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총수 김어준의 인생 매뉴얼, 삶을 장악하라
딴지일보 종신 총수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를 읽고 든 생각 두 가지. 하나는 원칙을 가지고 명쾌하게, 스타일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타고난 재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
200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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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종신 총수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를 읽고 든 생각 두 가지. 하나는 원칙을 가지고 명쾌하게, 스타일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타고난 재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 sixty nine』 작가의 말 한 구절.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모든 것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고민 상담 코너에 대해 불평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니가 써 봐.’ 그래서 얼떨결에 책임 못 질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를 하기 시작했다. 그 상담이 4년이나 계속되었고, 『건투를 빈다』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는 삐딱하고 짓궂고 웃기지만 항상 상대방의 고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성실하게 상담을 해 주었다. 그는 징징거리는 사람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똥침을 놓아야 할 때면 서슴없이 똥침을 놓는다. 정신이 번쩍 들게! 그의 상담을 읽노라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나, 나는 내 스타일대로 살고 있나, 나는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나를 끊임없이 묻게 된다. 그의 글은 은근히 위로가 된다. 다들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사는구나, 하는 안도 섞인 공감과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구나 하는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어쩌다 고민 상담에 대한 글을 쓰게 됐나?
우연이다. 술자리에서 잡지나 신문의 고민 상담 코너에 대한 불만을 퍼부었다. 너무 오만하다. 그 사람에게 고민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 사실을 이야기해 주기보다 대충 위로만 하고 끝내려고 한다. 문제의 근원과 해결방법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고민을 털어놓은 사람에 대한 예의다. 이렇게 열변을 토했는데, 앞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기자가 ‘그럼 니가 써’라고 했다. 실컷 폼 잡아놓고 안 한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게 4년이나 이어졌다. 우연찮게 시작해서 일이 커졌다.
기존 고민상담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 뭔가?
상담하는 이는 위에, 상담 받는 이는 아래에 두고 마치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무엇보다 문제 해결이 안 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대단한 자기 정화 능력, 자기 치유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다.
나름의 상담 원칙이 있는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상담을 굉장히 많이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해줬고,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줬다. 내가 사장으로 있을 때 여직원들도 곧잘 상담거리를 가지고 왔다. 사장과 여직원은 어떻게 보면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기가 어려운 관계 아닌가? 그런데 다들 스스럼없이 다가와 고민 상담을 해달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 왜 내게 사람들이 상담을 청하는지를 잘 몰랐는데 이번 책을 내면서 그 부분을 생각해 봤다. 나는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누가 불륜을 하고 있다고 하자, 사람들의 제일 첫 반응은 ‘이 나쁜 X’일 것이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들이대는 것이 도덕적, 윤리적 잣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내가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 것처럼 그 사람에게 하는 말도 에둘러 표현하거나 적절히 온건한 말로 포장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게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접?으로 이야기할 때 상대가 받을 상처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고민을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진 이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설픈 위로보다 상처의 고름을 확 짜내고, 소독해서 새 살이 돋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말 것, 그리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것. 이 두 가지가 내 상담의 원점 내지 원칙이 된 것 같다.
행복은 비슷하지만 불행은 제각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건투를 빈다』를 읽노라면 행복만큼이나 불행의 모습도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내가 20대 때 여행에 미쳐 살았는데 그때 깨달았다. 세상에는 남녀의 차이를 빼고는 다른 차이는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앞에 인종이나 종교의 차이는 정말 사소하게 느껴진다. 인류 문명의 8할은 남자하고 여자가 연애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나머지 2할은 그 연애의 부산물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가오’ 잡다가 영웅도 되고, 전쟁도 일으키고 한 거다.(웃음) 그러니 연애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나. 이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본다. 연애 말고는 가족이나 진로, 조직에서의 갈등에 대한 고민이 많더라.
상담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뭐 너무 뻔하지 않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 자유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해준 이야기에 수긍하더라. 인터넷에서 연재를 할 때 거의 유일하게 반론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남친을 확 뜯어 고치고 싶다는 여자였다. 그 분이 내 글을 읽고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나’라는 글을 올렸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담도 별 소용이 없다.
주로 이삼십 대의 사람들의 고민이 대부분인데. 그들의 글을 읽고 어떤 느낌을 많이 들었나?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할 내용을 내게 묻더라. 그 점이 제일 답답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자기가 누군지를 잘 모른다. 그 긴 청소년기 동안 그런 걸 할 시간이 있나? 학원이다 입시다 시달리다가 대학에 가면 취업에 시달리고, 어찌어찌 취직을 하고 나면 그때서야 고민하는 거다.
삶에는 원칙과 스타일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저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고 생각한다. 돈? 해주는 거 물론 많다. 하지만 돈이 자기 인생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건 그저 도구가 아닌가? 그래 열심히 돈 벌어서 몇 십 억 쌓아두었다고 고민 없을 것 같나? 더 허무하다. 행복하게 살자고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작 자기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겁이 많다. 남들처럼 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안다. 그런데 벼랑은 뛰어내려보기 전에는 그 높이를 알 수 없다. 천 길 낭떠러지인 줄 알았는데 무릎밖에 안 되는 언덕일 수도 있는 거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산 내가 보증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거 생각만큼 힘들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삼십 대와 사십 대가 『건투를 빈다』를 많이 샀다고 들었다.
출판사 쪽에서는 이십 대 타깃으로 책을 냈는데 의외로 삼십 대와 사십 대가 많이 샀다고 해서 나도 놀랐다. 사십 대는 자녀들에게 주려고 샀을 테고. 우리 사회 삼십 대들의 고민이 많은가 보다. 살면서 고민은 피할 수 없는데, 삼십 대들이 하는 고민을 보면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다. 사실 마흔이 넘어도 인생이라는 게 갈피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가만히 그 고민들을 바라보면 유아적인 구석이 있다.
어떤 점이 유아적으로 느껴지나?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 중에 이미 자신이 답을 알고 있으면서 나쁜 놈이 되기 싫어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기 싫어서 망설이는 사람이 많다. 누가 대신 그걸 해주길 바란다. 아니면 적어도 자기편이라도 들어주길 바란다. 예를 들어, 나는 불륜에 대해 어떤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러나 불륜을 저지르면 ?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의 몫이라고 본다. 그런데 바람을 피우면서 주위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는 식이다. 삶의 선택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바람을 피우면 당연히 주위의 비난이나 상처는 그의 몫이다. 인생에 공짜가 없다. 어떤 일을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피할 방법을 물으면 정말 돌아버리겠다. 이건 철부지 애보다 못한 짓이다. 또, 약자와 피해자인 척 하면서 위로와 동정을 즐기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노 땡큐다.
‘선택의 누적분이 곧 당신이다’라는 말을 책에 썼는데, 제일 가슴에 와 닿았다.
졸라 멋있지 않나?(웃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자기가 한 선택들을 돌아보면 된다. 선택은 곧 그 사람이다. 선택이 자기가 누군지를 결정하는 거다. 그 선택들이 몇십 개, 몇백 개가 누적된 것이 지금의 나다. 윤리와 사랑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선택 자체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진 않다. 어른이라면 사회의 규범과 윤리 금기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 않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것을 선택했다는 거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구구하게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설픈 자기 합리화나 동정을 구걸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당당하며 그 대가를 정당히 치러라.
가족에 대한 고민들을 상담하면서 ‘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이다’라고 썼는데……
우리는 사회적 안전망이 너무 취약하다 보니 가족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효도’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하지 마라. 그렇다고 이기적으로 살라는 건 아니다. 부당하게 느껴질 만큼 가족에게 시달리는 사람이 있어 하는 말이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서로의 삶이 있다. 그런데 그걸 희생하고 가족을 위해 살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자기들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다. 잘 키우겠다고 그 노력을 했는데 결국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그저 부모가 깔아놓은 레일 위만 달려가는 기차로 만들어 놨다. 그럼 부모가 평생 그 레일을 깔아 줄 수 있나? 반대로 자식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대학도 보내줘, 대학원도 보내줘, 집도 사줘, 결혼 비용도 대줘, 손주도 봐줘, 사업 자금도 보태줘. 나는 누누이 말했다. 가족끼리 서로 갖춰야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 삶에 끝없이 간섭하고,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부모에게 의지하기만 하는 거, 그건 패륜이다.
그럼 당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철저히 방목해서 키우셨다. 엄마가 유아원을 운영하느라 바쁘셔서 고등학생 때도 도시락을 안 싸주셨다. 근데 그걸 서운해 하지 않았다. 수험생이 뭐 대단한 벼슬인가 싶었다. 무엇이든 해도 괜찮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어릴 때부터 터득했다. 그렇게 키워주신 엄마에게 감사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생겨 먹은 대로 사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는가. 그건 엄청난 용기와 투쟁의 결과다. 그리고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윤리적이지 않은 자신도 결국 ‘나’의 일부분이다. 그냥 받아들여라.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잘난 나’로 가는 첫걸음이다. 자기 삶은 자기가 장악하라. 누군가를 위해 살지 말고 그 누군가가 되라고 말해 주고 싶다.
요즘은 뭐 하고 노나?
백수로 돌아왔다. 딴지일보 2.0을 기획 중이다. 책도 하루에 한 권씩 읽고 있고. 최근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YES24 블로그에 댓글(온라인 작가와의 만남 이벤트)을 다는 거다. 생애 처음으로 댓글을 달고 있다.
그전에는 댓글을 안 달았나?
PC통신부터 시작해서 거의 십사 년 넘게 온라인에서 활동 중인데 댓글을 달아본 적이 없다. 내가 쓴 글에 반박하는 댓글이 달리면 거기에 다시 반론하는 댓글을 쓰지 않는다. 나는 반박헭나 변명이 싫다. 내가 내 맘대로 글을 쓴 만큼 상대도 딱 그만큼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기에 반박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설득할 수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다. 내가 글을 못 써서 그 사람이 반박하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런 소모적인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가끔 악플도 달린다. 그런데 별로 신경 안 쓴다. 그 사람이 날 비난해도 내가 못난 게 아니니까. 난 원래 잘난 놈이다.(웃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건투를 빈다』 이벤트에서 처음으로 댓글이라는 걸 달아 본다. 그건 책을 산 사람에 대한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응답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열심히 댓글을 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가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뭔가?
스타일 있게 살아라. 스타일 있는 사람은 뭘 해도 섹시하다. 나처럼.(웃음) 언론에 나오는 내 사진이 산적 같고 삐딱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난 예민하고 부드럽고 젠틀한 사람이다. 그런 걸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한다.(큰 웃음)
언제쯤 되어야 사람은 길을 잃지 않고 제 삶을 살 수 있을까? 열 살 때는 스무 살의 자유가,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의 안정이, 서른 살 때는 마흔 살의 경륜이 삶을 이끌어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고 사는 그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고민거리가 없는 인간은 고민거리가 없는 것을 고민한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가장 끔찍한 비극으로 여긴다지만 언제고 인간은 길을 잃은 기분이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어도, 혹은 무리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길을 개척하는 이에게도 고민은 항상 있다. 그런 모든 이들에게 김어준의 책 제목을 빌려 말한다. 건투를 빈다.
그는 삐딱하고 짓궂고 웃기지만 항상 상대방의 고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성실하게 상담을 해 주었다. 그는 징징거리는 사람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똥침을 놓아야 할 때면 서슴없이 똥침을 놓는다. 정신이 번쩍 들게! 그의 상담을 읽노라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나, 나는 내 스타일대로 살고 있나, 나는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나를 끊임없이 묻게 된다. 그의 글은 은근히 위로가 된다. 다들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사는구나, 하는 안도 섞인 공감과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구나 하는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어쩌다 고민 상담에 대한 글을 쓰게 됐나?
우연이다. 술자리에서 잡지나 신문의 고민 상담 코너에 대한 불만을 퍼부었다. 너무 오만하다. 그 사람에게 고민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 사실을 이야기해 주기보다 대충 위로만 하고 끝내려고 한다. 문제의 근원과 해결방법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고민을 털어놓은 사람에 대한 예의다. 이렇게 열변을 토했는데, 앞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기자가 ‘그럼 니가 써’라고 했다. 실컷 폼 잡아놓고 안 한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게 4년이나 이어졌다. 우연찮게 시작해서 일이 커졌다.
기존 고민상담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 뭔가?
상담하는 이는 위에, 상담 받는 이는 아래에 두고 마치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무엇보다 문제 해결이 안 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대단한 자기 정화 능력, 자기 치유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상담을 굉장히 많이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해줬고,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줬다. 내가 사장으로 있을 때 여직원들도 곧잘 상담거리를 가지고 왔다. 사장과 여직원은 어떻게 보면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기가 어려운 관계 아닌가? 그런데 다들 스스럼없이 다가와 고민 상담을 해달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 왜 내게 사람들이 상담을 청하는지를 잘 몰랐는데 이번 책을 내면서 그 부분을 생각해 봤다. 나는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누가 불륜을 하고 있다고 하자, 사람들의 제일 첫 반응은 ‘이 나쁜 X’일 것이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들이대는 것이 도덕적, 윤리적 잣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내가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 것처럼 그 사람에게 하는 말도 에둘러 표현하거나 적절히 온건한 말로 포장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게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접?으로 이야기할 때 상대가 받을 상처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고민을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진 이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설픈 위로보다 상처의 고름을 확 짜내고, 소독해서 새 살이 돋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말 것, 그리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것. 이 두 가지가 내 상담의 원점 내지 원칙이 된 것 같다.
행복은 비슷하지만 불행은 제각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건투를 빈다』를 읽노라면 행복만큼이나 불행의 모습도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내가 20대 때 여행에 미쳐 살았는데 그때 깨달았다. 세상에는 남녀의 차이를 빼고는 다른 차이는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앞에 인종이나 종교의 차이는 정말 사소하게 느껴진다. 인류 문명의 8할은 남자하고 여자가 연애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나머지 2할은 그 연애의 부산물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가오’ 잡다가 영웅도 되고, 전쟁도 일으키고 한 거다.(웃음) 그러니 연애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나. 이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본다. 연애 말고는 가족이나 진로, 조직에서의 갈등에 대한 고민이 많더라.
상담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뭐 너무 뻔하지 않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 자유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해준 이야기에 수긍하더라. 인터넷에서 연재를 할 때 거의 유일하게 반론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남친을 확 뜯어 고치고 싶다는 여자였다. 그 분이 내 글을 읽고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나’라는 글을 올렸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담도 별 소용이 없다.
주로 이삼십 대의 사람들의 고민이 대부분인데. 그들의 글을 읽고 어떤 느낌을 많이 들었나?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할 내용을 내게 묻더라. 그 점이 제일 답답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자기가 누군지를 잘 모른다. 그 긴 청소년기 동안 그런 걸 할 시간이 있나? 학원이다 입시다 시달리다가 대학에 가면 취업에 시달리고, 어찌어찌 취직을 하고 나면 그때서야 고민하는 거다.
삶에는 원칙과 스타일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저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고 생각한다. 돈? 해주는 거 물론 많다. 하지만 돈이 자기 인생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건 그저 도구가 아닌가? 그래 열심히 돈 벌어서 몇 십 억 쌓아두었다고 고민 없을 것 같나? 더 허무하다. 행복하게 살자고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작 자기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겁이 많다. 남들처럼 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안다. 그런데 벼랑은 뛰어내려보기 전에는 그 높이를 알 수 없다. 천 길 낭떠러지인 줄 알았는데 무릎밖에 안 되는 언덕일 수도 있는 거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산 내가 보증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거 생각만큼 힘들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삼십 대와 사십 대가 『건투를 빈다』를 많이 샀다고 들었다.
출판사 쪽에서는 이십 대 타깃으로 책을 냈는데 의외로 삼십 대와 사십 대가 많이 샀다고 해서 나도 놀랐다. 사십 대는 자녀들에게 주려고 샀을 테고. 우리 사회 삼십 대들의 고민이 많은가 보다. 살면서 고민은 피할 수 없는데, 삼십 대들이 하는 고민을 보면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다. 사실 마흔이 넘어도 인생이라는 게 갈피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가만히 그 고민들을 바라보면 유아적인 구석이 있다.
어떤 점이 유아적으로 느껴지나?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 중에 이미 자신이 답을 알고 있으면서 나쁜 놈이 되기 싫어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기 싫어서 망설이는 사람이 많다. 누가 대신 그걸 해주길 바란다. 아니면 적어도 자기편이라도 들어주길 바란다. 예를 들어, 나는 불륜에 대해 어떤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러나 불륜을 저지르면 ?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의 몫이라고 본다. 그런데 바람을 피우면서 주위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는 식이다. 삶의 선택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바람을 피우면 당연히 주위의 비난이나 상처는 그의 몫이다. 인생에 공짜가 없다. 어떤 일을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피할 방법을 물으면 정말 돌아버리겠다. 이건 철부지 애보다 못한 짓이다. 또, 약자와 피해자인 척 하면서 위로와 동정을 즐기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노 땡큐다.
‘선택의 누적분이 곧 당신이다’라는 말을 책에 썼는데, 제일 가슴에 와 닿았다.
졸라 멋있지 않나?(웃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자기가 한 선택들을 돌아보면 된다. 선택은 곧 그 사람이다. 선택이 자기가 누군지를 결정하는 거다. 그 선택들이 몇십 개, 몇백 개가 누적된 것이 지금의 나다. 윤리와 사랑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선택 자체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진 않다. 어른이라면 사회의 규범과 윤리 금기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 않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것을 선택했다는 거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구구하게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설픈 자기 합리화나 동정을 구걸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당당하며 그 대가를 정당히 치러라.
가족에 대한 고민들을 상담하면서 ‘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이다’라고 썼는데……
우리는 사회적 안전망이 너무 취약하다 보니 가족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효도’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하지 마라. 그렇다고 이기적으로 살라는 건 아니다. 부당하게 느껴질 만큼 가족에게 시달리는 사람이 있어 하는 말이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서로의 삶이 있다. 그런데 그걸 희생하고 가족을 위해 살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자기들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다. 잘 키우겠다고 그 노력을 했는데 결국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그저 부모가 깔아놓은 레일 위만 달려가는 기차로 만들어 놨다. 그럼 부모가 평생 그 레일을 깔아 줄 수 있나? 반대로 자식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대학도 보내줘, 대학원도 보내줘, 집도 사줘, 결혼 비용도 대줘, 손주도 봐줘, 사업 자금도 보태줘. 나는 누누이 말했다. 가족끼리 서로 갖춰야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 삶에 끝없이 간섭하고,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부모에게 의지하기만 하는 거, 그건 패륜이다.
그럼 당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철저히 방목해서 키우셨다. 엄마가 유아원을 운영하느라 바쁘셔서 고등학생 때도 도시락을 안 싸주셨다. 근데 그걸 서운해 하지 않았다. 수험생이 뭐 대단한 벼슬인가 싶었다. 무엇이든 해도 괜찮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어릴 때부터 터득했다. 그렇게 키워주신 엄마에게 감사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생겨 먹은 대로 사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는가. 그건 엄청난 용기와 투쟁의 결과다. 그리고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윤리적이지 않은 자신도 결국 ‘나’의 일부분이다. 그냥 받아들여라.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잘난 나’로 가는 첫걸음이다. 자기 삶은 자기가 장악하라. 누군가를 위해 살지 말고 그 누군가가 되라고 말해 주고 싶다.
요즘은 뭐 하고 노나?
백수로 돌아왔다. 딴지일보 2.0을 기획 중이다. 책도 하루에 한 권씩 읽고 있고. 최근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YES24 블로그에 댓글(온라인 작가와의 만남 이벤트)을 다는 거다. 생애 처음으로 댓글을 달고 있다.
그전에는 댓글을 안 달았나?
PC통신부터 시작해서 거의 십사 년 넘게 온라인에서 활동 중인데 댓글을 달아본 적이 없다. 내가 쓴 글에 반박하는 댓글이 달리면 거기에 다시 반론하는 댓글을 쓰지 않는다. 나는 반박헭나 변명이 싫다. 내가 내 맘대로 글을 쓴 만큼 상대도 딱 그만큼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기에 반박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설득할 수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다. 내가 글을 못 써서 그 사람이 반박하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런 소모적인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가끔 악플도 달린다. 그런데 별로 신경 안 쓴다. 그 사람이 날 비난해도 내가 못난 게 아니니까. 난 원래 잘난 놈이다.(웃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건투를 빈다』 이벤트에서 처음으로 댓글이라는 걸 달아 본다. 그건 책을 산 사람에 대한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응답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열심히 댓글을 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가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뭔가?
스타일 있게 살아라. 스타일 있는 사람은 뭘 해도 섹시하다. 나처럼.(웃음) 언론에 나오는 내 사진이 산적 같고 삐딱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난 예민하고 부드럽고 젠틀한 사람이다. 그런 걸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한다.(큰 웃음)
언제쯤 되어야 사람은 길을 잃지 않고 제 삶을 살 수 있을까? 열 살 때는 스무 살의 자유가,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의 안정이, 서른 살 때는 마흔 살의 경륜이 삶을 이끌어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고 사는 그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고민거리가 없는 인간은 고민거리가 없는 것을 고민한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가장 끔찍한 비극으로 여긴다지만 언제고 인간은 길을 잃은 기분이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어도, 혹은 무리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길을 개척하는 이에게도 고민은 항상 있다. 그런 모든 이들에게 김어준의 책 제목을 빌려 말한다. 건투를 빈다.
1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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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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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7845
2014.02.28
예스 24에 컴플레인 메세지 보냈는데 답도 없네요...ㅎㅎㅎ
저는 이제 블랙 클라이언트 ^^ 괜찮아요..남편 아이디 이기 때문에...
암튼...그럴지라도 저는 김어준 총수 응원합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깊이만큼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
팡팡
2012.12.17
emin76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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