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쉽게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soul)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해요. 나는 이미 당신을,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당신, 영원하고 언제까지나 소중한 당신의 마음과…
글ㆍ사진 서진
201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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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 아르세네프에게

1856년 11월 2일

세인트 퍼터버그

나는 이미 당신을,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당신, 영원하고 언제까지나 소중한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아름다움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어요. 한 시간 안에 사랑에 빠지게도 하고 재빠르게 멈추게도 하지요. 그러나 영혼(soul)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날 믿으세요. 이 땅에 어느 것도 노력 없이는 주어지지 않는답니다. 심지어는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감정인 사랑조차도 말입니다.



레오 톨스토이(Count Leve Nikolayvich Tolstoi, 1828-1910)는 러시아의 작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리얼리즘의 대걸작인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영세한 농민아동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크림전쟁에서의 지휘관으로 일했던 경험은 말년에 그를 평화주의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그의 비폭력 저항의 원칙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루터 킹 주니어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초기의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남자들을 전쟁의 죽음 속으로 밀어 넣었고, 적군을 살해하기 위해 전투를 치루었다. 나는 카드에 졌고, 농부들의 땀으로 비틀어 짠 대지를 훼손했고, 마지막 생존자를 잔인하게 처벌했으며, 헤픈 여자들과 방탕한 생활을 했고, 남자들을 속였다. 거짓말, 강도질, 간음 등 모든 종류의 범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저질렀지만 비교적 나는 도덕적인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나의 십년 간의 삶이었다.”

1856년 군대를 떠난 직후, 동생을 결핵으로 잃고 아름다운 발레리아 아르세네프에게 구혼하여 약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결혼 전에 그를 완전히 이해하길 바랬기에- 그는 일기장을 주었고 그 충격으로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톨스토이는 어떤 여자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지만 6년 뒤 친구의 여동생, 19살의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그의 사랑스러운 소냐는 순조롭고 축복받은 수 년 간 열세 명의 자식을 낳았다.


서진의 번역 후기

최근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의 이야기는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악처라고 하고 -톨스토이가 그녀와 싸우고 집을 나가 객사했다고 추측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녀 때문에 톨스토이가 명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톨스토이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위였고 항상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여자를 필요로 했으나 결국 여성혐오에 빠지는 악순환을 경험했습니다. 톨스토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왜 자신의 일기를 보여주고 청혼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편지의 주인공인 발레리아 아르세네프는 도박과 여성편력으로 파란 만장한 톨스토이의 일기를 읽고 그만 관계를 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피아는 달랐습니다. 그의 일기를 읽고도 결혼했고 평생동안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소피아 톨스토이도 일기를 썼는데 번역이 되면 꼭 읽어보고 싶네요. 그나저나 번역하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연애 편지 인데, 그것이 주는 메시지는 아주 강렬한 것 같습니다. 사랑은 쉽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알기 위해 배워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메시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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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서진 #사랑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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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1318

2013.02.01

정말 인연은 따로 있나봐요. 어떤 상황이나 조건으로 인해 그 사람이 싫어진다면 인연이 아닌거겠죠. 톨스토이의 일기 꼭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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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

2012.01.12

톨스토이는 러시아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대문호이지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절절하게 소설 속에 녹아있어. 톨스토이의 딸이 본 아버지의 모습은 어떨까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흥미로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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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1.12

톨스토이의 딸이 쓴 톨스토이에 대한 책은 읽어봤어요. 단순히 톨스토이 뿐만 아니라 어릴 적 추억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어 재미있더라고요. 그녀 외에도 톨스토이 자식들 톨스토이에 대해서 책 쓴 사람 더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톨스토이가 참 위대한 작가라는 이야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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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2010년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개인 홈페이지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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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백작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과 아홉 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의 후원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카잔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캅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문학지 『동시대인』에 처녀작인 중편 자전소설 「유년 시절」을 발표해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1853년에는 『소년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크림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두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해 슬하에 자녀를 열세 명 두었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다.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창작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한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반 일리치의 죽음』 등이 이때 쓰였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며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를 비판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써서 ‘톨스토이즘’이라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 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에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 저술하고 활동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직접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했으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으로 전향한 이후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 작가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에 있는 귀족이었으나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등을 집필해 러시아 귀족들이 재산을 너무 많이 소유했기 때문에 대다수 민중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다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해 외국에서는 이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개인이 저작물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에 저작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1891), 1899년 종교를 바꾼 이후에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집필 활동을 왕성하게 펼쳐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아내와 불화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났으며 82세 때 현재 톨스토이역으로 바뀐 아스타포보역 역장의 관사에서 폐렴으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지 않겠다고 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톨스토이는 귀족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고귀한 인생 성찰로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걸작을 많이 남겨 지금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을 몸소 실천한 사상가였다. 톨스토이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였던 그는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