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호랑이’ 박정희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바야흐로 박정희 일인시대로 질주하던 때였다. 1년 전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내부 반대세력을 하나둘 성공적으로 제거해나갔다. 거칠게는 ‘반혁명음모’, 얌전하게는 ‘사표제출’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모셨던 선배 장도영과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겼던 송요찬도 날려버렸다.
201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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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흥분했다.
최근 인기폭발중인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엔 “가카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아버지 역시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렇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분이었다. (자주 벌어진 일은 아니었으나) 아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격한 말을 보탤라치면 걱정스런 눈길로 “나쁜 쪽으로만 보지 말라”고 충고하셨다. 늘 조심스러웠다.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분이, 이렇게나 흥분하시다니!
차라리 구두꾼을 먹어라
런던에 여섯 살 난 어린애가 배가 아퍼 죽겠다고
야단을 쳐서 수술해보니 뱃속에서 구두꾼 백십개
양말 여덟 켤레 리봉(리본)이 이십 개 그밖에 분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물건이 나왔더라는 해외뉴스 한토막이
근간에 있었다. 그런데 못 먹을 것을 먹는 경우가
비단 런던의 그 어린이만이 아니라 공금이나
뇌물을 먹는 것도 목 먹을 것을 먹는 일이다.
양말켤레쯤 먹어서는 배를 째고 끄집어낸다면
그만이지만 공금을 먹으면 입원 대신 형무소행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못 먹을 것을 먹을 경우가 있는데
즉 ‘야망을 먹는 일이다’ 구두끈처럼
배가 아파지는 것도 아니고 공금을 먹는 경우처럼
쇠고랑을 수월하게 차지는 않지만 정치적 야망
같은 것을 먹으면 구두끈이나 돈이 아니라 사람을
먹으니 큰일이다. 식인종 같으면 사람을 삶거나
구어서 소금을 쳐서 씹어나 먹지만 정치적으로
사람을 먹는 경우는 덮어놓고 통째로 먹어치우니
큰일이다. 영국의 시인 ‘새무얼 버틀러’는 정치적
권력은 마주(魔酒)라고 불렀다. 그 마주는 뭇 사람의
두뇌를 그르친다고 했다. 남이 권한다고 해서
자기 주량 이상을 마신다면 언제고 실수할 날이 올 것이다.
“차라리 구두끈을 먹어라”라고 일갈한 대상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다. ‘정치적 야망을 먹는 일’이 신문 해외토픽에 나온 ‘구두끈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를 먹는 일’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다. “덮어놓고 사람을 통째로 먹어치우기 때문”이란다. 영국 시인 새무얼 버틀러(1835~1902)의 말을 인용해 ‘주량을 넘은 마주(魔酒)’라고까지 했다. 이런 과격한(!) 글을 끄적거리던 해, 아버지의 나이는 만 27세였다.
사실 내가 온전히 떠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대개 4,50대다. 나이 지긋한 ‘어른’일 때였다. 당신에게도 정치적 관심으로 피가 뜨겁던 20대 시절이 존재했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생전의 이미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아들 입장에선 낯설다. 혼란스럽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5권 째다. 1962년6월1일부터 1966년12월30일까지 신문들이 담겨 있다. 한권에 무려 5년이 걸리다니. 게으름을 피우셨을까? 연도를 계산해보니, 학업을 마칠 때였다. 또한 결혼 직후였다. 바쁘셨나? 다른 권보다 두툼하긴 하다. 1963년 ‘대통령 박정희’의 탄생까지를 중심에 놓고 스크랩을 넘겨보았다.
다시 아버지의 글로 돌아가 본다. 구두꾼 운운한 대목 주변을 살펴보았다. 왼쪽 위에는 ‘반혁명음모 또 적발’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그 오른쪽 옆에는 ‘송수반?천재무 사의 수리’(송요찬 내각수반, 천병규 재무부장관을 가리킴-필자 주)가 놓여있다. 그 바로 밑이 하이라이트다. ‘박 의장, 내각수반직을 겸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얼굴은 원형사진으로 실렸다. 관련된 기사는 빠졌다. 대신 아버지의 글이 빼곡히 차지했다. <서울신문> 1962년6월17일치다.
아버지는 ‘송수반?천재무 사표수리’라는 제목 위에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의하면 송 수반 사표이유는 증권파동과 화폐개혁 반대 일인자로서의 낙인을 받고 물러선다는 것”이라는 비공식 해설을 적어놓았다. ‘박 의장, 내각수반직을 겸임’이라는 제목에선 ‘겸임’ 부분에 빨간 사인펜으로 네모를 친 뒤 그 위에 한문으로 이런 설명을 달아놓았다. “대통령권한대행 및 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직 겸임,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
바야흐로 박정희 일인시대로 질주하던 때였다. 1년 전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내부 반대세력을 하나둘 성공적으로 제거해나갔다. 거칠게는 ‘반혁명음모’, 얌전하게는 ‘사표제출’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모셨던 선배 장도영과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겼던 송요찬도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글처럼, 그는 몽땅 먹어치우고 있었다. ‘정치적 식인종’의 위세였다. 1962년3월22일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한 뒤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고 있었으니, 남은 목표는 ‘권한대행’ 꼬리표를 뗀 ‘진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공약’이 벽이었다.
5.16 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가 내건 혁명공약 6개항 중 마지막은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였다. 박정희는 그 벽을 넘으려 했다. 1962년10월31일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새 헌법안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통과시킨다. 두 달 뒤인 12월17일엔 국민투표에 부친다. 헌법안이 공포된 날은 12월26일이었다. 하루 뒤엔 대통령 출마의지를 밝힌다. 순조롭게 일이 풀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나 보다. 호랑이해였던 1962년 임인년을 보내고 토끼해였던 1963년 계묘년을 맞는 심정을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격동의 한 해가 황혼에 잠든다
(앞 생략)
임인년 호랑이는 간다지만 그분은
계묘년 토끼 등에 올라앉아 정사를 해보겠다고
그것은 공약위반이 아니요-
그것은 공약위반이 아니다-
호랑이 얼굴로 토끼를 노려본다
세상은 둥글고도 모진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칭찬하랴
계묘년의 노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이미 임인년 호랑이는 방을 비우는데
거기에 사람호랑이가 주인처럼 앉아있으니 웬말이냐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뜻대로 되여질 것 같지 않고
자기네가 없으면 백성이 끼니를
굶고 나라꼴이 망쳐질까봐 걱정을 한단 말이냐
세월은 아무 말이 없고 역사는 웃고만 있다
아무도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지만
의리를 모르고 약속을 곡해하는 얼굴을
계묘년 토끼만은 알고 있다
권력을 얻은 자는 권력을 마음껏 향락하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언제고 인생은 그 값을 치르고 속인으로
대가로 시공과 역사 앞에서 화초와
같이 시들 날이 있으리라
(중간 생략)
이제 그림에 호랑이는 가는구나 산호랑이는
새살림 차리기에 바쁘구나
약하고 무능한 백성이니 할말이 없다
새해엔 굶주리지 말어라 오즉 한가지
백성들이 잘 살수만 있다면 산 호랑이와
한방에서 살아도 좋으리라
“임인년 호랑이는 방을 비우는데 거기에 사람호랑이가 주인처럼 앉아있으니 웬말이냐”고 했다. 박정희가 ‘사람호랑이’인 셈이다. 계묘년 토끼해에 토끼를 잡아먹을 호랑이가 계속 주인행세를 하겠다며 으르렁거린다고 본 셈이다. 물론 “백성들이 잘 살 수만 있다면 산호랑이와 한방에서 살아도 좋으리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타협의 여지를 남긴다. “약하고 무능한 백성이니 할 말이 없다”는 전제 아래.
그 옆에 놓인 신문만평은 그림보다 글이 더 좋다. 다음 가수가 누구일지 궁금해 하는 관중들의 눈초리 속에서 철모를 쓴 군인이 악보를 들고 퇴장한다. 제목도 멋지다. ‘군가는 끝났다’.
군가는 끝났다! 박수를 쳐라! 박자와 음정이 조금은 틀렸어도 군가이기 때문에 큰 흠이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잘 불러도 ‘앙콜’을 원하지 않는 것은 역시 군가이기 때문이리라. 박수를 보내면서도 청중들의 관심은 평복을 입고 나타날 가수에게로 쏠린다.
민정복귀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희망을 ‘군가’에 빗대 재치 있게 표현했다. 아무리 잘 불러도 군가라서 ‘앙콜’을 원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선 기지가 빛난다. 당사자가 보았다면 열불을 냈으리라. 박정희 앙콜 금지? 앙콜, 재앙콜 플랜이 물밑에서 꿈틀대던 때였다. 그럼에도 1963년 새해 화두는 ‘민정복귀’였다. 박정희와 함께 군 생활 또는 ‘최고회의 활동’을 함께 했던 인사들도 “이제 좀 그만하라”는 사인을 보낸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말고 다른 최고위원들과 함께 모두 예편하라”는 직설적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실재 여부가 논란이 된 “동일 대통령의 20년 집권 법안”이 눈길을 끈다. 송요찬과 최경록은 모두 박정희의 군 선배였다. 최경록의 경우엔 쿠데타 당시 2군 부사령관이었던 그의 직속상관인 2군 사령관이었다.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을까. 돌연 ‘민정 불참’을 선서한다. 1963년2월27일. 이른바 ‘2.27 선서식’이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은 눈물까지 흘린다. 대중들은 100%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흥분한다. 언론도 감동에 취한다. <동아일보> 1963년2월27일치 사설은 ‘취해서’ 쓴 글 같다. 읽다보면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다.
미사여구들의 행진이 점입가경이다. 민족과 역사…거룩…위대…감격적인…조국은 새로운 역사의 기점에…민족 앞에 힘찬 도약…오직 영광과 희망…성스러운 공약…모든 자유인의 맹서…엄숙한 순간…우국애정.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보는 듯하다. ‘거룩한 사설’이었으나 헛다리를 짚었다. 아버지는 ‘2.27 선서식’ 기사 밑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인간은 언제나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따로
딴 주머니에 넣고 살기 마련이다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 연극
재미가 있다기보다 다음 막이 궁금한 인정이다.
모든 질서는 하나의 정돈된 각본이다
위대한 패배자도 없고 위대한 승리자도 없다
역사만이 심판자이다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 연극’. 맞다. ‘정돈된 각본’에 따른 연극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한 달도 안 돼 말을 뒤집는다. 3월16일, 기자회견을 열고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한다. 그 앞뒤로는 ‘각본’에 따른 사건 두 가지가 터진다. 모두 군인들이 주인공이었다. 첫째, 하루 전인 3월15일 수도방위사령부 장교 80여명의 ‘민정 불참선언 철회’데모. 둘째, 6일 뒤인 3월22일 장성 116명이 청와대를 찾아 ‘군정연장 지지’뜻을 밝힌 뒤 별판이 달린 지프차를 타고 서울 세종로를 누빈 위력시위.
‘군정연장 제안’에 다시 세상은 시끄러워졌지만 박정희는 끝내 ‘대통령’권좌에 올랐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크랩은 침묵하고 있다. 8월 박정희의 퇴역식과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 수락, 9?10월 선거유세, 11월 총선 등의 굵직굵직한 팩트 기사는 생략돼 있다.
불쑥 서울특별시의 대선 개표결과를 알리는 10월16일치 기사가 고개를 내밀 뿐이다. “윤보선씨를 3만여표 리드”했단다.
맨 밑엔 대통령 박정희의 사진과 함께 “제5대 대통령으로서 무궁화훈장을 받고 인사하는 박 대통령”이라는 설명이 달렸다. 그 가운데엔 <조선일보>의 칼럼 ‘만물상’이 붙어있다. “돈 주고도 못 보았을 게임…예측을 불허하는 시소게임”이라고 백중세였던 전날 밤의 개표상황을 전한다. (전국 개표결과는 박정희 46.6%, 윤보선 45.1%)
장외유세를 전하는 신문기사를 보고 싶었는데, 이 부분이 빠져 가장 아쉬웠다. 당시 특별한 쟁점 중 하나는 ‘색깔시비’였다. 1997년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후보에게, 2002년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했음직한 이념공세가 벌어졌다. 당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맞수는 구 신민당 출신 정치인들이 중심이 된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였다. 문제는 윤보선이 박정희에게가 아니라, 거꾸로 박정희가 윤보선에게 의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1948년 11월11일 남로당 가입 혐의로 체포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 후보의 경력 때문이었다. 하필 대선이 벌어지던 그때, 박정희를 만나러 남파됐다 체포된 북한의 밀사 황태성(전 무역부 부상, 좌익운동가로 활동하다 죽은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 남한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윤보선은 “공화당은 공산당 간첩이 공산당식으로 만든 정당”이라는 극언까지 했다. 아이러니였다. “박정희가 진짜 빨갱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투표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은 더 큰 아이러니였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뒤엔 좌익 사범을 누구보다 탄압했던 건 세 번 째 아이러니였다.
아버지의 스크랩을 통해 오래간만에 박정희에 관해 꼼꼼히 들여다봤다. 한데 이상하다. 그의 도박과 꼼수를 접하면서도 혐오보다는 괜한 연민이 차올랐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쩌면 박정희의 1963년은 권력자로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해본다. 풋내기 정치인으로서 애국적 초심을 간직했을지도 모른다. 불법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혁명공약을 어기고, 각종 정보공작을 통해 반대파를 억누르며 집권했음에도 최소한의 선의를 인정해 줄 여지는 있다. 민정불참 선서식에서, 군복을 벗는 퇴역식에서 수시로 흘린 눈물이 몽땅 거짓이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기준치 이하였다 해도, 그 순정의 성분을 부인할 수는 없다.
1963년 토끼년 새해 스크랩에 아버지는 박정희를 ‘사람호랑이’라고 했다. 여기에 빗대 ‘호랑이의 고독’을 떠올려본다. ‘쿠데타 결행과 성공’이라는 ‘호랑이 등’에 한 번 올라타는 순간, 그 역시 호랑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의 트랙에 접어들었다. 고양이가 될 수는 없었다. 호랑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1963년 12월 대통령 취임 때까지 총 13차례의 역쿠데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52명(연 인원) 중 무려 45명이 쫓겨났다. 호랑이는 발톱에 동지들의 피도 많이 묻혔다.
거사가 벌어졌던 1961년5월16일 새벽, 그는 김포의 차도에서 공수단 출동을 기다리며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과 함께 담배를 여섯 갑이나 피웠다고 한다.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극도의 초조함을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다. 내각을 접수하고 나서도, 1962년 3월 윤보선을 하야케 하고 나서도, 1963년 12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목숨을 건 비상상황은 계속됐다. 어떤 이들은 “딱 여기까지만 하고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한다. 조금 더 양보하는 이들은 “딱 두 번만 대통령을 하고 71년에 물러났더라면 더 칭찬을 받았을 텐데”라고도 한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권력을 포기하는 일도 목숨을 내놓는 도박이었을 테니까….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인생은 끝없는 여행자입니다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사는 동안은 그 옷을 매일 빨아 입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가지고 나온 것이 한 벌 옷 육체입니다
새 옷을 입은 사람, 이제는 다 헤어진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도 다같은 인생입니다
늙은 육체도 젊은 육체도 ‘시지프’와 같은 무거운 돌을 굴려 올려 합니다
인생은 끝없는 고독자입니다
이웃이 있고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는 것 같아도
모두가 각자 사는 고독자입니다
괴롭고 슬픈 존재는 밤입니다. 밥은 육체입니다
육체는 곧 위장입니다. 고되고 외로운 인생길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걸어갑니다
예의 그 아버지의 인생론이다. 고개를 넘는 아낙네의 사진을 배경으로 ‘누구나 괴롭고 외롭다’는 허무의 정서를 쏟아냈다.
아버지의 고독, 좀 지겹다. 그러니까 박정희도 시지프스라는 말씀인가? 권력의 성을 지키기 위해 쓸데없이 무거운 돌을 굴려 올렸던 타이거 시지프스?
‘사람호랑이’ 박정희는 외로웠지만 남는 장사를 했다. 호랑이답게, 죽어서 두꺼운 가죽을 남겼다. 내년 대선에 출마할 것이 확실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의 옷이 내 눈에는 자꾸만 ‘호피 외투’로 보인다.
※ 참고한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갑제 지음, 조선일보사, 1999)
『한국근현대사 산책-1960년대편2』(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4)
최근 인기폭발중인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엔 “가카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아버지 역시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렇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분이었다. (자주 벌어진 일은 아니었으나) 아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격한 말을 보탤라치면 걱정스런 눈길로 “나쁜 쪽으로만 보지 말라”고 충고하셨다. 늘 조심스러웠다.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분이, 이렇게나 흥분하시다니!
차라리 구두꾼을 먹어라
런던에 여섯 살 난 어린애가 배가 아퍼 죽겠다고
야단을 쳐서 수술해보니 뱃속에서 구두꾼 백십개
양말 여덟 켤레 리봉(리본)이 이십 개 그밖에 분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물건이 나왔더라는 해외뉴스 한토막이
근간에 있었다. 그런데 못 먹을 것을 먹는 경우가
비단 런던의 그 어린이만이 아니라 공금이나
뇌물을 먹는 것도 목 먹을 것을 먹는 일이다.
양말켤레쯤 먹어서는 배를 째고 끄집어낸다면
그만이지만 공금을 먹으면 입원 대신 형무소행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못 먹을 것을 먹을 경우가 있는데
즉 ‘야망을 먹는 일이다’ 구두끈처럼
배가 아파지는 것도 아니고 공금을 먹는 경우처럼
쇠고랑을 수월하게 차지는 않지만 정치적 야망
같은 것을 먹으면 구두끈이나 돈이 아니라 사람을
먹으니 큰일이다. 식인종 같으면 사람을 삶거나
구어서 소금을 쳐서 씹어나 먹지만 정치적으로
사람을 먹는 경우는 덮어놓고 통째로 먹어치우니
큰일이다. 영국의 시인 ‘새무얼 버틀러’는 정치적
권력은 마주(魔酒)라고 불렀다. 그 마주는 뭇 사람의
두뇌를 그르친다고 했다. 남이 권한다고 해서
자기 주량 이상을 마신다면 언제고 실수할 날이 올 것이다.
“차라리 구두끈을 먹어라”라고 일갈한 대상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다. ‘정치적 야망을 먹는 일’이 신문 해외토픽에 나온 ‘구두끈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를 먹는 일’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다. “덮어놓고 사람을 통째로 먹어치우기 때문”이란다. 영국 시인 새무얼 버틀러(1835~1902)의 말을 인용해 ‘주량을 넘은 마주(魔酒)’라고까지 했다. 이런 과격한(!) 글을 끄적거리던 해, 아버지의 나이는 만 27세였다.
사실 내가 온전히 떠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대개 4,50대다. 나이 지긋한 ‘어른’일 때였다. 당신에게도 정치적 관심으로 피가 뜨겁던 20대 시절이 존재했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생전의 이미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아들 입장에선 낯설다. 혼란스럽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5권 째다. 1962년6월1일부터 1966년12월30일까지 신문들이 담겨 있다. 한권에 무려 5년이 걸리다니. 게으름을 피우셨을까? 연도를 계산해보니, 학업을 마칠 때였다. 또한 결혼 직후였다. 바쁘셨나? 다른 권보다 두툼하긴 하다. 1963년 ‘대통령 박정희’의 탄생까지를 중심에 놓고 스크랩을 넘겨보았다.
다시 아버지의 글로 돌아가 본다. 구두꾼 운운한 대목 주변을 살펴보았다. 왼쪽 위에는 ‘반혁명음모 또 적발’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그 오른쪽 옆에는 ‘송수반?천재무 사의 수리’(송요찬 내각수반, 천병규 재무부장관을 가리킴-필자 주)가 놓여있다. 그 바로 밑이 하이라이트다. ‘박 의장, 내각수반직을 겸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얼굴은 원형사진으로 실렸다. 관련된 기사는 빠졌다. 대신 아버지의 글이 빼곡히 차지했다. <서울신문> 1962년6월17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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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송수반?천재무 사표수리’라는 제목 위에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의하면 송 수반 사표이유는 증권파동과 화폐개혁 반대 일인자로서의 낙인을 받고 물러선다는 것”이라는 비공식 해설을 적어놓았다. ‘박 의장, 내각수반직을 겸임’이라는 제목에선 ‘겸임’ 부분에 빨간 사인펜으로 네모를 친 뒤 그 위에 한문으로 이런 설명을 달아놓았다. “대통령권한대행 및 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직 겸임,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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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박정희 일인시대로 질주하던 때였다. 1년 전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내부 반대세력을 하나둘 성공적으로 제거해나갔다. 거칠게는 ‘반혁명음모’, 얌전하게는 ‘사표제출’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모셨던 선배 장도영과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겼던 송요찬도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글처럼, 그는 몽땅 먹어치우고 있었다. ‘정치적 식인종’의 위세였다. 1962년3월22일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한 뒤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고 있었으니, 남은 목표는 ‘권한대행’ 꼬리표를 뗀 ‘진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공약’이 벽이었다.
5.16 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가 내건 혁명공약 6개항 중 마지막은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였다. 박정희는 그 벽을 넘으려 했다. 1962년10월31일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새 헌법안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통과시킨다. 두 달 뒤인 12월17일엔 국민투표에 부친다. 헌법안이 공포된 날은 12월26일이었다. 하루 뒤엔 대통령 출마의지를 밝힌다. 순조롭게 일이 풀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나 보다. 호랑이해였던 1962년 임인년을 보내고 토끼해였던 1963년 계묘년을 맞는 심정을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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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한 해가 황혼에 잠든다
(앞 생략)
임인년 호랑이는 간다지만 그분은
계묘년 토끼 등에 올라앉아 정사를 해보겠다고
그것은 공약위반이 아니요-
그것은 공약위반이 아니다-
호랑이 얼굴로 토끼를 노려본다
세상은 둥글고도 모진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칭찬하랴
계묘년의 노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이미 임인년 호랑이는 방을 비우는데
거기에 사람호랑이가 주인처럼 앉아있으니 웬말이냐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뜻대로 되여질 것 같지 않고
자기네가 없으면 백성이 끼니를
굶고 나라꼴이 망쳐질까봐 걱정을 한단 말이냐
세월은 아무 말이 없고 역사는 웃고만 있다
아무도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지만
의리를 모르고 약속을 곡해하는 얼굴을
계묘년 토끼만은 알고 있다
권력을 얻은 자는 권력을 마음껏 향락하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언제고 인생은 그 값을 치르고 속인으로
대가로 시공과 역사 앞에서 화초와
같이 시들 날이 있으리라
(중간 생략)
이제 그림에 호랑이는 가는구나 산호랑이는
새살림 차리기에 바쁘구나
약하고 무능한 백성이니 할말이 없다
새해엔 굶주리지 말어라 오즉 한가지
백성들이 잘 살수만 있다면 산 호랑이와
한방에서 살아도 좋으리라
“임인년 호랑이는 방을 비우는데 거기에 사람호랑이가 주인처럼 앉아있으니 웬말이냐”고 했다. 박정희가 ‘사람호랑이’인 셈이다. 계묘년 토끼해에 토끼를 잡아먹을 호랑이가 계속 주인행세를 하겠다며 으르렁거린다고 본 셈이다. 물론 “백성들이 잘 살 수만 있다면 산호랑이와 한방에서 살아도 좋으리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타협의 여지를 남긴다. “약하고 무능한 백성이니 할 말이 없다”는 전제 아래.
그 옆에 놓인 신문만평은 그림보다 글이 더 좋다. 다음 가수가 누구일지 궁금해 하는 관중들의 눈초리 속에서 철모를 쓴 군인이 악보를 들고 퇴장한다. 제목도 멋지다. ‘군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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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가는 끝났다! 박수를 쳐라! 박자와 음정이 조금은 틀렸어도 군가이기 때문에 큰 흠이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잘 불러도 ‘앙콜’을 원하지 않는 것은 역시 군가이기 때문이리라. 박수를 보내면서도 청중들의 관심은 평복을 입고 나타날 가수에게로 쏠린다.
민정복귀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희망을 ‘군가’에 빗대 재치 있게 표현했다. 아무리 잘 불러도 군가라서 ‘앙콜’을 원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선 기지가 빛난다. 당사자가 보았다면 열불을 냈으리라. 박정희 앙콜 금지? 앙콜, 재앙콜 플랜이 물밑에서 꿈틀대던 때였다. 그럼에도 1963년 새해 화두는 ‘민정복귀’였다. 박정희와 함께 군 생활 또는 ‘최고회의 활동’을 함께 했던 인사들도 “이제 좀 그만하라”는 사인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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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장 등 출마번의 촉구 20년 집권 건의설은 일고의 가치없다 송요찬씨 소견밝혀 혁명정부의 제2대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씨는 9일 하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통령 출마와 최고위원들의 민정참여는 번의, 모두 예편돼야 마땅하며 국가는 이들에게 혁명 당시의 공을 인정하고 연금 같은 것을 주어 우대해야 옳은 줄 안다”고 말하였다. 예비역 중장인 그는 “양약이 입에 쓴 것처럼 이 말이 섭섭하게 당사자들에게 들릴는지 모르나 나중엔 옳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송씨는 지난 8일 박 의장의 대통령 출마 번의와 정정법(정치정화법-1962년3월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 정치인 등 4369명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킨 법-필자 주)에 묶인 기성정치인의 일률적인 해제 및 기성정치인의 단일야당 결성 등을 호소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최고회의 이후락 대변인과 박 의장의 행정비서 이낙선 중령 등이 “송씨가 내각수반 재직 당시 동일한 대통령이 20년 집권할 수 있게 헌법에 규정하여 국민투표에 붙일 것을 의장에게 건의했으며 정정법을 강화하자고 주장, 3.15 부정선거에 가담한 바로 당사자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비난한데 대해 9일 하오 다시금 그의 소신을 밝히면서 그같이 말했다. 무엇보다 박 의장 자신과 군의 전통적인 순수성으로 보아 최고위원들의 예편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송씨는 그가 동일한 대통령이 20년간 집권할 수 있도록 개헌하자고 건의했다고 한 것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 이라고 잘라 말했다. (<조선일보> 1963년1월11일치) |
혁명주체의 민정참여는 선례 남겨놓는 것 화부(華府-워싱턴-필자 주)에서 최경록씨 언명 국내민주정당 도울 터 【워싱턴에서 본사 통신원 문명자 발】체미 유학중인 최경록 장군은 혁명주체세력이 민정에 참여하는 데 대해“앞으로도 군사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선례를 남겨놓는 것”이라고 논평하면서 “정치와 군이 분리되지 않아 지금의 한국군은 통수(統帥)계통이 확립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4.19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최 장군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혁명을 당초부터 반대했었다”고 밝히고 자신도 여러 차례 군사혁명을 일으킬 기회가 있었으나 “애국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행동 못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군인집권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단다고 강조한 그는 “내 몸에서 군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정치에 관여 않겠다”고 말했으나 “진실?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정당이 있다면 도울 생각”이라고 앞으로의 구상을 펴보였다. 그는 또 앞으로 실시될 총선거가 진정한 공명선거가 되기 위해서는 중앙정보구가 해산되고 정정법 및 반혁명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1963년1월11일치) |
“박정희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말고 다른 최고위원들과 함께 모두 예편하라”는 직설적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실재 여부가 논란이 된 “동일 대통령의 20년 집권 법안”이 눈길을 끈다. 송요찬과 최경록은 모두 박정희의 군 선배였다. 최경록의 경우엔 쿠데타 당시 2군 부사령관이었던 그의 직속상관인 2군 사령관이었다.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을까. 돌연 ‘민정 불참’을 선서한다. 1963년2월27일. 이른바 ‘2.27 선서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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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은 눈물까지 흘린다. 대중들은 100%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흥분한다. 언론도 감동에 취한다. <동아일보> 1963년2월27일치 사설은 ‘취해서’ 쓴 글 같다. 읽다보면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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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역사에의 거룩한 서약 민족과 역사에 대한 거룩하고 위대한 선서의 제전이 오늘 국민회당에서 벌어졌고, 이어 듣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박정희 의장의 감격적인 민정 불참선언이 있었다. 이로써 조국은 새로운 역사의 기점에 들어섰다. 이로써 민족 앞에 힘찬 도약의 장이 열렸다. 욕된 역사를 과거의 어둠속에 영구히 파묻고 오직 영광과 희망만을 기약하는 흐뭇하고 엄숙한 순간이다. 이제는 다시 썩지 않겠다는 서약이요, 이제는 다시 흔들리지 않겠다는 서약이요, 이제는 다시 싸우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오직 거룩한 4.19와 5.16 정신을 받들어 혁명과업을 계승해서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겠다는 공약이며, 다시는 4.19와 5.16의 비극을 초래 않겠다는 공약이며 다시는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불행이 없어야겠다는 성스러운 공약이다. 그것은 정치인만의 공약이 아니고, 그것은 군인만이 공약이 아니며 그것은 실로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맹서, 하늘을 우러러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모든 자유인의 맹서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한 순간을 마련한 모든 사람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역사적 결단을 내린 박정희 의장의 우국애정을 높이 평가하고 이러한 결단에 전폭적 호응을 아끼지 않은 저이지도자와 군 지도자의 태도를 무한히 기쁘게 생각한다 이제 남은 것은 착실한 실천뿐이요 성실한 이행뿐이다. 오늘로 박 의장은 정정법의 전면해제를 선언했거니와 제3공화국의 창건에 참가하는 모든 정치인은 오늘의 위대한 선서를 가슴깊이 아로새겨 청신하고 건설적인 정치질서의 확립에 헌신노력이 있을 분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선행되는 것은 이른바 구 정치인들의 체질과 생리의 개혁이다. 박 의장의 선언에서 지적된 대로 새로운 세대에 의한 정치주체 세력형성은 완전히 실패했고 이나라 운명은 다나쓰나 결국 구 정치인의 손에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의 선서에서 4.19와 5.16의 정당성을 무조건 인정했고 혁명과업의 계승을 엄숙히 공약했거니와 이것은 고쳐말해서 혁명전의 구악 부조리 혼란과 부패 및 무능을 전면적으로 솔직히 시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과오와 전과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국민대중의 절실한 요구인 줄 안다. (하략) |
미사여구들의 행진이 점입가경이다. 민족과 역사…거룩…위대…감격적인…조국은 새로운 역사의 기점에…민족 앞에 힘찬 도약…오직 영광과 희망…성스러운 공약…모든 자유인의 맹서…엄숙한 순간…우국애정.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보는 듯하다. ‘거룩한 사설’이었으나 헛다리를 짚었다. 아버지는 ‘2.27 선서식’ 기사 밑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인간은 언제나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따로
딴 주머니에 넣고 살기 마련이다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 연극
재미가 있다기보다 다음 막이 궁금한 인정이다.
모든 질서는 하나의 정돈된 각본이다
위대한 패배자도 없고 위대한 승리자도 없다
역사만이 심판자이다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 연극’. 맞다. ‘정돈된 각본’에 따른 연극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한 달도 안 돼 말을 뒤집는다. 3월16일, 기자회견을 열고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한다. 그 앞뒤로는 ‘각본’에 따른 사건 두 가지가 터진다. 모두 군인들이 주인공이었다. 첫째, 하루 전인 3월15일 수도방위사령부 장교 80여명의 ‘민정 불참선언 철회’데모. 둘째, 6일 뒤인 3월22일 장성 116명이 청와대를 찾아 ‘군정연장 지지’뜻을 밝힌 뒤 별판이 달린 지프차를 타고 서울 세종로를 누빈 위력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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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연장 제안’에 다시 세상은 시끄러워졌지만 박정희는 끝내 ‘대통령’권좌에 올랐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크랩은 침묵하고 있다. 8월 박정희의 퇴역식과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 수락, 9?10월 선거유세, 11월 총선 등의 굵직굵직한 팩트 기사는 생략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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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서울특별시의 대선 개표결과를 알리는 10월16일치 기사가 고개를 내밀 뿐이다. “윤보선씨를 3만여표 리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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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밑엔 대통령 박정희의 사진과 함께 “제5대 대통령으로서 무궁화훈장을 받고 인사하는 박 대통령”이라는 설명이 달렸다. 그 가운데엔 <조선일보>의 칼럼 ‘만물상’이 붙어있다. “돈 주고도 못 보았을 게임…예측을 불허하는 시소게임”이라고 백중세였던 전날 밤의 개표상황을 전한다. (전국 개표결과는 박정희 46.6%, 윤보선 45.1%)
장외유세를 전하는 신문기사를 보고 싶었는데, 이 부분이 빠져 가장 아쉬웠다. 당시 특별한 쟁점 중 하나는 ‘색깔시비’였다. 1997년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후보에게, 2002년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했음직한 이념공세가 벌어졌다. 당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맞수는 구 신민당 출신 정치인들이 중심이 된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였다. 문제는 윤보선이 박정희에게가 아니라, 거꾸로 박정희가 윤보선에게 의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1948년 11월11일 남로당 가입 혐의로 체포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 후보의 경력 때문이었다. 하필 대선이 벌어지던 그때, 박정희를 만나러 남파됐다 체포된 북한의 밀사 황태성(전 무역부 부상, 좌익운동가로 활동하다 죽은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 남한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윤보선은 “공화당은 공산당 간첩이 공산당식으로 만든 정당”이라는 극언까지 했다. 아이러니였다. “박정희가 진짜 빨갱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투표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은 더 큰 아이러니였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뒤엔 좌익 사범을 누구보다 탄압했던 건 세 번 째 아이러니였다.
아버지의 스크랩을 통해 오래간만에 박정희에 관해 꼼꼼히 들여다봤다. 한데 이상하다. 그의 도박과 꼼수를 접하면서도 혐오보다는 괜한 연민이 차올랐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쩌면 박정희의 1963년은 권력자로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해본다. 풋내기 정치인으로서 애국적 초심을 간직했을지도 모른다. 불법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혁명공약을 어기고, 각종 정보공작을 통해 반대파를 억누르며 집권했음에도 최소한의 선의를 인정해 줄 여지는 있다. 민정불참 선서식에서, 군복을 벗는 퇴역식에서 수시로 흘린 눈물이 몽땅 거짓이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기준치 이하였다 해도, 그 순정의 성분을 부인할 수는 없다.
1963년 토끼년 새해 스크랩에 아버지는 박정희를 ‘사람호랑이’라고 했다. 여기에 빗대 ‘호랑이의 고독’을 떠올려본다. ‘쿠데타 결행과 성공’이라는 ‘호랑이 등’에 한 번 올라타는 순간, 그 역시 호랑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의 트랙에 접어들었다. 고양이가 될 수는 없었다. 호랑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1963년 12월 대통령 취임 때까지 총 13차례의 역쿠데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52명(연 인원) 중 무려 45명이 쫓겨났다. 호랑이는 발톱에 동지들의 피도 많이 묻혔다.
거사가 벌어졌던 1961년5월16일 새벽, 그는 김포의 차도에서 공수단 출동을 기다리며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과 함께 담배를 여섯 갑이나 피웠다고 한다.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극도의 초조함을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다. 내각을 접수하고 나서도, 1962년 3월 윤보선을 하야케 하고 나서도, 1963년 12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목숨을 건 비상상황은 계속됐다. 어떤 이들은 “딱 여기까지만 하고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한다. 조금 더 양보하는 이들은 “딱 두 번만 대통령을 하고 71년에 물러났더라면 더 칭찬을 받았을 텐데”라고도 한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권력을 포기하는 일도 목숨을 내놓는 도박이었을 테니까….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인생은 끝없는 여행자입니다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사는 동안은 그 옷을 매일 빨아 입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가지고 나온 것이 한 벌 옷 육체입니다
새 옷을 입은 사람, 이제는 다 헤어진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도 다같은 인생입니다
늙은 육체도 젊은 육체도 ‘시지프’와 같은 무거운 돌을 굴려 올려 합니다
인생은 끝없는 고독자입니다
이웃이 있고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는 것 같아도
모두가 각자 사는 고독자입니다
괴롭고 슬픈 존재는 밤입니다. 밥은 육체입니다
육체는 곧 위장입니다. 고되고 외로운 인생길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걸어갑니다
예의 그 아버지의 인생론이다. 고개를 넘는 아낙네의 사진을 배경으로 ‘누구나 괴롭고 외롭다’는 허무의 정서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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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고독, 좀 지겹다. 그러니까 박정희도 시지프스라는 말씀인가? 권력의 성을 지키기 위해 쓸데없이 무거운 돌을 굴려 올렸던 타이거 시지프스?
‘사람호랑이’ 박정희는 외로웠지만 남는 장사를 했다. 호랑이답게, 죽어서 두꺼운 가죽을 남겼다. 내년 대선에 출마할 것이 확실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의 옷이 내 눈에는 자꾸만 ‘호피 외투’로 보인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갑제 지음, 조선일보사, 1999)
『한국근현대사 산책-1960년대편2』(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4)
9개의 댓글
필자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사
2012.02.03
prognose
2011.11.18
달빛젤리
2011.10.29
호랑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박정희를 호랑이에 비유하는 것은 (호랑이에게 미안해서) 반대입니다만...^^; 박근혜 의원의 옷이 "호피 외투"로 보인다는 말에는 완전 공감인데요. 빵 터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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