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열전] 믹 재거 vs 로드 스튜어트 - 노래 잘하는 가수가 희대의 플레이보이?
두 거물은 그러나 기량의 우열을 떠나 확실한 보컬의 카리스마를 공유한 ‘무법자들’이란 점에서 서로가, 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팬들은 둘 중 누가 더 매력적인 가수인가를 부득불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여성들은 누가 더 ‘섹시 가이’인가 설전을 벌이곤 했다. 실로 많은 여자들이 둘의 보컬과 장외 행각의 휘하에 신음했다.
201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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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여성 편력 자랑한 ‘바람’의 아들들
지금도 기성 세대 록 팬들에게 ‘누가 제일 노래를 잘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로드 스튜어트의 이름을 댈 것이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록의 열정을 담은 그의 노래들은 1970-1980년대 지구촌의 팝 수요자들을 관통하며 골든 레퍼토리로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71년의 미국 데뷔 넘버원 싱글 「Maggie may」를 위시해 「Sailing」, 「I don't want to talk about it」, 「The first cut is the deepest」, 「You're in my heart」, 「I was only joking」, 「Da ya think I'm sexy」, 「Passion」등 ‘꺾고 휘고 비틀고 흐느끼는’ 보컬 예술의 보석들은 국내 팝 팬들의 귀도 홀려버렸다.
90년대 신세대 음악팬들 역시 MTV 언플러그드 무대에서 부른 곡 「Have I told you lately」로 로드 스튜어트의 진가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가 70년대에 보유한 타이틀은 ‘금세기 최고의 록 보컬리스트’.
하지만 그 위치는 끊임없이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Mick Jagger)로부터 위협을 받아야 했다. 때로 꽉 막힌 듯한 로드의 블루스적인 보컬과 달리 믹 재거의 확 트인 시원한 보컬은 어느 면에서 더 록 팬들을 구인한 요소였다. 더구나 그는 매 곡마다 그 곡에 맞는 성격의 보컬로 변신을 거듭해 개성의 측면에서 로드 스튜어트를 포함해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Time is on my side」, 「Ruby tuesday」, 「Paint it black」, 「Sympathy for the devil」, 「Moonlight mile」, 「Angie」, 「Miss you」, 「Start me up」 등 1960년대 중반이래의 쟁쟁한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에서 보여준 매직 보컬은 가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보컬 배우’라 해야 온당할 지경이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두 경쟁자
두 거물은 그러나 기량의 우열을 떠나 확실한 보컬의 카리스마를 공유한 ‘무법자들’이란 점에서 서로가, 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팬들은 둘 중 누가 더 매력적인 가수인가를 부득불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여성들은 누가 더 ‘섹시 가이’인가 설전을 벌이곤 했다. 실로 많은 여자들이 둘의 보컬과 장외 행각의 휘하에 신음했다.
“믹 재거가 휘두르는 최신의 성적 무차별(sexual Indiscretions)을 대중들은 끊임없이 요구했다.” 평자들은 다들 스톤스의 음악 외의 또 다른 무기를 그렇게 간주했다.
“내가 17살 적 로드 스튜어트가 퍼브(pub)에서 공연했을 때 무대로 달려가 ‘스튜어트 씨, 사인 좀 해줘요’라고 간청한 바도 있다. 너무나 그는 와일드했다.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노래하는 모습이란! 그렇게 멋있는 사람을 이전에 본적이 없었다.” 이건 엘튼 존의 감탄이다(남자가 이러니 여자인들 오죽했으랴).
이게 문제였다. 두 거인의 매혹 보컬 경쟁은 어디까지나 ‘낮 무대 앞 무대’의 모습이었을 뿐 진정한 라이벌 의식은 오히려 ‘밤무대 뒷무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두 사람은 마치 ‘숫자 불리기’로 싸움하듯 무지막지하게 여인 사냥에 골똘한 희대의 플레이보이들이었다.
그들의 편력 노정(路程)에 엄청난 여인들이 희생(?)되었건만 둘에게는 최소한의 죄의식도 없어 보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비정함의 측면에서 로드와 믹은 진정한 ‘바람의 아들’, 그리고 ‘침실의 난폭자’ 형제였다.
하지만 두 형제의 바람기는 우리처럼 추문으로 스타덤을 망가뜨리는 종점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슈퍼스타덤으로 안내한 개찰구’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는 구름 떼처럼 여자들이 운집했다는 점이 도리어 위세를 불려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이다(이게 스타와 일반인 사이에 엄존하는 ‘불평등’이다).
믹 재거의 연인 마리안느 페이스풀
장유유서에 따라 1943년 생으로 로드보다 2살 위인 형님 믹 재거의 화려한 ‘걸 헌팅’ 역사를 먼저 개괄하기로 하자. 최초로 타블로이드 신문에 공개된 그의 걸프렌드는 크리시 시림톤이란 이름의 유명 모델인 진 시림톤의 여동생이었다.
크리시는 60년대 중반 피어난 그루피(groupie), 즉 스타를 뒤쫓는 극렬 팬들의 존재를 여성들에게 알려준 기념비적(?) 인물이기도 했다. 크리시를 계기로 무수한 그루피 여성들이 믹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유명한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이 그중 불쑥 솟아나 크리시로부터 ‘믹의 여자’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의 이양을 강요했다. 예전에 메탈리카의 「The memory remains」에서 노련한 노래 솜씨를 과시하기도 한 그녀는 믹 재거의 연인으로서, ‘요동치는 1960년대의 여성’을 상징한 인물이었다. 일반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자유분방한 성(性)관념을 가진 마리안느는 스스로를 ‘더러운 계집애(dirty little girl)’라고 떠벌린 적도 있다.
그녀는 60년대 말 롤링 스톤스에게 벌어진 일련의 마약과 섹스 해프닝의 핵심적 여인으로 알려져 ‘처녀(또는 천사)의 얼굴을 한 창부’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67년 2월 영국을 들쑤셔놓은 레드랜즈 파티 사건 때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여성으로 언론이 ‘미스 X’(우리에게도 1980년 초반 X양 사건이 있었다)로 규정한 인물이 바로 마리안느였다.
레드랜즈(Redlands)는 영국 서섹스 소재의 키스 리처드 별장인데 경찰이 파티 현장을 덮쳐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와 마리안느 페이스풀 등 파티에 참가한 8명을 마약 불법 소지죄로 체포했다(비틀즈의 조지 해리슨도 파티에 참여한 아홉 번째 인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리안느가 발각되었을 때 모피 깔개로 몸을 가렸지만 완전 누드였던 것으로 전해져 줄기차게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마리안느는 나중 믹과의 관계가 뒤틀어지자 약물에 더욱 심취, 믹의 아이를 유산했으며 급기야 1969년에는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아∼격동의 60년대!). 서구 록 언론은 지금도 마리안느에게 ‘믹의 전(前) 걸프렌드’란 꼬리표를 떼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믹 재거의 ‘게릴라성 바람’은 쉬질 않아 1970년 마샬 헌트라는 여인의 딸아이 아빠가 믹으로 밝혀져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본 사건도 있었다. 하기야 그의 모든 편력이 믹이 주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순 없다. 여인들이 더 치근덕거린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일례로 스톤스 내에서 브라이언 존스의 연인이었다가 키스 리처드의 여자로 바뀐 애니타 팔렌버그(Anita Pallenberg)가 영화 <퍼포먼스> 촬영 때 노골적으로 믹을 유혹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나중 애니타는 키스 리차드의 아이를 낳았다. 이를 뭐라 해야 하나? 하나의 성(性)공동체?
캐나다 수상 부인과의 스캔들
믹 재거는 파란만장의 총각 시대를 뒤로하고 마침내 1971년 5월 니카라과 출신의 모델 비앙카(Bianca)에게 면사포를 씌운다. 앤디 워홀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최고의 여배우’라고 극찬한 매력적인 비앙카는 믹의 딸 제이드를 낳아 모든 여성들을 향해 ‘믹 재거 공개접촉 불허’를 공표했다. 그랬건만 모든 게 허사로 끝나 우리의 믹은 ‘몰래바이트’로 타고난 바람둥이의 재기(才氣)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기성세대 록 팬들 가운데 마가렛 트루도(Margaret Trudeau) 사건을 잊어버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가렛은 77년 당시 캐나다 피에르 트루도 수상의 젊은 부인. 이 고매한 여인이 믹의 매력 그물에 자진해서 걸려든 것이었다.
스톤즈의 토론토 공연을 관람하고 넋을 잃은 마가렛은 뉴욕까지 쫓아와 롤링 스톤스가 묶고 있던 호텔을 예약해 파티에 참석,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당시 팔팔한 27세의 마가렛은 아버지와 같은 트루도 수상과의 6년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믹 재거 또한 아내 비앙카와의 관계에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그 때 기자들에게 쏟아낸 믹의 해명은 지금 봐도 절묘하다.
“난 그녀를 부추기거나 또는 그만두라고 설득하지 않았다.”
“난 마가렛 트루도와 관계를 가진 바 없다. 단지 아는 사이로 이틀 밤을 보냈을 뿐이다(도대체 왜 신은 인간에게 말하는 능력을 준 것일까?).”
아내의 돌출행각에 트루도 수상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하지만 일국의 지도자가 쉽게 분노를 노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가렛이 믹 재거와 자취를 감추자 트루도 수상은 감장을 억누른 채 씁쓸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음악에 대한 취미는 나의 관할이 아니다!”
비앙카는 1977년 믹에 대한 이혼 소송에서 위자료로 8년 결혼생활에 걸친 믹의 소득이 25만 달러임을 근거로 그 절반인 12만5천 달러를 요구했다. 80년 11월에 막을 내린 이 소송은 소문에 따르면 믹이 비앙카에게 자그만치 100만 파운드의 위자료를 물어준 것으로 결말이 났다.
비앙카가 믹과의 청산에 광분했던 이유 중에는 믹이 180cm의 롱다리 모델 제리 홀(Jerry Hall)을 새 친구로 삼았다는 점도 있었다. 비앙카는 노골적으로 “홀이 혐오스럽다”며 적의를 나타내기도 했다.
제리 홀과 관련, 더 열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룹 록시 뮤직(Roxy Music)의 리더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였다. 홀이 「보그」지 표지 모델로 나왔을 때 한 눈에 반한 그는 그룹의 앨범 < Siren >의 커버에 홀을 등장시킬 만큼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고 약혼까지 했다. 그러나 홀은 매정하게도 믹을 만나자마자 함께 사랑의 줄행랑을 쳐버려 브라이언 페리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믹은 제리 홀의 품에 안긴 뒤 고질적인 나그네 병을 치유했다. 하지만 비앙카와의 결혼과 파경에 정나미가 떨어져서인지 홀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고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는 홀의 염원을 멀리한 채 13년간이나 동거 관계에만 머물렀다. 믹의 마지막 여자가 되어 결국 정식 결혼한 제리 홀의 인상적인 남편 다스리기 방법을 들어본다.
“믹은 완고한 사람이다. 따라서 될 수 있는 한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가만히 그의 기분이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그런 연후에 문제를 제기한다.”
믹 재거에 뒤지지 않는 여성편력 전문 로드 스튜어트
브리트 에클런트와 로드 스튜어트사랑과 염문의 독재자로서 로드 스튜어트의 명성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믹 재거에게 밀리지 않는다. 그의 첫 여성은 미모의 금발 브리트 에클런드(Britt Ekland). 1970년대 초반 에클런드는 제리 홀이 브라이언 페리를 징검다리로 믹에게 도달했듯 배우 피터 셀러즈, 영화제작자 구 애들러를 거쳐 로드라는 항구에 정박했다. 과거의 남자 사이에 자식이 둘씩 있는 애기 엄마가 훌쩍 로드의 침실 안주인이 됐다는 것 자체가 쇼킹한 뉴스였다.
하지만 블론드 여성에 사족을 못 쓰는 특급 플레이보이가 브리트를 끝으로 할 리 없었다. 그는 곧바로 영화배우 조지 해밀턴의 전처 알라나 해밀턴(Alanah Hamilton)에게 눈을 옮겨 브리트를 ‘강제퇴출’했다.
물론 브리트와 알라나 사이의 소강기간에도 그는 조금도 휴식(?) 없이 여배우 수잔 조지, 뮤지션 토드 런그런의 부인었던 베베 뷰엘, 그리고 플리트우드 맥의 스티비 닉스로 비공식 연인을 줄기차게 교체해갔다.
로드는 알라나를 1977년 처음 봤을 때 매니저를 시켜 전화를 걸어 데이트를 신청했다. 알라나는 로드의 첫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참으로 민감하고, 위트 넘치고, 지적이며 섹시하고 부끄럼을 잘 탔다.”
부끄럼? 정말 플레이보이의 첫 번 째 조건은 ‘절대 플레이보이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가 보다.
켈리 엠버그와 로드 스튜어트
둘은 결혼했다. 여기에 악이 받친 브리트는 ‘로드를 돕느라 난 연기생활도 팽개쳤다’며 위자료 1천3백만 파운드를 요구하기도 했다.
로드의 ‘영웅본색’은 그러나 알라나와의 백년해로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1983년 금발의 롱다리 미녀 켈리 엠버그(Kelly Emberg)를 엮어 새로운 밤의 친구로 만들었다. 로드는 켈리로 짝을 바꾸기 위해 이듬해 알라나와 이혼하면서 1천만 달러, 집 한 채, 매월 1만 달러의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판결문에 사인해야 했다. 그깟 위자료가 무서워 한 여자와 눌러 살 로드가 아니었다.
그런 보무당당함에 의해 로드의 여자는 또 다시 켈리 엠버그에서 레이첼 헌터(Rachel Hunter)로 얼굴이 바뀌고 만다(하필 성이 ‘헌터’일게 뭐람. 먼저 이름에 끌린 건 아닐는지). 버림을 받은 켈리 엠버그의 분노가 터졌음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또 한 차례 ‘로드만의 특권’인 위자료 소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켈리는 위로 수당으로 2천5백만 달러에 심리적 고통에 대한 대가로 1천만 달러를 추가로 청구했다.
로드는 숨 가쁜 여성 편력에 고단했던지 레이첼 헌터와 1991년 12월 재혼한 이유로는 헌터의 명성을 접고 행복한 부부 관계를 과시중이다. 현재까지는 ‘믹의 제리 홀’처럼 레이첼이 로드의 마지막 여인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록계에서는 로드가 여자를 바꾸기 위해 최소 3천만 달러의 위자료는 썼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 정도면 ‘돈이 없으면 바람도 못 피운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화려한 여성 편력은 거대해진 록 비즈니스계 상징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음악인의 장외 사랑 행각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뮤지션들이라면 아마 바람기를 들먹이는 이 라이벌전에 눈살을 찌푸릴지 모른다. 자유의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로드와 믹의 역정은 한편으로 거대해진 ‘록 비즈니스계’를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좋게 보면 그만큼 록이 산업적 위용을 과시할 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믹과 로드의 화려한 섹스 사냥은 더 이상 록이 이름만 용의 머리고 실제 덩치는 뱀 꼬리가 아니라는 점을 내포한다.
허나 록은 하층 청년들의 제도권에 대한 삿대질이라는 노동 계급적 측면이 있다. 거리의 청춘들한테 로드와 믹의 유한(有閑) 행각은 눈뜨고 못 볼 짓일 수 있다. 로드도 과거 할리우드로 이전해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을 때 “표범의 무늬가 일생 사라지지 않듯 나는 평생 노동자 계급의 이미지를 이탈하지 않는다”고 반박한 적이 있다.
아무리 변명해도 1977년 영국이 IMF시대로 접어들어 실업의 고통에 찌든 젊은이들 눈에 믹과 로드의 사생활이 호락호락 비칠 턱이 없었다. 당시 펑크 밴드들이 가장 먼저 처단해야 할 부자 로커로 꼽은 대상이 롤링 스톤스와 로드 스튜어트였다. 이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자유라고 하지만 개인에게도 문란한 사생활은 결국 피해를 가져다준다. 믹 재거는 다름 아닌 바람기 때문에 영예로운 경(Sir)의 칭호를 놓쳤다. 2000년 1월 영국의 「더 타임스」는 “믹 재거가 음악을 통해 영국을 빛낸 공로로 작위 수훈 대상에 올랐으나 지난해 말 최종명단에서 빠졌다”고 보도했다.
탈락 이유는 브라질 출신 모델(아마도 70년 마샬 헌트 사건을 가리키는 듯)과 혼외정사를 가져 자식을 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며 그의 작위 수여에 영국의 수상 토니 블레어가 결정적인 제동을 건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평소 스톤스의 팬으로 소문난 블레어 총리가 재거의 영광 일보직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자신의 집권 노동당이 보수층을 껴안기 위해 강조해온 가족의 가치가 손상될 것을 우려해 명단에서 뺀 것으로 알려졌다.
바람의 라이벌 전에 승패를 매길 순 없다. 지나간 시절을 돌이켜 보며 로드 스튜어트와 믹 재거 두 사람 다 웃음(믹은 쓴웃음?) 지을 이른바 ‘윈 윈 게임(Win win game)’일 수 있다. 솔직히 그래서 어떤 남자들은 못내 부럽기도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남성우월주의’라는 비판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많은 팬들은 분노한다. 이런 사람들은 로드와 믹의 행각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임을 안다.
지금도 기성 세대 록 팬들에게 ‘누가 제일 노래를 잘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로드 스튜어트의 이름을 댈 것이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록의 열정을 담은 그의 노래들은 1970-1980년대 지구촌의 팝 수요자들을 관통하며 골든 레퍼토리로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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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신세대 음악팬들 역시 MTV 언플러그드 무대에서 부른 곡 「Have I told you lately」로 로드 스튜어트의 진가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가 70년대에 보유한 타이틀은 ‘금세기 최고의 록 보컬리스트’.
하지만 그 위치는 끊임없이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Mick Jagger)로부터 위협을 받아야 했다. 때로 꽉 막힌 듯한 로드의 블루스적인 보컬과 달리 믹 재거의 확 트인 시원한 보컬은 어느 면에서 더 록 팬들을 구인한 요소였다. 더구나 그는 매 곡마다 그 곡에 맞는 성격의 보컬로 변신을 거듭해 개성의 측면에서 로드 스튜어트를 포함해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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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두 경쟁자
두 거물은 그러나 기량의 우열을 떠나 확실한 보컬의 카리스마를 공유한 ‘무법자들’이란 점에서 서로가, 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팬들은 둘 중 누가 더 매력적인 가수인가를 부득불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여성들은 누가 더 ‘섹시 가이’인가 설전을 벌이곤 했다. 실로 많은 여자들이 둘의 보컬과 장외 행각의 휘하에 신음했다.
“믹 재거가 휘두르는 최신의 성적 무차별(sexual Indiscretions)을 대중들은 끊임없이 요구했다.” 평자들은 다들 스톤스의 음악 외의 또 다른 무기를 그렇게 간주했다.
“내가 17살 적 로드 스튜어트가 퍼브(pub)에서 공연했을 때 무대로 달려가 ‘스튜어트 씨, 사인 좀 해줘요’라고 간청한 바도 있다. 너무나 그는 와일드했다.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노래하는 모습이란! 그렇게 멋있는 사람을 이전에 본적이 없었다.” 이건 엘튼 존의 감탄이다(남자가 이러니 여자인들 오죽했으랴).
이게 문제였다. 두 거인의 매혹 보컬 경쟁은 어디까지나 ‘낮 무대 앞 무대’의 모습이었을 뿐 진정한 라이벌 의식은 오히려 ‘밤무대 뒷무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두 사람은 마치 ‘숫자 불리기’로 싸움하듯 무지막지하게 여인 사냥에 골똘한 희대의 플레이보이들이었다.
그들의 편력 노정(路程)에 엄청난 여인들이 희생(?)되었건만 둘에게는 최소한의 죄의식도 없어 보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비정함의 측면에서 로드와 믹은 진정한 ‘바람의 아들’, 그리고 ‘침실의 난폭자’ 형제였다.
하지만 두 형제의 바람기는 우리처럼 추문으로 스타덤을 망가뜨리는 종점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슈퍼스타덤으로 안내한 개찰구’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는 구름 떼처럼 여자들이 운집했다는 점이 도리어 위세를 불려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이다(이게 스타와 일반인 사이에 엄존하는 ‘불평등’이다).
믹 재거의 연인 마리안느 페이스풀
장유유서에 따라 1943년 생으로 로드보다 2살 위인 형님 믹 재거의 화려한 ‘걸 헌팅’ 역사를 먼저 개괄하기로 하자. 최초로 타블로이드 신문에 공개된 그의 걸프렌드는 크리시 시림톤이란 이름의 유명 모델인 진 시림톤의 여동생이었다.
크리시는 60년대 중반 피어난 그루피(groupie), 즉 스타를 뒤쫓는 극렬 팬들의 존재를 여성들에게 알려준 기념비적(?) 인물이기도 했다. 크리시를 계기로 무수한 그루피 여성들이 믹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유명한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이 그중 불쑥 솟아나 크리시로부터 ‘믹의 여자’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의 이양을 강요했다. 예전에 메탈리카의 「The memory remains」에서 노련한 노래 솜씨를 과시하기도 한 그녀는 믹 재거의 연인으로서, ‘요동치는 1960년대의 여성’을 상징한 인물이었다. 일반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자유분방한 성(性)관념을 가진 마리안느는 스스로를 ‘더러운 계집애(dirty little girl)’라고 떠벌린 적도 있다.
그녀는 60년대 말 롤링 스톤스에게 벌어진 일련의 마약과 섹스 해프닝의 핵심적 여인으로 알려져 ‘처녀(또는 천사)의 얼굴을 한 창부’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67년 2월 영국을 들쑤셔놓은 레드랜즈 파티 사건 때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여성으로 언론이 ‘미스 X’(우리에게도 1980년 초반 X양 사건이 있었다)로 규정한 인물이 바로 마리안느였다.
레드랜즈(Redlands)는 영국 서섹스 소재의 키스 리처드 별장인데 경찰이 파티 현장을 덮쳐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와 마리안느 페이스풀 등 파티에 참가한 8명을 마약 불법 소지죄로 체포했다(비틀즈의 조지 해리슨도 파티에 참여한 아홉 번째 인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리안느가 발각되었을 때 모피 깔개로 몸을 가렸지만 완전 누드였던 것으로 전해져 줄기차게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마리안느는 나중 믹과의 관계가 뒤틀어지자 약물에 더욱 심취, 믹의 아이를 유산했으며 급기야 1969년에는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아∼격동의 60년대!). 서구 록 언론은 지금도 마리안느에게 ‘믹의 전(前) 걸프렌드’란 꼬리표를 떼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믹 재거의 ‘게릴라성 바람’은 쉬질 않아 1970년 마샬 헌트라는 여인의 딸아이 아빠가 믹으로 밝혀져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본 사건도 있었다. 하기야 그의 모든 편력이 믹이 주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순 없다. 여인들이 더 치근덕거린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일례로 스톤스 내에서 브라이언 존스의 연인이었다가 키스 리처드의 여자로 바뀐 애니타 팔렌버그(Anita Pallenberg)가 영화 <퍼포먼스> 촬영 때 노골적으로 믹을 유혹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나중 애니타는 키스 리차드의 아이를 낳았다. 이를 뭐라 해야 하나? 하나의 성(性)공동체?
캐나다 수상 부인과의 스캔들
믹 재거는 파란만장의 총각 시대를 뒤로하고 마침내 1971년 5월 니카라과 출신의 모델 비앙카(Bianca)에게 면사포를 씌운다. 앤디 워홀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최고의 여배우’라고 극찬한 매력적인 비앙카는 믹의 딸 제이드를 낳아 모든 여성들을 향해 ‘믹 재거 공개접촉 불허’를 공표했다. 그랬건만 모든 게 허사로 끝나 우리의 믹은 ‘몰래바이트’로 타고난 바람둥이의 재기(才氣)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기성세대 록 팬들 가운데 마가렛 트루도(Margaret Trudeau) 사건을 잊어버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가렛은 77년 당시 캐나다 피에르 트루도 수상의 젊은 부인. 이 고매한 여인이 믹의 매력 그물에 자진해서 걸려든 것이었다.
스톤즈의 토론토 공연을 관람하고 넋을 잃은 마가렛은 뉴욕까지 쫓아와 롤링 스톤스가 묶고 있던 호텔을 예약해 파티에 참석,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당시 팔팔한 27세의 마가렛은 아버지와 같은 트루도 수상과의 6년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믹 재거 또한 아내 비앙카와의 관계에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그 때 기자들에게 쏟아낸 믹의 해명은 지금 봐도 절묘하다.
“난 그녀를 부추기거나 또는 그만두라고 설득하지 않았다.”
“난 마가렛 트루도와 관계를 가진 바 없다. 단지 아는 사이로 이틀 밤을 보냈을 뿐이다(도대체 왜 신은 인간에게 말하는 능력을 준 것일까?).”
아내의 돌출행각에 트루도 수상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하지만 일국의 지도자가 쉽게 분노를 노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가렛이 믹 재거와 자취를 감추자 트루도 수상은 감장을 억누른 채 씁쓸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음악에 대한 취미는 나의 관할이 아니다!”
비앙카는 1977년 믹에 대한 이혼 소송에서 위자료로 8년 결혼생활에 걸친 믹의 소득이 25만 달러임을 근거로 그 절반인 12만5천 달러를 요구했다. 80년 11월에 막을 내린 이 소송은 소문에 따르면 믹이 비앙카에게 자그만치 100만 파운드의 위자료를 물어준 것으로 결말이 났다.
비앙카가 믹과의 청산에 광분했던 이유 중에는 믹이 180cm의 롱다리 모델 제리 홀(Jerry Hall)을 새 친구로 삼았다는 점도 있었다. 비앙카는 노골적으로 “홀이 혐오스럽다”며 적의를 나타내기도 했다.
제리 홀과 관련, 더 열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룹 록시 뮤직(Roxy Music)의 리더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였다. 홀이 「보그」지 표지 모델로 나왔을 때 한 눈에 반한 그는 그룹의 앨범 < Siren >의 커버에 홀을 등장시킬 만큼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고 약혼까지 했다. 그러나 홀은 매정하게도 믹을 만나자마자 함께 사랑의 줄행랑을 쳐버려 브라이언 페리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믹은 제리 홀의 품에 안긴 뒤 고질적인 나그네 병을 치유했다. 하지만 비앙카와의 결혼과 파경에 정나미가 떨어져서인지 홀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고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는 홀의 염원을 멀리한 채 13년간이나 동거 관계에만 머물렀다. 믹의 마지막 여자가 되어 결국 정식 결혼한 제리 홀의 인상적인 남편 다스리기 방법을 들어본다.
“믹은 완고한 사람이다. 따라서 될 수 있는 한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가만히 그의 기분이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그런 연후에 문제를 제기한다.”
믹 재거에 뒤지지 않는 여성편력 전문 로드 스튜어트
브리트 에클런트와 로드 스튜어트사랑과 염문의 독재자로서 로드 스튜어트의 명성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믹 재거에게 밀리지 않는다. 그의 첫 여성은 미모의 금발 브리트 에클런드(Britt Ekland). 1970년대 초반 에클런드는 제리 홀이 브라이언 페리를 징검다리로 믹에게 도달했듯 배우 피터 셀러즈, 영화제작자 구 애들러를 거쳐 로드라는 항구에 정박했다. 과거의 남자 사이에 자식이 둘씩 있는 애기 엄마가 훌쩍 로드의 침실 안주인이 됐다는 것 자체가 쇼킹한 뉴스였다.
하지만 블론드 여성에 사족을 못 쓰는 특급 플레이보이가 브리트를 끝으로 할 리 없었다. 그는 곧바로 영화배우 조지 해밀턴의 전처 알라나 해밀턴(Alanah Hamilton)에게 눈을 옮겨 브리트를 ‘강제퇴출’했다.
물론 브리트와 알라나 사이의 소강기간에도 그는 조금도 휴식(?) 없이 여배우 수잔 조지, 뮤지션 토드 런그런의 부인었던 베베 뷰엘, 그리고 플리트우드 맥의 스티비 닉스로 비공식 연인을 줄기차게 교체해갔다.
로드는 알라나를 1977년 처음 봤을 때 매니저를 시켜 전화를 걸어 데이트를 신청했다. 알라나는 로드의 첫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참으로 민감하고, 위트 넘치고, 지적이며 섹시하고 부끄럼을 잘 탔다.”
부끄럼? 정말 플레이보이의 첫 번 째 조건은 ‘절대 플레이보이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가 보다.
켈리 엠버그와 로드 스튜어트
둘은 결혼했다. 여기에 악이 받친 브리트는 ‘로드를 돕느라 난 연기생활도 팽개쳤다’며 위자료 1천3백만 파운드를 요구하기도 했다.
로드의 ‘영웅본색’은 그러나 알라나와의 백년해로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1983년 금발의 롱다리 미녀 켈리 엠버그(Kelly Emberg)를 엮어 새로운 밤의 친구로 만들었다. 로드는 켈리로 짝을 바꾸기 위해 이듬해 알라나와 이혼하면서 1천만 달러, 집 한 채, 매월 1만 달러의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판결문에 사인해야 했다. 그깟 위자료가 무서워 한 여자와 눌러 살 로드가 아니었다.
그런 보무당당함에 의해 로드의 여자는 또 다시 켈리 엠버그에서 레이첼 헌터(Rachel Hunter)로 얼굴이 바뀌고 만다(하필 성이 ‘헌터’일게 뭐람. 먼저 이름에 끌린 건 아닐는지). 버림을 받은 켈리 엠버그의 분노가 터졌음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또 한 차례 ‘로드만의 특권’인 위자료 소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켈리는 위로 수당으로 2천5백만 달러에 심리적 고통에 대한 대가로 1천만 달러를 추가로 청구했다.
로드는 숨 가쁜 여성 편력에 고단했던지 레이첼 헌터와 1991년 12월 재혼한 이유로는 헌터의 명성을 접고 행복한 부부 관계를 과시중이다. 현재까지는 ‘믹의 제리 홀’처럼 레이첼이 로드의 마지막 여인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록계에서는 로드가 여자를 바꾸기 위해 최소 3천만 달러의 위자료는 썼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 정도면 ‘돈이 없으면 바람도 못 피운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화려한 여성 편력은 거대해진 록 비즈니스계 상징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음악인의 장외 사랑 행각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뮤지션들이라면 아마 바람기를 들먹이는 이 라이벌전에 눈살을 찌푸릴지 모른다. 자유의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로드와 믹의 역정은 한편으로 거대해진 ‘록 비즈니스계’를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좋게 보면 그만큼 록이 산업적 위용을 과시할 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믹과 로드의 화려한 섹스 사냥은 더 이상 록이 이름만 용의 머리고 실제 덩치는 뱀 꼬리가 아니라는 점을 내포한다.
허나 록은 하층 청년들의 제도권에 대한 삿대질이라는 노동 계급적 측면이 있다. 거리의 청춘들한테 로드와 믹의 유한(有閑) 행각은 눈뜨고 못 볼 짓일 수 있다. 로드도 과거 할리우드로 이전해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을 때 “표범의 무늬가 일생 사라지지 않듯 나는 평생 노동자 계급의 이미지를 이탈하지 않는다”고 반박한 적이 있다.
아무리 변명해도 1977년 영국이 IMF시대로 접어들어 실업의 고통에 찌든 젊은이들 눈에 믹과 로드의 사생활이 호락호락 비칠 턱이 없었다. 당시 펑크 밴드들이 가장 먼저 처단해야 할 부자 로커로 꼽은 대상이 롤링 스톤스와 로드 스튜어트였다. 이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자유라고 하지만 개인에게도 문란한 사생활은 결국 피해를 가져다준다. 믹 재거는 다름 아닌 바람기 때문에 영예로운 경(Sir)의 칭호를 놓쳤다. 2000년 1월 영국의 「더 타임스」는 “믹 재거가 음악을 통해 영국을 빛낸 공로로 작위 수훈 대상에 올랐으나 지난해 말 최종명단에서 빠졌다”고 보도했다.
탈락 이유는 브라질 출신 모델(아마도 70년 마샬 헌트 사건을 가리키는 듯)과 혼외정사를 가져 자식을 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며 그의 작위 수여에 영국의 수상 토니 블레어가 결정적인 제동을 건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평소 스톤스의 팬으로 소문난 블레어 총리가 재거의 영광 일보직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자신의 집권 노동당이 보수층을 껴안기 위해 강조해온 가족의 가치가 손상될 것을 우려해 명단에서 뺀 것으로 알려졌다.
바람의 라이벌 전에 승패를 매길 순 없다. 지나간 시절을 돌이켜 보며 로드 스튜어트와 믹 재거 두 사람 다 웃음(믹은 쓴웃음?) 지을 이른바 ‘윈 윈 게임(Win win game)’일 수 있다. 솔직히 그래서 어떤 남자들은 못내 부럽기도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남성우월주의’라는 비판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많은 팬들은 분노한다. 이런 사람들은 로드와 믹의 행각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임을 안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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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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