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학생 가방에는 이 음반이 꼭 있었다
한국은 유난히 발라드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다. 예전에는 정치 권력의 건전가요 강요가 음반에 상처를 남겼다면 요즘에는 시장 권력을 의식한 발라드 타이틀곡의 강박이 흠결을 남기고 있을 정도이다.
글ㆍ사진 나도원
2011.04.13
작게
크게
 
결국, 음악
나도원 저 | 북노마드
대중음악 평론가인 저자 나도원이 한국에 흘렀던 대중가요들 중에서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사랑받았던 음악을 책으로 엮었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좋아한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사람에 비해 음악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음악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 대중음악평론가 나도원의 음악을 향한 시선은 꼼꼼하고 우직하다. 그의 귀는 한대수에서 장기하까지, 주류무대를 주름 잡는 걸 그룹부터 홍대 앞 인디밴드를 오가며, 다양한 음악과 음악인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선 세상을 읽어낸다.
1980년대의 공간에서

손때 묻은 음반들을 남기고 훌쩍 떠난 이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가 투병 중이던 2007년에 《경향신문》과 《컬처뉴스》에 이문세의 앨범에 대한 글을 연이어 썼고, 한국대중음악상 회의에서는 공로상을 그에게 주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2월 14일 이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파와 지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부음에 맞춰 글 한 줄과 말 한마디를 보태기가 어딘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봄이 왔다. 죽음 위에 생명이 자라는 봄은 얼마나 잔인한 계절인지. 또 얼마나 경건한 계절인지, 죽음이 생명을 키우는 봄은.

이영훈은 이문세가 발표한 대부분의 곡들을 쓴 작곡가이자 작사가로 <이문세 4>(1987)와 <이문세 5>(1988), 그리고 <이문세 7>(1991)과 같은 수작들을 낳은 장본인이다. 일관된 흐름 안에 다양성을 녹여낸 ‘앨범’을 지향하여 ‘웰메이드’의 교과서를 제시한 이 음반들은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다수의 후배 음악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가수만큼이나 작곡가가 주목받는 풍토를 재현했으며, 상업적으로 성공함으로써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한 앨범이 그에 상응하는 성과까지 얻어낸 사례가 되었다. 흔한 말로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성취한 이영훈은 1980년대에 달성된 대중음악의 질적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제 그 이야기는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 폭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인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두터운 언더그라운드가 존재했고, 기획사 시스템과 방송 권력이 결탁하게 되는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라디오와 TV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85년과 1986년 두 해 사이에만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김현식, 부활, 시나위 등의 대표작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짧은 터울을 두고 봄여름가을겨울과 신촌블루스,그리고 동물원이 뒤를 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장르가 다른 음악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의 ‘향’으로 기억된다. 세세히 구분된 장르 명칭이나 영향 받은 해외 뮤지션들의 나열은 필요치 않다. 그저 그 이름들, 그리고 함께 해온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이영훈과 이문세는 그 복판에서 만났다. 이들의 만남을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과거를 격하하는 건 온당치 않다.

이영훈은 이문세를 만나기 전에도 연극 등의 무대음악을 비롯하여 다양한 음악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이문세 역시 1집과 2집을 통하여 「나는 행복한 사람」과 「그대」, 「파랑새」와 같은 노래들로 이미 꽤 알려져 있었다. 다만 이영훈은 장래가 촉망되는 미완성의 작곡가였고, 이문세는 록과 포크를 오가며 아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가수였다. 아는 이들이 많진 않지만 이문세는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그로테스크한’ 어린이 합창단과 부른 적도 있다. 그러나 신중현이 ‘반어적 체제 비판가’라고 주장한 이 곡의 리메이크는 이선희의 목소리로 더 많이 들려졌고, 세계적 규모의 체육 경기를 축하하기 위해 잠실 스타디움에서 불리는 아이러니를 겪기도 했다.

이영훈과 이문세가 만남으로써 새 페이지를 적어나가게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노래를 잘하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지만. 단지 노래를 잘한다고 좋은 가수는 아니다. 많은 현을 가진 악기가 두어 개의 현을 가진 악기보다, 그리고 정교하게 세공된 악기가 투박하게 다듬어진 악기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듯, 사람이라는 악기, 즉 보컬 리스트의 가치도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와 자신만의 힘을 얼마나 지니는가에 달려 있다.

이문세는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좋은 작곡가와 빼어난 노래를 만남으로 써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었고, 이영훈 또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얻었다. 가수와 작곡가의 이상적인 결합을 통하여 서로에게 후광을 비춘 것이다. 물론 후에는 그것이 스스로를 제한하는 어떤 틀로 작용했고, 두 사람의 관계가 한동안 소원해지는 일도 있었다. 후광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1985년에 이들은 서로에게 절실한 존재였다. <이문세 3>(1985)부터 참여한 이영훈은 이문세를 인기가수로 만든 「난 아직 모르잖아요」와 어느덧 클래식이 된 「소녀」와 「빗속에서」, 그리고 음악극 스타일의 「할 말을 하지 못했죠」 등을 선보인다. 또한 1970년대 하드 록의 영향을 수렴한 「휘파람」까지, <이문세 3>에 수록된 이영훈의 모든 곡들은 인상적이었다.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마저 보태어진 이 앨범만으로도 두 사람은 중요한 지점에 자취를 새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곧 대중과 음악이 만나는 표면적을 극대화한 수작이 이어진다. 이영훈이 모든 곡을 맡고 당대 최고의 세션 연주인들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완벽한 팝 앨범이 탄생한다. <이문세4>(1987)가 그것이다.

이영훈과 이문세가 만남으로써 새 페이지를 적어나가게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문세는 좋은 작곡가와 빼어난 노래를 만남으로써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었고, 이영훈 또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얻었다.

이영훈의 격이 있는 사랑 노래

한국은 유난히 발라드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다. 예전에는 정치 권력의 건전가요 강요가 음반에 상처를 남겼다면 요즘에는 시장 권력을 의식한 발라드 타이틀곡의 강박이 흠결을 남기고 있을 정도이다. 서정가요의 발전을 추동한 이영훈과 이문세를 이러한 발라드 집착과 연결 짓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앨범은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었고, <이문세 4>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이 지나가면」을 시작으로 고급스러운 현악 연주가 수놓인 「밤이 머무는 곳에」와 「이별 이야기」, 신스 팝과 록을 반영한 「그대 나를 보면」과 포크송 「가을이 오면」으로 채워진 A면은 물론, 「깊은 밤을 날아서」와 「슬픈 미소」, 「굿바이」와 「그녀의 웃음소리뿐」으로 이어지는 B면의 모든 곡들이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영훈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다듬어 써 내리듯 앨범을 만든 완벽주의자였다. 이들의 성공은 잔뜩 부푼 풍선에 바늘 끝을 갖다댐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영훈은 화성적인 안정성과 구조적인 완결성을 중시했으며, 대중성을 획득하면서 품격을 유지하는 대중음악의 조형 방식을 제시했다. 어렵지 않으면서 틀이 잡힌 곡들의 저변에는 바흐의 숨결이 남은 클래식과 팝의 새로운 조류를 수용한 감각이 흐른다. 또한 사랑과 평화에서 활동한 김명곤이 편곡을 맡아 이영훈 못지않은 비중으로 기여했기에 이문세 전성기의 앨범들은 이문세, 이영훈, 김명곤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이문세 5>(1988)는 이러한 요인들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사실 당시 이문세 5집을 기다렸던 골수팬들은 4집에 비해 느슨해진 개별 곡들의 완성도와 집중도에 다소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시를 위한 시」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있었고, 「붉은 노을」과 「안개꽃 추억으로」가 있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진부했던 「광화문 연가」마저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한 5집은 이영훈과 이문세가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노래들의 주된 테마인 ‘헤어짐’을 통하여 대중과의 만남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문장만으로는 다소 묘한 구석을 내포하고 있다. 이영훈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하여 통속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는 말로 격하되지 않을 ‘격이 있는 사랑 노래’를 썼다.

과장과 위악과 오만 없이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풍성한 선율과 혼잣말과 같은 가사에 저며냈다. 그러면서도 자기 연민과 감정 과잉 속에 허우적대지 않고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살다보면 다른 가능성이 두려워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그러고선 ‘그래 차라리 잘됐어’라고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베어져 저만치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정서가 공감을 불러왔다.

흥미롭게도 앨범에 따라 그 거리는 변하여 이문세 3집과 4집이 헤어짐의 순간과 직후의 심상을 그렸다면 5집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를 담아내게 된다. 그리고 뒤에서 다시 말하게 될 <이문세 7>(1991)에 이르러 담담한 회상과 ‘아무렇지 않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옛사랑」과 「풋잠 속에 문득」은 그 완성이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볼 때 남는 것은 단지 아련한 향수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1980년대라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에 저항 또는 순응이라는 항의 대입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계단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느 예술가와 철학자가 특별히 불우한 시대를 산다는 것은 간혹 불행이다. 훗날 사회적?역사적으로 과잉된 해석을 개입시켜 20세기의 한국 대중음악의 주된 소재가 ‘이별’이었음을 분단 현실의 반영이라 분석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지만 이러한 수준 이전에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을 편치 않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나쓰메 소세키가 1916년에 죽어 이후의 일본에서 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다행이고, 마르틴 하이데거가 나치 독일에서 살아야 했던 것은 또한 어쩌면 불행이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때에도 사랑이 있었고 삶은 계속되었다. 매운 최루탄 냄새를 툭툭 털고 하숙집에 돌아온 대학생의 주머니에도, 얼굴 모르는 집단을 위해 거리에 서야 했던 전투경찰의 고향집 방에도, 교복을 입지 않았던 시절의 어린 학생의 가방에도 이영훈과 이문세의 음반이 있었다.


지금, 이영훈을 말하는 이유

연못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돌멩이 하나를 집어 수면 위에 던지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동심원이 홀로 넓게 퍼져나가던 시대는 지나갔으며, 작은 파장들이 여기저기에서 끝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다.

‘깊이에의 강요’에서 벗어나 행위 자체를 즐기며 완전한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닌 과정과 행위에 의미를 두는 음악인들도 많아졌다. 노이즈와 소리 자체만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미 생소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처럼 저마다의 손짓들이 섞여 또 다른 형태의 파장을 그려낸 다양한 양식들은 나눠짐이 아닌 합쳐짐의 결과라 해야 옳다.

이러한 기준에서는 공식에 충실한, 또는 공식을 만들어낸 이영훈의 곡들은 헌 방식으로 태어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계단을 놓거나 바통을 넘겨주고 있었고, 다른 단계였다면 또 다른 역을 맡았을 것이다. <이문세 3>부터 <이문세 5>까지 연이어 성공하면서 이영훈과 이문세는 하나의 정석이 되었다.

가뜩이나 천편일률적이던 대중음악의 소재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묻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기실 정태춘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결실을 맺은 1996년 이전까지는 정권의 자의적인 단속과 음반 사전심의와 같은 제도적 검열이 대중음악의 고리를 수시로 끊어놓았다. 음악인 스스로 소재와 표현을 제한하게 한 자기검열의 내면화는 여전히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서구의 대중음악에서 한국의 민중음악보다도 직설적이고 저항적인 노랫말을 찾아볼 수 있음과 대조된다. 멜로디가 좋아 흥얼거리곤 했던 팝송과 록의 명곡들 중 상당수는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의 절망이거나 살기 위해 창녀가 된 여인의 탄식이곤 했다.

이전과는 음악적으로 다른 분위기였을 뿐만 아니라 소재에서도 사랑과 이별을 벗어나고자 한 <이문세 6>(1989)은 새로운 시도였다. 이문세가 건너편 건물의 태권도장 아이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을 정도로 힘들게 제작했다는 이 앨범에는 ‘군인 정치인’을 빗댄 「장군의 동상」을 비롯하여 「생각하는 사람들」 등 이전과는 다른 내용이 담긴다. 「그게 나였어」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은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해바라기」는 그들의 대리스트에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몽가요로 들릴 정도의 거친 어법은 세상이 이영훈에게 원했던 것과 달랐다. 앨범 안에서 곡마다 성격을 배분하는 패턴도 계속되었다. 「붉은 노을」(5집)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으로, 「사랑이 지나가면」(4집)은 「시를 위한 시」(5집)를 거쳐 「해바라기」로, 「휘파람」(3집)은 「그녀의 웃음소리뿐」(4집)을 지나「다시 만나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급한 이들이 시선을 돌릴 즈음, 그리고 이영훈과 이문세의 생물학적 나이가 서른을 넘길 즈음, 오래된 팝과 재즈 등을 성공적으로 융화시킨 <이문세 7>(1991)에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의 성공적인 진입을 증명한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고급가요의 완성이었다. 6집에서 고음에 집착하여 다소 버거운 듯했던 이문세의 보컬이 안정적인 음역대를 찾은 것처럼 이영훈 역시 성숙에 걸맞은 옷을 입었다. 두 사람의 음악 작업이 더이상 하나의 ‘사건’이 되지 못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7집은 한국에 완성도 높은 어덜트 컨템퍼러리 뮤직을 제시한 앨범이었으며, 이후의 행보를 위한 이정표가 된다. 분명히 알면서도 설명하기 힘든 것들이 생기게 된, 나이를 먹기 시작한 남자들의 굽이가 새겨졌다.

심지어 어떤 노래들에서는 종교성마저 발견된다. 1991년에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문세는 「옛사랑」이 세속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진행자가 쉬이 넘겨버린 그 말은 이영훈의 내밀한 사연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전에 가스펠 음반을 만들고 싶어했다는 이영훈의 「옛사랑」에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겹쳐진다.

그것은 CCM 음반에 수록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겨울의 미소」에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민중음악의 경직성을 해학으로 넘어서고 있는 연영석은 「죽은 시인」에서 예술지상주의를 “시를 위한 시를 쓰고 시를 알게 되면서 죽어갔네”라고 질타한 바 있다. 정형화된 형식과 감상적 개인주의, 그리고 종교성까지 입혀진다면 이영훈의 음악은 더욱 보수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비기독교인들이 교회 음악가였던 바흐를 아낀다는 것에 굳이 변호가 필요치 않은 것과 같은 주름은 존재한다.

이영훈, 그가 그린 시적이고 회화적인 풍경들


현재의 대중음악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이영훈이라는 이름은 단지 추모나 향수의 대상으로 머무르지 않고 어떤 동기를 부여한다. 이영훈과 이문세는 유능한 음악인이 기회를 얻고, 충실한 앨범 제작을 위해 자본이 투입되며, 라디오와 공연만으로도 모종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았다. 극단적인 상업주의가 음악의 공정화를 요구하는 지금으로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음악적 핏기를 간직한 인디음악을 조명하면 차별적 지지를 한다는 오해를 사는 현실이다. 인디에 대한 안티마저 생겨나는 것은 그만큼 역량과 영향력이 커졌다는 반증이겠으나, 자극이 있어야 창조가 가능하고 아마추어리즘 뮤지션과 아마추어 뮤지션은 다름에도 몰이해와 편견은 강력하다. 가지와 뿌리 중 하나만 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혹 TV에서 캐릭터 사업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매력을 반감시켜버린 만화들을보게 된다. 그와 비슷했기에 외면받았던 아이돌 시스템이 2007년에 몇 건의 성공을 거두자 시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전망이 제기되었다. 믿었다기보다는 믿고 싶었을 것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판단하기 마련이지만, 그 아이돌 스타들이 실제로 거둔 성과와 영향은 초라하기만 했다. 1990년대부터 성장해오며 고정 지지자들을 포섭해놓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음반들이 더 팔려나가고 공연들은 성황을 이룬 것과도 대조를 이루었다. 증상 치료와 원인 치료가 혼동되는 상태에서 기획은 투기적일 수밖에 없다. 질서와 탈주, 그리고 정통과 전위가 공존하는 음악계야말로 건강함에도 지금 ‘대중가수’ 이문세와 ‘가요 작곡가’ 이영훈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논하는 것은 사치에 가까울지 모른다.

대중친화성과 함께 스타일이 중시되는 주류 대중음악계에서는 시장의 요구에 부응한 ‘쉽게 하기’가 더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대중이라는 말이 타자화된 채로, 또는 대변자를 자처하기 위한 용법으로 쓰이는 논리는 외울정도로 들어왔다. 이 속에서는 덜 나이 들고 덜 알았을 때 더 훌륭했던 음악인들이 양산된다.

소통을 거부한 일방성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남들이 원할 것 같은 음악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 사이에서 표류하는 것 역시 불우하긴 마찬가지다. 어느 배우는 전라 장면에서 자신이 아닌 대역이 연기했다며 웃었지만, 관객이 그 배우의 벗은 몸으로 알았고 보았고 기억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지켜낸 것일까. 병에 꽂힌 채로도 꽃은 피울 수 있지만 뿌리를 내릴 수는 없다.

해외의 트렌드 수입이 중시되면서 때론 문화 선도자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부여받은 대중 스타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책보다 신문에 실린 서평을 더 많이 읽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행위마저 그 안에 녹아든 시간을 먹는 것일진대, 단순 조합과 성급한 전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근래의 복고 풍조 역시 비슷한 한계를 노출한다. 복고는 시장을 위한 과거의 차용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유의미한 재창조일 때 가치를 지니지만, 작금의 복고는 시장 논리에 수동적이다. 물론 2008년 무렵의 복고 바람이 대중음악계에만 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음악(음원, 음반)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한 미술품 유통시장의 규모와 같은 4천억 원대이면서도 위기로 진단받는 것은 수익 분배의 비합리성과 함께 이처럼 내용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서이다. 무수히 많은 작곡가들이 주문생산한 곡들 중에서 시장의 기호에 맞을 법한 것을 골라 싣는 식으로 비슷비슷한 음반이 만들어지고, 공연은 방송 출연과 행사보다 중시되지 않는 세태이기에 이영훈과 이문세는 더더욱 다시 상기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모시키지 않았다. 이 시대가 ‘최고’와 ‘최대’를 구분하지 않음은 지금 플라스틱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만큼이나 분명해 보인다.

물론 다른 시대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평가와 위상의 상승, 산업성장과 위기의 과정을 몇 해의 터울을 두고 비슷하게 밟아온 영화계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내용으로 귀결된다. 이를 외면한 채 아무리 둔중한 자극을 가한들 젊은이로 변신하는 도술을 익히느라 젊음을 바쳐버리는 삶과 다르지 않다.

20여 년 전 엄인호의 작업실에서 쭈뼛하게 인사를 나누었을 두 젊은이는 자연스레 대중성과 음악성을 화해시켜 나간다. 타인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 하고, 타인이 갖고 싶은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음악에도 스며들어 있다. 그 안에서는 두려워할 줄 알아야 신뢰받을 수 있음을 알았던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의미 있는 대중성’의 모범적인 사례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또한 노랫말 쓰기에 더 힘을 들인 이영훈은 시적이고 회화적인 풍경을 그려냈으며, 가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비, 꽃, 노을, 눈은 구체적인 경험의 잔상이었다. 자신을 살펴 세상을 보는 것이 공부이듯 구체적인 경험이야말로 외부와 소통하는 창을 만든다. 물리적 경험이 촉발한 정신적 경험까지 포함한 체험에서 건져진 매듭이 일생에 한 번 스치고 헤어질 사람들과의 교감을 가능케 했다. 사실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지닌다.

이영훈에게 그 공간은 광화문 거리와 덕수궁의 어느 벤치였다. 창작은 정신적 나신을 드러내는 발가벗음이라서 문인과 음악인은 자신의 추억과 아픔을 파는 행위에 죄책감을 떠안기도 한다. 어쩌면 벌써 잊혔을지 모르지만, 그의 사연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화난 걸음들이 오가는 어둑한 거리의 저녁 냄새를 불러오고, 어느 날엔 작은 공원에서 어느 다리의 가로등 아래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데려간다. 언젠가 그 거리는 나를 잊겠지만, 이영훈의 노래들은 또 다른 이의 기억과 장소로 옮겨 살아남으리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이영훈
3의 댓글
User Avatar

pota2to

2012.11.26

제가 태어나기 전 세대라서, 이영훈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습니다. 글을 읽고 그의 음악이 무척 궁금해 지금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전곡듣기 하고있어요 ㅎㅎ 꼭 와닿는 노래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prognose

2012.03.24

전 이문세 가수 이름은 알아도 곡은 잘 모르다보니. 이영훈이라는 이름은 아예 이번에 처음으로 듣네요.
답글
0
0
User Avatar

앙ㅋ

2012.01.21

광화문의 연가라는 곡으로 뮤지컬이 만들어졌죠.한국 대중음악의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시고 떠나신 이영훈님의 곡들 언제들어도 마음속이 촉촉히 젖어듭니다.
답글
0
0
Writer Avatar

나도원

음악 웹진 《100 beat》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