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 범인은 너다
대통령 박정희가 담배를 물고 웃는다. 부인 육영수도 싱그러운 웃음을 날린다. 사진을 파고들며 적어놓은 아버지의 시는 얄궂다. 범인은 너다! ‘경축사에 부치는 노래’라는 제목을 달았다.
글ㆍ사진 고경태
201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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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사에 부치는 노래

문세광에 총탄-
삐뚤어진 입들이 하품을 한다
녹음기에서 哭들이 들린다
범인은 너다
정치는 무서운 비탈길
충돌하는 황우와 같다


대통령 박정희가 담배를 물고 웃는다. 부인 육영수도 싱그러운 웃음을 날린다. 사진을 파고들며 적어놓은 아버지의 시는 얄궂다. 범인은 너다! ‘경축사에 부치는 노래’라는 제목을 달았다. 1974년 8월15일 오전10시23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대통령 경축사를 일컫는다. 박정희가 연단에 서서 “친애하는 남북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그 경축사를 낭독하던 도중 객석에서 누군가 뛰쳐나왔다. 총성이 울렸다. 단상에 앉아있던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실려나갔다. ‘범인은 너’라는데, ‘너’가 누구인가. 현장에서 체포된 자이니치(재일조선인) 문세광을 일컫는가.
스크랩을 앞으로 넘긴다. 1년 전, 정확히 계산해 366일 전인 1973년 8월14일. <동아일보> 4컷만화 ‘고바우영감’은 의문부호로 가득하다.


“누구 짓일까?” “누구?” “누가 그랬나?” “누가?” “????” 알 수 없는 대사 속에, 청소부는 거리에 널린 물음표들을 치운다. 만화만 놓고 보면 뚱딴지 같다. 누가 어떤 짓을 했다는 말인가. 옆 신문을 보면 눈치를 챌 수 있다. 야당 정치인 김대중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해서 쓴다. 그 유명한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동시에 박정희 암살 미수사건)에 관해서 쓴다. 70년대 한국 정치의 거물들이 한 차례씩 절명의 위기를 넘긴 결정적 순간들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종신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 정권. 1973년 새해 들어서자마자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하며 반대세력을 향해 더욱 날카로워진 이빨을 들이대고 있었다. 1973년1월부터 74년12월까지를 담은 아버지의 스크랩 제9권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아슬아슬한 얼음판을 보여준다. 정치지도자의 목숨까지 노린 두 고비에서 그 얼음판은 폭삭 주저앉곤 했다.

시간 순으로 기사를 펼친다. 먼저 1973년 8월8일 발생한 이른바 ‘88 납치사건’이다.

김대중씨 서울자택에 데려다놔
동경서 납치한 자칭 ‘구국대원’
어젯밤 집앞서 석방


지난71년 7대 대통령선거때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으며 전 국회의원인 김대중씨가 지난8일 오후 일본 동경 시내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피랍된 지 만5일9시간만인 13일 밤 10시20분쯤,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1 자택으로 돌아왔다.
오른쪽 아랫입술과 왼쪽 눈썹위가 터져 피가 맺혔고 오른쪽 발목에 두 줄의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연한 하늘색 샤쓰에 줄무늬가 있는 고동색바지를 입고 집에 돌아온 김씨는 먼저 온 기자들과 뒤늦게 달려온 기자들 그리고 외신기자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차례로 그동안 실종된 경위를 차근차근하게 설명했다.
김씨는 이날 “8일 오후 5, 6명의 건장한 청년들에게 납치, 온몸이 묶인 채로 자동차로 5, 6시간 달려 ‘오사까’(?) 부근에서 모터보트에 실려 큰 배에 옮겨진 다음 10여 시간 해상으로 끌려갔다가 천사일생(千死一生)으로 한국해안에 회항, 11일 오후 7, 8시께 한국에 상륙, 초가와 양옥에 감금돼있던 끝에 13일 밤 10시20분쯤 붕대로 눈을 가리운 채 집 근방에 내려주어 돌아왔다”고 그동안의 경위를 밝히고 “살아서 돌아올수 있었던 것은 죽음직전에서도 예수님께 꾸준히 기도하고 국내외 동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의 인사들이 걱정해준 덕택”이라고 말했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피로한 기색이 짙은 김씨는 경위 설명 도중 한참동안 눈을 감고 울음을 삼키다가 말을 계속,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반공단체인 구국동맹행동대원이라고 자칭하는 청년들은 13일에야 상부지시로 석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밤 10시20분쯤 집근처인 동교동사무소 앞에서 ‘크라운’같은 차에 실려 눈을 가리운 채 내려 청년들의 지시대로 3분 동안 뒤로 돌아서 있다가 걸어서 집에 당도, 세 번 벨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섰다고 말하면서 웃는 얼굴로 “나는 하도 겁나는 일을 많이 당해서 아무렇지 않다”고 놀란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밝혔다.
이날 밤 김씨는 도착 직후 동경에서 걸려온 김경인 의원의 국제전화를 받고 “나 김대중이요. 그동안 해상에서 사흘 육지에서 이틀동안 지내다가 집에 돌아왔소. 여러분들에게 전해주시오”라고 말했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홍익표, 윤길중씨 및 김녹영 의원과 악수했다.
그는 14일 새벽 2시경까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경위를 설명한 후 2시30분쯤 잠자리에 들어갔으나 그 뒤로도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1973년8월14일치 <동아일보>)

‘고바우영감’을 그린 김성환 화백은 아마 ‘누구’인지 감 잡았으리라. 아버지도 뻔하다는 투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역사도 없는 세대
모두가 벙어리모양 머리만
갸웃거린다
그것은 자기분수다
역사의 종말이 와도 아무런
변명할 수 없는 작란이다.
민족적인 수치
자기살을 자기가 베어내는 어리석은 불장난
망할 놈들의 비웃는 대본이
가극처럼 지하에서 춤을 추는구나



“모두가 벙어리모양 머리만 갸웃거린다”며 “그것은 자기분수”란다. “모르면 바보”라는 말씀! 마지막 문장에선 “망할 놈들의 비웃는 대본이 춤을 춘다”고 못박는다. 그 ‘대본’의 실체는 훗날 밝혀졌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다는 ‘KT 공작계획안’이었다. ‘DJ’를 뜻하는 ‘KT’라는 이니셜이 생소하다.1)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은 총 46명이 9개조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진행한 범행이었다.2) 호텔에서 토막살해하려 했다는 정황도 엿보이지만, 여의치 않았는지 배로 현해탄 바다에서 수장하려다 정체불명의 비행기(CIA로 추정)가 나타난 뒤 작업을 중단하고 풀어줬다.

1971년 대통령선거 때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을 세상에서 가장 미워한 자는 누구였을까.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신을 비판하는 그에게 치를 떤 자는 누구였을까. 김대중이 영원히 사라질 경우 박정희에게 귀여움과 칭찬을 받을 자는 누구였을까. 다시 1년 뒤 8월로 건너 뛰어본다.


박정희대통령 저격 모면
육여사, 머리에 총상 중태
범인 현장서 체포 조사중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시내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제29회 8?15경축식에서 경축사를 낭독하던 도중 괴청년 1명으로부터 저격을 받았으나 총탄이 빗나가 무사했으며 단상에 앉아있던 대통령부인 육영수여사는 머리에 총상을 입어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가료중이라고 발표했다. 김 대변인은 저격범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으며 일본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1탄불발?2탄 빗나가-현장수습후 연설계속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전문은 다음과 같다. “괴청년 1명이 8월15일 상오 국립극장에서 거행중인 제29회 광복절 경축기념식전에서 경축사를 낭독중인 박정희대통령을 저격했으나 좌절되었으며 저격범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다.
이날상오 경축식전의 앞줄좌석에 자리잡고 있던 이 저격범은 이날상오 10시20분 좌석에서 갑자기 일어서 경축사를 낭독중이던 박대통령에 대해 저격했다.
제1탄은 불발이 되었으며 제2탄은 박대통령이 사용중이던 연설대 우측에 맞고 빗나갔으며 저격범은 곧이어 단상에 앉아있던 대통령영부인 육영수여사를 저격했다.
대통령영부인은 두부(頭部)에 총상을 입었으며 경호원들과 장내에 있던 여자합창단원 1명의 자발적인 부축을 받고 퇴장하여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 수술 가료중에 있다.
박대통령은 저격범이 체포된 뒤 즉각 태연히 경축사 낭독을 계속했으며 광복절 경축식전은 예정대로 모두 끝마쳤다.
박대통령이 경축식장을 퇴장할 때 장내의 경축인사들은 박대통령에 대해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으며 박대통령은 이들에게 정중히 답례했다.
경호원들에 의해 현장에서 즉각 체포된 저격범은 현재 경찰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고 있으며 이 저격범은 일본국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앞으로 조사가 진전되는대로 계속 발표할 예정이다.


(1974년8월16일치 <한국일보>)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이송되었고, 저녁 7시경 숨을 거둔다. 기사에서 “즉각 태연히 경축사 낭독을 계속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해야 하는 ‘어려운 국가지도자 노릇’이라고 이해를 해주자. 아버지는 “모르겠다”고 썼다.

모르겠다- 퀴즈

생의 바퀴는 무쇠통
들릴락 말락 매미들이
떼를 지어 운다
오늘도 벌떼들은 휴양중
생명선 우에서 마작놀이로
세월을 보낸다
일탄(一彈) 이탄(二彈) 삼탄(三彈)-
박수를 XX 숨을 거둔다
XXXX 고관들이
쥐구멍에 코를 박는다
삶은 X의 대명사-
코고는 소리에 불발탄이
유희한다
인명은 재천
모르겠다..역사의 증인들
아, 퀴즈를 풀라

스크랩 속의 사인펜 글씨는 희미하다.


오래 전에 물기가 묻었던 모양이다. 조금씩 번졌고 탈색되었다. 아무리 확대해보아도 해독불능인 글자들이 곳곳에 박혔다. 유물을 복구하는 심정으로 힘겹게 말을 이어보았다. 아버지는 ‘퀴즈’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헷갈린다는 의미일까? 슬프면서도 뭔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이야기하려 했음일까. 다시 1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김서기관 10월23일 해임
일 정부선 10월26일 추방


【동경2일=조두흠 특파원】일본외무성 ‘다까시마?마스오’ 아훁국장은 김대중씨 사건으로 혐의를 받고 있는 주일대사관의 김동운 전 1등서기관을 일본에서 추방했다고 1일 밝혔다.
이날 ‘다까시마’ 국장은 기자회견에서 지난 10월26일 추방조치가 취해졌으며 한국정부에 같은 날 통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 의해 기피인물로 추방된 외국외교관은 김 전 서기관이 1880년의 화란(和蘭-네덜란드를 뜻함-필자 주) 외교관에 이어 2번째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한국정부가 김 서기관을 10월23일자로 해임했음을 10월25일 일본에 통고해왔다고 밝히고 일본 정부는 한국정부의 이례적인 조치에 불만, 김 서기관을 추방키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1973년11월4일치 <한국일보>)


네덜란드 외교관이 추방된 지 93년 만의 일이었단다. 그만큼 사안이 엄중했다. 사실 일본 자민당 정부도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부터 시작된 김대중 납치사건을 봉합하려 했다. 도쿄 경시청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가 현장에서 채취한 주일대사관 중정요원 김동운의 지문은 어찌할 수 없었다. 김동운 개인의 범죄로 둔갑한 셈이다. <한국일보> 4컷만화 ‘두꺼비’의 대사가 재밌다. “이 사람은 관계가 없다고 말한 것 같은데…면직을 했네!”(부인) “아는 둥 마는 둥 해두는 것이 국민의 도리요! 소주 한 병 냉큼!”(남편) 아버지는 옆에 이렇게 적었다.


비밀을 아는 자는 자기의 함정을
예언하지 않는다
역사는 살아 있는 증인
먼 후일에 모두 웃으리라



비밀을 아는 자는 자기의 함정을 예언하지 않는다. 아니, 예언하지 못한다. 납치살해를 기도했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이를 지시했거나 묵인했을 대통령 박정희는 정말 1년 뒤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박정희한테만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애매했을, 전화위복이 되고 만 그 함정!


통로로 뛰어나온 범인은 바로 연단아래까지-저격의 현장

순간의 일이었다. 불과 10여초 사이에 일어난 총격이었다. 범인이 권총을 받쳐들고 통로를 반쯤 뛰어나왔을 때까지도 그것이 저격범이라는 생각이 미처나지 않았다. 범인이 재외동포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고 너무나 대담하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관객들이 ‘사건’임을 직감한 것은 “야 임마”하는 고함이 장내를 울렸을 때였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고함소리 자체가 사건일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을 지켜본 본사 사회부 김기경 기자는 “그것은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그러나 10년을 한꺼번에 겪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고 당시를 표현했다.
(중략)
▲10시13~23분=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등에 이어 박대통령이 붉은색 카피트로 싼 10cm높이의 기단위에 마련한 연단 앞으로 나와 경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의 목소리는 낮은 듯했고 다른 연설 때처럼 때때로 섞이는 강렬한 톤은 들을수 없었다.
▲10시23~25분=1층장내 뒷좌석에서 금속성(범인이 쏜 권총은 1탄이 불발했다)이 들리고 뒷좌석쪽이 웅몼거렸다.
이어 “땅”하는 총성이 장내를 울렸다. 총성은 독립유공자가족들이 자리잡은 식장 가운데 좌석 맨 끝쪽 부근에서 났다. 일제히 돌아선 시선속에 감색싱글을 입고 검은테 안경에 머리를 뒤로 빗어넘긴 모습의 35~36세 가량의 청년모습이 들어왔다. 청년은 권총을 두 손으로 뻗쳐 받쳐들고 식장 한가운데에 나있는 객석과 객석사이 통로를 뛰어나오고 있었다.
청년의 키는 1m72cm정도로 무척 건장한 체격.
범인이 리벌버형으로 보이는 권총으로 1발 더 쏘면서 중간쯤 달려나왔을때 “이놈아”하는 고함소리가 장내를 크게 울렸다.
순간 박대통령의 경축사 낭독소리가 그쳤다. 식장을 가득 매운 참석객들은 엄숙한 식장 분위기를 깨뜨리는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몇초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불길한 총격사건임을 느꼈다. 박대통령은 방탄벽으로 만든 연단뒤로 자세를 낮췄고 경호실장등 5, 6명과 정일권국회의장이 연단을 에워쌌다.
범인이 객석과 객석사이 통로를 다 빠져나가기 직전 구보속력을 줄이는듯하면서 연단을 향해 다시 1발의 총탄을 발사하는 순간 범인이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누군가가 범인의 발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 범인을 제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범인의 행동은 빨랐다. (중략)
이때서야 장내 참석자들은 육여사에게 시선을 모았다. 육여사의 오른쪽 이마와 뒷머리 가운데에서 선혈이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거의 동시에 성동여자실업고교생 합창단석에서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려나와 또한번 장내인사들을 놀라게 했다. 합창단원이었던 장봉화양(18?상과2년3반)이 피격된것을 여학생들이 육여사의 피격사실과 동시에 뒤늦게 알고 지른 비명이었다.(이하 생략)


(1974년8월17일치 <한국일보>)

한국 정부는 “북괴가 조총련 오사카 간부 김호룡을 통해 문세광에게 암살 지령을 내렸다”고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문세광은 오히려 조총련과 정반대인 ‘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소속이었다. 박정희 정부를 싫어했을 뿐이다.


김대중 구출 재일한국인대책위원회 오사카위원회 사무차장 직책을 수행할 정도였다. 우연히도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을 승용차로 이동시킨 뒤 모터보트에 실어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에 옮긴 곳이 오사카항이었다. <김형욱 회고록>에 등장하는 “김대중 납치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박정희를 살해하려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리”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육영수 여사를 과연 지독한 근시였던 문세광이 저격할 수 있었냐는 식의 진위 공방도 있었지만, 일단 맞다고 해두자. 분명한 사실은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업보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범인은 바로 너다! 이 글 맨 위에서 활짝 웃고 있는 자 말이다. 그 웃음의 연장을 위하여 정적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꼴을 당해주어야 했다. 다시 1년 전이다.


나는 예상했던대로 “바다에 던져지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모터보트로 옮겨 보자기를 씌운 후 1시간쯤 가더니 큰 배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배는 속력을 내어 한없이 달렸다. 전에 해운업에 손댄 일이 있는 내경험으로는 아마 북태평양 근방이나 ‘사모아’ 같은 남양(南洋)까지 끌고 간 것으로 짐작되었다. 얼마를 가더니 그들은 나를 배에 눕혀놓고 처음의 결박을 풀고 다시 온몸을 단단히 묶고 입에 자갈을 물렸다.
바다에 던져질 각오로 십자가를 그었더니 그들은 나를 때렸다.
조금전 그들끼리 12시50분이라고 하는 얘기를 들어 어림짐작으로 밤1시쯤 된 줄 알았다.
그들은 어떻게 훈련이 잘돼있는지 절대로 다음 행동을 눈치채게하지 못하게 했다. 식사를 주는 사람은 친절했으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장소가 어디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배위에서 끌어내려 선내 밑바닥으로 옮겨졌다. 묶은 것을 풀고 본격적으로 다시 묶기 시작했다.
두팔을 앞으로 묶고 50kg정도의 물체를 달고 발에도 같은 무게의 물체를 매달아 상하좌우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 입에 자갈을 물려 눕혀놨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그렇게 하면 빠진다” “솜이불을 덮어야 안 떠오르지” “후까(일어로 상어)…”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전부 한국어로 말했으며 경상 충청 전라 경기도의 액센트도 있었다.
한국어를 아주 잘한 것으로 미루어 재일교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이제 마지막 던져질 단계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예수에게 기도했다. 당분간 내대신이 없으니 살려달라고 했다. (이때 약2분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이때 갑자기 발동소리 비행기 엔진 같은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미친 듯이 배가 요동쳤다. 꽤큰 배였고 롤링도 없고 빨라 천 마력은 되는것 같았다. 붕대위로 얼핏 보니 빨간 불빛이 번쩍여 이것이 고비라고 생각했다. 배는 또 10여 시간 달렸다. (1973년8월14일치 <동아일보>, ‘김대중씨가 말하는 피랍 닷새’)

김대중의 체념을 생각해본다. 정신적 진공상태에서 오히려 ‘평안’했을까. 나는 잃을 수도 있다. 억울하지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끝이다. 그런데 하느님, 저 데려가셔도 좋은데요. 살려주시면 기쁘게 살겠습니다.
캄캄한 밤, 칠성판에 사지가 묶인 채 망망대해에 던져져 상어밥이 되려 했던 상황. 그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신은 그를 살려주었다. 납치사건을 통해 김대중은 더 단단해졌고 세계적 정치 지도자로 우뚝 섰다.

박정희의 체념도 생각해본다. 총성이 귀를 때린 뒤, 부인이 실려 나가는 순간 큰 충격에 휩싸였을까. 잃을 수도 있다. 나는 살았지만 부인을 잃을 수도 있다. 연단 밑에 숨었다가 일어난 뒤 경축사를 태연히 읽기는 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으리라. 정치적인 득실도 계산했을까? 정치에 괜한 욕심을 부렸다고 후회했을까?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은 민주화세력을 때려잡을 명분을 주고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머리를 숙여야 했던 일본에게 거꾸로 조아림을 받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3)


그가 나중에 “납치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고 하며 비통해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이후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미뤄보건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다. 범인은 너다. 빛바랜 파란 사인펜 글씨가 점점이 흩어진 뒤 권총의 형상이 되어 나타나 사진 속 그의 머리를 겨누는 상상을 해본다. 웃지 말고, 담배 끄고 …자백하라! 죄 없는 49세 여인 육영수는 결국 당신이 죽였다고!!




◆ 참고한 책
『김형욱 회고록-제3부 박정희 왕조의 비화』(김형욱?박사월 지음, 아침, 1985)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지음, 동아일보사, 1992)
『한국현대사 산책-1970년대편 2권』(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2)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주요 의혹사건편 上권(2)』(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편집, 국가정보원, 2007)




1) 왜 당시 김대중의 이니셜은 ‘KT’였을까. 국정원 과거사위(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미국 CIA 보고서가 김대중의 영문 이름을 ‘KIM DAE CHUNG’라고 표기한데서 연유했다고 추정한다.

2) 김대중 납치사건의 현장 총책임자였던 김기완 전 주일공사는 현 주한 미국대사인 성 김(한국이름 김성용)의 아버지다.

3) 김대중 납치사건 뒤 박정희는 김종필 총리를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1973년11월3일치 <한국일보>는 “김총리, 다나까 수상과 회담”이라는 제목으로 전날의 일본 방문을 전한다. 한국언론에서는 ‘회담’이라고 보도했지만 일본 언론에선 ‘사죄한다’는 의미의 ‘진사식’(陳謝式)이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1년 뒤 상황은 역전했다. 문세광이 일본 정부 발행의 여권으로 입국했고, 일본 경찰에서 훔친 권총을 저격에 사용했다는 이유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사죄를 요구했다. 각계각층에서 ‘화형식’ ‘할복기도’ ‘투석전’ ‘단지(斷指) 항의’등의 과격한 반일시위가 조직된다. 1974년9월19일 다나까 수상의 특사인 시이나 자민당 부총재가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를 예방하고 1년 전 받은 ‘진사’(陳謝)를 돌려준다.




 
#박정희 #고경태 #근현대사
1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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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2012.02.02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모이게 되면 그것들이 곧 우리의 역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예전에 저도 스크랩을 곧잘 했었는데, 지금은 손을 놓은지 제법 시간이 흘렀습니다. 스크랩철을 몇개 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내 자녀들도 이런 스크랩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될지 그저 궁긍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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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1.31

시의 'XX' 표시가 신경쓰이네요. 혹시 내가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하며 뚫어지게 관찰했답니다. 결국 한글자도 못 했지만. 그런데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도 음모론이 있었군요. 그냥 단순하게만 생각했는데.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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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2012.01.31

이장희의 노래 <그건 너>가 생각나네요. 그건 너 , 바로 너...'범인은 너'하면 그냥 범인이 되어버리고 말던 시절, '내가 안 그랬는데요'가 전혀 통하지 않던 암울했던 시절. 그렇게 해서 억지 누명 뒤집어쓰고 억울한 옥살이 하다 좋은 세상 오자 풀려난 사람들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육영수 여사 저격범이 정말 '문세광'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언론 플레이조차 없이 권력자가 '범인은 너'하고 말하면 경찰과 검찰은 그대로 언론을 통해 발표를 해버리니 언론도 딱히 하고픈 말 할 처지는 못되었겠지요. 세월이 이렇게 흐른 뒤에야 언론들은 '이제야 말할 수 있다'는 때늦은 당당함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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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