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니클과 인터뷰를? - 미 대륙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어 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동안 비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렸다. 게다가 밤에는 안 오고, 낮에만 주구장창 쏟아진다. 아, 매정한 하늘이시여. 우리가 이곳에서 활동한 것이라곤 샌프란시스코의 피셔먼스 워프에서 첫날 거리 홍보를 한 것뿐이다.
2008.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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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어 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동안 비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렸다. 게다가 밤에는 안 오고, 낮에만 주구장창 쏟아진다. 아, 매정한 하늘이시여. 우리가 이곳에서 활동한 것이라곤 샌프란시스코의 피셔먼스 워프에서 첫날 거리 홍보를 한 것뿐이다. 현지인들도 샌프란시스코에 비가 이렇게 연속적으로 내리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 한다. 흐릿한 하늘, 축축한 도로, 안개 속 어렴풋이 보이는 금문교의 풍경, 모두가 비를 피하며 다니는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은 참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다.
오늘은 그나마 빗줄기가 약하다. 지끈거리는 머리도 식힐 겸 잠깐 산책을 나왔다. 전봇대에는 개 세 마리가 묶여서 처량한 눈으로 나를 보고, 길바닥에는 ‘No Bike or Skate’라는 글자가 지워져서 ‘or Skate’만 보였다. 가판대 앞에는 한 중국인이 서서 “War without End”라고 중얼거렸다. 다가가 “무슨 말이죠?”하고 묻자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누군가 죽어간다는 거겠지요”라고 답하고는 유유히 걸어가 버린다. 아마 한가한 사람이거나 외로운 사람인가 보다.
어찌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간이 견디기 힘들다. 목적을 잃고 허공에 붕 떠버린 느낌이다. 며칠 간 인터넷으로 일기예보를 주시했지만 이곳의 날씨는 앞으로도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결국 일정을 앞당겨 다음 주 월요일에 이곳을 떠나기로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그때였다. 갑자기 무지개가 떠올랐다. 사진기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풀 사이즈의 무지개였다. 신기한 것은 아직도 비는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흐린 하늘에서도 해사하고 맑은 반원을 그려 낸 저 무지개가 우리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길.
“여보세요?”
전화기를 통해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찰스 버레스Charles Burress,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자입니다. 독도 라이더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당신들을 인터뷰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정말 그 무지개가 행운의 전조였던 걸까. 나는 기뻐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태연한 척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답했다. 내친 김에 당장 인터뷰 일시까지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영어로 오가는 범상치 않은 전화 통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친구들이 당장 내게 달려들었다.
“뭐야? 누구야?”
“그게, 《크로니클》에서…….”
“《크로니클》? 무슨…… 설마 그 신문사 《크로니클》?”
“설마 그 신문사 《크로니클》에서 우리를 인터뷰하겠대.”
“진짜? 거짓말이지? 거기서 우리를 어떻게 알고 취재를 한대?”
“몰라. 아무튼 진짜 《크로니클》 기자야.”
우리는 잠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곧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다.
독도라이더의 기본 활동은 3가지이다. 첫째, 세계 유수 대학 세미나. 둘째, 길거리 홍보 활동. 셋째, 언론 홍보 활동. 이 세 가지 중 지금까지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 언론 홍보 활동이었다. 한인 사회에서는 여러 언론사들이 우리를 수차례 취재했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한 번도 우리를 취재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버클리 신문》 《오클랜드 신문》 같은 조금 작은 지역 신문들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주류 언론 쪽을 공략하며 인터뷰 요청을 하기로 방향을 잡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뉴욕 타임즈》 《LA 타임즈》 수준의 권위를 자랑하는 샌프란시스코의 《크로니클》이 ‘먼저’ 인터뷰 요청을 해온 것이다.
인터뷰 시간은 금요일 오전 11시, 장소는 버클리 대학 근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Oxford St에 있는 스타벅스였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우리의 영어가 부족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는 불안했다. 생각 끝에 대뜸 2002년 버클리에서 계절 학기를 들을 때 만났던 주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영아, 다섯 남자랑 데이트하자. 금요일 11시까지 스타벅스로 와. 알겠지?”
4년 만에 처음 전화하는 주제에 매일매일 보는 친구마냥 친한 척을 하며 거절할 틈도 안 주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주영이에게 참 첹안하다. 그래도 그때는 혹여 주영이가 거절이라도 하면, 다른 믿을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뻔뻔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착한 주영이는 군말 없이 약속 장소에 나와 주었다. 찰스 기자 역시 똑같은 모터사이클 다섯 대를 나란히 끌고 등장한 우리를 바로 알아보고는 인사했다. 그는 우리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다며 원하는 것을 주문하라고 말했고, 순간 커피보다는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우유를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유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샌드위치도 시켜도 될까요?”
갑자기 어디서 그런 가상한 용기가 났던 것인지 한국에서라면 절대 민망해서 못했을 말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웃으며 자기도 젊은 시절 여행할 때는 돈이 없어 늘 배가 고팠다며 두 개를 먹어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주문이 끝나고 가장 궁금했던 사실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우리를 알게 되셨나요?” 그는 《코리아 헤럴드》에서 권지영 기자가 쓴 기사를 읽고서 연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다같이 “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한국의 신문이 외신 기자들이 읽을 정도로 성장을 했다니.
인터뷰는 아주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이전까지 한인 언론과의 인터뷰가 ‘독도 라이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 인터뷰는 ‘독도’를 중심이었다. 한국 기자들은 기본적으로 독도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는 반면, 이분은 한일 간에 독도가 얼마나 뜨거운 감자로 오르내리는지 알지 못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영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전 샌드위치 사건 이후 이상하게 배포가 커진 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을 일일이 고심하여 말하기보다는 그냥 가슴에 있는 말들을 흘러나오는 대로 뱉어 냈다. 어쩌면 진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눈빛에 마음이 편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말 훌륭한 기자였다. 지금까지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면 자신들이 더 많은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기사에 우리의 말보다 기자의 생각이 더 많이 포함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찰스 기자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우리의 말에 집중하며 그대로 받아 적어 내려가기만 했다. 1시간가량의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어느새 큼지막한 수첩 10페이지를 써냈다.
그는 버클리대학 앞에서 사물놀이를 하면서 독도 홍보활동을 하는 우리의 모습을 찍고 싶어 했으나 점심 사이에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신 모터사이클을 타는 모습을 찍기로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포토샵 좀 해 주세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사진 기자는 큰 소리로 웃으며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과연 다음 날 우리의 모습이 신문에 크게 실리게 되었는데, 헬멧을 쓰고 있는 사진이라 그가 배려를 해준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어 준 주영이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미국식 전통 레스토랑에 갔다. 약속한 대로 나름 다섯 남자와의 데이트였다. 내가 슬쩍 분위기를 띄우며 “한국말을 아직도 잘하네. 미국에서 1년 어학연수만 해도 말 흘리거나 ‘웁스’ 같은 말 이 막 튀어나오는 애들 많은데”라고 하자 주영이는 깔깔깔 웃었다. 버클리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어엿한 회사원인 그녀는 영어로 말할 때 발음을 굴리려고 애쓰면서 말을 얼버무리기보다는 가능한 또박또박 말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뜻밖의 칭찬.
“오전에 인터뷰할 때 말 잘하더라. 진심이 느껴졌어.”
나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건 발음이 좋더라, 유창하더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사실 모든 언어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게 목적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샌프란시스코의 우울한 하늘까지 뚫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오늘은 그나마 빗줄기가 약하다. 지끈거리는 머리도 식힐 겸 잠깐 산책을 나왔다. 전봇대에는 개 세 마리가 묶여서 처량한 눈으로 나를 보고, 길바닥에는 ‘No Bike or Skate’라는 글자가 지워져서 ‘or Skate’만 보였다. 가판대 앞에는 한 중국인이 서서 “War without End”라고 중얼거렸다. 다가가 “무슨 말이죠?”하고 묻자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누군가 죽어간다는 거겠지요”라고 답하고는 유유히 걸어가 버린다. 아마 한가한 사람이거나 외로운 사람인가 보다.
어찌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간이 견디기 힘들다. 목적을 잃고 허공에 붕 떠버린 느낌이다. 며칠 간 인터넷으로 일기예보를 주시했지만 이곳의 날씨는 앞으로도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결국 일정을 앞당겨 다음 주 월요일에 이곳을 떠나기로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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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갑자기 무지개가 떠올랐다. 사진기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풀 사이즈의 무지개였다. 신기한 것은 아직도 비는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흐린 하늘에서도 해사하고 맑은 반원을 그려 낸 저 무지개가 우리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길.
“여보세요?”
전화기를 통해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찰스 버레스Charles Burress,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자입니다. 독도 라이더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당신들을 인터뷰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정말 그 무지개가 행운의 전조였던 걸까. 나는 기뻐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태연한 척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답했다. 내친 김에 당장 인터뷰 일시까지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영어로 오가는 범상치 않은 전화 통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친구들이 당장 내게 달려들었다.
“뭐야? 누구야?”
“그게, 《크로니클》에서…….”
“《크로니클》? 무슨…… 설마 그 신문사 《크로니클》?”
“설마 그 신문사 《크로니클》에서 우리를 인터뷰하겠대.”
“진짜? 거짓말이지? 거기서 우리를 어떻게 알고 취재를 한대?”
“몰라. 아무튼 진짜 《크로니클》 기자야.”
우리는 잠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곧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다.
독도라이더의 기본 활동은 3가지이다. 첫째, 세계 유수 대학 세미나. 둘째, 길거리 홍보 활동. 셋째, 언론 홍보 활동. 이 세 가지 중 지금까지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 언론 홍보 활동이었다. 한인 사회에서는 여러 언론사들이 우리를 수차례 취재했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한 번도 우리를 취재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버클리 신문》 《오클랜드 신문》 같은 조금 작은 지역 신문들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주류 언론 쪽을 공략하며 인터뷰 요청을 하기로 방향을 잡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뉴욕 타임즈》 《LA 타임즈》 수준의 권위를 자랑하는 샌프란시스코의 《크로니클》이 ‘먼저’ 인터뷰 요청을 해온 것이다.
인터뷰 시간은 금요일 오전 11시, 장소는 버클리 대학 근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Oxford St에 있는 스타벅스였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우리의 영어가 부족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는 불안했다. 생각 끝에 대뜸 2002년 버클리에서 계절 학기를 들을 때 만났던 주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영아, 다섯 남자랑 데이트하자. 금요일 11시까지 스타벅스로 와. 알겠지?”
4년 만에 처음 전화하는 주제에 매일매일 보는 친구마냥 친한 척을 하며 거절할 틈도 안 주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주영이에게 참 첹안하다. 그래도 그때는 혹여 주영이가 거절이라도 하면, 다른 믿을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뻔뻔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착한 주영이는 군말 없이 약속 장소에 나와 주었다. 찰스 기자 역시 똑같은 모터사이클 다섯 대를 나란히 끌고 등장한 우리를 바로 알아보고는 인사했다. 그는 우리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다며 원하는 것을 주문하라고 말했고, 순간 커피보다는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우유를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유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샌드위치도 시켜도 될까요?”
갑자기 어디서 그런 가상한 용기가 났던 것인지 한국에서라면 절대 민망해서 못했을 말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웃으며 자기도 젊은 시절 여행할 때는 돈이 없어 늘 배가 고팠다며 두 개를 먹어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주문이 끝나고 가장 궁금했던 사실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우리를 알게 되셨나요?” 그는 《코리아 헤럴드》에서 권지영 기자가 쓴 기사를 읽고서 연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다같이 “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한국의 신문이 외신 기자들이 읽을 정도로 성장을 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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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아주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이전까지 한인 언론과의 인터뷰가 ‘독도 라이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 인터뷰는 ‘독도’를 중심이었다. 한국 기자들은 기본적으로 독도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는 반면, 이분은 한일 간에 독도가 얼마나 뜨거운 감자로 오르내리는지 알지 못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영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전 샌드위치 사건 이후 이상하게 배포가 커진 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을 일일이 고심하여 말하기보다는 그냥 가슴에 있는 말들을 흘러나오는 대로 뱉어 냈다. 어쩌면 진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눈빛에 마음이 편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말 훌륭한 기자였다. 지금까지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면 자신들이 더 많은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기사에 우리의 말보다 기자의 생각이 더 많이 포함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찰스 기자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우리의 말에 집중하며 그대로 받아 적어 내려가기만 했다. 1시간가량의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어느새 큼지막한 수첩 10페이지를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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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버클리대학 앞에서 사물놀이를 하면서 독도 홍보활동을 하는 우리의 모습을 찍고 싶어 했으나 점심 사이에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신 모터사이클을 타는 모습을 찍기로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포토샵 좀 해 주세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사진 기자는 큰 소리로 웃으며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과연 다음 날 우리의 모습이 신문에 크게 실리게 되었는데, 헬멧을 쓰고 있는 사진이라 그가 배려를 해준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어 준 주영이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미국식 전통 레스토랑에 갔다. 약속한 대로 나름 다섯 남자와의 데이트였다. 내가 슬쩍 분위기를 띄우며 “한국말을 아직도 잘하네. 미국에서 1년 어학연수만 해도 말 흘리거나 ‘웁스’ 같은 말 이 막 튀어나오는 애들 많은데”라고 하자 주영이는 깔깔깔 웃었다. 버클리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어엿한 회사원인 그녀는 영어로 말할 때 발음을 굴리려고 애쓰면서 말을 얼버무리기보다는 가능한 또박또박 말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뜻밖의 칭찬.
“오전에 인터뷰할 때 말 잘하더라. 진심이 느껴졌어.”
나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건 발음이 좋더라, 유창하더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사실 모든 언어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게 목적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샌프란시스코의 우울한 하늘까지 뚫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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