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강연회]이 책을 밤에만 읽어야 하는 이유 - 『은교』 박범신
새내기 대학생이 된 나의 신부, 은교. 삶은 어떻게든 유한하다. 그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늙는 것도 죄가 아닌 ‘자연’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만나면서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201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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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17일, 서울 북촌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은교』(박범신 지음|문학동네 펴냄) 출간 기념 작가와의 만남 현장을 재구성했습니다. 외람되지만, 구름의 저편으로 가신 이적요 시인을 화자로 모셔서 이야기를 풉니다. 박범신 작가의 말씀을 따로 뺐지만, 화자의 이야기 속에도 살짝 녹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역시나 당부 드리자면, 부디, 밤에만 읽으시라.
은교,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 내 영원한 처녀.
잘 있니. 대학생이 됐다며. 그 모습, 저 멀리서나마 보고 있다.
할아부지는 잘 있어. 우리 이야기를 좀 더 나눴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글을 쓴다.
나의 몰스킨 노트도 봤으니, 그때 널 향한 내 마음도 알았겠구나. 허허.
괴테. 알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 양반, 팔십 넘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여든셋에 세상을 떴는데, 앞선 해 『파우스트』 2부를 탈고했다. 도정일 선생은, 괴테가 근 60년 동안 마르지 않는 창작 샘을 가동할 수 있었던 단초로, 어릴 때 어머니와 주고받은 ‘이야기 지어내기’, 즉 ‘별들 사이에 길을 놓’은 일을 들기도 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하나 덧붙이고자 한다. 연애(사랑)의 힘.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연애사는 파란만장했다. 첫사랑의 여인, 케트헨은 호프집 처녀였고, 세 번째 여인은 친구의 약혼녀였던, 그리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낳게 했던 로테였다. 16세의 아름다운 릴리는 네 번째 여인이었다. 약혼까지 했던 그는 “자유를 동경하는 마음의 소용돌이가 가정의 행복이라는 항구 가까이 가려는 생활의 배를 다시 먼 바다로 밀어낸다”는 말만 남겨 놓고 그녀와 헤어져 스위스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계속해줄까? 다섯 번째 여인, 슈타인은 일곱 자녀를 둔 7년 연상이었다. 그는 슈타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다고 한다. 여섯 번째 여인이 쉰여섯의 나이에 정식으로 결혼한 크리스티아네였다.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혼 와중에 그는 서점 주인인 프로만의 양녀 민나를 탐닉했다. 일곱 번째 여인이었다.
압권은 1816년 아내가 사망하고 7년 뒤인 1823년, 일흔넷의 괴테는 여덟 번째 여인을 만났다. 그 대상은 울리케 폰 레베초, 열아홉 소녀였다. 이른바,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다. 혹자는 이것을 ‘스캔들’이라 일컫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해야겠다. 당시, 괴테는 울리케의 모친에게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도 꺼냈다. 안타깝게도, 울리케가 끝내 망설이는 바람에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괴테는 이때, 시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를 썼다. 잠깐 읊어주마. 눈은 감는 대신 귀를 열고 들어다오.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 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 /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 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 / 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
아마, 괴테가 울리케의 사랑을 받았다면, 「마리엔바트의 비가」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파우스트』 2부 역시 장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기, 이 절절함을 보거라.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 A. 앙드레(Endre),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에서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는 『괴테의 사랑』을 통해 이 마지막 사랑을 진지하고 정중하게 대우한다. 발저는 괴테가 울리케를 처음 만나 헤어질 때까지 느꼈을 감정의 동요를 전한다. 일흔넷과 열아홉, 대문호 괴테의 내적 갈등이 오죽했겠니.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고. 울리케는 아흔다섯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아흔다섯 독신, 아마 괴테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괴테의 사랑 이야길 하는 건, 너를 향한 내 사랑이, 특별한 것만은 아님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일흔, 너는 열여덟. 오십이 년. 괴테와 울리케의 것과 별 차이는 없다만, 나는 생전에 네게 나의 사랑을 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p.12)
괴테나 울리케, 이적요와 은교에게 나이 차는 사실, 문제가 아니다. 너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들과 우리에게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pp.107~108)
호사가들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괴테와 울리케에게도 그랬고, 아마 우리에게도 그럴 것이다. 노트에 적었듯, 너에게 그건 참으로 미안한 것이지만, 잊지 마라. 사람들은 단순한 이치를 잊고 산다.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 돼야 한다. 모든 사랑은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 났을 뿐이다. 사랑은 늘 당사자의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p.11)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라고 했던가. 서지우가 그랬듯, 사람들은 그렇게 삿대질도 하고, 자기네들의 비루한 잣대도 들이댈 것이다. 은교 너와 나의 이야기를 쓴 노트는 분명 오해도 받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노트를 참으로 행복하게 썼다.
작가의 말
“950매쯤 되는 소설인데, 한 달 반 만에 썼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왔지만 두 달 안에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는 처음이었다. 연재의 시작은 하루 서른 명 정도밖에 안 들어오는 블로그였다. 블로그에 쓰면, 하루에 한 줄만 써도 뭐라는 사람 없고, 쓰다가 지치면 일주일쯤 안 써도 뭐라 할 사람 없잖나. 널널하고 편하게 연재도 할 겸, 작가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방식이라 생각하고, 게으름 피우려고 연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첫 문장을 쓰니 폭풍 같이 다른 문장들이 뒤따라오는 바람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하루 30~50매 썼다.
작가로서 행복한 경험이었다. 한 번쯤 막힐 법도 한데 한 번도 막힌 적 없이 내 안의 문장들이 나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느낌이었다. 워드프로세서가 돼서 내 안의 누군가가 하는 말을 받아쓰는 느낌으로 썼다. 그런데 다 쓰고 나서 두 달 동안 설사만 했다.(웃음) 이 소설을 쓰면서 행복했지만, 내 몸은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쓰고 나서 쭉정이만 남은 느낌으로 봄을 보냈다. 소설은 뻥이지만, 내 자신의 어떤 것들을 강력하게 반영한 느낌이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이적요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강력하게 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나의 신부, 은교. 삶은 어떻게든 유한하다. 그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늙는 것도 죄가 아닌 ‘자연’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만나면서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나의 노트를 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한때 사회주의운동에도 몸을 담았다. 폭풍 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기도 했다. 그건 목표가 아니었다. 꿈이었다, 꿈. 그러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삼십 대에는 감옥에 있었고, 사십 대부터 나는 시인으로 살았다. 나의 문학은, 나의 시는 그래서 모든 것이었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내게도 생피처럼 더운 욕망이 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작가의 말
“1976년 데뷔해서 이른바 운동권 문학도 썼는데, 79년에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을 쓴 뒤, 15년 동안 연애소설을 많이 쓰는, 대중적인 인기작가로 살았다. 돈 벌겠다는 생각도 했겠지만, 본질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젊은 날은 그랬는데, 나이 드니까 소수지만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숫자로 승부할 일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80년대에는 이데올로기로 편 가르기가 심했던 문학판이 준 고통과 재판에서 받아야 했던 형벌도 있었다. 이래저래 40대 후반에 고통이 많았다. 아홉수 있다더니, 스트레스 많은 지옥 같은 시기였다.
문학을 어떻게, 인생을 어떻게 재편할지 암담한 시절도 있었다. 인기의 허망함도 느꼈고, 시대가 준 스트레스와 번뇌도 있었고, 나이에 밀려나가는 고통도 있었다. 어떻게 나를 구할 수 있지, 고민했다. 문학으로 이룬 사회적 기득권 같은 게 있다면, 반납하자. 그래서 절필하고 용인의 외딴 오두막에 들어가서, 3년 동안 혼자 지내는 시기를 겪었다. 시장에서 잘나가는 사장이 이유도 분명하지 않게 그 자릴 박차고 나간 셈이었다.(웃음) 3년 지났더니 풀을 매면서 중얼거리는 거다. 이걸 받아쓴다면 소설이지. 입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거다.(웃음) 내 안에 우물이 넘치고 말이 넘쳐서 안 쓰면 고통스럽더라. 그래서 문단으로 돌아왔다.”
너를 만나면서 내겐 늘 시간이 문제였다. 어떻게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 안에 지니면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절실하고 중요했다. 과실도 씨를 갖고 태어나듯,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라는 씨앗을 갖고 나온다. 할아부지가 괜히 인생이랍시고 어렵게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도 어쩌면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도 곧 스물이 될 테니 말이다.
내가 아는 인생은 그렇다. 과육이 썩듯이, 죽음의 씨가 배 밖으로 언젠가는 나온다. 돈을 많이 번다? 유명해진다? 사랑을 한다? 그 모든 것을 해도, 우리는 죽음의 사이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단다. 죽음에서 먼 것이 젊음이라지만, 내밀한 곳에는 그런 불안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그것 역시, 자연이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p.250)
그래, 너는 내게, 갈망이었다. 다다를 수 없는 신적인 것, 초월적인 꿈 같은 것. 허리 잘록하고 젖가슴이 아름답게 앞으로 뻗어 나온 처녀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꿈의 그림자였다. 나라고 길을 걷다가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안 쳐다보겠니. 물론 마음에 드는 처녀도 있고, 아닌 처녀도 있다. 집에 가서 누워있으면, 나는 여자를 봤던가, 하는 느낌도 받는다. 평생 뭔가를 그리워하고 살았는데, 그게 여자였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너로 인해 확실해졌다. 나는 모순 속을 그렇게 오가면서, 죽을 때까지 가 닿을 수 없는 로망을 그리워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p.151)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p.194)
그게 너였고, 너는 그렇게 관념이었다. 어쩌면 너는 내게, 실체하지 않는 영혼의 구멍 속을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너는 잡을 수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너는, 손을 빠져나가는 바람 같은 관념.
작가의 말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갈망의 3부작이라고 썼는데, 앞선 두 개가 우회했다면, 이번 『은교』는 직접적이며 정직하고 뜨겁게 토로한 소설이 됐다. 앞으로 내 영혼의 중심에 구멍이 뻥 뚫렸다고 느끼는 날이 많을 것 같다. 누가 뚫어서 뚫린 것은 아니고. 그런 텅 빈 공간에 뭘 채워야 하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절필 이후 내 소설은 대부분 갈망을 담고 있다.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꿈을 말하고 있는데, 꿈은 사랑의 완성,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 다시는 소설을 안 써도 될 위대한 하나의 작품 같은 것을 말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사람은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불타는 것 아닌가! 나이 들면 이런 게 더 커진다. 초월에 대한 욕망이랄까. 십 몇 년은 아내가 어떤 소리를 해도 히말라야에 간다. 그 꼭대기를 보고 있으면 영원성 같은 게 있다. 지금의 인생은 가장 절실하고 고단한 문제가 됐다. 어떻게 하면 삶의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을까.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껍데기 다 날려버리고 남는 것, 내가 온갖 불온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진실로 간절히 그리워한 것은, ‘처녀’의 ‘숨결’이었다는 것이다. 네 숨결에 비하면, 내가 내걸었던 명분의 기치는 모두 ‘마지못한,’ 것에 불과했다. 처녀인 네 앞에서 나는, 누추할 뿐이었다.(p.96)
너는 확실히 달랐다.
노트에도 적었지만, 내게도 여인들이 있었다. 수많은 여자와 눈을 마주보며 차도 마셔봤다. 이 할아부지는 여자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나는,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졌다. 몰랐구나. 정녕 몰랐구나. 그러니, 내가 무너졌을 게다.
내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전적으로 내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평생 신뢰해온, 평생 자신만만했던 나의 이성이 그애의 옴씬한 발목 인대에서 단번에 무너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p.129)
남자는, 그래 너도 이젠 알겠지만 수컷은 대체로 그렇다. 참 소모적이고 쓸쓸하고 슬픈 동물이다. 영원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수컷에게 동정심을 부러 가질 필요는 없다. 반면, 여자는, 그러니까, 너는 자궁이 있다. 그건 굉장한 것이다.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애를 낳을 수 있으며, 영원히 뭔가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면, 그것은 여자다.
너는 그렇게, 내게 영원성이었다. 영원히 가 닿을 수 없겠지만, 영원히 그리워하고 진선미가 갖춰진 존재. 강력하게 그리워하지만,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나에겐 바로 갈망. 세속적인 목표가 아니라 근원적인 갈망의 한 그림자. 그게 은교, 너였다.
쌔근쌔근 바람 부는 네 코의 피리, 푸르스름하고 가지런한 네 속눈썹 그늘의 떨림, 맑은 물 고인 네 쇄골 속 우물,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고 있는 네 가슴의 힘찬 동력, 휘어져서 비상하는 네 허리의 고혹을 나는 보고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고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네가 ‘소녀’의 이미지에서 ‘처녀’의 이미지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p.93)
‘본시창’이라도 좋다.
혁명을 꿈꾸며 감옥에서 10년을 있었고, 시인으로 영원히 남고자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은 카리스마? 천만에, 그런 명분 따위 다시 말하지만, 거짓이다. 나는 욕망과 본능을 무시한, 죄인이다. 다행히 죽기 전에 네가 그 욕망을, 본능을 건드려줬다. 다행이다. 감히 말하겠다. 모범적으로 사는 인생? 몽땅 거짓이다. 자신에 대한 명백한 거짓이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거짓 인생이다.
너로 인해,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내 몸 안에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p.394)
작가의 말
“이 책, 밤에만 읽으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본능이 우리 안에서 비합리적으로 억눌려서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을, 가족이나 친구를 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웃음) 눈 뜨면 사회 활동 하면서 돈도 벌고 직장 생활도 하고 가정도 챙기고, 출세도 해야겠고, 경쟁 시대에 살아남아야겠고, 사회적 자아를 꼿꼿이 내세우면서 열심히 산다.
하지만 깊은 밤 누웠을 때는 달라져도 된다. 사회적 자아를 내려놔라. 그 사회적 자아의 억압에, 횡격막에 눌려 있던 본능, 오욕칠정 등은 깊은 밤 남몰래 터져 나와야 되지 않겠나. 이적요를 통해 우리에게도 강력한 오욕칠정이, 어쩌면 더럽고 슬프고 추하면서도 아름답기도 한 그것들이 오장육부의 창자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건드렸으면 좋겠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고 더 열심히 사는 게 아니고, 깽판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다. 불온한 서적이다. 인생에 전혀 도움 안 될지 모른다. 그래도 그걸 통해서 목표에 불과한 것을 꿈이라 알고, 평생을 자기감정을 억제하고 사는 것보다 한 번쯤은 오장육부에 있는 욕망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그게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요즘도 저는 불가능한 꿈을 꿉니다. 진선미가 갖춰진 여인과 북극해로 도망간다거나, 영원히 살고 싶다거나, 혁명적으로 바뀌는 세상을 보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이죠.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명된 것들을 꿈꾸지요. 육체적으로는 이미 정점을 훨씬 지난 나이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꿈 앞에선 제 자신이 지금도 화염병처럼 뜨겁게 타오릅니다. 꿈을 갈망이고 그리움이지요. 이렇게 나이가 든 사람도 꿈을 꾸는데, 요즘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스럽습니다.”(『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5)
“내 욕망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 사회의 욕망에 맞춰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명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에 보면 ‘천복(天福)을 좇으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살고, 자신이 행복하겠다 싶은 길로 나아가라는 뜻이지요.”(『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8)
할아부지가 하늘에서 보자니, 그곳이 그립다. 은교 너 때문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여름이 선사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부디, 너는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목표를 꿈으로 착각하지도 말아라. 그 여름, 온전히 너의 것으로 너의 욕망으로 채워라. 소설가 김훈이 그랬던가.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여자의 옷을 보는지 몸을 보는지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그의 즐거움이라고.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여자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이 나라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젊은 여자들의 성적 매력은 나라의 힘이고 겨레의 기쁨이라고.
네가 없는 이 하늘, 혼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힘과 기쁨도 없다. 그래서 영원할 수가 없다. 할아부지가 힐긋 보니, 숏팬츠와 레드룩으로 무장한 네 모습,
관능적이다.
박범신 작가와 독자들이 나눈 Q&A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들이 나온다. 어떻게 생각하면서 썼나. 쓰고 난 뒤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생각한 것이 있다면.
“나 모르는데.(웃음) 이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 옳을지 질문하는 소설이다. 원래는 훨씬 더 불온하고 발칙하게 구성돼 있었다. 은교랑 노인이 한 번도 섹스를 안 하는데 애초 구상은 그게 아니었다. 섹스도 끝 간 데 없이 밀어붙이는 소설을 생각했다. 잘하면 감옥 가겠다는 생각도 했다.(웃음) 나도 어쩔 수 없이 육십 대이고 보니, 내 안에 쌓인 계몽성이 나를 억압했다. 그래서 소설이 이 상태로 됐다. 이데올로기나 계몽성을 작가 자신도 뛰어넘기가 쉽지 않더라. 이적요 입장에서도 나이 드는 것의 고통, 젊은 것 자체에 대한 욕망과 질투가 복잡한데, 내 자신도 그렇다. 나이 들수록, 예컨대 집에선 가족의 인기를 끌려고 별 짓을 다한다. 돈만 벌어줘선 찬밥이라서. 애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학교 가면 제자들에게 또 온갖 애교를 떤다.(웃음)
출판사에 권했다. e북과 함께 가자. 새로운 문화와 함께 가자. 다양한 문화가 내 갈비뼈 사이를 관통하도록 하자는 것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지점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많을수록 지옥이다. 나이 들수록 더 넓은 문화,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서 내 몸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e북을 만든 것도 그런 것이 반영됐다.
사실 인터넷 연재의 막을 박범신이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촐라체』를 할 때 주변에서 인터넷에 쓰면 저급한 사람이 되기 쉽다고 걱정했다. 악플도 걱정하고. 상관없어. 딴 데서 애 낳은 적도 없고.(웃음) 문학은 누구나 악플을 달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감동적인 소설이 아니거든. 당연히 짊어져야 할 것이라고 봤다. 저급해진다? 난 찬성 못한다. 인터넷 글쓰기가 저급하다면, 형편없는 글이 있다면, 더더욱 잘 쓸 수 있는 작가들이 가서 청소해줘야지.
『촐라체』를 연재할 때도 200자 원고지에 써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 올렸다. 나는 아날로그적인 사람이고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일한다. 『촐라체』 『고산자』 다 아날로그적이라는 생각이 들 거다. 독자와 작가,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채널은 다양할수록 좋다. 인터넷이 아니라 더 발가벗어서 독자들이 읽을 수 있으면 선택할 거다. 두렵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악플이 달리더라. 그래도 기다렸다. 선플이 달려서 악플을 몰아내더라. 새로운 문화의 풍향계가 돼야 한다. 작가는 그래야 한다.”
문학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밤을 새워야 하는데…….(웃음) 문학이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이 짓 하는 거다. 나는, 문학은 오욕칠정을 그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현대소설은 사랑을 그리워하지만, 사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세상을 그리고, 심적이고 영원한 세계를 꿈꾸지만 신이 없는 세계를 그린다. 문학은 결핍을 통해 충만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모든 부족한 것에 관심을 갖지만, 목표는 부족한 너머의 것에 있다. 눈으로는 그리운 것을 보고 손으로는 부족한 것투성이를 만지는 작업이다. 행복한 걸 왜 쓰겠나. 눈물나고 억울하고 화나는 것을 쓰지. 눈으로는 더 완전한 어떤 것을 보고, 오늘, 손으로는 아프게 결핍투성이의 현실, 부족함을 보듬는 것, 그게 문학 하는 자세다.”
행복한가.
“좋은 질문이다. 행복해 보이나. (아니요~) 잘 맞히셨다. 사실은 행복이 뭔지 모르겠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부분은, 우리도 뭔지 모르는 것이다. 물론 더러는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 본 적 있나? 결혼해서 37년을 살았는데, 사랑은 조금씩 까먹고 우정은 날로 깊어지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웃음) 사랑은 바구니에 담기지 않는다. 사랑의 열망은 영원하지만, 파트너를 두고 완성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본다. 내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네가 알아듣기 편하도록 쉽게 설명하자면,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 사랑을 믿지 못한다.(p.91)
“행복은 뭘까. 목표를 이루면 행복하지만, 그건 마취제 같은 거다. 아파트 40평을 목표로 해서 샀다고 치자. 행복? 한두 달 가고 마는 거지. 참된 의미의 행복은 본 적도 만진 적도 없고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말 그리워하는 것, 그건 대부분 관념의 세계에 있어서 잘 모르고 행복한지 불행한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행복하다고 느꼈던 짧은 순간이 있지만, 나 자신이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새로운 역사는 갈망과 그리움에서 비롯됩니다. 실현가능한 목표는 결코 꿈이 아니에요. 목표죠. 의사 또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거나 얼마 정도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게 꿈입니까? 그건 목표에 불과해요. 요컨대, 의사가 된 후에, 국회의원에 된 후에, 매출 얼마를 달성한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갈망이 꿈인 거죠. 그런데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세속적인 목표를 꿈이라고 가르치며 경쟁만 부추깁니다.”(『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5)
“한동안은 소설을 영원히 쓸 수 있어서, 행복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다. 물론 나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현역 작가이겠지만, 그것도 다짐을 해서 그렇지, 정말 좋아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 생에선 안 할 거다. 내가 미쳤나.(웃음) 목표를 조금 낮춰 잡고 마음의 욕망을 조금 내려놓으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말은 전적으로 신뢰한다.
나도 대부분 욕망은 내려놨다. 돈, 권력, 더 건강하게 살겠다는 욕망도. 운동도 안 한다. 그리 살고 있다. 100% 내려놨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 내려놓지 않은 욕망이 있다. 사랑. 이게 짐이 되고 힘이 든다. 단지 젊은 여자와의 사랑으로 생각하지 말라. 살아생전, 사랑의 완성이라는 욕망은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생의 에너지인 것 같다. 내게 행복이 있다면 자유롭고, 사랑의 열망을 뜨겁게 갖고 있으며, 아직도 청년 작가로 불릴 수 있는 것. 이것이 내 ?생의 행복이 아닐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은 날이 저물 때가, 저문 다음이 제일 좋아요. 해가 저물면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해요. 『주름』에 나오는 남자처럼 팜므파탈에게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북극해로 도망가고 싶다는 식의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지요. 그러면서도 집에서 아내와 조용히 보내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고 편안할 수 없어요. 모순이고 내적 분열이고 갈등인데요, 자기모순과 내적 갈등은 젊음의 영원한 자산이라 할 수 있어요. 나이가 젊다고 젊은 게 아닌 것처럼 나이가 많다고 꼭 늙은 것만은 아니라고 봐요. 저는 아직 ‘청년작가’입니다.”(『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9)
스릴러 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세 가지 시점으로 된 이유가 있나. 한 달 만에 완성한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한 달 반 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참았나보다. 그런데 많은 독자들이 연애소설이 아니라고 말해서 연애소설을 새로 써야하는 고민하고 있다.(웃음)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이적요, 서지우, 은교만 이름이 있다. 나머지는 이름이 없다. 단 한 사람이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적요의 아들 이름이 얼이다. 이니셜로 된 이름은 기억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전형적 인물이다. 그러니까, 세 사람의 소설이길 바랐다. 특히 이적요와 서지우가 중요하다. 은교만 해도 관념적 인물이다. 박범신이 히말라야를 걸을 때 꼭대기의 만년 빙하의 봉우리 같은 것이다. 위에선 비바람이 쳐도 박범신에겐 영원성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로 보이거든.”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을 가진 적요라는 이름은 물론 필명이다. 그는 이십대 때 사회주의운동에 투신, 폭풍 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었고, 삼십대 십 년은 감옥에 있었으며, 사십대에서 일흔 살로 죽을 때까지는 시인의 이름으로 살았다.(p.16)
“이 소설은 최근 몇 년 동안 갖고 있던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문단에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사랑에 대한 욕망도 고백했고, 글쓰기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다. 이적요가 원고를 태우잖나. 그가 쓴 모든 산문과 시가 아무것도 아니고 쓰레기에 불과했다며. 톨스토이도 말년에 집을 뛰쳐나오면서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싶다고 하고는 객사한다. 이적요도 자기의 모든 문학을 부정하고 욕망이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죽는다. 자기 부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작가는, 다른 작가와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항상 내 소설만 생각한다. 지난번보다 새로운가, 문장이 나아졌나. 동어반복이라면 때려치워야지.”
지금 생각하면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나의 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 ) 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을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pp.397~398)
은교,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 내 영원한 처녀.
잘 있니. 대학생이 됐다며. 그 모습, 저 멀리서나마 보고 있다.
할아부지는 잘 있어. 우리 이야기를 좀 더 나눴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글을 쓴다.
나의 몰스킨 노트도 봤으니, 그때 널 향한 내 마음도 알았겠구나. 허허.
그런데, 나는 거기에 하나 덧붙이고자 한다. 연애(사랑)의 힘.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연애사는 파란만장했다. 첫사랑의 여인, 케트헨은 호프집 처녀였고, 세 번째 여인은 친구의 약혼녀였던, 그리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낳게 했던 로테였다. 16세의 아름다운 릴리는 네 번째 여인이었다. 약혼까지 했던 그는 “자유를 동경하는 마음의 소용돌이가 가정의 행복이라는 항구 가까이 가려는 생활의 배를 다시 먼 바다로 밀어낸다”는 말만 남겨 놓고 그녀와 헤어져 스위스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계속해줄까? 다섯 번째 여인, 슈타인은 일곱 자녀를 둔 7년 연상이었다. 그는 슈타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다고 한다. 여섯 번째 여인이 쉰여섯의 나이에 정식으로 결혼한 크리스티아네였다.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혼 와중에 그는 서점 주인인 프로만의 양녀 민나를 탐닉했다. 일곱 번째 여인이었다.
압권은 1816년 아내가 사망하고 7년 뒤인 1823년, 일흔넷의 괴테는 여덟 번째 여인을 만났다. 그 대상은 울리케 폰 레베초, 열아홉 소녀였다. 이른바,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다. 혹자는 이것을 ‘스캔들’이라 일컫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해야겠다. 당시, 괴테는 울리케의 모친에게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도 꺼냈다. 안타깝게도, 울리케가 끝내 망설이는 바람에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괴테는 이때, 시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를 썼다. 잠깐 읊어주마. 눈은 감는 대신 귀를 열고 들어다오.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 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 /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 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 / 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
아마, 괴테가 울리케의 사랑을 받았다면, 「마리엔바트의 비가」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파우스트』 2부 역시 장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기, 이 절절함을 보거라.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 A. 앙드레(Endre),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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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는 『괴테의 사랑』을 통해 이 마지막 사랑을 진지하고 정중하게 대우한다. 발저는 괴테가 울리케를 처음 만나 헤어질 때까지 느꼈을 감정의 동요를 전한다. 일흔넷과 열아홉, 대문호 괴테의 내적 갈등이 오죽했겠니.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고. 울리케는 아흔다섯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아흔다섯 독신, 아마 괴테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괴테의 사랑 이야길 하는 건, 너를 향한 내 사랑이, 특별한 것만은 아님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일흔, 너는 열여덟. 오십이 년. 괴테와 울리케의 것과 별 차이는 없다만, 나는 생전에 네게 나의 사랑을 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p.12)
괴테나 울리케, 이적요와 은교에게 나이 차는 사실, 문제가 아니다. 너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들과 우리에게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pp.107~108)
호사가들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괴테와 울리케에게도 그랬고, 아마 우리에게도 그럴 것이다. 노트에 적었듯, 너에게 그건 참으로 미안한 것이지만, 잊지 마라. 사람들은 단순한 이치를 잊고 산다.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 돼야 한다. 모든 사랑은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 났을 뿐이다. 사랑은 늘 당사자의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p.11)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라고 했던가. 서지우가 그랬듯, 사람들은 그렇게 삿대질도 하고, 자기네들의 비루한 잣대도 들이댈 것이다. 은교 너와 나의 이야기를 쓴 노트는 분명 오해도 받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노트를 참으로 행복하게 썼다.
작가의 말
“950매쯤 되는 소설인데, 한 달 반 만에 썼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왔지만 두 달 안에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는 처음이었다. 연재의 시작은 하루 서른 명 정도밖에 안 들어오는 블로그였다. 블로그에 쓰면, 하루에 한 줄만 써도 뭐라는 사람 없고, 쓰다가 지치면 일주일쯤 안 써도 뭐라 할 사람 없잖나. 널널하고 편하게 연재도 할 겸, 작가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방식이라 생각하고, 게으름 피우려고 연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첫 문장을 쓰니 폭풍 같이 다른 문장들이 뒤따라오는 바람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하루 30~50매 썼다.
작가로서 행복한 경험이었다. 한 번쯤 막힐 법도 한데 한 번도 막힌 적 없이 내 안의 문장들이 나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느낌이었다. 워드프로세서가 돼서 내 안의 누군가가 하는 말을 받아쓰는 느낌으로 썼다. 그런데 다 쓰고 나서 두 달 동안 설사만 했다.(웃음) 이 소설을 쓰면서 행복했지만, 내 몸은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쓰고 나서 쭉정이만 남은 느낌으로 봄을 보냈다. 소설은 뻥이지만, 내 자신의 어떤 것들을 강력하게 반영한 느낌이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이적요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강력하게 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나의 신부, 은교. 삶은 어떻게든 유한하다. 그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늙는 것도 죄가 아닌 ‘자연’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만나면서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나의 노트를 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한때 사회주의운동에도 몸을 담았다. 폭풍 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기도 했다. 그건 목표가 아니었다. 꿈이었다, 꿈. 그러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삼십 대에는 감옥에 있었고, 사십 대부터 나는 시인으로 살았다. 나의 문학은, 나의 시는 그래서 모든 것이었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내게도 생피처럼 더운 욕망이 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작가의 말
“1976년 데뷔해서 이른바 운동권 문학도 썼는데, 79년에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을 쓴 뒤, 15년 동안 연애소설을 많이 쓰는, 대중적인 인기작가로 살았다. 돈 벌겠다는 생각도 했겠지만, 본질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젊은 날은 그랬는데, 나이 드니까 소수지만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숫자로 승부할 일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80년대에는 이데올로기로 편 가르기가 심했던 문학판이 준 고통과 재판에서 받아야 했던 형벌도 있었다. 이래저래 40대 후반에 고통이 많았다. 아홉수 있다더니, 스트레스 많은 지옥 같은 시기였다.
문학을 어떻게, 인생을 어떻게 재편할지 암담한 시절도 있었다. 인기의 허망함도 느꼈고, 시대가 준 스트레스와 번뇌도 있었고, 나이에 밀려나가는 고통도 있었다. 어떻게 나를 구할 수 있지, 고민했다. 문학으로 이룬 사회적 기득권 같은 게 있다면, 반납하자. 그래서 절필하고 용인의 외딴 오두막에 들어가서, 3년 동안 혼자 지내는 시기를 겪었다. 시장에서 잘나가는 사장이 이유도 분명하지 않게 그 자릴 박차고 나간 셈이었다.(웃음) 3년 지났더니 풀을 매면서 중얼거리는 거다. 이걸 받아쓴다면 소설이지. 입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거다.(웃음) 내 안에 우물이 넘치고 말이 넘쳐서 안 쓰면 고통스럽더라. 그래서 문단으로 돌아왔다.”
너를 만나면서 내겐 늘 시간이 문제였다. 어떻게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 안에 지니면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절실하고 중요했다. 과실도 씨를 갖고 태어나듯,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라는 씨앗을 갖고 나온다. 할아부지가 괜히 인생이랍시고 어렵게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도 어쩌면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도 곧 스물이 될 테니 말이다.
내가 아는 인생은 그렇다. 과육이 썩듯이, 죽음의 씨가 배 밖으로 언젠가는 나온다. 돈을 많이 번다? 유명해진다? 사랑을 한다? 그 모든 것을 해도, 우리는 죽음의 사이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단다. 죽음에서 먼 것이 젊음이라지만, 내밀한 곳에는 그런 불안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그것 역시, 자연이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p.250)
그래, 너는 내게, 갈망이었다. 다다를 수 없는 신적인 것, 초월적인 꿈 같은 것. 허리 잘록하고 젖가슴이 아름답게 앞으로 뻗어 나온 처녀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꿈의 그림자였다. 나라고 길을 걷다가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안 쳐다보겠니. 물론 마음에 드는 처녀도 있고, 아닌 처녀도 있다. 집에 가서 누워있으면, 나는 여자를 봤던가, 하는 느낌도 받는다. 평생 뭔가를 그리워하고 살았는데, 그게 여자였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너로 인해 확실해졌다. 나는 모순 속을 그렇게 오가면서, 죽을 때까지 가 닿을 수 없는 로망을 그리워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p.151)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p.194)
그게 너였고, 너는 그렇게 관념이었다. 어쩌면 너는 내게, 실체하지 않는 영혼의 구멍 속을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너는 잡을 수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너는, 손을 빠져나가는 바람 같은 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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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갈망의 3부작이라고 썼는데, 앞선 두 개가 우회했다면, 이번 『은교』는 직접적이며 정직하고 뜨겁게 토로한 소설이 됐다. 앞으로 내 영혼의 중심에 구멍이 뻥 뚫렸다고 느끼는 날이 많을 것 같다. 누가 뚫어서 뚫린 것은 아니고. 그런 텅 빈 공간에 뭘 채워야 하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절필 이후 내 소설은 대부분 갈망을 담고 있다.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꿈을 말하고 있는데, 꿈은 사랑의 완성,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 다시는 소설을 안 써도 될 위대한 하나의 작품 같은 것을 말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사람은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불타는 것 아닌가! 나이 들면 이런 게 더 커진다. 초월에 대한 욕망이랄까. 십 몇 년은 아내가 어떤 소리를 해도 히말라야에 간다. 그 꼭대기를 보고 있으면 영원성 같은 게 있다. 지금의 인생은 가장 절실하고 고단한 문제가 됐다. 어떻게 하면 삶의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을까.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껍데기 다 날려버리고 남는 것, 내가 온갖 불온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진실로 간절히 그리워한 것은, ‘처녀’의 ‘숨결’이었다는 것이다. 네 숨결에 비하면, 내가 내걸었던 명분의 기치는 모두 ‘마지못한,’ 것에 불과했다. 처녀인 네 앞에서 나는, 누추할 뿐이었다.(p.96)
너는 확실히 달랐다.
노트에도 적었지만, 내게도 여인들이 있었다. 수많은 여자와 눈을 마주보며 차도 마셔봤다. 이 할아부지는 여자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나는,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졌다. 몰랐구나. 정녕 몰랐구나. 그러니, 내가 무너졌을 게다.
내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전적으로 내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평생 신뢰해온, 평생 자신만만했던 나의 이성이 그애의 옴씬한 발목 인대에서 단번에 무너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p.129)
남자는, 그래 너도 이젠 알겠지만 수컷은 대체로 그렇다. 참 소모적이고 쓸쓸하고 슬픈 동물이다. 영원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수컷에게 동정심을 부러 가질 필요는 없다. 반면, 여자는, 그러니까, 너는 자궁이 있다. 그건 굉장한 것이다.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애를 낳을 수 있으며, 영원히 뭔가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면, 그것은 여자다.
너는 그렇게, 내게 영원성이었다. 영원히 가 닿을 수 없겠지만, 영원히 그리워하고 진선미가 갖춰진 존재. 강력하게 그리워하지만,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나에겐 바로 갈망. 세속적인 목표가 아니라 근원적인 갈망의 한 그림자. 그게 은교, 너였다.
쌔근쌔근 바람 부는 네 코의 피리, 푸르스름하고 가지런한 네 속눈썹 그늘의 떨림, 맑은 물 고인 네 쇄골 속 우물,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고 있는 네 가슴의 힘찬 동력, 휘어져서 비상하는 네 허리의 고혹을 나는 보고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고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네가 ‘소녀’의 이미지에서 ‘처녀’의 이미지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p.93)
‘본시창’이라도 좋다.
혁명을 꿈꾸며 감옥에서 10년을 있었고, 시인으로 영원히 남고자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은 카리스마? 천만에, 그런 명분 따위 다시 말하지만, 거짓이다. 나는 욕망과 본능을 무시한, 죄인이다. 다행히 죽기 전에 네가 그 욕망을, 본능을 건드려줬다. 다행이다. 감히 말하겠다. 모범적으로 사는 인생? 몽땅 거짓이다. 자신에 대한 명백한 거짓이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거짓 인생이다.
너로 인해,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내 몸 안에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p.394)
작가의 말
“이 책, 밤에만 읽으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본능이 우리 안에서 비합리적으로 억눌려서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을, 가족이나 친구를 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웃음) 눈 뜨면 사회 활동 하면서 돈도 벌고 직장 생활도 하고 가정도 챙기고, 출세도 해야겠고, 경쟁 시대에 살아남아야겠고, 사회적 자아를 꼿꼿이 내세우면서 열심히 산다.
하지만 깊은 밤 누웠을 때는 달라져도 된다. 사회적 자아를 내려놔라. 그 사회적 자아의 억압에, 횡격막에 눌려 있던 본능, 오욕칠정 등은 깊은 밤 남몰래 터져 나와야 되지 않겠나. 이적요를 통해 우리에게도 강력한 오욕칠정이, 어쩌면 더럽고 슬프고 추하면서도 아름답기도 한 그것들이 오장육부의 창자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건드렸으면 좋겠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고 더 열심히 사는 게 아니고, 깽판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다. 불온한 서적이다. 인생에 전혀 도움 안 될지 모른다. 그래도 그걸 통해서 목표에 불과한 것을 꿈이라 알고, 평생을 자기감정을 억제하고 사는 것보다 한 번쯤은 오장육부에 있는 욕망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그게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요즘도 저는 불가능한 꿈을 꿉니다. 진선미가 갖춰진 여인과 북극해로 도망간다거나, 영원히 살고 싶다거나, 혁명적으로 바뀌는 세상을 보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이죠.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명된 것들을 꿈꾸지요. 육체적으로는 이미 정점을 훨씬 지난 나이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꿈 앞에선 제 자신이 지금도 화염병처럼 뜨겁게 타오릅니다. 꿈을 갈망이고 그리움이지요. 이렇게 나이가 든 사람도 꿈을 꾸는데, 요즘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스럽습니다.”(『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5)
“내 욕망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 사회의 욕망에 맞춰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명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에 보면 ‘천복(天福)을 좇으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살고, 자신이 행복하겠다 싶은 길로 나아가라는 뜻이지요.”(『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8)
할아부지가 하늘에서 보자니, 그곳이 그립다. 은교 너 때문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여름이 선사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부디, 너는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목표를 꿈으로 착각하지도 말아라. 그 여름, 온전히 너의 것으로 너의 욕망으로 채워라. 소설가 김훈이 그랬던가.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여자의 옷을 보는지 몸을 보는지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그의 즐거움이라고.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여자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이 나라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젊은 여자들의 성적 매력은 나라의 힘이고 겨레의 기쁨이라고.
네가 없는 이 하늘, 혼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힘과 기쁨도 없다. 그래서 영원할 수가 없다. 할아부지가 힐긋 보니, 숏팬츠와 레드룩으로 무장한 네 모습,
관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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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와 독자들이 나눈 Q&A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들이 나온다. 어떻게 생각하면서 썼나. 쓰고 난 뒤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생각한 것이 있다면.
“나 모르는데.(웃음) 이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 옳을지 질문하는 소설이다. 원래는 훨씬 더 불온하고 발칙하게 구성돼 있었다. 은교랑 노인이 한 번도 섹스를 안 하는데 애초 구상은 그게 아니었다. 섹스도 끝 간 데 없이 밀어붙이는 소설을 생각했다. 잘하면 감옥 가겠다는 생각도 했다.(웃음) 나도 어쩔 수 없이 육십 대이고 보니, 내 안에 쌓인 계몽성이 나를 억압했다. 그래서 소설이 이 상태로 됐다. 이데올로기나 계몽성을 작가 자신도 뛰어넘기가 쉽지 않더라. 이적요 입장에서도 나이 드는 것의 고통, 젊은 것 자체에 대한 욕망과 질투가 복잡한데, 내 자신도 그렇다. 나이 들수록, 예컨대 집에선 가족의 인기를 끌려고 별 짓을 다한다. 돈만 벌어줘선 찬밥이라서. 애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학교 가면 제자들에게 또 온갖 애교를 떤다.(웃음)
출판사에 권했다. e북과 함께 가자. 새로운 문화와 함께 가자. 다양한 문화가 내 갈비뼈 사이를 관통하도록 하자는 것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지점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많을수록 지옥이다. 나이 들수록 더 넓은 문화,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서 내 몸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e북을 만든 것도 그런 것이 반영됐다.
사실 인터넷 연재의 막을 박범신이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촐라체』를 할 때 주변에서 인터넷에 쓰면 저급한 사람이 되기 쉽다고 걱정했다. 악플도 걱정하고. 상관없어. 딴 데서 애 낳은 적도 없고.(웃음) 문학은 누구나 악플을 달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감동적인 소설이 아니거든. 당연히 짊어져야 할 것이라고 봤다. 저급해진다? 난 찬성 못한다. 인터넷 글쓰기가 저급하다면, 형편없는 글이 있다면, 더더욱 잘 쓸 수 있는 작가들이 가서 청소해줘야지.
『촐라체』를 연재할 때도 200자 원고지에 써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 올렸다. 나는 아날로그적인 사람이고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일한다. 『촐라체』 『고산자』 다 아날로그적이라는 생각이 들 거다. 독자와 작가,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채널은 다양할수록 좋다. 인터넷이 아니라 더 발가벗어서 독자들이 읽을 수 있으면 선택할 거다. 두렵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악플이 달리더라. 그래도 기다렸다. 선플이 달려서 악플을 몰아내더라. 새로운 문화의 풍향계가 돼야 한다. 작가는 그래야 한다.”
문학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밤을 새워야 하는데…….(웃음) 문학이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이 짓 하는 거다. 나는, 문학은 오욕칠정을 그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현대소설은 사랑을 그리워하지만, 사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세상을 그리고, 심적이고 영원한 세계를 꿈꾸지만 신이 없는 세계를 그린다. 문학은 결핍을 통해 충만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모든 부족한 것에 관심을 갖지만, 목표는 부족한 너머의 것에 있다. 눈으로는 그리운 것을 보고 손으로는 부족한 것투성이를 만지는 작업이다. 행복한 걸 왜 쓰겠나. 눈물나고 억울하고 화나는 것을 쓰지. 눈으로는 더 완전한 어떤 것을 보고, 오늘, 손으로는 아프게 결핍투성이의 현실, 부족함을 보듬는 것, 그게 문학 하는 자세다.”
행복한가.
“좋은 질문이다. 행복해 보이나. (아니요~) 잘 맞히셨다. 사실은 행복이 뭔지 모르겠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부분은, 우리도 뭔지 모르는 것이다. 물론 더러는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 본 적 있나? 결혼해서 37년을 살았는데, 사랑은 조금씩 까먹고 우정은 날로 깊어지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웃음) 사랑은 바구니에 담기지 않는다. 사랑의 열망은 영원하지만, 파트너를 두고 완성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본다. 내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네가 알아듣기 편하도록 쉽게 설명하자면,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 사랑을 믿지 못한다.(p.91)
“행복은 뭘까. 목표를 이루면 행복하지만, 그건 마취제 같은 거다. 아파트 40평을 목표로 해서 샀다고 치자. 행복? 한두 달 가고 마는 거지. 참된 의미의 행복은 본 적도 만진 적도 없고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말 그리워하는 것, 그건 대부분 관념의 세계에 있어서 잘 모르고 행복한지 불행한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행복하다고 느꼈던 짧은 순간이 있지만, 나 자신이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새로운 역사는 갈망과 그리움에서 비롯됩니다. 실현가능한 목표는 결코 꿈이 아니에요. 목표죠. 의사 또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거나 얼마 정도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게 꿈입니까? 그건 목표에 불과해요. 요컨대, 의사가 된 후에, 국회의원에 된 후에, 매출 얼마를 달성한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갈망이 꿈인 거죠. 그런데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세속적인 목표를 꿈이라고 가르치며 경쟁만 부추깁니다.”(『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5)
“한동안은 소설을 영원히 쓸 수 있어서, 행복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다. 물론 나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현역 작가이겠지만, 그것도 다짐을 해서 그렇지, 정말 좋아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 생에선 안 할 거다. 내가 미쳤나.(웃음) 목표를 조금 낮춰 잡고 마음의 욕망을 조금 내려놓으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말은 전적으로 신뢰한다.
나도 대부분 욕망은 내려놨다. 돈, 권력, 더 건강하게 살겠다는 욕망도. 운동도 안 한다. 그리 살고 있다. 100% 내려놨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 내려놓지 않은 욕망이 있다. 사랑. 이게 짐이 되고 힘이 든다. 단지 젊은 여자와의 사랑으로 생각하지 말라. 살아생전, 사랑의 완성이라는 욕망은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생의 에너지인 것 같다. 내게 행복이 있다면 자유롭고, 사랑의 열망을 뜨겁게 갖고 있으며, 아직도 청년 작가로 불릴 수 있는 것. 이것이 내 ?생의 행복이 아닐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은 날이 저물 때가, 저문 다음이 제일 좋아요. 해가 저물면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해요. 『주름』에 나오는 남자처럼 팜므파탈에게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북극해로 도망가고 싶다는 식의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지요. 그러면서도 집에서 아내와 조용히 보내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고 편안할 수 없어요. 모순이고 내적 분열이고 갈등인데요, 자기모순과 내적 갈등은 젊음의 영원한 자산이라 할 수 있어요. 나이가 젊다고 젊은 게 아닌 것처럼 나이가 많다고 꼭 늙은 것만은 아니라고 봐요. 저는 아직 ‘청년작가’입니다.”(『리더의 하루』 중에서 박범신 편, p.159)
스릴러 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세 가지 시점으로 된 이유가 있나. 한 달 만에 완성한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한 달 반 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참았나보다. 그런데 많은 독자들이 연애소설이 아니라고 말해서 연애소설을 새로 써야하는 고민하고 있다.(웃음)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이적요, 서지우, 은교만 이름이 있다. 나머지는 이름이 없다. 단 한 사람이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적요의 아들 이름이 얼이다. 이니셜로 된 이름은 기억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전형적 인물이다. 그러니까, 세 사람의 소설이길 바랐다. 특히 이적요와 서지우가 중요하다. 은교만 해도 관념적 인물이다. 박범신이 히말라야를 걸을 때 꼭대기의 만년 빙하의 봉우리 같은 것이다. 위에선 비바람이 쳐도 박범신에겐 영원성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로 보이거든.”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을 가진 적요라는 이름은 물론 필명이다. 그는 이십대 때 사회주의운동에 투신, 폭풍 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었고, 삼십대 십 년은 감옥에 있었으며, 사십대에서 일흔 살로 죽을 때까지는 시인의 이름으로 살았다.(p.16)
“이 소설은 최근 몇 년 동안 갖고 있던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문단에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사랑에 대한 욕망도 고백했고, 글쓰기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다. 이적요가 원고를 태우잖나. 그가 쓴 모든 산문과 시가 아무것도 아니고 쓰레기에 불과했다며. 톨스토이도 말년에 집을 뛰쳐나오면서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싶다고 하고는 객사한다. 이적요도 자기의 모든 문학을 부정하고 욕망이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죽는다. 자기 부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작가는, 다른 작가와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항상 내 소설만 생각한다. 지난번보다 새로운가, 문장이 나아졌나. 동어반복이라면 때려치워야지.”
지금 생각하면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나의 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 ) 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을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pp.397~398)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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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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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커피좋아
2012.12.17
그 유행이 사그러졌다고 판단될 때 쯤 읽게 된 '은교'는 빠른 전개 속에 작가의 생각이 간결하게 나타난 소설이었다. 멋진! 이 기사를 통해 또 한번 느끼는 작가님의 열정에 감사를!
prognose
2012.05.23
찍눈이
201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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