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내게 천직이고, 가장 잘 맞는 옷이다” -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 낸 최영미 시인
서른을 읊조리던 시인은 한때 시와 절연하리라 마음도 먹었지만, 이제는 시가 천직임을 깨닫고 보다 성숙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 시인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2009.04.30
작게
크게
공유
당신에게 ‘서른’은 무엇인가. 그 서른까지가 아직 남았든, 그 서른을 관통했든, 살아있다면 누구나 거쳐야 할 정류장, 서른. 물론 정류장은 종착역이 아니다. 삶에서 서른은 도착하는 것만으로 끝날 무엇이 아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 더 빨리 우리의 기억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면, 스물한 살이 아닌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했지만, 누군가에겐 서른이 또 그럴지도 모른다.
1990년대 ‘서른’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적이 있었다. 고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시인 최영미도 서른을 읊조렸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서른은 그렇게 비고, 가는, 시기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90년대, 서른을 노래하던 이는 이미 세상과 작별했다. 예순의 나이에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싶다던 이였다. 서른을 읊조리던 시인은 한때 시와 절연하리라 마음도 먹었지만, 이제는 시가 천직임을 깨닫고 보다 성숙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 시인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도착하지 않은 삶』이란 한결 너른 제목을 품고. 앞선 『돼지들에게』 이후 4년 만이다.
시니컬하면서도 재기발랄한 비유,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시적 화법으로 문단과 세상에 큰 화제를 몰고 왔던 그였다. 1994년 출간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지금까지 51만 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시집이다. 멋도 모르고 긁적인 이 시집으로 최영미는 신드롬이 됐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겐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다. 시 쓰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삶은 도착할 곳 없는 방랑이 됐다.
그는 첫 번째 시집 이후, 산문집과 미술 에세이, 장편소설을 펴냈다. 시집을 낸 만큼이나 시집 아닌 책들도 냈다. 시 쓰기의 어려움이었을까. 오죽하면, 그는 「다시는」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토해내고 있었다. “시를 쓰지 않으마/ 불을 끄고 누웠는데……/ 옆으로, 뒤로, 먼지처럼 시가 스며들었다./ 오래 전에 죽은 단어들이/ 하나둘 달빛에 살아 움직여도,/ 나는 연필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밖에 무언가 어른거려,/ 바람의 그림자에 속아/ 아까운 잠이 달아났다.”
허나 그는 숙명적으로, 운명적으로 ‘시인’이다. 시를 쓰지 않고자 했을 때, 스스로 방랑자였다고 표현한 그는 이제, 시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임을 안다. 다시 시로 돌아온, 시인 최영미다. 어쩌면 파블로 네루다에게 시가 그랬듯, 시가 그에게로 온 것일까. 다시 그때처럼, 그는 시를 저질렀다. ‘나는 시를 쓴다’고 말하는 시인 최영미에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건넸던 이 말을 되건넨다. “먼길 떠나는 나그네가/ 살아서 떠돌/ 지상의 모든 길이/ 영원히 푸른 하늘과 닿게 하소서.”
지난 21일 홍대 부근 상상마당에서 여전히 곱고 아름다운 최영미 시인을 만났다. 그에게 다시 시를 물었고, 계속되는 인터뷰에 지쳤을 법하지만, 그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첫 시집 이후, 설레는 건 이번 네 번째 시집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 설렘은 시집에 대한 만족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설렘의 근원이 있나?
지난 2005년 소설을 쓰고, 시를 쓰지 못할 줄 알았다. 안 쓰려고 했었다.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에 대한) 회의 같은 게 있었고, 작가로서의 위기도 있었다. 2006년 이수문학상을 탔다. 처음으로 (문학상을) 받은 건데, 분명 기뻤지만 (글 쓰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이번 시집에도 그런 마음이 담긴 시가 있다. 그리고 2007년까지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이번 시집을 냈는데, 마음의 평화랄까. 설렘은 그런 평화에서 온 것 같다.
그런 의미였나. 이번 시집에 대해, “연애의 즐거움을 음미하는 느낌”이라고 했던데. 시작(詩作)이 그만큼 즐거웠다는 것인가.
20대 때는 그러니까, 멋모르고 쓴 거다. 시가 무엇인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를 쓴 거지. 그런데 이번에는 뭐랄까, 시 쓰는 것의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음미했다. 시를 안 쓰다가 1년 만에 쓴 시가 「내일을 위한 기도」였다.
일부 시는 <광주일보>와 <문예잡지사>에 선보였던 것인데, 계기가 있었나.
<광주일보>에서 시를 청탁했다. 처음이자 유일하게 일간지에서 내게 시를 청탁한 경우였다. 그러니까 청탁이 받아서 쓴 것이지, 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설을 보면 일본의 사가와 아키 시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도착하지 않은 삶’이란 현대의 ‘도착하지 않은 사랑’ ‘도착하지 않은 시’를 의미한다…. 도착하지 않은 삶을 구하는 것이 시이다.” 시집의 제목에 담긴 의미가 있나.
해설이 정확하게 됐다.(웃음) 나도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도착하지 않은 삶은, 목표 없이 떠도는 삶이기도 하고,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삶이 아닐까. 그런 삶을 구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고. 사가와 시인의 해설을 읽고 나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사실 시를 쓸 때,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쓸 때도 있다.
마지막 시인 「나는 시를 쓴다」가 인상적이다. 특히, ‘詩를 저지른다’는 말이 시에 대한 열망과 내 안에 있던 시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묘사한 것 같았다. 어떤 마음에서 나온 시인가.
(시를 처음 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내게 남은 건 이것밖에 없다는 그런 심정 있지 않나. 이제 내게 남은 건 글밖에 없고, 시를 쓸 때가 가장 내게 어울리고, 내게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방랑자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편안했다.
「다시는」이라는 시에선, 시를 쓰지 않겠다는 마음이 나온다. 시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마음의 표현이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복합적인 것이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종의 중년의 위기였다고나 할까. 물론 이제는 벗어났다.
2007년 가을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1년 반 춘천 생활이 시를 다시 쓰게 한 동력이 됐다고도 하던데, 춘천이라는 공간, 어떤 곳이었나.
춘천을 간 뒤로 아픈 적이 없다.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다. 아름답고 좋은 도시다. 위로를 받기도 했다. (서울과 일산에 있을 때는) 치여서 괴로웠다. 특히 2006~2007년에는. 춘천에서는 어디든 산이 보인다. 그런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춘천에 아는, 친한 사람은 없지만, 이상하게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물론 내가 존경하는 오정희 선생님(『새』『돼지꿈』의 작가)도 계시고, 이외수 선생님도 계시고.
그렇다면 춘천에 간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건가.
단순하다. 집값이 싸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찾았는데, 그게 춘천이었다. 조카들을 좋아하는데, 춘천에서는 자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그리고 옛날에 할아버지가 백양리역 역장을 하셨다. 4살 무렵이었던가, 아버지가 감옥에 계실 때, 할아버지와 함께 역사에서 살기도 했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런 것들이 내 안에 잠재돼 있다가 춘천으로 이사할 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번 시집의 4부에 보면, 교토, 파리 등 여행의 흔적들이 나온다. 특히 「나의 여행」에서는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라거나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여행과 시, 혹은 익숙한 곳에서의 떠남은 어떤 의미인가.
인생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4부에 나온 그런 곳을 여행 다녔다. 짧게 메모하고 돌아와서 한참 뒤 기억을 살리면서 시를 썼다. 젊었을 때부터 여행을 많이 했고, 20대 때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혼자서. 지금은 그렇게 여행을 자주 하지 못한다. 서울 오는 게 일종의 여행이다. 여행 욕구도 해소가 된다. 한 달에 두 번 꼴로, 그러니까 평균 2주에 한 번 춘천과 서울을 오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웃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그런 에너지가 느껴지는 시들이 있다. 가령 「중년의 기쁨」에서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나 「내일을 위한 기도」에서 “당신과 함께라면 가난한 잠을 깨우는 새벽 종소리가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와 같은. 살아있다는 것을 언제 느끼는가.
재밌는 운동경기를 볼 때, 조카를 볼 때, 행복하다고 느끼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야구를 좋아하는데, 두산베어스의 김현수 선수 팬이다. 이승엽 이후 최고의 타자가 아닌가 싶다. 따로 정해놓고 하는 운동은 없고 평소에 많이 걷는다. 차가 없으니까.(웃음) 춘천 시내에서 집까지 걸어온 적도 있다. 1시간가량 걸린다. 그냥 생활이 걷기다. 걷는 걸 좋아해서 많이 돌아다닌다.
예전 「Personal Computer」에서 친구보다 애인보다 낫다며,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당시로선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언어로 컴퓨터를 풍자했다. 과거, 재기발랄한 비유, 직설적인 화법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번 시집에선 세련되고 무르익거나, 달리 말하면 무뎌졌다는 인상도 받는다. 스스로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나.
뭐랄까. 나이 들어서 보이는 게 있다. 젊어서는 못 보지만 나이듦이 안겨다주는 그런 것들이 있다.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 이번 시집에 나이듦이 보인다고 하더라. ‘최영미, 살아있구나.’ 하는 말도 듣고.(웃음) 남들 얘기를 들으면 그런 얘기들이 많은데, 그냥 덤덤하다. 누구나 늙는 거니까.
기계를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도 여전한가. 혹시 시나 다른 글을 쓸 때, 원고지를 쓰는가.
기계치다. 아직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를 보낼 줄 모른다. 문자 받아서 보는 법을 배운 것도 얼마 안 됐다. 노트북도 원고를 넘길 때만 쓴다. 초고는 종이에 쓴다. 기계를 그만큼 싫어한다. 그래서 여행할 때 카메라도 안 들고 간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여행할 때 딱 한 번 카메라를 들고 간 적이 있다. 한 여성 월간지에 산문을 쓸 때가 있었는데, 카메라를 협찬받았다. 카메라를 들고 갔는데, 한 컷도 못 찍었다. 가기 전에 카메라 작동법을 배웠는데 기억이 안 나더라. 그래서 유럽에 살고 있는 친구가 카메라 들고 있는 포즈를 찍어줘서 다행히 ‘땜빵’을 했다.(웃음)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스타가 된 후 나머지 세월을 “설거지하며 살았다”고 했다. 예기치 않은 스타덤의 부담이 너무 컸다는 얘기인가.
스타라고 할 수 있나. 시집이 그냥 좀 팔린 것일 뿐이지.(웃음) 그땐 뭐든 준비가 안 됐다. 글을 써서 산다는 것, 작가의 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른 길을 엿봤는데 나이 들어서 다른 직업을 구하기도 쉽지 않더라.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공부에 미련이 있어서. 시간강사로 한 학기 해 봤는데, 그것도 체질이 아니더라.
요즘 (시인이) 천직이라고 깨닫고 있다. 나는, 여럿이 하는 일을 못한다. 그러니까 조직에 들어가서 하는 일 있잖나. 혼자서 하는 일이 나한테 맞는다. 그 책이 나온 뒤로도 인터뷰를 잘 하지도 못하고 서툰 데다 힘든 게 많았다.
우연찮게 시인이 됐다. 1991년 겨울 대학원 학기가 끝나고 일기장에 써 온 시를 일간지 선배에게 보내고, 출판사에서 ‘재능이 있다’며 날마다 시를 쓰라고 권하고. 그런데 1994년에야 시집이 나왔다. 당시 얘기 좀 해 달라.
당시 일기장에 적어놓은 시가 10편쯤 됐다. 정서(正書)로 옮겨 적고 베껴 놓은 노트를 갖고 있는데, 참 애틋하다. 그걸 보면 목숨 걸고 썼구나, 싶다. 그만큼 정서를 여러 번 했다. 처음 일기장에 쓸 때는, 별 생각 없이 장난삼아 썼던 시였다.
그렇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인이 돼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작가나 시인을 알 기회가 없었고, 주변에도 없었으니까, 이 동네 상식이나 기본도 몰랐다. 이 업계 상식을 몰라서, 지금도 많이 모르지만, 애를 먹기도 했다. 직업인데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 있지 않나. 어디 업계든 살아남기 위해 룰이 있고, 룰을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런 면에서 나는 좀…….
5공화국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사랑이 있더라. 어떤 사랑을 갈망하고, 지금 사랑하는 대상이 있나.
그때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시대 분위기에 눌려 스무 살에 풋풋하게 연애할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조카다. 남녀간 사랑은 별것 아니다. 사랑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좋아한다. 자연도 좋아하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점점 깊어진다.
「2008년 6월, 서울」이라는 시에서 유모차를 호위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라고 했다. 한바탕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과거 품종(?)은 어땠기에.
요즘 젊은이들, 멋있어졌다. (과거보다) 마초 기질이 희석되고 부드러워졌다. 외모도 개량되고. (웃음) 좋게 보인다. 이 사회가 남자는 여자보다 일찍부터 비열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만드는 것 같다. (군대에서 주로 그런 것을 체화한다고 하자) (남자들에 대해) 불쌍하고 연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시인의 말에 보면, “보다 성숙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지금보다 좀 더 인간미나 세상을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그냥 좋은 글이고 만족스러운 글을 쓰고 싶다. 이번 시집이 4년 전에 나온 『돼지들에게』보다 만족스럽듯, 앞으로 나올 글이 나에게도 흡족하고, 사람들에게도 흡족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 바람이나 계획이 있다면. 시인으로서도 좋고, 생활인으로서도 좋고.
춘천에 사는 집의 대출금을 아직 못 갚았는데, 빨리 갚았으면 좋겠다.(웃음) 지금 조카가 깁스를 한 상태인데, 빨리 나았으면 하고. 나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기는 하나,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주변 사람들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획이라면, 시집은 잘 모르겠고, 두 번째 장편소설을 쓰다가 중단한 상태다. 7년쯤 전에 산문집이 나왔는데, 6월 중에 지금 시집이 나온 출판사에서 산문집이 나올 예정이다. 현재 교정을 보고 있다. 소설 쓰기도 계속할 거고, 앞으로는 시와 소설에 집중하고 싶다.
1990년대 ‘서른’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적이 있었다. 고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시인 최영미도 서른을 읊조렸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서른은 그렇게 비고, 가는, 시기였다.
시니컬하면서도 재기발랄한 비유,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시적 화법으로 문단과 세상에 큰 화제를 몰고 왔던 그였다. 1994년 출간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지금까지 51만 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시집이다. 멋도 모르고 긁적인 이 시집으로 최영미는 신드롬이 됐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겐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다. 시 쓰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삶은 도착할 곳 없는 방랑이 됐다.
그는 첫 번째 시집 이후, 산문집과 미술 에세이, 장편소설을 펴냈다. 시집을 낸 만큼이나 시집 아닌 책들도 냈다. 시 쓰기의 어려움이었을까. 오죽하면, 그는 「다시는」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토해내고 있었다. “시를 쓰지 않으마/ 불을 끄고 누웠는데……/ 옆으로, 뒤로, 먼지처럼 시가 스며들었다./ 오래 전에 죽은 단어들이/ 하나둘 달빛에 살아 움직여도,/ 나는 연필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밖에 무언가 어른거려,/ 바람의 그림자에 속아/ 아까운 잠이 달아났다.”
허나 그는 숙명적으로, 운명적으로 ‘시인’이다. 시를 쓰지 않고자 했을 때, 스스로 방랑자였다고 표현한 그는 이제, 시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임을 안다. 다시 시로 돌아온, 시인 최영미다. 어쩌면 파블로 네루다에게 시가 그랬듯, 시가 그에게로 온 것일까. 다시 그때처럼, 그는 시를 저질렀다. ‘나는 시를 쓴다’고 말하는 시인 최영미에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건넸던 이 말을 되건넨다. “먼길 떠나는 나그네가/ 살아서 떠돌/ 지상의 모든 길이/ 영원히 푸른 하늘과 닿게 하소서.”
지난 21일 홍대 부근 상상마당에서 여전히 곱고 아름다운 최영미 시인을 만났다. 그에게 다시 시를 물었고, 계속되는 인터뷰에 지쳤을 법하지만, 그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지난 2005년 소설을 쓰고, 시를 쓰지 못할 줄 알았다. 안 쓰려고 했었다.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에 대한) 회의 같은 게 있었고, 작가로서의 위기도 있었다. 2006년 이수문학상을 탔다. 처음으로 (문학상을) 받은 건데, 분명 기뻤지만 (글 쓰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이번 시집에도 그런 마음이 담긴 시가 있다. 그리고 2007년까지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이번 시집을 냈는데, 마음의 평화랄까. 설렘은 그런 평화에서 온 것 같다.
그런 의미였나. 이번 시집에 대해, “연애의 즐거움을 음미하는 느낌”이라고 했던데. 시작(詩作)이 그만큼 즐거웠다는 것인가.
20대 때는 그러니까, 멋모르고 쓴 거다. 시가 무엇인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를 쓴 거지. 그런데 이번에는 뭐랄까, 시 쓰는 것의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음미했다. 시를 안 쓰다가 1년 만에 쓴 시가 「내일을 위한 기도」였다.
일부 시는 <광주일보>와 <문예잡지사>에 선보였던 것인데, 계기가 있었나.
<광주일보>에서 시를 청탁했다. 처음이자 유일하게 일간지에서 내게 시를 청탁한 경우였다. 그러니까 청탁이 받아서 쓴 것이지, 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설을 보면 일본의 사가와 아키 시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도착하지 않은 삶’이란 현대의 ‘도착하지 않은 사랑’ ‘도착하지 않은 시’를 의미한다…. 도착하지 않은 삶을 구하는 것이 시이다.” 시집의 제목에 담긴 의미가 있나.
해설이 정확하게 됐다.(웃음) 나도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도착하지 않은 삶은, 목표 없이 떠도는 삶이기도 하고,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삶이 아닐까. 그런 삶을 구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고. 사가와 시인의 해설을 읽고 나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사실 시를 쓸 때,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쓸 때도 있다.
마지막 시인 「나는 시를 쓴다」가 인상적이다. 특히, ‘詩를 저지른다’는 말이 시에 대한 열망과 내 안에 있던 시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묘사한 것 같았다. 어떤 마음에서 나온 시인가.
(시를 처음 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내게 남은 건 이것밖에 없다는 그런 심정 있지 않나. 이제 내게 남은 건 글밖에 없고, 시를 쓸 때가 가장 내게 어울리고, 내게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방랑자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편안했다.
「다시는」이라는 시에선, 시를 쓰지 않겠다는 마음이 나온다. 시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마음의 표현이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복합적인 것이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종의 중년의 위기였다고나 할까. 물론 이제는 벗어났다.
2007년 가을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1년 반 춘천 생활이 시를 다시 쓰게 한 동력이 됐다고도 하던데, 춘천이라는 공간, 어떤 곳이었나.
춘천을 간 뒤로 아픈 적이 없다.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다. 아름답고 좋은 도시다. 위로를 받기도 했다. (서울과 일산에 있을 때는) 치여서 괴로웠다. 특히 2006~2007년에는. 춘천에서는 어디든 산이 보인다. 그런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춘천에 아는, 친한 사람은 없지만, 이상하게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물론 내가 존경하는 오정희 선생님(『새』『돼지꿈』의 작가)도 계시고, 이외수 선생님도 계시고.
그렇다면 춘천에 간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건가.
단순하다. 집값이 싸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찾았는데, 그게 춘천이었다. 조카들을 좋아하는데, 춘천에서는 자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그리고 옛날에 할아버지가 백양리역 역장을 하셨다. 4살 무렵이었던가, 아버지가 감옥에 계실 때, 할아버지와 함께 역사에서 살기도 했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런 것들이 내 안에 잠재돼 있다가 춘천으로 이사할 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번 시집의 4부에 보면, 교토, 파리 등 여행의 흔적들이 나온다. 특히 「나의 여행」에서는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라거나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여행과 시, 혹은 익숙한 곳에서의 떠남은 어떤 의미인가.
인생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4부에 나온 그런 곳을 여행 다녔다. 짧게 메모하고 돌아와서 한참 뒤 기억을 살리면서 시를 썼다. 젊었을 때부터 여행을 많이 했고, 20대 때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혼자서. 지금은 그렇게 여행을 자주 하지 못한다. 서울 오는 게 일종의 여행이다. 여행 욕구도 해소가 된다. 한 달에 두 번 꼴로, 그러니까 평균 2주에 한 번 춘천과 서울을 오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웃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그런 에너지가 느껴지는 시들이 있다. 가령 「중년의 기쁨」에서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나 「내일을 위한 기도」에서 “당신과 함께라면 가난한 잠을 깨우는 새벽 종소리가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와 같은. 살아있다는 것을 언제 느끼는가.
재밌는 운동경기를 볼 때, 조카를 볼 때, 행복하다고 느끼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야구를 좋아하는데, 두산베어스의 김현수 선수 팬이다. 이승엽 이후 최고의 타자가 아닌가 싶다. 따로 정해놓고 하는 운동은 없고 평소에 많이 걷는다. 차가 없으니까.(웃음) 춘천 시내에서 집까지 걸어온 적도 있다. 1시간가량 걸린다. 그냥 생활이 걷기다. 걷는 걸 좋아해서 많이 돌아다닌다.
예전 「Personal Computer」에서 친구보다 애인보다 낫다며,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당시로선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언어로 컴퓨터를 풍자했다. 과거, 재기발랄한 비유, 직설적인 화법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번 시집에선 세련되고 무르익거나, 달리 말하면 무뎌졌다는 인상도 받는다. 스스로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나.
뭐랄까. 나이 들어서 보이는 게 있다. 젊어서는 못 보지만 나이듦이 안겨다주는 그런 것들이 있다.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 이번 시집에 나이듦이 보인다고 하더라. ‘최영미, 살아있구나.’ 하는 말도 듣고.(웃음) 남들 얘기를 들으면 그런 얘기들이 많은데, 그냥 덤덤하다. 누구나 늙는 거니까.
기계를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도 여전한가. 혹시 시나 다른 글을 쓸 때, 원고지를 쓰는가.
기계치다. 아직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를 보낼 줄 모른다. 문자 받아서 보는 법을 배운 것도 얼마 안 됐다. 노트북도 원고를 넘길 때만 쓴다. 초고는 종이에 쓴다. 기계를 그만큼 싫어한다. 그래서 여행할 때 카메라도 안 들고 간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여행할 때 딱 한 번 카메라를 들고 간 적이 있다. 한 여성 월간지에 산문을 쓸 때가 있었는데, 카메라를 협찬받았다. 카메라를 들고 갔는데, 한 컷도 못 찍었다. 가기 전에 카메라 작동법을 배웠는데 기억이 안 나더라. 그래서 유럽에 살고 있는 친구가 카메라 들고 있는 포즈를 찍어줘서 다행히 ‘땜빵’을 했다.(웃음)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스타가 된 후 나머지 세월을 “설거지하며 살았다”고 했다. 예기치 않은 스타덤의 부담이 너무 컸다는 얘기인가.
스타라고 할 수 있나. 시집이 그냥 좀 팔린 것일 뿐이지.(웃음) 그땐 뭐든 준비가 안 됐다. 글을 써서 산다는 것, 작가의 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른 길을 엿봤는데 나이 들어서 다른 직업을 구하기도 쉽지 않더라.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공부에 미련이 있어서. 시간강사로 한 학기 해 봤는데, 그것도 체질이 아니더라.
요즘 (시인이) 천직이라고 깨닫고 있다. 나는, 여럿이 하는 일을 못한다. 그러니까 조직에 들어가서 하는 일 있잖나. 혼자서 하는 일이 나한테 맞는다. 그 책이 나온 뒤로도 인터뷰를 잘 하지도 못하고 서툰 데다 힘든 게 많았다.
우연찮게 시인이 됐다. 1991년 겨울 대학원 학기가 끝나고 일기장에 써 온 시를 일간지 선배에게 보내고, 출판사에서 ‘재능이 있다’며 날마다 시를 쓰라고 권하고. 그런데 1994년에야 시집이 나왔다. 당시 얘기 좀 해 달라.
당시 일기장에 적어놓은 시가 10편쯤 됐다. 정서(正書)로 옮겨 적고 베껴 놓은 노트를 갖고 있는데, 참 애틋하다. 그걸 보면 목숨 걸고 썼구나, 싶다. 그만큼 정서를 여러 번 했다. 처음 일기장에 쓸 때는, 별 생각 없이 장난삼아 썼던 시였다.
그렇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인이 돼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작가나 시인을 알 기회가 없었고, 주변에도 없었으니까, 이 동네 상식이나 기본도 몰랐다. 이 업계 상식을 몰라서, 지금도 많이 모르지만, 애를 먹기도 했다. 직업인데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 있지 않나. 어디 업계든 살아남기 위해 룰이 있고, 룰을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런 면에서 나는 좀…….
그때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시대 분위기에 눌려 스무 살에 풋풋하게 연애할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조카다. 남녀간 사랑은 별것 아니다. 사랑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좋아한다. 자연도 좋아하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점점 깊어진다.
「2008년 6월, 서울」이라는 시에서 유모차를 호위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라고 했다. 한바탕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과거 품종(?)은 어땠기에.
요즘 젊은이들, 멋있어졌다. (과거보다) 마초 기질이 희석되고 부드러워졌다. 외모도 개량되고. (웃음) 좋게 보인다. 이 사회가 남자는 여자보다 일찍부터 비열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만드는 것 같다. (군대에서 주로 그런 것을 체화한다고 하자) (남자들에 대해) 불쌍하고 연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시인의 말에 보면, “보다 성숙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지금보다 좀 더 인간미나 세상을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그냥 좋은 글이고 만족스러운 글을 쓰고 싶다. 이번 시집이 4년 전에 나온 『돼지들에게』보다 만족스럽듯, 앞으로 나올 글이 나에게도 흡족하고, 사람들에게도 흡족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 바람이나 계획이 있다면. 시인으로서도 좋고, 생활인으로서도 좋고.
춘천에 사는 집의 대출금을 아직 못 갚았는데, 빨리 갚았으면 좋겠다.(웃음) 지금 조카가 깁스를 한 상태인데, 빨리 나았으면 하고. 나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기는 하나,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주변 사람들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획이라면, 시집은 잘 모르겠고, 두 번째 장편소설을 쓰다가 중단한 상태다. 7년쯤 전에 산문집이 나왔는데, 6월 중에 지금 시집이 나온 출판사에서 산문집이 나올 예정이다. 현재 교정을 보고 있다. 소설 쓰기도 계속할 거고, 앞으로는 시와 소설에 집중하고 싶다.
4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천사
2012.03.22
2june1
2009.05.03
저의 스무살에 삼십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얼굴이 어두우세요. 힘내시고...
youtube에서 버클리에서의 korean wave 영시 낭독 잘 봤습니다. 자신감있게 잘 하셨어요.
아르뛰르
2009.05.02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