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의 추종을 불허한 한국 최고의 번역가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던 그, 잠들다 - 나는 번역서를 구입할 때면 꼭 번역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만약 번역가 이름이 낯설면 그의 번역 이력을 살펴보고, 본문을 읽어 번역이 매끄럽게 됐는지를 확인한다
201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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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1), 지다
나는 번역서를 구입할 때면 꼭 번역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만약 번역가 이름이 낯설면 그의 번역 이력을 살펴보고, 본문을 읽어 번역이 매끄럽게 됐는지를 확인한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책을 읽었을 때의 짜증과 곤혹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욕심내서 비싼 값을 주고 책을 구입했는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할 때는 짜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낀다. 출판사에 전화해서 항의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그 반대로 잘된 번역서를 볼 때면 번역가의 이름을 꼭 기억해두고, 그다음에 책을 살 때 그 번역가의 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구입한다.
나에게 이런 습관을 안겨준 이는, 번역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이는 바로 이윤기다. 그가 번역한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92)을 읽고 나는 번역의 묘미를 깨달았다. 그를 알고부터 번역가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됐으며, 마음에 드는 번역가 몇 명을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 번역가 중 들머리에 서 있는 이는 당연히 이윤기다.
나에게 번역의 묘미를 깨우쳐준 한국의 대표적인 번역가이자, 소설가, 신화연구가인 이윤기가 2010년 8월 27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글, 시작한다.
독서광
이윤기는 1947년 경북 군위군 우보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윤기를 포함한 일곱 남매와 시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린 시절 이윤기의 집안은 가난했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이윤기는 독서광이었던 할머니 덕분에 책을 가까이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한문을 익히며 할머니가 평소 즐겨 낭송하던 『옥루몽』을 외우며 자랐다.
“내 어릴 적, 그러니까 1950년대 초, 내 조모의 취미 중 하나는 고담(古談)을 송창(誦唱) 가락으로 읽는 일이었다. 조모가 거처하던 사랑은 그 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조모가 즐겨 낭송하던 책은 『옥루몽』이었다. 『옥루몽』은 내가 만난 최초의 서사문학이다. 형님들 귀 너머로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을 힐끔거린 직후의 일이었다. ‘뜻도 모르고’ 읽고 왼 것은 아니었다.”2)
할머니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독서광이었다. 이윤기의 어머니는 한국 고유의 서사문학을 즐겨 읽었는데 이윤기는 그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이런 고전을 외우고 다녔다. 또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천자문』과 『소학』을 달달 욀 정도로 책을 가까이 했다. 책과의 만남은 이렇듯 자연스러웠고, 그는 일평생 책을 가까이 하며 살게 된다.
1958년 4월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구 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5세라는 늦은 나이로 경북중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도서반원이 되면서 수많은 책을 섭렵하게 된다. “수천 권에 이르는 장서와의 만남은 통발에 갇혀 있던 고기가 물을 만난 형국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책은 지적 목마름을 해소해주었다.3) 당시 그는 서정주와 이어령의 글을 몽땅 외우고 다니기도 했다.
“학교 공부 같은 것은 쥐뿔도 아니었다. 미당 서정주의 시집을 읽는데, 읽는 족족 암기하게 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자랑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사이클이 딱 맞는 책이 있는 법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어령의 『지성의 오솔길』이 나온 것이 그 어름이다.…… 그 어리고 어리석던 시절에 나는 시도 읊고 산문도 끼적거리고는 했는데, 친구들은 시를 써서 보여주면 ‘어째 미당 냄새가 너무 난다’고 했고 산문을 끼적거려 보여주면 ‘어째 이어령의 건방기가 묻어난다’ 했다. 왼 것 잊어버리는 데 오래 걸렸다.”4)
이윤기가 외웠던 것은 시, 산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과 음악도 온통 외우고 다녔다. 감상이 아닌 단순 암기를 통해 예술작품을 접했던 것이다. 그는 신문에 나오는 그림을 오려 이것은 낭만주의, 이것은 고전주의 하는 식으로 그림을 외웠다. 또 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악감상실에 다니며 이것은 베토벤, 이것은 브람스 하는 식으로 음악을 외웠다. 훗날 이윤기는 자신이 예술과의 만남에 관한 한 ‘천박한 이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5)
1965년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윤기는 3개월 동안 학교를 다니다 자퇴한다. 주판 교사로부터 받은 체벌로 인해 학교생활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주판 놓기’의 젬병이었어. 자꾸 틀리니까, 주판교사가 주판으로 내 까까머리를 밀어버리는데, 물론 내가 까까머리를 밀리는 순간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 버렸기 때문이겠지만, 한 줄에 여섯 개씩 꿰여 있는 주판알이 내 머리의 살가죽으로 파고들고 말았어. 여섯 줄로 된 상처 중 두어 줄에서 피가 흘렀지. 많이 흘렀어. 눈으로 흘러 들어갔을 정도로……. 단지 주판을 잘 놓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인을 꿈꾸던 아이, 인문학자를 꿈꾸던 아이, 영어와 일본어로 시와 소설을 읽던 아이에게 상처를, 그것도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입히던 곳…… 거기 더 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싶더라. 그런 야만의 시대였어. 나에게 스승의 날은 없다.”6)
학교를 떠난 이윤기는 한동안 야학교사를 하며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이때 즐겨 했던 공부는 중학시절부터 재미를 느꼈던 어학공부였다. 영어와 일어 그리고 독일어까지 섭럽한 그는 원문으로 된 소설을 읽을 정도로 어학에 자신감을 보였다.
“나는 ‘글읽기’를 배우는 학교에다 ‘학창 시절’이라는 월사금을 바쳤다.…… 나는 그 시절에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영어를 배워 헤밍웨이, 오 헨리, 윌리엄 포크너(이 양반의 책이 가장 어려웠다)를 읽었다. 일본어를 배워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이 양반의 시전집은 울면서)를 읽었다.…… 독일어로도 소설을 읽었지만 지금은 ‘당케 쇤’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7)
이윤기의 어학실력은 배움에 대한 열정 때문에 얻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는 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더 나아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외우면서 한 장씩 씹어 먹는 상당히 무식한(?) 방법을 통해 어학 실력을 키워갔다. 또 이때 이윤기는 『한국단편문학전집』을 읽고 “한국문학이라는 건물을 지어 올리는 데 벽돌 한 장이라도 보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8)
운 좋은 과부
1966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한 이윤기는 1967년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신학을 통해 종교사학, 종교현상학, 민속학, 신화학까지 공부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대학에서 이윤기는 배움에의 갈증을 풀 수 없었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와 입대 날짜를 기다리다가 1969년 입대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 입대한 이윤기는 1971년 4월 베트남으로 향한다. 1년 동안 베트남에 머무르며 그는 전투병으로 작전에 참가했고, 나머지 기간에는 전투 일선에서 물러나 발전기 기사, 헬기로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일 등을 하며 지내게 된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은 단편 「하얀 헬리콥터」와 장편 『하늘의 문』에 투영되어 있다.
베트남에서 지낸 마지막 3~4개월 동안 이윤기는 근사한 경험을 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군대살이하면서도, 그것도 월남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글읽기를 ‘직업적’으로 했다. 전투병을 은퇴(隱退)하고 3, 4개월 동안 영내(營內) 도서관 사서 노릇을 했던 것이다. 1만여 권의 장서를 관리하자니 분류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분류하자니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운수 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가지 밭에만 넘어진다는 말이 있다. 책 좋아하는 전투병이 도서관 사서를 할 수 있었으니 나만큼 운이 좋은 ‘과부’도 없을 터이다.”9)
1972년 4월 귀국한 이윤기는 잔여 복무기간 3개월을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이때 그는 우리 산천과 똑같은 북한 땅을 보고, 그리고 적이 베트콩에서 동포로 변해 있는 사실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았다. 분단의 현실을 비로소 체감한 것이다. 이즈음 그는 월남에서의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10)
군 제대 후 이윤기는 약 1년간 재도급 업자인 종매형의 서기 노릇과 도목수인 제종형 아래서 일종의 ‘해결사’ 노릇을 하며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리고 1974년 베트남에서 만난, 후에 방송작가로 활동하는 김준일과 함께 『니체전집』을 윤문했다. 이윤기는 1975년 청소년 잡지 <학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나 일본어로 된 잡지 기사를 번역하는 게 그의 주된 일이었다. <학원>에서의 기자 생활은 그에게 번역가, 소설가에 이어 신화연구가라는 또 하나의 별칭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동물을 모아 ‘전설의 동물원’을 꾸려 잡지에 싣는 일을 맡았던 이윤기는 ‘페가수스’를 접하게 된 후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제대 직후부터 신춘문예에 계속 응모해왔던 이윤기는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기쁜 일이었지만, 겁이 덜컥 나는 일이었다.
“문단은 좀체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래지 않아 문이 반쯤 열렸다. 그때의 심경을, 지금은 기억에 가물가물한 아시카와 다쿠보쿠의 단가(短歌)를 인용해서 드러내보면, ‘낡은 문을 에멜무지로 밀어보았더니 너무 쉽게 열려서 실망했다’와 비슷하다. 어, 뜨거워라 싶어서 문단에서 도망쳤다. 최근 들어, 그때 왜 도망쳤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이 좋아서 단 한 차례 케이오 펀치를 날릴 수 있었던 권투선수가,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 참가하라는 제의를 받은 판인데? 튀자.…… 나는, 연습을 핑계 삼아, 문단에 들어가기도 전에 입산했다.”11)
번역가가 되다
준비가 부족하다고 여겨 문학의 길에서 잠시 비켜선 이윤기는 산으로 들어가 번역일을 시작했다. 이윤기가 최초로 번역했던 작품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편(編)한 네 권짜리 『전장의 인간』(태양문화사, 1978)이었다. 『전장의 인간』이 출판되던 해 결혼한 이윤기는 번역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또한 그는 이때 본격적으로 신화를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그 발단은 책 디자이너 정병규가 던져둔 일본어판 『인간과 상징』이란 책 때문이었다. 신화를 통해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카를 융의 『인간과 상징』을 읽던 이윤기는 저자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심리학보다 고대 신화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신화와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인간과 상징』을 미친 듯이 번역했고 본격적인 신화연구를 시작했다.
번역과 신화연구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이윤기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를 보낸다. 그는 1978년부터 한 달에 한 권꼴로 번역서를 출간해 1980년대 말 무렵에는 150여 권에 이르는 번역서를 내놓았다.
당시의 주요 번역서로는 앙리 샤리에르의 『카라카스의 아침』(홍성사, 1978), 리차드 아모어의 『이 모든 것이 돌멩이와 몽둥이로부터 시작하였다』(홍성사, 1978)와 『모든 것은 이브로부터 시작하였다』(홍성사, 1978), 클라우스 만의 『소설 차이코스프키』(고려원, 1979), 제프리 아처의 『카인과 아벨』(심지, 1981),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고려원, 1981)와 『미칼레스 대장』(고려원, 1983),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86),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학원사, 1986), 에코의 『푸코의 추』(열린책들, 1990), 토마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고려원, 1991), 파울 프리샤우어의 『세계풍속사』(까치, 1992) 등이 있다.
또 그는 신화와 관련된 책들도 번역해 내놓았다. 『인간과 상징』(열린책들, 1996)12),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평단문화사, 1985), 토마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대원사, 1989), 조셉 캠벨의 『세계의 영웅신화』(대원사, 1989), 엘리아데의 『샤머니즘』(까치, 1992),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민음사, 1994),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신화의 힘』(고려원, 1992),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열린책들, 1997) 등이 그것이다. 1988년에는 소설 형식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해석한 전 3권짜리 『뮈토스』(고려원)를 출간했다.
무수히 많은 이윤기의 번역서 중 대중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렵기로 소문난 에코의 소설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수백 개에 이르는 각주까지 달아가면서 친절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충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윤기는 1996년에 번역한 에코의 또 다른 소설 『전날의 섬』(열린책들) 후기에서, 난해하기로 유명한 에코의 소설을 번역한 역자의 심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코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운이 좋다.” 역자는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맞다. 역자만 빼고.”13)
이윤기가 역자후기에서 밝힌 이 말은 그가 에코의 소설을 번역하며 느꼈던 고충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번역하며 원서를 집어던진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그 고충만큼 들인 노력도 상당했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는 각각 1992년과 1995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독자들의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이윤기의 말에 따르면 1986년에 출판된 『장미의 이름』은 오역을 바로잡고 400여 개의 각주를 달아 개정판을 낸 데 비해 『푸코의 진자』는 제목부터 『푸코의 추』에서 『푸코의 진자』로 바꾸고, 처음부터 각주를 달아가며 몽땅 다시 번역했다고 한다.14)
이런 성실함과 완벽주의적 풍모 때문에 이윤기는 번역가로 이름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이윤기는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자신이 번역한 책 중에 번역이 잘된 책으로 꼽았다. 그리고 1999년 번역문학 연감 『미메시스』에서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출판인들이 이윤기를 한국에서 최고로 뛰어난 번역가로 선정했고, 번역가들은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92)을 해방 이후 가장 번역이 잘된 번역서로 꼽았다.15) 2000년에는 대한민국 번역가상을 받기도 했다. 30년 넘게 번역에 힘을 기울였던 이윤기는 자신의 번역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번역은 한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윤기가 번역을 시작한 것은 생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번역을 통해 소설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번역에 몰두한 이유는 특별히 없고요, 생업이었어요. 발자크가 노름빚 때문에 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별로 신기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내가 번역을 시작한 시점으로 소급해서 만들어 낸, 근사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소설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지요. 사유의 연습 같은 것에 대한 집착이었어요. 나는, 소설 공부 중에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정독(精讀)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번역을 통하여 저는 더할 나위 없는 정독의 방법을 배웠습니다. 도장이 아닌 뒷골목에서 배운 태권도 같은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요?”16)
자연발생적인 소설쓰기
앞서 본 것처럼 이윤기가 처음부터 번역가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소설쓰기는 자연발생적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소설가를 꿈꾸었고 실제로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하얀 헬리콥터』로 일찌감치 등단한 소설가였다.17) 그러나 그는 등단 후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진 않았다. 문학을 추구하긴 했지만 문학을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번역에 매달렸고,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진작부터 이런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내게는 서른 살 무렵에 짠 내 인생의 계획표가 있다. 매우 정교한 시행 세칙이 있지만 줄거리는, 공자 말씀 믿지 말고 쉰 살 되기까지 생업에 뜨겁게 매달리되 공부를 계속하고, 쉰 살부터 예순 살까지는 쓰기에 매달려 그동안 해온 공부의 보람이 뒤쪽으로 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예순 살부터는 붓을 놓고 다시 공부에 들되, 공부로써 삶의 지극한 비밀을 꿰뚫어 죽음을 하찮게 여길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18)
서른 살 무렵에 세운 인생설계치고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주목할 점은 이윤기가 이 인생설계대로 살았다는 점이다. 그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1990년 무렵이었다. 당시 이윤기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좋아하면 자주 하게 되고, 자주 하게 되면 전문가가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번역도 참 좋은 일이지만 가장 좋은 일을 아니었어요.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지요. 너는 지금 삶에서 무엇을 취하고 있는가? 하고 있는 일, 살고 있는 삶에는 지금 네 피가 통하고 있는가? 너는 하고 있는 일의 품삯이 아닌 일 그 자체, 그 일의 골수와 희로애락을 함께할 수 있는가? 너는 삶에서 무엇을 취하는가? 가죽인가, 뼈인가? 문제는 골수이겠는데, 과연 골수인가? 1990년, 도미 직전에 던진 질문인데, 결국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디다. 그때까지 내 소매를 붙잡고 있던 번역이라는 걸 떨쳐버리려는 몸짓…… 1991년의 도미에는 그런 속사정이 있습니다.”19)
1990년 당시 출판사 고려원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던 이윤기는 이런 속사정 때문에 1991년 미국으로 향한다. 마침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국제대학의 초청이 있었다. 그해 8월 이윤기는 초빙연구원 자격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행은 번역을 떨치려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번역을 쉽사리 떨치지 못한다. 오역이 많은 『장미의 이름』과 미덥지 못한 『푸코의 추』가 뒷덜미를 붙잡았다. 번역작업을 하면서 그는 1993년부터 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1994년 장편소설 『하늘의 문』을 출간한다. 그리고 1995년에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 「나비넥타이」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6년 8월 일시 귀국한 이윤기는 그동안 써온 작품 여러 편을 국내 문학계간지에 게재했다. 그리고 1997년 9월 이윤기는 미시간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객원교수로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윤기는 국내 문학지에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중 1997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발표한 「숨은 그림 찾기 1-직선과 곡선」이 문단 내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고, 결국 이 작품으로 1998년 <조선일보>가 주관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동인문학상 수상으로 자신감을 얻은 이윤기는 2000년 귀국해 소설 창작에 몰두했고 그가 내놓은 소설은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윤기는 번역을 통한 습작, 경제적인 문제 해결 덕분에 1990년대에 갑자기 출현한 ‘신예(?) 중견작가’로 활동했다. 그가 ‘신예 중견작가’란 모순된 칭호로 불리는 이유는 1970년대에 등단을 했으나 실제로 활동을 시작한 때는 1990년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에 대한 한을 풀 듯 누구보다 왕성하게 소설을 발표했다.
1988년 작품집 『하얀 헬리콥터』(영학출판사)를 출간한 이후에 『외길보기, 두길보기』(열린책들, 1991), 『하늘의 문(전 3권)』(열린책들, 1994), 『만남』(중앙일보사, 1996), 『햇빛과 달빛』(문학동네, 1996), 『나비넥타이』(민음사, 1998), 『뿌리와 날개』(현대문학사, 1998), 『두물머리』(민음사, 2000), 『그리운 흔적』(문학사상사, 2000), 『나무가 기도하는 집』(세계사, 2000), 『진홍글씨』(작가정신, 2003), 『노래의 날개』(민음사, 2003), 『내 시대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03) 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외에 산문집 『에세이 온 아메리카』(원장재단, 1997), 『무지개와 프리즘』(생각의나무, 1998), 『어른의 학교』(민음사, 1999),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동아일보사, 2000), 『이윤기가 건너는 강』(작가정신, 2001), 『시간의 눈금』(열림원, 2005), 『내려올 때 보았네』(비채, 2007) 등을 펴냈다.
이처럼 그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 그가 진정 하고자 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분출시켰다. 젊은 시절 켜켜이 쌓아놓았던 성과물을 늙은 나이에 하나씩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늦깎이 창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작업실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하기 싫은 온갖 핑곗거리가 다 생기지요. 권태롭기도 하고요. 하지만 50년 넘게 남의 글을 읽었으니, 이제 그동안 공부한 것을 글로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20)
참고로 이윤기는 애주가로 유명했다. 그는 술이 상상력을 활성화시키는 일종의 도화선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같은 시베리아계 무당들은 북을 두드림으로써 망아(忘我)지경에 이른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담배 여러 개비를 피움으로써 망아지경에 이른다. 중세 유럽의 점복가(占卜家)들은 수정구(水晶球)를 응시함으로써 앞에 앉은 고객의 영혼에 사이클을 맞추었다. 술 마시고도 소설 구상할 수 있느냐니? 술을 마시고 소설을 구상한다. 술에 약간 취해 있을 때 나의 상상력은 가장 활발하게 작용한다. 상상력이 다른 상상력을 점화시키는 일도 이때 일어난다. 나에게 술은, 북이자, 담배이자, 수정구다. 술을 전혀 안 마신 상태에서는 소설 생각이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딴생각(술 생각)하느라고.”21)
그에게 소설은 무엇일까? 그는 소설을 “숨은 그림을 찾아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숨은 그림을 담아두는 것”이라고 정의한다.22) 또 한편으로 그는 소설을 통해 삶의 여러 면을 독자에게 보여주길 원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소설가가 일종의 신(神)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가가 일종의 신 같은 것이라고 봐요. 소설가가 이쪽 편에도 서고 저쪽 편에도 섬으로써, 삶이란 것이 네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강고한 것이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인생이 불행하기만 하거나 정반대로 너무 행복하기만 하다는 독자들에게, 알뿌리 식물은 일 년 내내 방에 있으면 그다음 해에는 꽃이 안 핀다는 것을 아는가 묻고 싶은 거죠. 그래서 알뿌리 장수들은 그걸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했다가 팔아요. 그러면 꽃이 피지요. 독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내 고통은 내년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구나, 혹은 행복한 사람은 내년에 나는 꽃을 못 피우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23)
위대한 문학, 신화
이윤기에게는 신화연구가 혹은 신화전문가란 별칭이 따라다닌다. 1970년대부터 신화연구를 해온 이윤기는 번역과 독서를 통해 신화연구에 한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이윤기를 떠올린다. 이윤기는 1999년 11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문화일보>에 「신화에세이」를 연재했고, 2000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이윤기의 신화기행>이라는 이름으로 EBS에서 강연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웅진지식하우스, 2000)를 펴낸 것도 이때였다. 이 책은 출간 3개월 만에 11쇄를 인쇄할 정도로 인기를 끌어 인문과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신화 읽기’ 열풍을 일으켰다.
이후 이윤기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2002),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2004),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2007) 등을 내놓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200만 권 이상이 팔린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이 외에 이윤기는 자신의 이름은 건 신화 에세이를 여러 편 출간했다. 『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작가정신, 2002), 『이윤기, 그리스에서 길을 묻다』(해냄, 2003), 『꽃아 꽃아 문 열어라: 이윤기 우리 신화 에세이』(열림원, 2007) 등이 그것이다.
이윤기가 신화에 집중하고 신화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신화가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명저를 읽으면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다. 배움으로 만들어진 나 이전의 나와 만나는 것처럼. 신화와의 만남은 보편과의 만남이다.”24)
그가 조셉 캠벨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던 영웅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늘도 5번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주목하는 까닭도 신화가 보편적이라는 믿음 때문이다.25) 이 때문에 그는 “인류의 삶이 곤고해질 때마다 결국은 신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26) 그가 ‘신화 읽기’를 독자에게 권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윤기가 신화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화가 소설 창작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밑반찬, 소설이 주 요리”라는 그의 말처럼 신화는 그의 소설 창작에 많은 도움을 준다.27)
“신화는 위대한 문학이죠. 문학의 화석입니다. 신화적 상상력은 곧 소설적 상상력입니다. 이 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호메로스의 상상력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빚었지요. 그것은 신화이자 서사시입니다. 결국 소설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소설쓰기는 ‘작은 신화 빚기’가 아닐까요? 당대에 읽히다가 훼멸되면 소설이고, 오래오래 삶과 인간의 한 유형으로 남아 읽힌다면 신화에 편입되겠지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신화에 편입된 것처럼 말이에요.”28)
아쉬운 시간
소설과 번역 그리고 신화연구. 이 세 가지가 이윤기란 인물을 구성하는 삼각형이다. 이윤기는 생전에 이 삼각형을 그리는 일에 힘을 쏟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최근에 점선으로 삼각형을 하나 그렸습니다. 한 변은 안 쓰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소설쓰기’, 또 한 변은 내가 가본 산길을 독자들에게 일러주는 일련의 작업으로 이루어질 ‘저술행위’, 나머지 한 변은, 옛 사람들이 간 길을 오늘 사람들에게 일러줄 ‘고전번역’이 차지합니다. 앞으로 한 20년 동안 이 삼각형을 실제로 그리는 일에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꿈이 너무 큰가요?”29)
1990년대 후반, 앞으로 한 20년 동안 이 삼각형을 그리는 일에 힘을 쏟을 생각이라고 말했던 이윤기는, 실제로 그 이후에 소설쓰기와 저술행위 그리고 고전번역을 꾸준히 진행했다. 자신이 한 말을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년이란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그 점이 못내 아쉽다.
| 주 |
1) 이 글은 최을영 외 지음, 『베스트셀러와 작가들』(인물과사상사, 2001)에 실린 글인 최을영, 「이윤기: 삼각형을 그리는 작가」를 참조했으며, 일부를 재구성했습니다.
2)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78쪽.
3) 권명아,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는 자」, <작가세계>, 1999년 여름호, 28~29쪽에서 재인용.
4)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79~181쪽.
5)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 나무, 1998, 206~207쪽.
6) 이윤기?이다희 대담,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너희 아버지 어디 갔니?」, 김우창 외 25인,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민음사, 2001, 22쪽.
7)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1쪽.
8)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1~182쪽.
9)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2쪽.
10) 권명아,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는 자」, <작가세계>, 1999년 여름호, 34쪽.
11)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2~183쪽.
12) 이윤기는 이 책을 1970년대 말에 번역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출판을 꺼려 결국 1996년에 이르러서야 출간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이윤기는 세 번이나 번역작업을 해야 했다.
13) 이윤기, 「역자후기-17세기의 사이버스페이스」,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역, 『전날의 섬 하』, 열린책들, 1996, 667쪽.
14) 이윤기, 「역자후기-‘추’의 자리에 ‘진자’를 매달면서」,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역, 『푸코의 진자』, 열린책들, 1995, 개정증보판, 1061~1062쪽.
15) 열린책들 편집부, 『미메시스』, 열린책들, 1999, 190~191쪽.
16)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334~335쪽.
17) 김예림, 「삶에의 기술과 자기 치유의 노정」, <실천문학>, 1995년 겨울호, 395쪽에서 재인용.
18)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82~83쪽. 이윤기는 후에 김대중이 75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세운 계획의 일부를 수정했다. 60세가 되어도 쓰기를 멈추지 않고 죽을 때까지 쓰기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19)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334~335쪽.
20) 한승주, 「괴력의 문학열정… ‘문화권력’ 부상」, <국민일보>, 2000년 8월 1일, 18면.
21) 이윤기?이다희 대담,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너희 아버지 어디 갔니?」, 김우창 외 25인,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민음사, 2001, 26쪽.
22) 하종호, 「“소설은 글 속에 숨은 그림 담기”」, <한국일보>, 2000년 6월 27일, 19면.
23) 문혜원, 「내 안에 숨은 신화 찾기」, <문학사상>, 2000년 12월호, 232쪽.
24) 성우제, 「“인류 문화 2500년 전에 완성”」, <시사저널>, 1998년 11월 26일, 80면.
25)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166쪽.
26) 한승주, 「괴력의 문학열정… ‘문화권력’ 부상」, <국민일보>, 2000년 8월 1일, 18면.
27) 윤정훈, 「“이젠 디저트 드시오”」, <동아일보>, 2000년 8월 5일, B4면.
28) 문혜원, 「내 안에 숨은 신화 찾기」, <문학사상>, 2000년 12월호, 227쪽.
29)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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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번역서를 구입할 때면 꼭 번역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만약 번역가 이름이 낯설면 그의 번역 이력을 살펴보고, 본문을 읽어 번역이 매끄럽게 됐는지를 확인한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책을 읽었을 때의 짜증과 곤혹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욕심내서 비싼 값을 주고 책을 구입했는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할 때는 짜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낀다. 출판사에 전화해서 항의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그 반대로 잘된 번역서를 볼 때면 번역가의 이름을 꼭 기억해두고, 그다음에 책을 살 때 그 번역가의 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구입한다.
나에게 이런 습관을 안겨준 이는, 번역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이는 바로 이윤기다. 그가 번역한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92)을 읽고 나는 번역의 묘미를 깨달았다. 그를 알고부터 번역가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됐으며, 마음에 드는 번역가 몇 명을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 번역가 중 들머리에 서 있는 이는 당연히 이윤기다.
나에게 번역의 묘미를 깨우쳐준 한국의 대표적인 번역가이자, 소설가, 신화연구가인 이윤기가 2010년 8월 27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글, 시작한다.
독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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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는 1947년 경북 군위군 우보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윤기를 포함한 일곱 남매와 시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린 시절 이윤기의 집안은 가난했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이윤기는 독서광이었던 할머니 덕분에 책을 가까이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한문을 익히며 할머니가 평소 즐겨 낭송하던 『옥루몽』을 외우며 자랐다.
“내 어릴 적, 그러니까 1950년대 초, 내 조모의 취미 중 하나는 고담(古談)을 송창(誦唱) 가락으로 읽는 일이었다. 조모가 거처하던 사랑은 그 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조모가 즐겨 낭송하던 책은 『옥루몽』이었다. 『옥루몽』은 내가 만난 최초의 서사문학이다. 형님들 귀 너머로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을 힐끔거린 직후의 일이었다. ‘뜻도 모르고’ 읽고 왼 것은 아니었다.”2)
할머니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독서광이었다. 이윤기의 어머니는 한국 고유의 서사문학을 즐겨 읽었는데 이윤기는 그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이런 고전을 외우고 다녔다. 또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천자문』과 『소학』을 달달 욀 정도로 책을 가까이 했다. 책과의 만남은 이렇듯 자연스러웠고, 그는 일평생 책을 가까이 하며 살게 된다.
1958년 4월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구 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5세라는 늦은 나이로 경북중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도서반원이 되면서 수많은 책을 섭렵하게 된다. “수천 권에 이르는 장서와의 만남은 통발에 갇혀 있던 고기가 물을 만난 형국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책은 지적 목마름을 해소해주었다.3) 당시 그는 서정주와 이어령의 글을 몽땅 외우고 다니기도 했다.
“학교 공부 같은 것은 쥐뿔도 아니었다. 미당 서정주의 시집을 읽는데, 읽는 족족 암기하게 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자랑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사이클이 딱 맞는 책이 있는 법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어령의 『지성의 오솔길』이 나온 것이 그 어름이다.…… 그 어리고 어리석던 시절에 나는 시도 읊고 산문도 끼적거리고는 했는데, 친구들은 시를 써서 보여주면 ‘어째 미당 냄새가 너무 난다’고 했고 산문을 끼적거려 보여주면 ‘어째 이어령의 건방기가 묻어난다’ 했다. 왼 것 잊어버리는 데 오래 걸렸다.”4)
이윤기가 외웠던 것은 시, 산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과 음악도 온통 외우고 다녔다. 감상이 아닌 단순 암기를 통해 예술작품을 접했던 것이다. 그는 신문에 나오는 그림을 오려 이것은 낭만주의, 이것은 고전주의 하는 식으로 그림을 외웠다. 또 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악감상실에 다니며 이것은 베토벤, 이것은 브람스 하는 식으로 음악을 외웠다. 훗날 이윤기는 자신이 예술과의 만남에 관한 한 ‘천박한 이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5)
1965년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윤기는 3개월 동안 학교를 다니다 자퇴한다. 주판 교사로부터 받은 체벌로 인해 학교생활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주판 놓기’의 젬병이었어. 자꾸 틀리니까, 주판교사가 주판으로 내 까까머리를 밀어버리는데, 물론 내가 까까머리를 밀리는 순간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 버렸기 때문이겠지만, 한 줄에 여섯 개씩 꿰여 있는 주판알이 내 머리의 살가죽으로 파고들고 말았어. 여섯 줄로 된 상처 중 두어 줄에서 피가 흘렀지. 많이 흘렀어. 눈으로 흘러 들어갔을 정도로……. 단지 주판을 잘 놓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인을 꿈꾸던 아이, 인문학자를 꿈꾸던 아이, 영어와 일본어로 시와 소설을 읽던 아이에게 상처를, 그것도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입히던 곳…… 거기 더 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싶더라. 그런 야만의 시대였어. 나에게 스승의 날은 없다.”6)
학교를 떠난 이윤기는 한동안 야학교사를 하며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이때 즐겨 했던 공부는 중학시절부터 재미를 느꼈던 어학공부였다. 영어와 일어 그리고 독일어까지 섭럽한 그는 원문으로 된 소설을 읽을 정도로 어학에 자신감을 보였다.
“나는 ‘글읽기’를 배우는 학교에다 ‘학창 시절’이라는 월사금을 바쳤다.…… 나는 그 시절에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영어를 배워 헤밍웨이, 오 헨리, 윌리엄 포크너(이 양반의 책이 가장 어려웠다)를 읽었다. 일본어를 배워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이 양반의 시전집은 울면서)를 읽었다.…… 독일어로도 소설을 읽었지만 지금은 ‘당케 쇤’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7)
이윤기의 어학실력은 배움에 대한 열정 때문에 얻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는 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더 나아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외우면서 한 장씩 씹어 먹는 상당히 무식한(?) 방법을 통해 어학 실력을 키워갔다. 또 이때 이윤기는 『한국단편문학전집』을 읽고 “한국문학이라는 건물을 지어 올리는 데 벽돌 한 장이라도 보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8)
운 좋은 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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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한 이윤기는 1967년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신학을 통해 종교사학, 종교현상학, 민속학, 신화학까지 공부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대학에서 이윤기는 배움에의 갈증을 풀 수 없었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와 입대 날짜를 기다리다가 1969년 입대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 입대한 이윤기는 1971년 4월 베트남으로 향한다. 1년 동안 베트남에 머무르며 그는 전투병으로 작전에 참가했고, 나머지 기간에는 전투 일선에서 물러나 발전기 기사, 헬기로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일 등을 하며 지내게 된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은 단편 「하얀 헬리콥터」와 장편 『하늘의 문』에 투영되어 있다.
베트남에서 지낸 마지막 3~4개월 동안 이윤기는 근사한 경험을 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군대살이하면서도, 그것도 월남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글읽기를 ‘직업적’으로 했다. 전투병을 은퇴(隱退)하고 3, 4개월 동안 영내(營內) 도서관 사서 노릇을 했던 것이다. 1만여 권의 장서를 관리하자니 분류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분류하자니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운수 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가지 밭에만 넘어진다는 말이 있다. 책 좋아하는 전투병이 도서관 사서를 할 수 있었으니 나만큼 운이 좋은 ‘과부’도 없을 터이다.”9)
1972년 4월 귀국한 이윤기는 잔여 복무기간 3개월을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이때 그는 우리 산천과 똑같은 북한 땅을 보고, 그리고 적이 베트콩에서 동포로 변해 있는 사실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았다. 분단의 현실을 비로소 체감한 것이다. 이즈음 그는 월남에서의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10)
군 제대 후 이윤기는 약 1년간 재도급 업자인 종매형의 서기 노릇과 도목수인 제종형 아래서 일종의 ‘해결사’ 노릇을 하며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리고 1974년 베트남에서 만난, 후에 방송작가로 활동하는 김준일과 함께 『니체전집』을 윤문했다.
한편 제대 직후부터 신춘문예에 계속 응모해왔던 이윤기는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기쁜 일이었지만, 겁이 덜컥 나는 일이었다.
“문단은 좀체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래지 않아 문이 반쯤 열렸다. 그때의 심경을, 지금은 기억에 가물가물한 아시카와 다쿠보쿠의 단가(短歌)를 인용해서 드러내보면, ‘낡은 문을 에멜무지로 밀어보았더니 너무 쉽게 열려서 실망했다’와 비슷하다. 어, 뜨거워라 싶어서 문단에서 도망쳤다. 최근 들어, 그때 왜 도망쳤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이 좋아서 단 한 차례 케이오 펀치를 날릴 수 있었던 권투선수가,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 참가하라는 제의를 받은 판인데? 튀자.…… 나는, 연습을 핑계 삼아, 문단에 들어가기도 전에 입산했다.”11)
번역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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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부족하다고 여겨 문학의 길에서 잠시 비켜선 이윤기는 산으로 들어가 번역일을 시작했다. 이윤기가 최초로 번역했던 작품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편(編)한 네 권짜리 『전장의 인간』(태양문화사, 1978)이었다. 『전장의 인간』이 출판되던 해 결혼한 이윤기는 번역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또한 그는 이때 본격적으로 신화를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그 발단은 책 디자이너 정병규가 던져둔 일본어판 『인간과 상징』이란 책 때문이었다. 신화를 통해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카를 융의 『인간과 상징』을 읽던 이윤기는 저자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심리학보다 고대 신화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신화와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인간과 상징』을 미친 듯이 번역했고 본격적인 신화연구를 시작했다.
번역과 신화연구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이윤기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를 보낸다. 그는 1978년부터 한 달에 한 권꼴로 번역서를 출간해 1980년대 말 무렵에는 150여 권에 이르는 번역서를 내놓았다.
당시의 주요 번역서로는 앙리 샤리에르의 『카라카스의 아침』(홍성사, 1978), 리차드 아모어의 『이 모든 것이 돌멩이와 몽둥이로부터 시작하였다』(홍성사, 1978)와 『모든 것은 이브로부터 시작하였다』(홍성사, 1978), 클라우스 만의 『소설 차이코스프키』(고려원, 1979), 제프리 아처의 『카인과 아벨』(심지, 1981),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고려원, 1981)와 『미칼레스 대장』(고려원, 1983),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86),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학원사, 1986), 에코의 『푸코의 추』(열린책들, 1990), 토마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고려원, 1991), 파울 프리샤우어의 『세계풍속사』(까치, 1992) 등이 있다.
또 그는 신화와 관련된 책들도 번역해 내놓았다. 『인간과 상징』(열린책들, 1996)12),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평단문화사, 1985), 토마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대원사, 1989), 조셉 캠벨의 『세계의 영웅신화』(대원사, 1989), 엘리아데의 『샤머니즘』(까치, 1992),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민음사, 1994),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신화의 힘』(고려원, 1992),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열린책들, 1997) 등이 그것이다. 1988년에는 소설 형식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해석한 전 3권짜리 『뮈토스』(고려원)를 출간했다.
무수히 많은 이윤기의 번역서 중 대중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렵기로 소문난 에코의 소설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수백 개에 이르는 각주까지 달아가면서 친절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충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윤기는 1996년에 번역한 에코의 또 다른 소설 『전날의 섬』(열린책들) 후기에서, 난해하기로 유명한 에코의 소설을 번역한 역자의 심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코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운이 좋다.” 역자는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맞다. 역자만 빼고.”13)
이윤기가 역자후기에서 밝힌 이 말은 그가 에코의 소설을 번역하며 느꼈던 고충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번역하며 원서를 집어던진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그 고충만큼 들인 노력도 상당했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는 각각 1992년과 1995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독자들의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이윤기의 말에 따르면 1986년에 출판된 『장미의 이름』은 오역을 바로잡고 400여 개의 각주를 달아 개정판을 낸 데 비해 『푸코의 진자』는 제목부터 『푸코의 추』에서 『푸코의 진자』로 바꾸고, 처음부터 각주를 달아가며 몽땅 다시 번역했다고 한다.14)
이런 성실함과 완벽주의적 풍모 때문에 이윤기는 번역가로 이름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이윤기는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자신이 번역한 책 중에 번역이 잘된 책으로 꼽았다. 그리고 1999년 번역문학 연감 『미메시스』에서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출판인들이 이윤기를 한국에서 최고로 뛰어난 번역가로 선정했고, 번역가들은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92)을 해방 이후 가장 번역이 잘된 번역서로 꼽았다.15) 2000년에는 대한민국 번역가상을 받기도 했다. 30년 넘게 번역에 힘을 기울였던 이윤기는 자신의 번역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번역은 한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윤기가 번역을 시작한 것은 생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번역을 통해 소설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번역에 몰두한 이유는 특별히 없고요, 생업이었어요. 발자크가 노름빚 때문에 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별로 신기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내가 번역을 시작한 시점으로 소급해서 만들어 낸, 근사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소설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지요. 사유의 연습 같은 것에 대한 집착이었어요. 나는, 소설 공부 중에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정독(精讀)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번역을 통하여 저는 더할 나위 없는 정독의 방법을 배웠습니다. 도장이 아닌 뒷골목에서 배운 태권도 같은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요?”16)
자연발생적인 소설쓰기
앞서 본 것처럼 이윤기가 처음부터 번역가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소설쓰기는 자연발생적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소설가를 꿈꾸었고 실제로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하얀 헬리콥터』로 일찌감치 등단한 소설가였다.17) 그러나 그는 등단 후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진 않았다. 문학을 추구하긴 했지만 문학을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번역에 매달렸고,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진작부터 이런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내게는 서른 살 무렵에 짠 내 인생의 계획표가 있다. 매우 정교한 시행 세칙이 있지만 줄거리는, 공자 말씀 믿지 말고 쉰 살 되기까지 생업에 뜨겁게 매달리되 공부를 계속하고, 쉰 살부터 예순 살까지는 쓰기에 매달려 그동안 해온 공부의 보람이 뒤쪽으로 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예순 살부터는 붓을 놓고 다시 공부에 들되, 공부로써 삶의 지극한 비밀을 꿰뚫어 죽음을 하찮게 여길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18)
서른 살 무렵에 세운 인생설계치고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주목할 점은 이윤기가 이 인생설계대로 살았다는 점이다. 그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1990년 무렵이었다. 당시 이윤기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좋아하면 자주 하게 되고, 자주 하게 되면 전문가가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번역도 참 좋은 일이지만 가장 좋은 일을 아니었어요.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지요. 너는 지금 삶에서 무엇을 취하고 있는가? 하고 있는 일, 살고 있는 삶에는 지금 네 피가 통하고 있는가? 너는 하고 있는 일의 품삯이 아닌 일 그 자체, 그 일의 골수와 희로애락을 함께할 수 있는가? 너는 삶에서 무엇을 취하는가? 가죽인가, 뼈인가? 문제는 골수이겠는데, 과연 골수인가? 1990년, 도미 직전에 던진 질문인데, 결국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디다. 그때까지 내 소매를 붙잡고 있던 번역이라는 걸 떨쳐버리려는 몸짓…… 1991년의 도미에는 그런 속사정이 있습니다.”19)
1990년 당시 출판사 고려원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던 이윤기는 이런 속사정 때문에 1991년 미국으로 향한다. 마침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국제대학의 초청이 있었다. 그해 8월 이윤기는 초빙연구원 자격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행은 번역을 떨치려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번역을 쉽사리 떨치지 못한다. 오역이 많은 『장미의 이름』과 미덥지 못한 『푸코의 추』가 뒷덜미를 붙잡았다. 번역작업을 하면서 그는 1993년부터 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1994년 장편소설 『하늘의 문』을 출간한다. 그리고 1995년에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 「나비넥타이」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6년 8월 일시 귀국한 이윤기는 그동안 써온 작품 여러 편을 국내 문학계간지에 게재했다. 그리고 1997년 9월 이윤기는 미시간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객원교수로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윤기는 국내 문학지에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중 1997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발표한 「숨은 그림 찾기 1-직선과 곡선」이 문단 내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고, 결국 이 작품으로 1998년 <조선일보>가 주관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동인문학상 수상으로 자신감을 얻은 이윤기는 2000년 귀국해 소설 창작에 몰두했고 그가 내놓은 소설은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윤기는 번역을 통한 습작, 경제적인 문제 해결 덕분에 1990년대에 갑자기 출현한 ‘신예(?) 중견작가’로 활동했다. 그가 ‘신예 중견작가’란 모순된 칭호로 불리는 이유는 1970년대에 등단을 했으나 실제로 활동을 시작한 때는 1990년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에 대한 한을 풀 듯 누구보다 왕성하게 소설을 발표했다.
1988년 작품집 『하얀 헬리콥터』(영학출판사)를 출간한 이후에 『외길보기, 두길보기』(열린책들, 1991), 『하늘의 문(전 3권)』(열린책들, 1994), 『만남』(중앙일보사, 1996), 『햇빛과 달빛』(문학동네, 1996), 『나비넥타이』(민음사, 1998), 『뿌리와 날개』(현대문학사, 1998), 『두물머리』(민음사, 2000), 『그리운 흔적』(문학사상사, 2000), 『나무가 기도하는 집』(세계사, 2000), 『진홍글씨』(작가정신, 2003), 『노래의 날개』(민음사, 2003), 『내 시대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03) 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외에 산문집 『에세이 온 아메리카』(원장재단, 1997), 『무지개와 프리즘』(생각의나무, 1998), 『어른의 학교』(민음사, 1999),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동아일보사, 2000), 『이윤기가 건너는 강』(작가정신, 2001), 『시간의 눈금』(열림원, 2005), 『내려올 때 보았네』(비채, 2007) 등을 펴냈다.
이처럼 그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 그가 진정 하고자 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분출시켰다. 젊은 시절 켜켜이 쌓아놓았던 성과물을 늙은 나이에 하나씩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늦깎이 창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작업실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하기 싫은 온갖 핑곗거리가 다 생기지요. 권태롭기도 하고요. 하지만 50년 넘게 남의 글을 읽었으니, 이제 그동안 공부한 것을 글로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20)
참고로 이윤기는 애주가로 유명했다. 그는 술이 상상력을 활성화시키는 일종의 도화선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같은 시베리아계 무당들은 북을 두드림으로써 망아(忘我)지경에 이른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담배 여러 개비를 피움으로써 망아지경에 이른다. 중세 유럽의 점복가(占卜家)들은 수정구(水晶球)를 응시함으로써 앞에 앉은 고객의 영혼에 사이클을 맞추었다. 술 마시고도 소설 구상할 수 있느냐니? 술을 마시고 소설을 구상한다. 술에 약간 취해 있을 때 나의 상상력은 가장 활발하게 작용한다. 상상력이 다른 상상력을 점화시키는 일도 이때 일어난다. 나에게 술은, 북이자, 담배이자, 수정구다. 술을 전혀 안 마신 상태에서는 소설 생각이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딴생각(술 생각)하느라고.”21)
그에게 소설은 무엇일까? 그는 소설을 “숨은 그림을 찾아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숨은 그림을 담아두는 것”이라고 정의한다.22) 또 한편으로 그는 소설을 통해 삶의 여러 면을 독자에게 보여주길 원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소설가가 일종의 신(神)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가가 일종의 신 같은 것이라고 봐요. 소설가가 이쪽 편에도 서고 저쪽 편에도 섬으로써, 삶이란 것이 네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강고한 것이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인생이 불행하기만 하거나 정반대로 너무 행복하기만 하다는 독자들에게, 알뿌리 식물은 일 년 내내 방에 있으면 그다음 해에는 꽃이 안 핀다는 것을 아는가 묻고 싶은 거죠. 그래서 알뿌리 장수들은 그걸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했다가 팔아요. 그러면 꽃이 피지요. 독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내 고통은 내년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구나, 혹은 행복한 사람은 내년에 나는 꽃을 못 피우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23)
위대한 문학,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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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에게는 신화연구가 혹은 신화전문가란 별칭이 따라다닌다. 1970년대부터 신화연구를 해온 이윤기는 번역과 독서를 통해 신화연구에 한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이윤기를 떠올린다. 이윤기는 1999년 11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문화일보>에 「신화에세이」를 연재했고, 2000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이윤기의 신화기행>이라는 이름으로 EBS에서 강연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웅진지식하우스, 2000)를 펴낸 것도 이때였다. 이 책은 출간 3개월 만에 11쇄를 인쇄할 정도로 인기를 끌어 인문과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신화 읽기’ 열풍을 일으켰다.
이후 이윤기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2002),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2004),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2007) 등을 내놓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200만 권 이상이 팔린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이 외에 이윤기는 자신의 이름은 건 신화 에세이를 여러 편 출간했다. 『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작가정신, 2002), 『이윤기, 그리스에서 길을 묻다』(해냄, 2003), 『꽃아 꽃아 문 열어라: 이윤기 우리 신화 에세이』(열림원, 2007) 등이 그것이다.
이윤기가 신화에 집중하고 신화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신화가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명저를 읽으면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다. 배움으로 만들어진 나 이전의 나와 만나는 것처럼. 신화와의 만남은 보편과의 만남이다.”24)
그가 조셉 캠벨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던 영웅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늘도 5번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주목하는 까닭도 신화가 보편적이라는 믿음 때문이다.25) 이 때문에 그는 “인류의 삶이 곤고해질 때마다 결국은 신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26) 그가 ‘신화 읽기’를 독자에게 권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윤기가 신화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화가 소설 창작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밑반찬, 소설이 주 요리”라는 그의 말처럼 신화는 그의 소설 창작에 많은 도움을 준다.27)
“신화는 위대한 문학이죠. 문학의 화석입니다. 신화적 상상력은 곧 소설적 상상력입니다. 이 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호메로스의 상상력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빚었지요. 그것은 신화이자 서사시입니다. 결국 소설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소설쓰기는 ‘작은 신화 빚기’가 아닐까요? 당대에 읽히다가 훼멸되면 소설이고, 오래오래 삶과 인간의 한 유형으로 남아 읽힌다면 신화에 편입되겠지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신화에 편입된 것처럼 말이에요.”28)
아쉬운 시간
소설과 번역 그리고 신화연구. 이 세 가지가 이윤기란 인물을 구성하는 삼각형이다. 이윤기는 생전에 이 삼각형을 그리는 일에 힘을 쏟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최근에 점선으로 삼각형을 하나 그렸습니다. 한 변은 안 쓰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소설쓰기’, 또 한 변은 내가 가본 산길을 독자들에게 일러주는 일련의 작업으로 이루어질 ‘저술행위’, 나머지 한 변은, 옛 사람들이 간 길을 오늘 사람들에게 일러줄 ‘고전번역’이 차지합니다. 앞으로 한 20년 동안 이 삼각형을 실제로 그리는 일에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꿈이 너무 큰가요?”29)
1990년대 후반, 앞으로 한 20년 동안 이 삼각형을 그리는 일에 힘을 쏟을 생각이라고 말했던 이윤기는, 실제로 그 이후에 소설쓰기와 저술행위 그리고 고전번역을 꾸준히 진행했다. 자신이 한 말을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년이란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그 점이 못내 아쉽다.
| 주 |
1) 이 글은 최을영 외 지음, 『베스트셀러와 작가들』(인물과사상사, 2001)에 실린 글인 최을영, 「이윤기: 삼각형을 그리는 작가」를 참조했으며, 일부를 재구성했습니다.
2)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78쪽.
3) 권명아,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는 자」, <작가세계>, 1999년 여름호, 28~29쪽에서 재인용.
4)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79~181쪽.
5)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 나무, 1998, 206~207쪽.
6) 이윤기?이다희 대담,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너희 아버지 어디 갔니?」, 김우창 외 25인,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민음사, 2001, 22쪽.
7)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1쪽.
8)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1~182쪽.
9)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2쪽.
10) 권명아,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는 자」, <작가세계>, 1999년 여름호, 34쪽.
11)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182~183쪽.
12) 이윤기는 이 책을 1970년대 말에 번역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출판을 꺼려 결국 1996년에 이르러서야 출간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이윤기는 세 번이나 번역작업을 해야 했다.
13) 이윤기, 「역자후기-17세기의 사이버스페이스」,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역, 『전날의 섬 하』, 열린책들, 1996, 667쪽.
14) 이윤기, 「역자후기-‘추’의 자리에 ‘진자’를 매달면서」,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역, 『푸코의 진자』, 열린책들, 1995, 개정증보판, 1061~1062쪽.
15) 열린책들 편집부, 『미메시스』, 열린책들, 1999, 190~191쪽.
16)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334~335쪽.
17) 김예림, 「삶에의 기술과 자기 치유의 노정」, <실천문학>, 1995년 겨울호, 395쪽에서 재인용.
18) 이윤기,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2000, 82~83쪽. 이윤기는 후에 김대중이 75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세운 계획의 일부를 수정했다. 60세가 되어도 쓰기를 멈추지 않고 죽을 때까지 쓰기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19)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334~335쪽.
20) 한승주, 「괴력의 문학열정… ‘문화권력’ 부상」, <국민일보>, 2000년 8월 1일, 18면.
21) 이윤기?이다희 대담,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너희 아버지 어디 갔니?」, 김우창 외 25인,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민음사, 2001, 26쪽.
22) 하종호, 「“소설은 글 속에 숨은 그림 담기”」, <한국일보>, 2000년 6월 27일, 19면.
23) 문혜원, 「내 안에 숨은 신화 찾기」, <문학사상>, 2000년 12월호, 232쪽.
24) 성우제, 「“인류 문화 2500년 전에 완성”」, <시사저널>, 1998년 11월 26일, 80면.
25)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166쪽.
26) 한승주, 「괴력의 문학열정… ‘문화권력’ 부상」, <국민일보>, 2000년 8월 1일, 18면.
27) 윤정훈, 「“이젠 디저트 드시오”」, <동아일보>, 2000년 8월 5일, B4면.
28) 문혜원, 「내 안에 숨은 신화 찾기」, <문학사상>, 2000년 12월호, 227쪽.
29) 이윤기,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나무, 1998,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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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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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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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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