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후 ‘성취감’ 느끼는 살인마를 소재로…-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차가운 족쇄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아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며 4년을 보냈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글ㆍ사진 실리어 블루 존슨
201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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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족쇄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아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며 4년을 보냈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인물이 겪고 느끼는 일들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는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훗날 작가는 《죄와 벌》이 감옥에서 지은 이야기라고 전하며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슬픔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회고했다. 감옥생활을 계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그 동기에 관해 진지하게 숙고해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1847년 초,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매주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문학, 철학, 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다. 그의 방에 웬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긴급 체포되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유럽 전역에 퍼진 정치적 불안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프랑스에 공화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정치적 질서를 바로잡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잠재적인 반체제 단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그리고 운 없게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 그 감시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이 넉 달이나 이어진 끝에,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구성원들에게 전원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혹독한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던 12월의 어느 날 아침, 간수들이 스물여덟 살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죄수들을 어딘가로 끌고 가 일렬로 세웠다.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열여섯 명의 사수(射手)들이 있었다. 곧이어 죄수들은 명령에 따라 세 명씩 짝을 이뤄 나뉘었다. 가장 먼저 처형될 세 명에게 두건이 씌워졌다(도스토예프스키가 속한 무리는 다음 차례였다). 집행관의 우렁찬 신호가 울려 퍼졌다.

“장전! 조준!”

뒤이어 정적이 흘렀다.
“발사!” 신호는 없었다. 대신 특사가 가져온 황제의 새 명령문이 큰소리로 낭독되었다.

“죄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되, 사형 대신 장기간 복역형을 명하노라!”


                                                                ⓒ정가애



이 극적인 상황은 전부 니콜라이 1세가 꾸민 일이었다. 그들이 죄의 무게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사형집행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 간 후에 형량을 감해준 것이다. 얼마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1850년 1월부터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운 순간, 작가의 뇌리를 스친 문학적 영감이 어두운 감방에 한 줄기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빛은 훗날 《죄와 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에서 복역하던 시절에 이미 ‘범죄의 고백’ 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딱 알맞은 실존인물을 우연히 알게 된 덕이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
Vremya(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브레미아>는 일반인의 사회 참여를 도모하는 데 주력하는, 자그마치 5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잡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삿거리를 찾아 프랑스의 법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아주 이례적인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피에르-프랑수아 라스네르는 여느 범죄자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자의식이 강한……, 살인마였다. 라스네르는 주먹다짐을 하던 상대가 죽어버린 일을 계기로 본인이 타고난 범죄자임을 깨달았다. 죽어버린 상대 앞에서 그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듯, 성취감마저 느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관심사를 시 쓰기로 돌렸지만, 시인으로서의 평온한 삶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라스네르는 수차례에 걸쳐 강도행각을 벌였고, 매번 누군가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범죄예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쇠창살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죄를 탓하는 데 허비하지 않았다. 그에게 감방이란 문학과 정치와 종교에 관해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상한 범죄자의 사연에 매료된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네르를 모델로 《죄와 벌》의 타락한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를 탄생시켰다. 소설과 현실의 두 범죄자는 모두 살인을 돈 버는 수단으로 치부하고, 둘 다 죄질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상 라스네르는 라스콜니코프만큼 돈에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의 비애에 관해서라면, 감방에 갇힌 프랑스의 살인마보다 작가 자신이 훨씬 더 전문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1865년, 그는 돈 문제를 잊고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났을지언정 나약한 자신에게선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도 도박에 빠져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순간이 곧 《죄와 벌》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단편들이, ‘파산의 충격’으로 한데 모여 하나의 이야기틀로 짜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필에만 몰두했다. 물론 돈이 절실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꺾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어느덧 꽤 많은 분량으로 늘어난 《죄와 벌》 원고를 깨끗이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형식, 새로운 줄거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그때까지 쓴 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전했다. 과연 작가의 본능은 옳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펜이 종잇장 위를 훨훨 날듯이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866년 1월, 《죄와 벌》 제1부가 <러스키 베스트니크
Ruskii Vestnik(러시아 통보)>에 실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써왔지만, 이번 작품은 그의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는 수작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러스키 베스트니크>는 12개월 동안 《죄와 벌》을 연재했고, 그동안 정기구독자 수가 500명이나 늘어나는 특수를 누렸다. 이렇듯 문예지를 통해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 받은 《죄와 벌》은, 이듬해인 1867년에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의 대문호로, 182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과도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이것이 작품세계에 투영됐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백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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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실리어 블루 존슨 저/신선해 역 | 지식채널

작가들의 문학적 영감에 대해 늘 궁금해하던 편집자 실리어 블루 존슨은 어느 날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소설의 첫 줄이 탄생하기 이전의 일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우아한 사교계 명사를 창조하기 위해 밟았던 과정을 직접 따라가면서,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문학작품을 품은 작가들의 반짝이는 영감을 캐내보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작가들의 공통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서들

[ 백치 ]
[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 악령 ]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러시아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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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ghee0412

2013.01.01

죄와 벌의 배경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으면 그 재미가 배가 될 것 같군요 ㅎ 이런 칼럼은 책을 읽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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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10.22

죄와 벌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거였군요.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 모델이 된 사람 요즘 말로 하면 싸이코패스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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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칰

2012.10.16

이런 배경 이야기를 듣는것도 책을 읽는 것만큼 정말 재미있네요! 어렸을때 읽었던 소설이라 다시 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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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어 블루 존슨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영미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출판사 랜덤하우스와 그랜드 센트럴 퍼블리싱에서 편집자로 근무했다. 비영리 문예지 「슬라이스Slice」를 공동 설립, 운영하면서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평소 많은 작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문학적 영감을 얻고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는지에 관심이 많았던 존슨은 《댈러웨이 부인》, 《오만과 편견》, 《노인과 바다》, 《어린 왕자》 등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흥미진진한 뒷이야기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을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에 오롯이 담아냈다. 현재는 유명 작가들의 독특한 글쓰기 기술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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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풀 네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그때의 경험과 배움은 평생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의 길을 택한 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1846)로 당시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당시 비평계의 거물이던 벨린스키에게 ‘새로운 고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분신』, 『주부』, 『백야』, 『네트치카 네즈바노바』 등을 집필하면서 혁명가들과 교루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당대 최고의 문학 비평가 베를린스키로부터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1849년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을 띤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1년 『학대받은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으로 복귀했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죄와 벌』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고통과 굴욕을 리얼하게 묘사한 걸작이며, 만년의 미완성 대작인 『카라마조프의 형제』(1880) 또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실상을 여실히 그리면서 종교와 인간의 본질을 헤집는다. 그는 세계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체호프,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부터 니체와 후대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폐동맥 파열로 사망했으며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카야 대수도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작품을 통해 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로까지 그의 사상적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선과 악, 성(聖)과 속(俗), 과학과 형이상학의 양극단 사이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당대에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회적, 철학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숙고한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변치 않는 삶의 영원한 가치를 전해 준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치적·사회적으로 복잡화된 인간의 내면 심리를 그려내며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서는 과도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투영하면서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