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서 태어난 미국 작가 벤 마이켈슨(Ben Mikaelsen, 1952- )의 붓끝은 거침이 없다. 『스피릿베어(Touching Sprit Bear)』(정미영 옮김, 2005)는 처음부터 살벌하다. 소설의 주인공 콜 매슈스는 심각한 문제 청소년이다. “콜은 미니애폴리스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인생의 절반을 흘려보낸 순진하고 앳된 얼굴의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
콜은 겉만 멀쩡하다. 속은 완전히 뒤틀렸다. 콜은 자기를 밀고했다는 이유로, 평소에도 심심풀이 삼아 못살게 굴던 피터 드리스칼을 아주 묵사발 만든다. “피터가 달아나려다 발을 헛디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콜은 다시 풀쩍 뛰어 피터를 와락 덮치더니 머리를 바닥에 짓찧기 시작했다.”
이번엔 빼도 박도 못 하게 생겼다. 그동안 ‘문제’ 아들을 뒤치다꺼리한 부모가 이혼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하긴 콜의 부모님 역시 ‘문제’가 심각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아들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콜의 할아버지 역시 콜의 아버지에게 그랬다. 콜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방관했다. 그녀는 자신의 무기력을 술로 달랜다. 콜의 어머니는 알코올중독자다.
감방 신세를 질 게 뻔했지만, ‘원형 평결 심사’가 콜을 살렸다. 원형 평결 심사란 수백 년 동안 북미 원주민들이 시행해 온, 미국현대사법제도에 도입된 치유가 목적인 재판 방식이다. 일종의 유배다. 콜은 미니애폴리스의 보호관찰관인 틀링깃 인디언 가비와 또 다른 틀링깃 인디언 에드윈 노인의 도움과 배려로 원형 평결 심사를 통과하여 유배 길에 오른다.
유배지는 알래스카 남동부의 외딴 섬이다. 그 섬에서 1년간 홀로 지내야 한다. 유배지에 도착한 첫날, 콜은 에드윈 노인이 애써 지은 오두막을 불태운다. 그리고 스피릿베어를 만나 대들다 피터처럼 묵사발이 된다. 콜의 묵사발은 그가 자처한 것이다.
몸 여기저기가 부러져 꼼짝없이 누워있는 콜은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지만 아직 반성 같은 건 할 줄 모른다. “잘못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데 되레 골탕을 먹고 있다. 다시금 화가 울컥 치밀었다.”
사람은 안 변한다. 천성을 바꾸기 어렵다. 굳어진 습관 또한 그렇다. 괜히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콜 매슈스의 ‘회심’은 더욱 중요하다. “오늘부터 진실만 말할 것이다. 진실이 아니면 입에 담지도 않을 것이다.” 콜의 유배지에 피터 드리스칼이 합류한다. 피터의 마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다.
과테말라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나무소녀(Tree Girl)』(홍한별 옮김, 2006)의 도입부는 짧은 폭풍전야이긴 하지만, 평화롭다. 가브리엘라 플로레스는 과테말라의 중서부 고지대에 사는 키체 족 마야 인이다. 가브리엘라가 바로 ‘나무소녀’다. 키체 어로는 ‘라 알리 레 하윱’이다. “언제나 나무는 자기 가지 위로 올라오라고” 가브리엘라를 부추겼다.
마을을 향해 걸으며 아빠가 딸에게 말한다. “외우기만 해선 안 돼. 마음으로 이해를 해야지. 그래야 배운 것을 다른 식구들한테 설명해 줄 수 있잖니. 배운 걸 단순히 따라 읊기만 할 거라면 차라리 앵무새를 학교에 보내겠다.” 가브리엘라는 일곱 형제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학교에 다닌다.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호르헤 오빠는 학생이 아니다.
엄마는 큰딸에게 사랑을 베푼다. “이제 여자가 되어 입게 될 화려한 빛깔의 위필을 짜는 법을 가르칠 때도 엄마는 사랑으로 가르쳐 주었다. 매일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은 사랑이었다. 엄마는 다정함도 가르쳐 주었다. ‘다정함은 사랑보다 더 소중하단다. 다정하다는 건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야.’”
가브리엘라는 어른이 되는 열다섯 번째 생일 날, 그녀의 성년을 축하하는 ‘킨세아녜라’에서 “강을 건너려는 사람을 엄청난 힘으로 끌고 가버리는 세찬 물살”에 직면한다. 늦은 밤 나타난 정부군 병사들은 호르헤 오빠를 붙잡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가브리엘라 집에 들이닥칠 비극의 서막일 뿐이다.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세상을 뜬다. 과테말라 정부는 마야 인을 희생양 삼는다. 하루는 장에서 과일을 팔던 할아버지로부터 이런 얘길 듣는다. “이제는 아예 암살단을 보낸다고 한다. 우리가 인디오라서. 인디오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대.” 어느 토요일 오후, 가브리엘라의 식구가 살고 있는 키체 족 마을이 정부군의 습격을 받는다.
장을 보러갔던 가브리엘라는 화를 면한다. 가브리엘라의 가족 중에선 막내 동생 알리시아만 용케 목숨을 구한다. 비극은 개인과 가족 그리고 마을 차원을 넘어선다. 가브리엘라는 읍내에서 자행된 군인들의 참혹한 살육 장면을 “광장에 단 한 그루 홀로 서 있는, 잎과 가지가 무성한 커다란 마치치나무” 위에서 똑똑히 지켜본다.
가브리엘라가 이런 다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하늘과 땅과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신성한 것에 대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다시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으리라.”
『피티 이야기(Petey)』(홍한별 옮김, 2008)의 피티 로이 코빈은 심각한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사지가 뒤틀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으며 혀가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말을 할 수 없었다. “코빈 씨, 부인. 아주 심한 정신박약입니다. 백치이므로 재활치료가 의미가 없습니다.” 피티에게 내려진 최초 진단은 오진이다.
피티의 정신과 지력은 멀쩡했다. 그는 아주 심한 뇌성마비 지체장애였다. 피티는 보호시설에서 평생을 보낸다. 보호시설의 실무자들은 피티의 남다르게 정상적인 측면을 누구보다 잘 안다.
“피티, 내 말 잘 들어. 너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 가운데 가장 멋진 사람이야. 이기심에 제멋대로 굴거나 심술을 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단 한 번도. 늘 내 문제를 염려해 주고, 늘 캘빈이나 리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 하고.”(캐시)
“피티는 오언이 만나 본 그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했다. 피티는 순간순간을 깊이 음미하고 느꼈다. 소박한 기쁨이나 작은 재밋거리도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일인 것처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과 사려 깊음이 한이 없었다.”
“(뇌성마비는) 신경계에 이상이 있는 거야. 피티는 지력은 정상이지만, 정신이 자유롭지 못한 몸에 갇혀 있는 상태야. 아주 특별한 사람이란다.… 삶이 피티한테는 무척 가혹했는데도 피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을 사랑한단다.”(시시 마이클)
『피티 이야기(Petey)』는 우정이 큰 축을 이룬다. 피티가 몬태나 주 웜스프링스 정신병원에서 만난 그보다 두 살 어린 환자 캘빈과 나눈 우정은 그 하나다. “‘어, 피티…, 나 쓰러졌을 때 네가 어떻게 했는지 들었어. 고마워.’ 캘빈은 눈을 내리깔았다. ‘피티, 넌 나랑 가장 친한 친구야.’ 피티는 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소리 지를 줄 아는지 몰랐어.’ 캘?이 불쑥 덧붙였다.”
트레버 래드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은 2부의 이야기를 이끈다. “트레버는 꿰뚫어 보는 듯한 두 눈이 자기한테 꽂혀 먹이를 쥐듯 붙드는 것을 느꼈다. 피티의 몸은 아무 힘이 없을지 몰라도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트레버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서서는 이 할아버지 앞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달려라, 모터사이클』(박정화 옮김, 2008)은 앞서 번역된 벤 마이켈슨 작품의 한국어판 책날개 저자 소개 글에서 『조쉬 맥과이어 구하기(Rescue Josh McGuire)』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미국아동도서협회와 국제독서연합의 ‘1994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상을 여러 개 받았다. ‘조쉬 맥과이어 구하기’는 ‘새끼 곰 포키 구하기’나 다름없다.
믿음직한 큰아들을 잃은 조쉬의 아버지는 술에 빠져 지내며 폭력을 행사하곤 한다. “샘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 손바닥으로 조쉬의 얼굴을 갈겼다. 조쉬의 고개가 옆으로 홱 꺾였다. 귀에서 천둥이 치고 이상야릇한 색깔들이 하늘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갔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나는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담임선생님한테 뺨을 세게 맞은 일이 있다(존 테일러 개토 편 참조).
조쉬 또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경 운동을 하면서 기력이 다 빠”진 오티스 싱클레어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눈다. 여기엔 조쉬 가출사건을 맡은 보안관 대리 브루스터 빙엄의 에피소드를 옮겨 적는다.
“보안관 대리로서 브루스터는 갤러틴 카운티 탐색구조대를 이끌고 일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도망을 친다면 그들이 무엇을 피해서 도망가는지 알아야만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자기 자신한테서 도망을 치는 사람은 법의 구속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과 다르게 행동했다. 책임을 지기 싫어 탈출하는 사람은 분노로 가득 찼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과는 다른 짓을 했다.”
“외딴 오두막으로 차를 몰아가면서 브루스터는 그 주위를 둘러싼 출입 금지 푯말을 보았다. 사람들이 남의 간섭을 피하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숨길 것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보호할 것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이와 불화를 겪었다.”
『붉은 밤을 날아서(Red Midnight)』(문세원 옮김, 2010)도 『나무소녀(Tree Girl)』처럼 과테말라 내전이 배경을 이룬다.
“1980년대 중앙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끔찍한 군사 학살에 대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과테말라만 해도 450개가 넘는 마을이 불에 타서 사라졌으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 남자들이 가장 먼저 살해되었고 그다음엔 여자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죽어갔다. 많은 아이들이 이 잔혹 행위를 목격했으며 그중 살아남은 몇몇 덕분에 세상에 그 일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작가의 말」에서)
열두 살 먹은 산티아고 크루스는 “인디헤노스”(원주민)다. 1981년 5월 18일 과테말라 낮은 산악 지대의 작은 마을 도스 비아스가 불탄다. 그날 산티아고는 네 살 난 여동생 안젤리나를 빼고 식구들을 모두 잃는다.
‘나무소녀’ 가브리엘라 플로레스의 안중에 미국은 없었다. 반면 산티아고 크루스는 라모스 삼촌의 뜻을 받들어 안젤리나와 미국으로 향한다. “북쪽도 이미 군인들로 가득해. 이사발 호수가 있는 남쪽으로 가서 카유코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거라.” 산티아고와 안젤리나 크루스는 라모스 삼촌이 만든 카유코(카약)을 타고 23일간의 항해 끝에 플로리다에 도착한다.
벤 마이켈슨이 지은 청소년소설의 한국어판은 전부 양철북에서 펴냈다.
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