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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사람도 없다. 가수, 화가, 진행자, 작가 등 조영남을 수식할 수 있는 명함은 많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가수’라는 직함일 것이다. 7월 22일부터 진행될 세시봉 미국 공연을 앞두고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라디오 녹음이 끝난 직후라 노곤했을 텐데도 모든 질문에 성의껏 임해주는 성실함을 보인 그는, 최근 나가수 열풍에 대한 따끔한 일침과 함께 ‘노래’ 그 자체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별난 가수’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별나지 않은’ 신중한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뇌경색 이후, 건강에 무리는 없는가.
“아플 새가 없었어요. 뭐 현재는 특별한 이상도 없고요.”
세시봉이 미국에도 진출하게 됐다.
“네. 윤형주, 김세환, MC 이상벽과 함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와 산호세에서 각각 1회씩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이번 미국 공연에서 송창식은 제외됐다. 이유가 무엇인가.
“스케줄 때문은 아니지만 못하는 이유가 뚜렷해요. 해외 공연 같은 경우는 자기가 매일 하는 운동에 지장이 되기 때문에 안 가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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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한참을 생각 후)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게 큰 것 같아요. 디지털로만 해서도 안 되고, 아날로그로만 해서도 안 되잖아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 영역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느낀 것 같아요. 그래서 자랑은 아니지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무교동 세시봉은 어땠나.
“이장희, 윤형주, 송창식, 이상벽이 다 1947년생인, 저보다 두 살 밑에 친구들이었어요. 중세시대에 모든 문화가 한 살롱을 중심으로 생기는 현상이 있었잖아요? 저는 세시봉이 딱 그런 형식이었다고 봐요. 거기가 거점이 되어 나 같은 식구가 생겼죠.”
김세환은 초창기 세시봉 멤버가 아니라고 들었다.
“맞아요. 이장희는 원래 같이 있었고, 형주, 창식이, 세환이를 영입한 셈이죠. 장희는 그때부터 노래와 곡을 같이 썼어요.”
회식도 많았을 것 같다.
“요즘 같은 회식은 아니에요. 비지찌개 같은 거 먹고, 조금 더 화려하면 자장면 먹고 그랬죠. 술 먹고 그런 건 없었어요. 다 개별적으로 나가서 했죠. 그 안에서는 주인이 술을 못 먹게 했어요.”
순수했나보다.
“아 순수했죠. (웃음) 정말 순수했죠.”
다른 멤버들이 두 살 아래인데, 말은 잘 듣나?
“우리한테 그런 건 없었어요. 옛날부터 내가 단 한 번도 이래라 저래라 해본적도 없고.”
세시봉이 어떻게 다시 모이게 되었나.
“사실은 그게 (최)유라가 “아저씨가 방송 하니까 아저씨 친구들 한 번 모이자고 해봐요.”하고 옆구리 찌른 거에서 시작된 거에요. 아이디어가 좋아서 ‘야 모여보자!’ 했는데 그날 전부 기타 갖고 온 거지.(웃음)”
이제는 세시돌이 되셨는데, 그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저는 늘 인간이 살아가면서 재수가 좋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재수 좋은 놈한테 못 당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재수 좋은 놈한테 못 당하잖아요. 이 나이에 그런 말 듣는 걸 보며 나도 재수가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느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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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어떻게 가수가 됐느냐?” 라는 물음에 “노래에서는 내가 최고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라는 답을 한 적이 있다. 기억하는가? 요즘 가수들은 준비도 안 되고 자신감도 없는데 나온다는 말로도 들렸는데.
“그건 아니고, 어려서부터 노래를 하면 내가 제일 잘 했어요. 내가 봐도.(웃음) 중학교 때도 그렇고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 때도 그렇고. 그냥 그 얘기를 한 거죠.”
순전히 싱어라는 측면에서 정말 잘하는 노래란 무엇인가.
“사람의 가슴을 울렁울렁하게 하고, 급기야는 통곡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만드는 노래. 그게 진짜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세시봉 때문에 40년 만에 발표한 정규 앨범이 좀 묻힌 것 같다.
“제작자한테 누누이 그 앨범 내도 소용없다고 했어요. 그게 이 시대 대부분의 대중한테는 결코 다가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죠. 결국 제 예측이 맞아 떨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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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너무 많은 것을 했다는 거죠.(웃음)”
앨범 제작의 주도권을 갖고 있지 않았는가.
“전혀. 난 그냥 가창만 빌려줬을 뿐이에요.”
본인의 앨범은 왜 주목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나.
“그게 원인이…. 목소리가 대중적이지 않은 게 결함이라고 봐요. 정제되어 있고.”
절대음감의 소유자이지 않나. 43년 동안 노래하면서 가창에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 있나.
“단 한 번도 그런 생각 가져본 적이 없어요. 믿지 않겠지만, 노(No).”
그럼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하나.
“이게 사람들한테 먹힐까. 늘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지금이라도 조금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사람들이 금방 알지 않겠어요? 그럼 금방 돌아설 것 아니에요. 내 노래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돌아설 것 같고. 난 아직도 먼 것 같아요.”
부족하다는 점을 설명하자면.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 같이 무한정 음정이 안 올라가는 것. 그건 화까지 나요. 결국에는 테너의 끝을 보지 못하는 거니까.”
나이 탓은 아닌가.
“아뇨. 학교 때도 그랬어요.「그대의 찬 손(오페라 아리아)」을 부르는데 그게 한 번도 안 올라가. 난 제대로 부르고 싶은데. 거기서부터 클래식 그만두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바리톤인데도 그런 욕심이 나더라고요.”
바리톤과 테너 중간이지 않나.
“테리톤이죠.”
또 있다면.
“외우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가사는 정말 간신히 외우는 거에요.”
곡 쓰는 것에 대해, 젊어서부터 왜 열망이 없었는가.
“그게 노래만 불러도 충분히 먹고 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까. (폭소)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쓸 정도로 먹고사는 게 편안했으니까 굳이 곡을 쓰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노래 측면에서 세시봉의 멤버들의 개성과 장점을 말한다면.
“윤형주는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보다도 한 수 위의 음악성이 있다고 봐요. 소리도 곱지요. 창식이랑 이중주 할 때는 천하무적이에요. 송창식은 자연적으로 나오는, 거의 보첼리 수준의 노래 실력을 갖고 있지요. 노래를 만드는 실력도 뛰어나고. 김세환은 목소리 자체가 아주 귀족적이에요. 그 목소리에 여자들이 반할 수 있지. 이장희는 자유 그 자체에요. 저는 장희가 진짜 가수라고 생각해요. 시에다 음을 붙여서 시하고 음악하고 일치시키니까. 또 그걸 자기 소리로 노래하니까 진짜 가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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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전성기인데, 후속 앨범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있는가.
“장희가 울릉도에 관한 노래를 한다고 해서, 저는 서울에 관한 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에서만 50년을 살아서 서울이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2004년 그린데이(Greenday)가 발표한 「American idiot」이 1991년에 나왔던 「도시여 안녕」과 표절 시비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들어봤어요. 표절이야.”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나?
“그렇게 길게는 우연으로 잘 안 되죠. 그 친구들이 어디서 흘려들었겠거니 하고 있어요.”
발표한 수많은 노래 가운데, 정말 녹음 잘 됐다라고 생각하는 곡이 있나.
“부른 노래 중 최고는 모란동백이지요. 콘서트에서 매번 하기도 하고. 내가 작곡한 노래 중에는 「지금」을 꼽고 싶고요.번안곡 중에서는.
「내 고향 충청도」,「내 생에 단 한 번만」이 최고지요.”
초창기 < 나는 가수다 >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가졌었다. 지금의 < 나는 가수다 >는 어떤가.
“지금도 가수 아이들이 자기 등수 발표될 때 벌벌 떨면서 “난 7등을 해도 괜찮아요.” 그런 말 하는 거 보면 안쓰럽고, 방송이 멀쩡한 애들 다 망가트리는 것 같고. 그런 생각 들어요. 저걸 겪고 나면 가수하기 힘들 텐데 라는 생각도 들고. 저렇게 그 자리 외에서 치열하게 노래 부를 장소가 없단 말이에요. 우리나라에, 우리 정서로.”
극한치라는 건가.
“딱 그거죠. 그리고 저렇게 경쟁적으로 노래를 하고 나서, 무대에 내려와서 어떻게 될지 심하게 걱정되기도 하고요.”
과거에는 그런 게 없지 않았나.
“없었죠. 무명은 콩쿠르를 통해 경쟁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렇게 이미 대중적으로 검증된 사람을 갖다가 앉혀 놓고 경쟁시킨다는 건 방송의 오만 같아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그게 옳다는 게 방송사의 입장이고. 그래도 할 게 있고 안 할게 있다는 게 내 입장이죠. 시간이 판단해주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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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현, 박정현, 임재범 등 많은 후배 가수들이 출연 중에 있다. 대선배의 입장에서 그들의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노래라는 건 저렇게 하는 게 아닌데…. 저렇게 하는 건 아닌데. 방송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계속 해요. 노래라는 건 부르는 사람도 편안하고 듣는 사람도 편안하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놀이와 같아야 하는데 지금 양상이 그렇지가 않은 거죠. 저건 스포츠화 시킨 거지. 그런데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에요. 노래는 야구와 축구하면서 점수매기는 거랑은 다른 거라는 거죠.
나가수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이 있는 건, 그동안 방송에 나오던 음악이 하나같이 획일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시청자 입장에서 ‘노래를 듣는다’라는 의견이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는 세시봉과 현상과 비슷하다고 봐요. 다만 노래를 왜곡 시킬 수 있다는 걱정이 있는 거죠. 시스템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요. 발라드에서 우월할 수 있고, 뒤에 나오는 사람이 더 유리하고.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의 의견이 소수인 것 같더라고요. 어쩔 수 없죠.”
현재 대한민국 주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기획사 시스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이 자꾸 기계를 닮아가는 게 안쓰럽죠. 기계의 틀에 맞는 음악이 나오고 사람도 따라가고.”
윤미래 이후, 근래 후배들(1990년대 이후) 중 인상 깊은 가수가 있는가.
“윤미래 이후는(한참을 생각하다) 백지영.”
어떤 점에서?
“노래를 정석으로 부르는데 감동을 주니까요. 윤미래도 마찬가지고.”
외국 가수 중 영향을 받은 가수는?
“스리테너즈(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보다는 보첼리를 좋아했어요. 편안하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소리를 내잖아요. 보첼리가 유일하게 세 사람이 하는 노래를 다 할 수 있어요. 무슨 노래를 불러도 소화해내는데 그 세 사람은 불가능하지. 제가 보는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는 보첼리에요.”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이 보첼리와 「Time to say goodbye」를 불렀는데, 거기서 본인이 보첼리를 맡는다면 여자 가수 중엔 누가 불러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한참을 생각하다)떠오르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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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기에는 쑥스럽지만, 한 번 가수가 되면 평생 잘 먹고 살게 되는 거. 오랫동안. 말하고 보니 나쁜 영향 같은데?(좌중폭소)”
후배 중 콘서트나 듀엣을 같이 하고 싶다고 하는 가수가 얼마나 있었나.
“많지 않아요. 겁나서 그런지. 지 드래곤이 내 뒤를 밟고 싶다고 하는 것 같긴 하더라고.”
1990년대 이후 가요 중에서 감동을 준 노래는 있는가.
“「그대 그리고 나(소리새)」, 「송학사(김태곤)」, 내가 좋아하는 「인생은 미완성(이진관)」 정도네요. 이것의 맥을 이어가는 노래들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 때나 불러도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게 명곡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런 노래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안타까운 현상이죠.”
과거의 노래쟁이 중 ‘정말 노래 잘 했다’, ‘후대의 귀감이 될 만하다’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내 윗세대는 안다성, 공민도, 김광석까지 명곡들을 많이 부른 것 같아요. 최희준은 그야말로 최고였고, 배호는 우리나라 통틀어서 최고의 가수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안 나오는 게 안타깝지만.”
여자가수는 어떤 사람들이 떠오르나.
“이미자나 패티김. 그와 같은 걸출한 가수가 없어요. 지금 이미 여러 명 나와 있어야 하는데.”
아까 감동을 주는 노래라고 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노래라는 게 그 사람의 인격이 다 들어있는 것인데, 그야 말로 하늘이 관리하는 거라고 봐요. 사람이 관리하는 것 같진 않아. 저는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 기를 쓴 경우에요. 그래야 사람들이 내 노래를 돈 주고 듣는다고 생각하니까요.”
본인의 노력과 도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소리가 하늘이 준 소리라는 생각은 안 하나 보다.
“따로 따로 노는 게 아니고. 하늘이 주긴 했어도 독자적인 것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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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하이라이트는 언제였나.
“그런 거 기억 못해요. 항상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하이라이트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조영남을 처음 「딜라일라」로 데뷔 시켰던 사람은 누구인가.
“한 이백여 명 되는데. (웃음) 음악평론가 이백천 선생이라고 생각해요. 황정태 PD하고.”
이백천 선생은 본인의 가창이나 노래를 어떻게 평하던가.
“내 노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기억이 없고, 이백천 선생한테 평생 교훈을 받은 것만 뚜렷이 기억나요. 늘 그랬어요. 자기가 가진 기량의 60~70%만 보이라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 말이 평생 내 뇌리에 있거든요. 오버하지 말라는 얘기지요. 감정 표현이든 뭐든지. 그래서 나가수를 볼 때 염려스러운 게, 저렇게 120~130%씩 보여주면 끝나고 나서 굉장히 허탈할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너무 잘 하려고 해도 잘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음악이라는 게. 저는 이 시대 사람들이 조급해서 70% 하는 건 못 참아준다고 생각해요. 더 해라. 넌 이제 늙었구나. 샜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요즘 오디션이나 나가수를 보면 스탠더드를 소화하는 것이 중요한 관문이 되었다. 스탠더드가 부족했던 국내 가수들에게 좋은 현상이라고 보는가.
“그런 점은 긍정적이지요.”
음반이 정규보다 베스트가 더 많은 이유는 뭔가.
“정규고 뭐고 돈 준다면 가서 노래 불렀지요.(웃음) 가창료 준다면 무조건 노래 불렀어요.”
1968년에 데뷔해서, 가수로서 섰다고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그게 신기해요 제가. 평생 내가 가수로서 앉아 있구나(선 것에 반대) 그런 걸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데뷔해서 지금까지. 항상 괜찮았던 것 같아.”
요즘 노래를 하려면 정말 노래 연습을 많이 해야 하나.
“노(No). 노래는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세시봉 1탄에서 증명됐잖아요. 연습 일절 안 하고 그냥 와서 한 건데 정말 잘 했거든요. 처음 라디오에서 한 게 그거였죠. 두 번째로 브라운관에 나왔을 때도 연습 안 했어요. 그냥 라디오에서 한 거 그대로 옮겼으니까. 그런데 세 번째가 놀러와 콘서트는 음악적으로 네 번 모여서 연습했는데 그게 워스트에요. (웃음) 신기하죠. 음악이라는 게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게.”
자연스럽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인가.
“그렇죠.”
음정, 음량, 성량, 박자감각, 음감, 호흡 이런 거 다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으로 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말인가.
“그렇지.”
가수, 진행자, 화가, 작가라는 다양한 직함을 갖고 있다. 먼 훗날 대중이 조영남이란 이름 석 자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줬으면 하는 명함은 어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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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다보니까 어쩌다 이렇게 됐네요.(웃음)”
최고의 엔터테이너는 누구라고 보는가.
“말 그대로 ‘엔터테이너’로서는 나훈아 정도?”
방송활동은 어떤가.
“라디오와 < 명작 스캔들 > 모두 재밌게 하고 있어요.
티비 진행 중 제일 즐겁게 임했던 건.
< 조영남이 만난 사람들 >, < 자니윤쇼 >. 그런 걸로 제가 다시 섰으니까요.”
R&B 창법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건 역사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잖아요. 저는 미국 사람들이 하는 리듬 앤 블루스라는 게 결국 우리나라 창으로 “왔구나~”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미국인이 봤을 때 마이클 잭슨이 창을 부른다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저는 우리말도 제대로 구사 못하면서 미국식으로 발음 돌리는 거 보면 모두 아류로 보여요. 저는 그래서 영어를 하는 편인데도, 영어 노래를 안 하려고해요. 영어 노래는 내 말이 아닌데, 우리나라 말로 부를 수 있는데 영어로 부를 필요 없잖아요. 알앤비 부르는 걸 우리 아들들이 보면 표정을 찡그려요. 얘들 뭐하냐 이거지. 걔네들 표정이 맞죠.”
아들은 조영남의 노래를 어떻게 평가하나.
“최악으로 평가해요.(폭소) 아. 평가조차 안 하려고해. 아버지 얘기를 입에 담는 것조차 싫어할 거야.”
쓸쓸한가.
“저는 신이 행복 반 불행 반, 기쁨 반 슬픔 반, 외로움 반 북적북적함 반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무조건 행복, 성공이란 한 쪽 면만, 외롭지 않은 것만 추구하도록 교육을 시켜온 것 같아서 큰 문제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건 질문이 없어야해 우리 서로가. 너무 당연하니까. 하루에 한 끼 이상 먹죠? 이거랑 뭐가 달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지 않고 사는 사람은 더 힘들 게 사는 것 같다.
“그건 이제 자기 스타일로 들어가야 하는 거에요. 개인마다 자기 개성을 고집할 권리가 있으니까. 사회가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스타일이 어떠냐고 물을 수만 있을 뿐.”
그림과 노래를 모두 하는데, 그런 모습에서 1970년대 히피의 생활이 많이 떠올랐다. 영향을 받은 것인가?
“히피 정신이 세시봉 정신이라고 보면 되요. 라보엠(떠돌이들) 같은 그 정신을, 히피 정신을 평생 붙잡고 늘어졌어요. 그게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정신이라 생각해요. 그 속에는 기독교, 불교 등 모든 종교가 얘기하는 ‘사랑’이라는 게 중심축으로 돌아가니까요.”
요즘 사람들이 그런 자세를 원한다면 권할 것인가. 요즘 시대의 시스템은 그런 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다.
“우리 시스템이 허락을 안 한다는 개념을 갖지 말아야 해요. 그건 허약한 얘기라고 봐요. 그래서 투쟁적으로 살아야 하는 거고.”
사진: 여인협
정리: 이종민, 여인협
글 / 여인협(lunarianih@naver.com)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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