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좋은가. 1년 새 할아버지가 돼 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이 담긴 우표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총 9장이다. 맨 아래에 있는 게 가장 오래됐다. 1967년7월1일 발행된 제6대 대통령 취임기념 우표다. 7원이다. ‘청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팔팔해 보인다. 당시 그는 만 50세였다. 가운데 시가 적힌 공간을 넘어 수직으로 올라가면 가장 가까운 곳에 1971년 우표가 보인다. 제7대 대통령 취임 기념이다. 3원 올랐다. 10원. ‘3선개헌 덕분에 가능했던 대통령 자리’라는 보충설명이 필요하겠다. 이때의 얼굴사진은 4년 전 우표 속과 같다. 이번엔 왼쪽 가운데 우표로 눈을 돌려본다. 1974년 포드 미국 대통령 방한 기념이다. 역시 10원. 박정희의 얼굴이 조금 노숙해졌다. 그 오른쪽에 있는 1978년 제9대 대통령 취임기념 우표에 이르면 완숙미가 더 느껴진다. 값은 20원으로 두 배나 올랐다.
문제의 우표는 맨 오른쪽에서 가운데 것이다. 1년 지났다.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기념이다. 우표 속의 박정희는 훌쩍 늙어버렸다. 아니, 갑자기 노인이 된 느낌이다. 이전의 우표 속에선 반질반질했던 피부까지 거칠어지고 생기를 잃은 듯 보인다. 발행일은 1979년6월29일이다. 그 바로 위 우표도 같은 해다. 세네갈공화국 레오뽈 세다르 생고르 대통령 방한 기념으로, 두 달 전인 4월22일에 발행됐다. 이 우표 속에도 젊은 박정희가 있다. 그렇다면 2개월 만에 급격히 노화가 진행됐단 말인가? 나는 그 비밀을 안다. 이 모든 건 우표 속에 나란히 있는 카터 미국 대통령을 향한 무언의 시위다. 카터, 당신이 마음고생 시켜 늙었버렸다는 항의성 메시지!
이 9장의 우표들은 아버지의 스크랩북 제12권(1979년) 첫 장에 모여 있다. 아버지는 왜 그동안 수집해온 대통령 우표들을 이곳에 붙여놓았을까. 시의 제목이 말해준다. ‘현실과 종말’. 그러고 보니 ‘종말’을 맞이한 대통령을 기념하는 듯하다. 맨 왼쪽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추모우표’는 그 결정판이다. 1979년10월26일 박정희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피격당해 목숨을 잃은 지 100일째 되던 1980년2월2일, 대한민국 체신부는 박정희 대통령 추모우표를 발행했다. 중학교1학년 끄트머리의 겨울방학이었던 그 날 아침, 나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추모우표를 사기 위해 동이 트기도 전 동네 우체국 앞에 나가 줄을 섰다. 어린이와 청소년들 사이에 한창 우표 수집 붐이 불 때였다. 영정사진 속의 박정희는 도로 젊어졌다. 가격은 또 올라 30원.
박정희가 카터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그 궤적을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확인해본다. 스크랩북 제12권을 잠시 덮고, 1977년과 1978년치 신문기사가 담긴 제11권부터 편다. 1977년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므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미군철수 반대 않겠다 박대통령, 연두기자회견 북한동포에 식량원조 용의 박정희 대통령은 12일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적화통일 망상포기의도를 확인키 위해 우리가 전에 제의한 남북한상호불가침협정안을 북한당국이 받아들일 것을 다시한번 제의한다”고 밝히고 “이 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된 연후에는 주한미군의 철수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이 제의에 대한 북한당국의 성의있는 회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상오 10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약 2시간18분 동안 계속된 77년도 연두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중단된 남북대화도 이 문제부터 다뤄나가기 위해 재개되어야 하며 북한당국이 서울에 오는 것을 꺼려한다면 중간지점인 판문점이나 그밖의 서로 합의하는 제3의 장소라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하략) (1977년1월13일치 <한국일보>) | ||
주한미군은 대소 견제에 중요역할 박대통령 외신회견 “NATO와 2대근간” 지상군의 계속주한요청은 않겠다 “북괴 단독남침 격퇴 자신” 【서울UPI동양=본사종합】박정희 대통령은 22일 자신은 미국에 대해 주한미지상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을 요청할 의사는 없다고 말하고 그러나 주한미군과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미국의 대소 견제에 2대근간이 되고 있으며 특히 주한미군은 중공의 대소견제에도 정치적으로 유익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지적, 미국정책수립자들은 주한미지상군의 중요성과 전략적 가치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고려할 것을 촉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로드릭 비튼’ UPI통신사장, ‘클로드 루세’ AFP통신사장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중공 또는 소련의 지원을 받지 않는 북괴의 단독남침을 스스로 격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한국이 이제는 군사력에서 북괴를 앞서고 있다고 말했다. (중략) 박대통령은 “주한미지상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한다는 미국정부의 정책이 공식화돼 있으므로 더 이상 미군을 주둔시킬 것을 요청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주한미지상군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관련 막중한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미국의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략) 박대통령은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대부분의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일부 함대함(艦對艦)미사일과 대잠함(對潛艦)헬리콥터들을 ‘프랑스’로부터 구매했다”고 밝혔다. 박대통령은 주한미지상군의 궁극적인 철수에 대비해 왔으며 앞으로 그러한 준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박대통령은 이어 미국이 한국방위에 필요한 충분한 양의 무기를 한국에 계속 판매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하고 미국이 앞으로 4,5년간 충분한 무기를 한국에 판매한다면 한국의 자주국방능력은 주한미지상군 철수로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주한미지상군이 철수한 뒤에는 미 공군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략) 박대통령은 그러나 한국이 앞으로 4,5년 내에 북괴침략을 저지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유사시에 중공이나 소련의 개입전망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이 소련과 타협을 하든지 혹은 중공의 소련견제역할이 약화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하략) (1977년4월22일치 <동아일보>) | ||
철수가 괴롭혔다. ‘철수와 영희’의 그 철수가 아니다. 미군철수. 박정희에겐 악몽 같은 존재였다. 한데 위의 두 기사 속에서 박정희는 의연해 보인다.
“남북한상호불가침협정안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철수에 반대하지 않겠다.” “더 이상 미군을 주둔시킬 것을 요청할 의사는 전혀 없다.” 전자는 작은 전제를 달았고, 후자는 그 전제마저 포기했다. 진심인가?
철수가 시작된 건 1971년부터다. 그해 3월27일 주한미군 제7사단 2만 명이 한국을 떠났다. 단계적 추가 철수안도 발표됐다. “아시아 방위의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 져야한다”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된 지 2년만이었다.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한-미간의 줄다리기와 물밑 거래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부통령이었던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해 수행했다. 그는 1976년 겨울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도전했으나, 남부 조지아주 땅콩 농장주의 아들이자 해군 장교 출신인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에 패했다.
카터 대통령이야말로 ‘철수계의 저승사자’였다. 그는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이었던 1976년 6월부터 ‘주한 미 지상군 철수’를 공약 중 하나로 내걸었다. 1977년1월20일 대통령 취임연설에서는 “우리가 자유민이라는 이유로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밝히며 박정희의 심사를 긁었다. 이 말은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무장한 한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1977년3월10일엔 5년 내에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카터의 화두는 ‘인권’과 ‘양심’이었다. 한국은 그 중요한 시험무대였다. 베트남전 철수 이후 미국인들은 자국의 젊은이들이 이국의 전쟁터에서, 그것도 남한 같은 1인 군사독재 국가를 위해 피 흘리는 걸 원치 않았다. 유신독재에 경고음을 날리며 ‘미 지상군 철수’ 카드로 압박했던 이유다. 기사로만 보면 박정희는 쫄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반미주의자들에게는 ‘의외의 자주적 모습’으로 비쳤을 수도 있겠다. 아버지로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 눈에는, 박정희가 조심스럽지 않게 미국에 대드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과욕의 자신은 과대망상의 비극을 만들 수가 있다 |
성의가 없는 글이다. 가운데엔 비문도 있다. 어쨌든 ‘과대망상의 비극’을 우려한다. “더욱 계산하고 더욱 조사하고 더욱 연구해야 한다”는 충고를 한다. ‘과욕’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신문기사 속 박정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 같다. 박정희 밑에서 6년간이나 중앙정보부장을 했고,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형욱도 그랬다. 물론 전혀 다른 이유에서다. <김형욱 회고록> 제3권엔 ‘왜 박정희는 진심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바랬던가?’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장이 있다. 그중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나를 더 격발시킨 것은 주한미군은 철수해도 좋다는 식으로 정부 대변인을 시켜 다분히 감정적인 반발을 보이고 있던 박정희의 태도였다. 앞서 몇 차례 밝힌 바 있지만 나는 박정희의 사상동향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해방 전과 정부수립 이전의 그의 경력은 말할 것도 없고 1972년 유신선포를 전후하여 김일성과 비밀흥정을 벌였을 때만 해도 나는 박정희가 김일성과 무슨 비밀거래를 교환했는지, 그 내용에 자못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반미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미국 놈들은 꺼져야 해’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해도 좋다는 박정희의 발언을 전문하면서 나는 불현듯 그가 겉으로는 다분히 감정적인 반발을 하는 척 하면서도 내심으로 사실은 차제에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을 노리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의혹이 번개처럼 나의 뇌리를 때렸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박정희와 김일성의 야합이 사실상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는가 말이다.” |
‘정통 반공주의자’를 자처하는 김형욱은 늘 ‘전향한 공산주의자’였던 박정희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초기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박정희의 사회의주의 활동 경력과 관련한 비밀보고서를 몰래 읽으며 고뇌에 빠지기도 했던 터였다. 박정희가 김일성과 야합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노파심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67년 대통령선거에서 상당수 유권자들이 “박정희가 실은 좌파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찍어준 일을 염두에 두면, 무리한 생각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철수 이야기는 계속된다.
미의 대한방위공약은 확고 싱글러브소장은 해직될 듯 【워싱턴=이웅희특파원】 ‘카아터’ 미국대통령은 20일 주한미지상군철수계획추진에는 변화가 없으나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은 확고부동한 것이며 어떤 가능한 침략자도 우리의 공약을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조디 파우얼’ 백악관대변인은 이날 “주한미지상군철수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지구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는 미국결의의 확고성과 한국에 대한 우리의 공약을 어느 가능한 침략자도 의심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이같은 그의 경고는 북괴를 두고 한것이 분명하다. 백악관대변인 “어떤 침략자도 의심말라” “미지상군 철수는 불변” 카아터, 내일 싱글러브 면담 ‘파우얼’대변인은 주한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의 ‘워싱턴’ 소환과 관련, ‘싱글러브’ 소장의 발언은 선동적인 것이며 다른 주한미군 고위장교들이 주한미지상군 철수계획에 반대의사를 개진했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카아터’ 대통령이 ‘싱글러브’소장을 21일 만나게 될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의 보좌관들은 ‘싱글러브’소장이 직위해제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들은 ‘카아터’대통령이 군지휘관 출신임을 기억해야하며 상황이 명백하다고 말함으로써 ‘카아터’대통령이 강경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파우얼’대변인은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위치한 서태평양에서 군사적 균형을 계속 유지할 결심이라고 말하고 “한국은 미공군의 계속적인 지원을 받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파우얼’대변인은 ‘카아터’대통령이 “한국 및 일본 두 나라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한 연후에 비로소 주한미지상군을 철수할 의향”이라고 거듭 밝혔다. “발언내용에 유감없다” 【뉴우요오크 로이터 합동】‘지미 카아터’ 미국대통령의 주한미지상군철수계획을 실책이라고 비난하여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에 출두해서 그 발언을 해명하라는 소환령을 받은 주한미군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은 20일 자신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대통령에게 사과하겠으나 ‘워싱턴 포우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를 고수하며 발언내용에 아무 유감이 없다고 말했다. (1977년5월21일치 <동아일보>) | ||
위 기사에서 핵심은 ‘존 싱글러브’ 주한미군 참모장이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 1977년 5월 9일치 인터뷰에서 카터의 주한 미 지상군 철수계획을 비판했다. 내용은 이렇다. “카터의 철군 계획은 2~3년 묵은 군사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지난 12개월 동안 북한 군사력은 훨씬 강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한에서 미 지상군을 모두 빼 가면 남북한 모두에게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인식돼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 화가 난 백악관이 소환령을 내렸다. 그는 “물의를 일으킨 데 사과하겠으나 발언내용에는 아무 유감이 없다”고 맞섰다.
이른바 ‘싱글러브 항명 사건’이다. 이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 항명사건이라고 한다. 첫번째 항명사건의 주인공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였다. 그는 1951년 4월 만주폭격 등을 둘러싸고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하다 해임됐다. 미국 언론은 싱글러브를 ‘제2의 맥아더’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며칠 뒤 미국은 한국에 특사를 보낸다.
한국방위공약준수를 다짐 | ||
철수냐 안 철수냐. 얼마나 지겨웠으면 <한국일보>의 두꺼비가 엉엉 운다. “하도 재미가 없어서….” “신문이….” “몇 해를 두고 철군문제만 밤낮….” <동아일보>의 ‘고바우영감’에선 한 사내가 신경과를 찾아간다. 그의 이름은 ‘철수’다. 의사에게 “온통 세상 사람들이 내 얘기만 하는데…”라고 하소연한다. 텔레비전에선 “철수, 철수”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온다. 철수 타령은 계속된다. 이번엔 카터가 등장했다.
한국피침 땐 핵무기 사용 | ||
제목엔 ‘한국 피침 때 핵무기 사용’이란 말이 있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머리를 갸웃거리게 된다. 기사 속엔 그런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핵무기 사용’에 대해 기자의 질문은 있었지만, 카터는 “원자무기로써 전략적 엄호를 하고…”라고 말했을 뿐이다. ‘핵무기 사용’이라는 단정적 제목은 확대해석이며 오해의 소지가 있다.
카터는 주한 미 지상군은 단계적으로 철수하되 공군 및 해군 지원은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지상군과 미국의 해ㆍ공군이 결합하고 이 모두가 미국 핵무기의 우산 속에 있다면 재래식 전쟁억제는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을 것 같다. “어디 두고 보겠다…약속을 지키는가 말이다”라는 투로 글을 썼으니 말이다. 그동안 박정희를 비판했던 아버지가, 박정희를 염려하는 분위기다.
이불이불(耳不耳不) |
핵무기가 나왔으니, 박정희의 핵 이야기를 해보자. 박정희는 69년경 핵구상을 했고, 72년 핵개발에 착수했으며, 의지의 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78년경 중단을 했다는 게 정설이다. ‘핵’은 닉슨 독트린 이후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나왔다. 박정희는 국방과학연구소에 ‘백곰’ 미사일 개발팀, 핵무기 개발팀 등을 두고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대거 불러들여 채용했다고 한다. 미국은 국방과학연구소의 미사일 개발팀이 사정거리가 350km나 되는 미사일을 만들려고 하자 180km로 낮추도록 압력을 넣고, 핵무기 개발팀이 벨기에에서 핵분열물질인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는 중수로를 구매하려 하자 이를 무산시켰다. 최근의 ‘북핵’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내용들은 박정희가 핵을 민족주의의 무기로 사용하려 했던 양 부풀려져 “81년 국군의 날 원자탄을 공개한 뒤 하야할 계획”이었다거나, “핵무기 개발 의지 때문에 미국의 사주를 받은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소설같은 의혹으로 재생산되기도 했다.
박정희에겐 또 다른 핵무기가 있었다. ‘로비’였다. 1976년10월24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정부, 미국 정치인들에 수백만 달러 뇌물 제공’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주인공은 박동선. 이 사건은 ‘코리아게이트’로 불렸다.
‘박동선 청문회’종료 김형욱 등 한인 증언 【워싱턴=이웅희특파원】미하원윤리위원회는 21일 오후 3일간 계속되어온 한국의 미국의회 매수사건청문회를 일단 끝마쳤다. 이날 청문회에서 마지막 증인의 증언이 끝나자 ‘화이트’ 차석 특별조사관은 미의회매수사건조사에 대한 한국정부의 협력거부는 한미관계를 악화시키게 될것이라고 말하고 매수시도사건의 2단계조사 추진을 위해 ‘한국정부의 전적인 협조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하원본회의가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결의안 초안을 낭독했다. 지난 19일부터 3일간 윤리위는 모두 12명의 증인을 출두시켜 매수시도사건의 내막을 들춰 공개했다. 박동선씨 커미션 총9백20만달러 21일 청문회에 출두한 미국의 ‘쌀생산협회’ 대표들 증언 및 윤리위조사관집계에 의하면 69년부터 76년까지 8년간 한국정부의 쌀수입으로 박동선씨가 수령한 커미션의 총액은 9백20만4천8백15달러55센트였다. 이날 또다른 증인으로 나온 김형욱씨는 박동선씨한테 대미로비를 맡기게 된 경위와 그에게 쌀수입 중계권을 주게 된 경위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박씨가 쌀수입구전에서 나온 돈을 미의원들에게 주고 있다고 말했으나 그 사실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0만달러 바꾸어 파우치편에 보내 김형욱씨는 10만달러를 암시장에서 바꿔 외교파우치로 송부한 사실등 박씨의 ‘조오지 타운 클럽’ 설립과 운영을 지원한 내용을 설명했다. 이밖에 ‘해너’ 전하원 의원과 박씨의 부탁을 받아 박씨를 쌀수입 중계인으로 결정하도록 67년 당시 조달청장 김원희씨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김형욱씨는 증언했다. 이날 증언한 한국인은 이근팔씨(70년에 사임한 전주미대사관 직원) 유재신씨(박동선씨 회사 고용원) 등이었다. 이씨는 박동선씨가 양두원 주미공사를 자주 방문하는 등 무척 가까운 사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한때 김동조 주미대사가 박동선씨를 가리켜 “주미대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만한 젊은이”라고 몹시 불평을 한일이 있다고 말했다. 윤리위 조사관은 9월30일자로 작성된 ‘박동선활동의 결과’라는 박씨 사무실에서 발견된 장문의 문서를 제시하자 유재신씨는 이문서가 “서울에 송부된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박씨 활동의 상황 수단방법 자금사용내역 활동결과 분석평가등 항목으로 나누어 박씨의 활동을 성공적인 것인양 표현한 것이었다. 이 문서는 박동선씨 ‘영향하’에 있는 사람이 상하양원에서 1백20명 행정부관리및 기타 30명 도합 1백50명이며 박씨를 “미국정계와 폭넓은 접촉을 가졌고 독신자라 활동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으며 상류사회에 찬란한 설득력과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문서는 총평가 부분에서 박씨가 로비를 개시한지 6개월 만에 미국의 대한군수에 관련, 상하양원의원과 행정부 관리 및 백악관보좌관등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포섭할 수 있었다고 격찬했다. 21일 증인들의 증언이 끝난뒤 ‘플린트’위원장은 서울에서 있었던 한미양국법무성관리들의 절충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자워스키’ 특별조사관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울에 가지 않겠다고 했던 판단은 옳았다”고 말했다. ‘플린트’위원장은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매수시도사건 제2단계조사에 관해 청문회를 다시 열겠다”고 이날 말했다. (1977년10월22일치 <동아일보>) | ||
박동선은 고등학교 때 미국에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뛰어난 사교성으로 개척한 미국 내 폭넓은 인맥의 힘을 빌어 한국의 정관계에 손을 뻗쳤다. 한국의 정치 실세들이 군사원조를 하는 나라 의원들의 청을 뿌리칠 수 없음을 꿰뚫어보았다. 결국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후원을 업고 1968년부터 미국과 한국 사이의 쌀 중개권을 얻었다. 김형욱이 어떻게 박동선에게 쌀 중개권을 얻게 해줬는지는 위 기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77년 2월부터 한미관계 조사를 위해 가동되었던 프레이저 위원회에서의 청문회 내용이다.
당시 뉴욕에 망명 중이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박정희가 듣기 싫어할 소리만 골라했다. 박동선을 지원하기 위해 10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바꿔 외교 파우치(행낭)로 송부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기사 속의 문서에 따르면 박동선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이 상하 양원 1백20명, 행정부 관리 및 기타 30명 도합 1백50명이었다고 한다. 박동선이 지녔다는 ‘상류사회에 찬란한 설득력’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박동선은 김형욱이 물러나며 잠시 중개권을 잃기도 했으나, 1972년 친분이 두터운 미국의 리처드 해너 의원 등이 압력을 넣어주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다시 중개권을 얻었다. 박동선은 쌀 중개로 미국의 쌀 수출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커미션을 챙겼다. 1978년2월 박동선의 미 상ㆍ하원 윤리위원회 증언에 따르면, 박동선은 한국에 대한 쌀 판매로 약 920만 달러를 벌어 이 중 800만 달러를 로비활동 등에 지출하였다. 같은 해 4월 청문회에선 하원의원 리처드 해너 등 32명의 전ㆍ현직 의원들에게 약 85만 달러의 선물과 금품을 제공했다는 고백을 했다. 197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 닉슨에게도 2만 5천 달러를 제공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로비를 했을까. 다 철수 때문이다. 어떻게든 반한 여론을 잠재우려 했고, 주한미군 철수에 대응하려 했다. 주한미군 철수가 불가피해지면, 대신 미국 의회의 예산승인이 필요한 군사원조라도 받아야 했다. 의회를 돈으로 설득하려 했다.
박동선씨 신문시작 한미, 검찰청사 회의실서 “진실증언하겠다” 선서 비공개 36개혐의 조목별질문 한미검찰공조협정에 따른 한미검찰당국의 박동선씨에 대한 최초의 직접 공동신문이 13일 오전 10시 검찰종합청사 13층 소회의실에서 시작됐다. 이날 신문에는 미국측에서 ‘시빌레티’ 법무차관(서리) ‘미첼’ 한국문제담당 검사 ‘존 T 코텔리’ 검사및 ‘마이어’ ‘루이스 에반스’ ‘프랭크 코넬리’ 미연방수사국 특별수사관등 6명이, 한국 측에서는 안경상 서울지검 공안부장검사, 김유순 법무부 검찰4과장 서울지검의 유길선 서익원 한영석 검사등 5명이 관여했으며 12일 밤 내한한 미하원윤리위원회의 ‘카푸토’의원 상원윤리위의 ‘스윌링거’전문위원이 업저어버자격으로 참관했다. 또 박동선씨의 변호사 ‘헌들리’씨와 문인배씨가 참석, 신문받는 박씨를 거들었다. 신문에 앞서 박씨는 신문실옆에 마련된 특별법정에서 서울형사지법 한정진수석부장판사와 주한미국총영사 ‘차알스케네디’씨 앞에서 진실한 증언을 한다는 선서를 했다. 이날 미 측은 박씨와 마주앉은 ‘시빌레티’차관이 박씨에게 첫 질문을 시작했으며 미국측의 신문이 계속되는 동안 한국검찰은 대기석에 앉아 신문내용을 경청했다. ‘시빌레티’ 차관의 좌우에는 ‘미첼’ ‘코텔리’ 검사가, 바로 뒷좌석에는 미연방특별수사관3명이 앉았다. 이들의 신문이 끝난후 한국검찰이 신문을 이어받아 교대로 진행했다. 신문은 공조협정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됐고 신문내용은 밝히지 않기로 합의돼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박씨가 미국에서 의원들과 공직자에 대한 뇌물수수등 불법적인 로비활동으로 미연방법원에 기소된 36개 혐의사실에 대한 조목별 질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측의 신문내용은 ‘조이스 바네르’ 법원서기에 의해 속기됐고 한미양국어로 동시 통역됐다. 박씨의 증언에 의혹이 있다고 생각할때는 병실에서 ‘코넬리’연방수사국 특별수사관이 조작하는 거짓말 탐지기실로 박씨를 데리고 가 테스트를 하게된다. 이날 1차신문은 정오에 끝났으며 점심을 든 후 오후1시부터 계속됐다. 신문은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통상 공공근무시간인 오전 9시반부터 오후5시반까지 계속되며 신문횟수에는 제한이 없다. 신문은 10일동안 실시될 예정이다. (1978년1월13일치 <동아일보>) | ||
박동선은 1977년9월22일 뇌물 제공과 선거자금 불법 제공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박동선의 소환을 거부하던 한국 정부는 한국에서의 검찰 공동심문을 받아들였고, 면책특권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78년2월미국 의회 윤리위원회와 청문회에 박동선을 출석시킨다.
철수, 철수 하던 언론은 이번엔 박동선, 박동선 타령으로 선회했다. ‘고바우 영감’ 속 라디오는 ‘박동선’만 읊어댄다.
그렇다고 ‘철수’가 죽지는 않았다. 박동선은 당연히 ‘철수 억제제’가 아니라 ‘철수 촉진제’로 작용했다. 아래 기사들은 여기에 맞서려는 여론전처럼 보인다. 또 철수, 철수, 철수, 아니 철수반대, 철수반대, 철수반대다.
“북괴 서울기습점령 가능” | ||
북괴 남침땐 즉각 개입 | ||
어쩌면, 카터는 왕따였다. 미 정부보고서는 미군철수에 불리한 조사결과물을 뱉어냈다. 위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해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도 철수에 불리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기본적으로 군부와 미중앙정보부(CIA)는 주한미군철수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미국에서도 국방ㆍ안보 기득권세력은 완고했다. 기사에서 보듯 “미군철수를 위해선 대한보완군원법 승인과 철군추진은 뗄 수 없는 한묶음”이란다. 대한보완군원법 승인 없이는 미군철수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대한보완군원법’이란 ‘미군철수보완을 위한 특별국제안보원조법안’이다. 한국방위력이 주한미군철수로 약화되지 않도록 매년 2억7천5백만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의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었다. 의회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자 미 지상군 철수계획도 차츰 미뤄졌다.
그리고 도청사건이 다시 터졌다. 본래 철수와 박동선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 사건이다. 1976년 10월26일 한국정부가 “박동선은 한국과 무관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자 <워싱턴 포스트>는 “10월27일 CIA가 코리아 게이트의 단서를 잡은 것은 미국 정부가 전자장치로 청와대를 도청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내보낸다. 미국은 구체적인 사항을 밝히지 않았고, 한미관계는 얼어붙었다. 박정희로서는 ‘반전의 카드’였다. 다음 기사는 그로부터 1년6개월 뒤 포터 전 주한 미 대사의 ‘도청 부인발언’ 이후에 나온 기사다. 한국정부는 미 의회가 계속 박동선 사건을 물고 늘어지자 ‘도청 문제’를 새삼스레 쟁점화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등학생들과 노인회가 ‘반미’시위에 나섰으니 말이다.
더 불편해진 ‘불편한 관계’- | ||
역시 카터는 왕따였다. 주한 미 지상군 철수문제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1979년2월 “주한미군철수를 잠정 보류한다”는 발표를 하고 만다. 국방장관 뿐 아니라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등 참모들 중 철수에 찬성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1979년 6월29일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와 어떻게든 양국 현안에 관해 담판을 지어야 했던 카터는 결국 ‘조건부 철수계획 재고’에 동의했다. ‘조건’이란 남한 군사력 증강과 87명의 반정부 인사 석방이었다. 그리고 2년6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주한미군 철수계획은 1개 전투대대 674명 철수만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렇다면 “주한 미 지상군을 계속 주둔 요청할 의사가 없다”는 박정희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김형욱이 거론한 “(김일성과 야합하기 위해)차제에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을 노리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의혹”은 오버라고 보는 편이 맞다. 대신 ‘정치적 수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77년, 박정희는 버림받을까봐 불안해했다. 미국은 1975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남베트남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자신이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 꼴이 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역사학자인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박정희가 주한 미 지상군이 철수해도 좋다고 발언한 것은 마치 애인과 싸우다 삐친 사람의 심리다. ‘그래, 헤어질 테면 헤어져!’ 또는 ‘나 밥 안 먹어’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의 자기위로라고나 할까.
1979년 6월, 카터가 한국에 온 29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버지는 약간 들떠 있었다. 카터는 아버지와 같은 계파의 기독교인이었기에 자부심이 솟았을 것이다. 7월1일 카터는 정동 미 대사관저에서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강원룡 목사 등 교계지도자들과 환담을 나눴다. 카터가 후일 미국에 있던 김장환 목사를 박정희에게 보내 ‘전도’를 시도하려 했던 것처럼, 아버지 역시 박정희가 카터에게 종교적 감화를 받기를 바랐다.
박정희로서는 카터가 더 이상 힘들게만 안 하면 그게 ‘은혜 받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정개입’으로 느껴졌을 불쾌한 ‘인권 간섭’, 5년 내 미 지상군 철수라는 협박, 김형욱을 비롯한 반한 인사들의 미 의회 청문회 출석, 박동선을 비롯한 코리아 게이트, 청와대 도청 등등. 그 와중에 99.9%의 압도적 지지로 제9대 대통령에 당선(1978년 7월6일)되었지만 별 감흥 없이 시큰둥하지 않았을까 싶다.
애초의 철수안이 거의 백지화되었음에도 카터에 대한 분노가 누그러지지 않았으리라. 이미 심신이 미약해질대로 미약해졌을테니 말이다. 술 없이는 하루도 지탱할 수 없었기에 밤마다 궁정동에서 연회를 열었고, 이것이 결국 10.26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게 나의 과도한(!) 추론이다.
다시 박정희와 카터가 함께 있는 우표를 들여다본다. 이번엔 나의 우표앨범에 꽂혀있는 것을 찾았다.
왜 카터하고 있는 사진만 이렇게 늙고 추레한 얼굴일까. 우연 치고는 묘하다. 우표사진 한 장이 어찌 이렇게 외교관계의 숨은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만62세였던 당시 박정희의 얼굴과 피부를 가장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사진이지만 말이다.
카터는 2012년4월 현재 만 88세다. ‘인권대통령’의 이력을 자랑하듯, 북한과 중동 등 분쟁지역을 돌며 평화중재 노력을 했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요즘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2년 전 북한에 갔다가 별 소득도 없이 돌아왔다는 뉴스를 본 기억만 난다. 그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시간이 나면 한국에 와서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위로의 인사를 건네라고.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와 사사건건 부딪치며 화병을 유발했던 과거에 관해, 사과까지는 아니어도 유감 한 자락 표명하면 노년의 착한 일로 남지 않을까.
카터가 방한하여 박정희 유족을 위로하는 상상을 해본다.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ssal0218
2012.08.14
uutu
2012.06.01
jere^ve
2012.04.04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