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 동양고전을 말하다> 강연이 열린 연세대학교 대강당에는 많은 인파가 모였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인문학, 그 중에서도 특히 동양 고전에 대한 관심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2012 동양고전을 말하다>는 갈수록 깊어지는 삶의 고민들을 동양고전을 통해서 다시금 생각해보며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강연이다. <2012 동양고전을 말하다>는 2012년 9월 4일부터 매주 화요일에 14주 동안 진행된다.
14주라는 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동양고전을 공부하기 위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척 짧은 기간이 될 것이다. 하나의 동양고전을 14주 동안 진득하게 공부해도 시간이 그리 길다고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2012 동양 고전을 말하다>는 14주 동안 매주 다른 동양 고전으로 진행되기에 시간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시간이 부족할 때 필요한 것은 좋은 길잡이이다. 이날은 동양고전이라는 거대한 항해에 앞서서 어떻게 가야할지 방향을 잡아줄 기조 강연이 있었다.
기조 강연은 광고인 박웅현과 서양사학과 교수 주경철이 맡아주었다. 동양철학 강연의 기조 강연을 광고인과 서양사학과 교수가 한다? 무언가 어색하다. 동양고전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박웅현 - 세상의 모든 사물을 경건하게 대하라.
“저는 광고인입니다. 오늘도 경쟁 PT를 하고 왔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저는 『책은 도끼다』라는 책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서삼경 중에서 완독한 책이 한권도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동양고전 강의라니요. 족탈불급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저 살아가는 말을 몇 마디 하려고 합니다.”
박웅현은 매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매화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매화향이 향기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 꽃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꽃이 피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꽃이 피는 과정, 그 순간순간의 놀라운 변화에 결국 박웅현은 기적을 믿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박웅현에게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어준 범인은 정도전의 시조였다.
가지 끝의 흰 것 하나 하늘의 뜻을 보이누나
“여러분, 지식(知識)의 지와 지혜(智慧)의 지는 다른 글자임을 아십니까? 지식에는 알 지(知)자가 쓰이고 지혜에는 슬기 지(智)자가 쓰입니다. 지식은 밖에서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우리 안에서 있는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동양의 힘인 통찰입니다.”
박웅현은 서양적 사고의 힘은 호기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세상의 이치를 따지고 분석하고 파고드는 것이 서양의 힘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적 사고의 힘은 들여다보는 것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서양의 지식은 논쟁을 부르지만, 동양의 지혜는 사색과 시를 만든다고 말한다. 지난 200년은 서양적 사고의 시대였다. 하지만 서양적 사고는 주변을 타자화시키고 정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악성적 이분법이었다. 이제 주변과 관계를 맺고 서로를 연결하는 동양적 사고가 필요함을 박웅현은 말한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해 물러난다고 합니다. 이제 서양적 지식에 동양적 지혜가 서로 섞일 때가 되었습니다.”
박웅현 뿐만 아니라 많은 석학들 또한 앞으로는 동양적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동양적 지혜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시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박웅현은 한국인보다 서양인이 더 많이 찾는 불교박물관의 예시를 들며, 익숙한 것을 보지 못한다면 미래 경쟁력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익숙한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만물에 경의를 가질 때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상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경이를 가지고 바라보는 그 자세에 동양적 지혜는 피어난다.
주경철 - 고전이란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점점 커지는 것.
박웅현의 기조 강연이 끝나고 두 번째 기조 강연을 맡아준 주경철 교수가 무대에 올라왔다. 주경철은 서양사학자다. 일반적인 시선과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동양고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주경철은 이제 글로컬의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글로컬이란 글로벌(Global)과 로컬(Local)을 합성한 신조어로, 사람들의 생활 반경이 국가를 뛰어넘어 지구 규모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글로컬 시대가 되면서 정보가 빠른 속도로 유통되기 시작되었고, 세상의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해도 좋은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고리타분한 인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물론 과학 기술도 중요합니다. 학생들에게 과학 기술을 공부하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과학 기술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합쳐질 때 비로소 의미가 생깁니다.”
주경철은 인간에 대한 좌표를 인문학이 잡아줄 수 있으리라 말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소양은 어떻게 쌓아야 할까? 주경철은 고전을 읽음으로서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주경철이 말하는 고전이란 무엇일까? 흔히들 고전을 신비의 경전, 혹은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경철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주경철은 고전이란 어떤 시대에 형성된 후, 다양한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점점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17~18세기는 서양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시기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 및 서양문물을 중국에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은 동양고전의 깊이에 충격을 받고 서양으로 적극적으로 동양고전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은 동양 고전을 깊이 있게 읽고, 중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도 높여갔습니다. 반면 중국은 서양 고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배워가는 서양 오랑캐를 보며 지적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주경철이 17~18세기의 에피소드를 말한 것은 동양 고전을 읽는 자세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였다. 주경철은 동양 고전을 읽을 때 서양에 당한만큼 갚아주겠다는 자세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진중하게 동양 고전을 읽고 마음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문을 열어놓는 자세를 권하며 강연을 마무리 하였다.
김언종 - 3천년 지속된 사랑의 공식, 시경
기조강연이 끝나고 본격적인 동양 고전에 들어갔다. 이 날은 김언종 한문학과 교수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 모음집인 시경(詩經)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였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떨린다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긴 김언종은 강연을 시작하였다.
“자연 과학은 정말 많이 발전했습니다. 단순히 발전에만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문학의 보물들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고 있지 않습니다. 한문으로 쓴 한국의 책은 5천여권에 달합니다. 그 중에서 1350여권이 번역되었습니다. 번역된 책도 보물이고, 앞으로 번역될 책도 보물입니다. 이 보물들을 바탕으로 우리들의 뿌리를 알아가야 합니다.”
예전에는 시경을 시삼백(詩三百)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시를 삼백편 모아두었다는 뜻이다. 그런 시삼백의 이름이 바뀐 것은 한 무제 시기였다. 한무제는 유학을 잘 써먹으면 정치에 이로우리라 생각했고, 시삼백에 경을 붙였다. 경(經)자를 붙인 이유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담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이번 강연에서 김언종이 시경에서 뽑은 대목은 맹(氓)이었다. 많은 고전이 그러하듯 시경 또한 다양한 독법이 존재한다. 김언종은 대표적으로 맹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시인이 썼다고 주장한 모시서의 관점. 두 번째는 버림받은 여인이 썼다고 주장한 구양수의 관점. 마지막으로 음탕한 계집이 썼다고 주장한 주희의 관점을 보여주었다. 김언종은 청중들과 맹을 함께 읽으며 버림받은 그녀가 애달픈 마음으로 쓴 시임을, 즉 구양수의 관점이 시의 본모습에 가깝다고 말한다.
김언종은 이제 시대가 변했다고 말한다. 현대는 맹에서 그려진 여인처럼 남녀의 애정문제로 버림 받는 여인이 적은 사회라는 것이다. 오히려 김언종이 걱정하는 것은 남성의 문제였다. 물론 여전히 가부장제도가 존재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인류의 역사와 비교해보았을 때 가부장 제도가 존재했던 기간은 극히 짧다. 인류는 많은 기간을 모계 중심 사회로 살아왔다. 김언종은 이제 점차 모계 중심 사회로 사회가 다시 재편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버림받는 남자가 발생하리라고 예측했다.
“저는 방물장수, 잡상인입니다. 오늘은 한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경에 대한 이야기까지 많은 것을 담았습니다. 오늘 판 물건들 중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라도 사주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준민
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있는
voler08
2012.11.26
클라이스테네스
2012.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