 작가 답하다
역사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건, 많이 다른가? 글쓰기를 잘하려면?
많이 다르다. 장르도 다르고. 소설이 좋은 게, (작가가) 숨을 수 있다. 내 얘길 쓰면서도, 시치미를 뗄 수가 있다. 역사소설은 다른 소설과도 다른데, 나는 사실을 중시해서 자료를 수집?분석하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 에세이는 가장 솔직한 글일 수 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생활인과 가장 가까운 장르다. 글쓰기 비법은 없다. 있으면 알려줘(웃음). 나도 커서가 깜빡거릴 때 막막하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건 생각이다.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쓴다. 책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내게 생각을 정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기다.
순우리말 어휘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
『미실』이 내겐 첫 번째 역사소설이고 이른바 출세작인데, 그때 난 자유로웠다. 청탁도 없으니 혼자 기획하고 쓰고. 안 해본 일에 도전한 거다. 내가 풀숲을 헤쳐서 내 길을 만든 거지. 1500년 전의 이야기인데, 고대사 자료도 별로 없었다. 순우리말 표현을 많이 쓰려는 게, 독자들이 그 순간에 간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어서다. 의태어, 의성어를 많이 쓰다 보니 감각적인 표현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말을 더 잘 쓰고 싶다. 싫어하는 독자도 있다. 모르는 단어 쓴다고. 나는 사전을 여러 개 띄워놓고 쓴다. 한 문장을 50번만 읽고, 50번 고친다. 요즘 공모전을 종종 심사하는데, 맞춤법이 비어 있다. 문장에 대한 자의식도 없이 1,000매를 어떻게 쓸까 싶다. 나는 한 문장을 내 리듬을 만들 때까지 쓴다. 사전을 많이 활용하면 좋다.
역사소설은 대부분 남성 작가들이 해서, 나름 블루오션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고, 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조선시대 여성 3부작을 생각하고 있다. 처음이 『채홍』의 봉빈이었고, 지금 마무리 중인 것은 순애보를 다룬다. 사랑 때문에 죽은 여자이야기다. 조선시대엔 사랑이 법적으로 금지됐다. 유일하게 인정받은 남녀관계는 집안이 정혼해서 결혼한 것밖에 없었다. 나머진 다 간통이었다. 국법에 의해 처벌당했다. 그 시절, 기준으로 지금 우린 다 간통이지. 세종 때가 배경인데, 그때 실은 참형이 많았다. 그 와중에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여자이야기다. 다만, 연애세포가 다 죽어서 죽을 뻔 했다. 세 번째론 『미실』보다 더 야한소설을 생각 중이다. 여성이라고 하나의 모습이 아니고, 한 여성 안에도 여러 모습이 있다. 옛날에도 분명 나쁜 여자들이 있었을 텐데, 왜 착한 여자만 나오는지 궁금했다.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싶다.
홀수, 외롭지 않을까?
외로운 것이 나쁜 게 아니다. 심리학에선, 우울이 인류가 진화하면서 꼭 필요한 감정이었다고 한다. 스페인 속담에 ‘365일 태양이 비치는 날만 된다면 그것은 사막이 될 것이다’라는 게 있다. 정호승 시인의 詩(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시구가 있다. 그늘, 비 오는 날도 인생에 필요하다.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위나 장이 나쁜 것과 같다. 나는 우울이 오면 운동화를 신고 나가서 햇빛을 맞는다. 여러 방법을 쓴다. 우울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나를 잘 알면 조절할 수 있다.
“삶은 어차피 홀수이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 그 사실에 새삼 놀라거나 쓸쓸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가장 좋은 벗이 되어 충만한 자유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홀로 있을지언정 더 이상 외톨이는 아닐 테니까.”(p.17) | ||
- 삶은 홀수다
- 김별아 저 | 한겨레출판
문학을 ‘인간학’에 비유했던 고리끼처럼, 소설가 김별아는 ‘소설의 풍미는 삶의 진창에 코를 박고 짓무른 상처에 뺨을 비빌 때 발현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체질상 더욱 예리하고 예민하게 삶을, 사회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소설가 김별아는 언제 어디서고 사람과 삶을 본다. 선배와 밥을 먹으면서, 먹는 일은 본능을 넘어선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바뀌면서 대충 사먹는 일에 익숙한 우리의 삶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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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chang0307
2013.03.20
집짓는사람
2013.01.02
marie23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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