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그림에, 마음을 놓다』로 다정하게 안아주며 심리 치유를 해준 이주은의 새로운 에세이가 나왔다. 전작이 심리 치유 에세이라면 이번에 나온 『당신도, 그림처럼』은 나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일상 치유 에세이다. 매일매일 그림처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이 책에 들어 있다. 2009년 9월 7일, 가을로 인도하는 촉촉한 비가 한바탕 내린 월요일 저녁에 ‘향긋한 북살롱’ 9월의 초대 손님 이주은에게 그 행복함을 전해 받았다.
긴 겨울을 보내고 다시 맞는 사계절의 이야기
『그림에, 마음을 놓다』가 긴긴 겨울에 관한 이야기라면 『당신도, 그림처럼』은 그 긴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사계절의 이야기다. 저자인 이주은이 앉을 테이블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플로리스트 독자가 직접 만든 꽃이 놓여 있었다. 빨간 맨드라미 사이사이에 포도가 숨어 있었다. 꽃에 과일이 들어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나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그 플로리스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이날 저자가 가지고 온 주제, ‘매일매일 그림처럼 행복하게 사는 법’ 중에는 상상에 관한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었다. 상상이야말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과일이 꽃이 되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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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쁘게 보이려고 준비한 원피스가 있었는데 실크 소재인지라 비가 와서 입지 못하고 다른 원피스를 입고 왔어요. 예쁜가요?”라는 귀여운(!) 물음으로 인사를 한 저자는 ‘오늘은 책의 컨셉을 어떻게 잡았는지 보여 드리고, 그림을 본 후 내가 느낀 생각과 여러분이 가졌던 생각도 물어보며 보내면 좋겠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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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그림에, 마음을 놓다』는 긴 겨울에 관한 이야기였다. 겨울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진취적이고 명랑한 사람도 심리적으로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인생에서 고비를 맞이하거나 갈림길에 섰을 때,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제자리걸음할 때, 스스로 자랑스럽고 인정받고 싶은데 잘 안 될 때, 그런 긴 과정을 겪을 때가 바로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영혼의 어두운 밤. 그런 밤을 ‘사람, 관계, 자아’ 세 단계로 유지한 게 『그림에, 마음을 놓다』였다. 그리고 길고 긴 겨울을 보낸 후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새 봄을 맞이하고 여름, 가을을 보낸 후 다시 맞는 겨울은 정말 따뜻하고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구성한 것이 이번에 나온 『당신도, 그림처럼』이란다. 그림에 계절감이 살아있지 않은 것도 있지만 계절의 속성을 보여주려 했기에 그런 속성이 나온 그림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림을 보며 나의 소중함을 알아간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 「페르세포네 이야기」, 18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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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예요.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지하의 신, 하데스에게 잡혀와 갇혀 살게 됩니다. 엄마인 데메테르는 하데스에게 잡힌 딸을 구하기 위해 제우스에게 부탁을 하죠. 제우스는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면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이미 석류를 먹은 상태였으므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고 반은 지하에, 나머지 반은 지상에 갇혀 살게 되죠. 이렇듯 신화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 삶의 섭리를 표현합니다.
그림은 감금된 여자가 석류를 들고 허무한 표정 짓고 있는데 그건 빠져나가고 싶은 욕망, 사계절의 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겨울 내내 지하에서 갇혀 있다가 봄이 되어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동안 꽃이 만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건 자연의 섭리이며 인생의 섭리로는 어둠의 밤을 지내고 발랄하고 편안하며 즐거운 사계절을 맞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석류는 그녀를 가두어 놓은 저주스런 과일처럼 여겨지지만 그녀가 품어 놓은 희망일 수 있습니다. 석류에 알알이 박혀 있는 것은 상상력과 창조력의 상징하고 봄이 되면 열매를 맺고 결실을 맺으며 하나하나 기쁨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읽은 『데미안』의 표지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데미안』의 이야기가 잘 어울려 대부분의 책 표지에 이 그림이 들어갔었다.
라우리츠 링 - 「창밖을 보는 소녀」, 18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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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많이 본 사람으로서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신선하게 느껴졌단다. 라틴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거장들의 그림에 우린 익숙한 편이다. 그런 그림들은 따뜻한 느낌을 주므로 밝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그림은 덴마크 그림인데 북유럽 특유의 춥고 스산한 느낌이 있어서 지나간 긴 겨울을 느낄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이 그림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했어요.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갇혀서 창밖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가난을 벗어나고 싶거나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에서 바깥세상을 꿈꾸는 사람 같기도 하여 많은 것을 상상하게 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자유를 갈망하고 있죠. 그런 까닭에 『그림에, 마음을 놓다』의 표지 후보작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것을 상징하기에 추억, 희망 느껴지면서 이 겨울은 참 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입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판도라」,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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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주는 작은 선물에도 넘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형인 프로메테우스의 충고를 무시한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넘어가고 말죠. 판도라와 집으로 돌아온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준 결혼 축하 선물인 작은 상자를 이상하게 여겨 판도라에게 열지 못하게 하였으나 궁금증을 참지 못한 판도라는 상자를 열고 맙니다. 그 속엔 온갖 절망, 좌절, 질병, 심지어는 질투, 질시까지 들어 있었죠. 너무 놀라 닫았는데 그 안에 희망이 남아 있었어요.”
판도라 상자 속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희망이었다. 희망은 안 좋은 것들하고 같이 살고 있다는 결론이다. 희망, 혼자 좋은 개념이고, 빠져나간 다른 것은 나쁜 개념이다. 우리가 품고 있는 희망도 절망 속에 같이 살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긴 겨울도 판도라 상자처럼 희망 품고 기다리는 것, 희망 없이 모든 게 절망이라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희망이며 한 가닥 기대일 거다. 또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절대로 버리지 않는 것이 희망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에커스베르 - 「거울 앞에 선 여자모델」, 18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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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마음을 놓다』 표지 그림이기도 한 이 그림은 거울을 통해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에요.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머리를 말아 나갈 준비를 하며 즐거운 외출을 꿈꾸고 있죠. 비록 어디로 갈지 모르고, 어떤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스스로에게 희망을 주고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하는 거랍니다.”
이렇게 하여 긴긴 겨울이 희망을 남겨주고 끝났다. 책을 펴내고 나니 『그림에, 마음을 놓다』를 읽은 몇몇 팬들이 그렇게 끝내버렸다고 아쉬워했다. 하여 『당신도, 그림처럼』을 펴냈다. 일종의 속편인 셈이다. 속편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속편을 만들게 되었다. 밝은 이야기란다. 일상의 순수한 것들을 발견하는 이야기. 새롭게 맞은 봄은 연둣빛을 띠고 있다. 저자는 연두색을 봄의 속성으로 봤다. 봄은 자유롭다. 개구리도 나오고 경직된 얼음물도 쩍쩍 갈라지며 물이 졸졸 흐르고 설렌다. 봄이라는 이유만으로 봄을 타는(!) 사람, 방랑벽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그런 설렘을 설정했다.
다시 돌아온 계절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봄
영국화가 그웬 존 - 「파리에 있는 예술가의 방코너(열린 창)」, 1907~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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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몽마르트에서 작업을 한 그웬 존은 자기 방이 생기니 기분이 좋았어요. 파리의 허름한 방이지만 방을 구해 흡족했고 로댕을 좋아해서 돈벌이는 되지 못했지만 모델을 서주고 그녀도 그림을 그렸죠. 또 항상 로댕에게 편지를 썼어요. 로댕이 읽든 말든 자기 방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커튼에 대한 이야기, 꽃 이야기. 창을 여니 마을이 보이는 것도 좋았는지 아늑하고 예쁜 방에 대해서도 계속 얘기했죠. 17세기 정물화에 나오는 방처럼 그리고 싶다는 얘기 등등. 재미나는 이야기를 조목조목 했답니다.”
언젠가 런던에 갔을 때 그웬과 오거스트 존 남매의 전시회가 있었단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니 이런 멋진 그림들을 엽서로 판매하고 있었다. 푸근하고 기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그림을 보면 십 년 전 영화인 <전망 좋은 방>이 생각난다. 빅토리아 영국풍이 그대로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 영화에 주인공 루시가 창문 여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에서 봤을 때 그 창문 여는 모습이 마음의 창을 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피렌체의 전망 좋다는 방, 바다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마을이 보이는데도 그 집이 전망 좋은 방이라는 이유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두오모 성당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음의 창을 열어 자기감정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봄인 것 같다고 했다.
마르크 샤갈 - 「산책」,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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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 붕 뜬 것 같아 좋아하는 그림이란다. 사랑에 빠져 사랑하는 연인과 산책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목적 없이 걷는 자유도 봄의 속성인 것 같다. 늘 꿈꾸는 연인과의 산책, 발길 닿는 대로 어슬렁거리고 이것저것 구경하며 걷는 자유, 이게 지금을 살아가는 삶이 나일까 싶다.
에드워드 브로트놀 - 「다음엔 어디로?」, 188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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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역시 ‘어디로 가볼까?’ 하는 그림이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고 지금도 멋진 장소에 있으면서 다음에 또 ‘어디로 갈지’ 정하고 있는 거다. 언젠가 이 그림을 편집자에게 보여주었더니 힘든 일이 있었는지 ‘염장을 지르는 그림이군요.’ 한 적이 있었다. 그림을 보면 진짜 염장을 지른다.(웃음) 이것 역시 봄의 속성일 것이다. 무모하지만 방랑과도 같은 여행은 장소를 바꿀 때마다 경험이 바뀌고, 기억도 바뀌며, 잊을 것은 잊을 수 있는 진정한 여행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또 풍요로움 속에 고통도 있어서 돌아올 때는 세상이 별 것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게 여행 같다고 했다.
여름
앨버트 무어 - 「비즈」, 18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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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여름의 속성으로 본능과 솔직함을 떠올렸다. 그림을 보면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잠은 본능과 가깝다. 잔다는 것은 그림에서 보듯이 소진할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컷 자고 나면 좋은 아침일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잔다는 거다. 현실 도피적이기도 하고 자고 있는 동안 본인도 모르는 억압된 기운들이 자고 나면 다시 살아나는, 눈을 뜨는 시간. 본능에 충만한 그런 시간이 잠을 자는 순간이란다.
“신화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여인은 아리아드네예요. 테세우스에게 배신을 당하죠. 이기적인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궁 속에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잡을 수 있었어요. 아리아드네와 결혼을 약속하고 아테네로 떠나면서 낙소스 섬에서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가 버리죠. 이기적인 테세우스가 떠난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아리아드네의 모습입니다. 잠들어 있는 아리아드네에게 나타난 것은 디오니소스예요. 둘은 새로운 연인이 되죠. 잠과 본능의 신이 만난 거죠”
귀도 레니 - 「와인을 마시는 바쿠스」, 16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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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바쿠스예요. 와인을 마시는 바쿠스인데 귀엽죠?” 바쿠스는 디오니소스를 말한다. 낙소스 섬에 버려진 아리아드네와 연인이 된 사이다. 바쿠스는 본능의 신이며 잠의 여신인 아리아드네와 친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본능과 잠은 잘 어울리는 관계가 된다. 디오니소스 축제도 있다. 포도를 수확하는 가을에 열린다. 본능을 드러낼 수 있는 축제로 실컷 떠들고 싸우다가 널브러져 잠자는 걸로 끝을 맺는 축제란다.
르네 마그리트 - 「침실의 철학」,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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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마그리트의 그림이에요. 세상에서 상상력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저는 옷에 본능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예쁜 옷 내일 입어야지.’ 하고 잠들어 있는데 자기 본능이 관조하고 있는 부분들의 본능이 살아나서 운을 땐 것 같은, 본능에 솔직해지자는 그런 그림이라고 생각했어요.” 저자의 딸은 이 그림을 무서워한단다. 목이 없다는 둥 귀신 시리즈로 바꿔버렸다. 무섭게 보면 상당히 무섭다. 발목도 잘려 있고, <분홍신> 생각도 나고, 정말 무섭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대체로 초현실적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가을
에드워드 번 존스 - 「비너스의 거울」,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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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을이에요. 9월. 내게 찾아온 가을엔 나다운 것을 실컷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그림은 아름다운 비너스들이 거울에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보고 있는 그림이죠. 철학적으로 신플라톤주의라고 해서 육체의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아름다움, 영적인 아름다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림이라고 해요.” 저자는 이런 그림을 보며 조화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의 동요가 없으니 물 위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그런 모습이다. 수면이 고요하고 정결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탁해지지 않은 욕심이 없는 것이므로 진짜 자기를 볼 수 있는 거란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 아닌 자길 제대로 볼 수 있는 상태. 거울 앞에 선 그녀들이다.
레메디오스 바로 - 「환생」,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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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자신을 비추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달빛이 저 먼 곳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마음속에도 빛이 있었다. ‘빛이 내 마음 속에도 있구나!’ 하고 깨닫는 그 경이로움. “작은 행복이 주는 경이로움 같은 것을 매일 느끼면 어떨까? 내가 가지지 않는, 내게 없는 것에서만 나를 찾으려 했어요. 내가 가지는 것에서 나를 찾으면 좋겠어요.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처럼 말이죠.”
조지 클라우센 - 「들판의 작은 꽃」,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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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꽃에서도 기쁨을 느끼고, 꽃 이름은 몰라도 굉장히 기분이 좋고, 보고 있어도 행복한 것 그게 기쁨이란다. 그게 좋다.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길 원하는데 그게 사랑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랑 받는다는 거죠. 부모에게도 인정받고 싶고,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이에요. 근데 내가 나를 왜 인정하지 못할까요? 나는 나라서 자랑스러운 거랍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 「풍경 속에 검정 스패니얼과 함께 있는 자화상」, 18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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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좋아하는 그림이란다. 오만한 쿠르베의 자화상이다. 남을 내려다보는 표정을 그린 거란다. 겸손하지 않고 가증스럽게 오만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소중하고 내가 자랑스럽다. 내가 어떤 점에서는 인정을 하니까 그런 점에서는 오만하고 싶다.”
겨울
“또 다시 겨울이 왔어요.” 저자는 겨울이 참 좋단다. 눈이 와서 좋고 코트 입고 부츠 신는 것도 기분이 좋다.
다시 맞은 겨울은 힘겨워 하지 말고 꿈꾸면서 좋은 추억 가지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꿈을 꾼다는 것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꿈은 ‘꿈은 이루어진다.’를 뜻하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꿈이 아니라 막연히 행복한 생각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렸을 때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서 ‘멍’ 때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 자라면서 그런 생각은 더 이상 안 한 것 같다. 아마도 자라면서 꿈꾸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멍한 표정으로 시간 잃고, 초점 잃은 모습으로 사는 게, 바보스럽긴 하지만 본인은 평화로운 것 같다. 물론 머리도 용량이 있듯이 복잡하고 계산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가도 꿈꾸는 행복하고 엉뚱한 공상에 의해 악의적인 것이 밀려나가고 자동 삭제되어 행복한 것들이 많이 채워지는 것 같다고 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춤」, 18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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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행복한 그림을 많이 그린다. 평소에 고달픈 일이 많기에 한순간이라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이 그림 역시 춤추는 장면인데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저자는 부르주아의 행복한 그림인 줄 알았단다. 하지만 화려하게 춤추는 곳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한껏 스트레스 풀며 추는 춤이었다. 행복한 기억, 비록 현실로 돌아가면 아픈 기억일 테지만 기본적으로 되뇔 수 있는 기억이라면 그런 기억은 행복하다. “지금은 비록 떠나버릴 사랑일지라도 내게 행복했던 기억을 준 사람이라면 그건 감사하죠. 추억이 많을수록 공상도 많아지고 더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흐드프리트 스할켄 - 「촛불을 불어 불을 밝히는 소년」, 16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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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년이 촛불을 부는 모습은 환각제라도 맞은 것처럼 보인다. 가끔 촛불을 켜면 공상에 빠져서 좋다. 사람들은 너무 밝은 곳에서는 논리적이고 싶어 하고 분석하려 든다. 어두운 곳에서는 보이는 게 없어서 ‘그동안 안 볼 것을 너무 많이 봤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촛불을 켜두면 좋은 것 같단다.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결국 자기만의 방을 만들 수 있는 게 공상의 시간인 것 같다. 공상을 많이 하면 그런 것들이 우릴 행복하게 한다. 그 공상들이 하나하나 쌓이면 행복이 쌓이는 것. 내리는 눈이 지저분한 것을 다 덮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윌리엄 팩스턴 - 「노란 옷을 입은 여자」,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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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도, 그림처럼』의 표지가 나왔다. 표지 그림을 고를 때는 편집자와 많은 고민을 한다. 이 그림은 거울 앞에 있다. 일단 거울 앞에 선 그녀. 『그림에, 마음을 놓다』 속편을 의미한다. 『그림에, 마음을 놓다』에서는 머리를 말리고 있어도 희망이 있었고. 지금은 다 차려 입었다. 어떻게 보면 촌스럽지만 ‘노란 드레스에 초록색 모자를 왜 썼을까?’ 하는 질문들을 많이 한단다. 또 빨간 꽃까지 달았다. 이런 그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든다. 노랑과 보라는 색의 대비다. 이 여자는 다 차려입고 꽃도 달고 나갈 즈음에 초록색 모자 대신에 보라색을 써볼까 망설이는 듯하지만 얼굴은 흡족하다. 소중한 자아를 깨달은 기쁨, 나는 소중하다는 깨달음의 만족이 느껴진다. 저자는 이 정도면 더 이상 속편을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 표지를 사용했다고 했다. 영국 작가의 그림이다.
“준비한 그림은 여기까지예요. 마치 진짜로 천 개의 바람을 느끼듯이 바람에 나를 내맡기는 것들이 즐거움 같아요. 어젯밤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가며 ‘내일 강연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해 이야길 해줘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어떤 게 좋았는지 여러분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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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하나씩 보여주며 알기 쉽고 재미있게 강연을 했다. 독자들이 일어나 감동 깊었던 문장들에 대해서 낭독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했다. 궁금했던 몇 가지의 질문도 했다. 그중 그림을 보는 방법에 대해 묻는 독자에게 저자는 말했다.
“이 책은 그림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의 상상력은 픽션과 이야기 구조가 삶을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 되어준다고 믿어요. 우리는 이야기를 잃으면서 살고 있죠. 보통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실용 서적을 많이 읽어요. 처세, 성공서, 경제 투자 같은 책이죠. ‘픽션은 왜 안 읽어요?’ 물으면 소설이나 에세이는 마음에 와 닿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사실이 아니라는 거죠. 꼭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려 합니다. 우리의 생각 자체가 어떤 것은 허구고, 어떤 것은 경험을 하죠. 또 실험적인 것을 대하는 인식 방식은 정리되지 않으면서 분리하는 시도부터 어렸을 때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없어지고 픽션은 알게 모르게 무시됩니다. 이야기를 해석하는 세상, 사람들과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잃어버리면 자기 이야기를 만들 능력조차 잃어간다고 생각해요. 그림도 안 보이고, 문학도 안 읽히죠. 내 이야기가 없다면 다른 분의 이야기도 들리지 않아요.” 하지만 상상을 통해 픽션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뭘 봐도 이야기가 떠오른단다. 영화를 보더라도 연상이 되는 뭔가가 떠오르고, 나무를 봐도 그저 나무로만 보지 않는다. 그러니 이야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했다. 우연성을 분석하지 말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란다. 엉뚱한 상상 자꾸 해서 이야기 구조를 만들면 세상과의 소통의 길이 열린다. 그러면 그림도 보이고 다 보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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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여주는 강연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몰랐다. 그림을 잘 모르면서 그림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날의 강연이 얼마나 유익했는지 모른다. 강연 도중 중간 중간에 저자가 하는 말들은 이날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이제 더 이상의 속편은 없다고 저자는 말했다. 아쉽지만 속편이 아니라면 또 다른 그림을 통한 치유의 에세이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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