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사랑한 여자 소쌍
봉씨는 처음에는 소쌍에게 장난삼아 몸을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가슴을 만지기도 했다. 소쌍은 세자빈에게 지나친 장난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청했다. 그러나 세자빈은 소쌍의 반응에 더 재미를 느꼈다.
200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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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쌍召雙은 약간 남자다운 용모를 지녔다. 그리 예쁘거나 귀염성 있는 얼굴도 아니었다. 어쩌다 옆얼굴을 보면 턱 선이 매력적인 정도였다. 하지만 일찍부터 궁궐에 들어와 생활해온 덕에 몸에 궁중 법도가 익어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매우 이른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여기저기 모르는 데가 없었다. 세자궁에 근무한 지도 오래돼 새로운 세자빈인 봉씨奉氏에게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단지 낯선 궁궐을 익히기 위해 봉씨가 소쌍을 자주 찾았다.
소쌍은 지엄한 세자빈이 자신을 찾아주자 늘 고마웠다. 세자빈 봉씨도 점차 소쌍에게 의지해갔다. 세자빈은 늘 혼자였다. 세자는 봉씨에게 관심이 없었다. 봉씨는 처음에는 소쌍에게 장난삼아 몸을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가슴을 만지기도 했다. 소쌍은 세자빈에게 지나친 장난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청했다. 그러나 세자빈은 소쌍의 반응에 더 재미를 느꼈다. 오히려 거부하는 소쌍을 보며 짜릿함까지 느꼈다. 봉씨는 찾아오지 않는 세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쌍을 약 올리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봉씨는 소쌍이 곁에 없으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소쌍은 무서웠다. 세자빈의 스킨십이 나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자빈은 소쌍을 남자처럼 생각해 온몸을 희롱했다.
세자빈은 소쌍을 사랑해 한시도 떠나지 못하게 했다. 500명이 넘는 궁녀들이 머무는 궁궐에 곧 소문이 퍼졌다. 궁녀들은 “세자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한다.”고 수군거렸다. 이 소문은 곧 세자에게도 알려졌다. 소쌍이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다가와 갑자기 물었다.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 소쌍은 얼떨결에 그렇다고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세자의 표정은 파래졌다.
평소 세자빈은 소쌍에게 사랑 고백을 자주했다. 세자빈은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며 소쌍이 잠시라도 곁을 떠나면 원망하고 성을 내었다. 세자빈의 집요한 사랑에 소쌍은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다르게 하므로 매우 무섭다” 하고 털어놓았다.
소쌍은 성격이 서글서글해 세자빈뿐만 아니라 주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권승휘權承徽의 사비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해 함께 자기도 했다. 봉씨는 소쌍을 질투해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르게 해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했다. 한편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했다. 그런데 소쌍과 동침한 이후로는 여종을 시키지 않고 직접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다. 또 몰래 그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시아버지인 세종에게도 알려졌다. 세종은 왕비와 함께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었다. 소쌍은 부들부들 떨면서 아뢰었다.
“지난해 동짓날에 세자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세자빈께서 같이 잘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소인은 거절하였으나 세자빈께서 윽박질러 할 수 없이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사옵니다. 그런데 세자빈이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였습니다. 이후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궁궐이라는 지엄한 공간에서 세자빈이 이뤄질 수 없는 동성 간의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세종도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세종은 시녀와 종비從婢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동침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동성애를 하는 자는 곤장 70대를 내리게 하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곤장 100대를 더 집행하기도 했다. 동성애는 형벌이 강화되자 약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세종은 뜻밖에도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애자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즉시 세자빈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세자빈은 단지 놀이가 지나칠 뿐이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은 아니라고 고했다. 소쌍은 자신과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다른 노비인 단지와 서로 사랑해 밤에도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키스를 한다며,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항변했다.
이러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봉씨는 몇몇 증거에 발목 잡혀 결국 처벌을 받게 되었다. 봉씨는 소쌍과 관계를 가지면서 약간 변태적인 성향도 보였다. 자신이 소쌍과 즐기는 사이 다른 여종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했다. 몇몇 여종들은 몰래 벽 틈으로 들여다봤던 사실을 세종에게 아뢰었다.
세종은 어이가 없었다. 세자빈을 간택할 때 그렇게 신중을 기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자신을 책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문종이 되는 세자는 여자 복이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남자를 지나치게 밝혔다. 1444년(세종 9) 세종은 세자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하지만 왕실의 후사를 잇는 일이 중대하므로 빨리 배필을 맞이할 생각을 가졌다. 김구덕金九德의 손녀딸인 김씨를 간택해 세자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세자는 학문을 좋아할 뿐 여자에 별 관심이 없었다. 세자빈은 아들을 낳아야 자신의 입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세자의 관심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세종은 대대로 명가의 딸인 김씨를 간택해서 세자빈을 삼았다. 명문 출신이지만 남편의 사랑이 그리운 김씨는 사랑을 얻기 위해 각종 비책을 사용했다. 세종이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궁인을 보내어 심문했다. 김씨는 시녀 호초胡椒에게 배웠다고 고했다. 세종은 바로 호초를 불렀다. 호초는 고해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겨울 세자빈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자 계속 강요해 어쩔 수 없이 방법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가지고 술에 타서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자빈은 즉시 효동孝童?덕금德金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와 한쪽을 베어 그 조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워 먹지는 못했습니다.”
세자빈이 다른 방법을 묻자 호초는 더 자극적인 방법을 가르쳐줬다.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습니다.”
세자빈이 이렇게도 무리수를 두어서 세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 것은 자신의 가문을 일으킬 아들을 낳기 위해서였다. 결국 1429년(세종 11) 7월 20일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빈시켰다.
김씨가 폐빈된 그해 봉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봉씨는 봉여奉礪의 딸이었다. 조선시대의 국혼은 대개 왕비와 세자빈을 뽑는 것을 말하는데, 그 대상은 사실상 사대부 가문 중에서도 당대의 명문 가문으로 한정됐다. 그중에서 열다섯 살 안팎의 딸을 데리고 있는 가문을 헤아려보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왕비를 간택할 때는 금혼령이 전국에 반포돼 처녀들의 결혼을 일시적으로 금지했다. 금혼령의 대상은 사대부 집안의 규수로 나이 제한은 확실치 않으나 대략 13~17세 정도의 처녀였다. 나라에서는 금혼령을 내리고 가례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해 간택과 혼례를 주관했다. 금혼령을 내린 후 명문 가문의 규수 가운데 부덕과 집안, 미모, 세 가지를 갖춘 처녀를 최종적으로 한 명 뽑았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뤄졌으며 최종 단계인 삼간택에는 세 명이 후보로 올라간다. 세 명 중 한 명이 왕비나 세자빈으로 낙점되면 나머지 둘은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혼자 살거나 후궁이 되기도 했다. 최종 간택에서 낙점받은 처녀는 그날부터 별궁에 들어와 일정 기간 동안 궁중 예절과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예의범절 교육을 마치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왕비나 세자빈이 되었다. 혼례가 끝난 후 왕비의 친가에 각종 은전이 내려지는데,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에 봉해지고 어머니는 부부인으로 봉해졌으며 왕비의 본향은 행정 단위를 승격시켜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봉씨는 뜻밖에도 세자와 금슬이 좋지 않았다. 세종이 왕비와 함께 세자에게 세자빈에게 따뜻하게 대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침실의 일까지 부모가 간섭할 순 없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도 자식이 없었다. 세종은 후사를 걱정해 사대부가의 딸들로 세 명의 후궁을 뽑아 승휘承徽(세자궁에 딸린 종사품 내명부의 품계로 여관女官에게 주었다.)로 삼았다.
봉씨는 평소에도 시기심과 질투심이 심했다. 세 명의 승휘를 뽑은 뒤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하자 원망과 앙심을 품었다. 드디어 권승휘가 임신을 하자 봉씨는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항상 궁인에게 “권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는 쫓겨나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 봉씨의 울음소리가 궁궐 먼 곳까지 들렸다. 세종이 왕비와 같이 봉씨를 불러서 타일렀다. 세자빈이 되어 아들을 낳지 못했으나 다행히도 권승휘가 아들을 두었다. 이는 인지상정 기뻐할 일이지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했으나 봉씨는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이후 봉씨는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세종의 인심을 더 잃어버렸다. 한 가지는 권승휘가 임신한 후 봉씨도 아이를 가졌다고 밝힌 것이다. 세종을 비롯한 궁중의 많은 어른이 모두 기뻐했다. 세종은 봉씨가 혹 놀라 아이가 잘못될까 염려해 중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중궁에서 거처한 지 한 달 남짓 되자 봉씨가 “낙태를 하였다”고 말했다. 봉씨는 자기 뱃속에서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했다. 세종은 늙은 궁궐 여종으로 하여금 가서 이를 보게 했다. 그러나 이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신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봉씨는 늘 외로웠다. 여자로서 즐거움을 알아버린 상황에서 남편이 늘 곁에 없었다. 오히려 세자가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해주지 못하자 궁궐 여종인 소쌍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된다. 봉씨가 처음부터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남편의 무심함이 그녀로 하여금 계집종과 관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봉씨는 세자를 매우 사랑했다. 당시 세자의 유모가 죽어 고미古未라는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궁중의 일을 맡게 했다. 봉씨는 밤마다 고미를 불러 세자를 불러오도록 했다. 그러나 세자는 봉씨를 피해다녔다. 한 번은 세자가 봉씨가 머무는 궁궐에 들어와 뜰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봉씨는 “저분이 왜 안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공연히 밖에서 걷고 있을까?”하면서 세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세자는 봉씨를 찾지 않았다.
궁궐은 너무나 조용하고 가라앉아 있어 봉씨는 힘들었다. 그 힘겨움을 술로 해결했다. 그녀는 항상 방에 술을 준비해두고 큰 그릇으로 연거푸 마셔 자주 취했다. 취기가 들면 뜰에 산책을 나갔다. 마실 술이 부족하면 사사로이 본가에서 가져왔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시렁에 두고 혼자 꺼내 먹곤 해 부족한 사랑을 달랬다.
봉씨는 세자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집착을 드러냈다. 세자가 며칠 동안 왕래했다가 오지 않자 노래를 지어 여종에게 부르게 했는데, 대개는 세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봉씨는 여러 번 투기 때문에 몸소 궁인을 구타해 혹 어떤 때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기도 했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픈 여인의 집착은 무서웠다.
술과 음식으로도 해소되지 못했던 외로움은 결국 봉씨로 하여금 여자를 탐하게 만들었다. 여종과 세자빈의 동성애는 조정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세종은 투기가 심하고 동성애까지 벌이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첫 며느리를 폐빈시킨 아픔을 또다시 겪어야 했다. 세종은 “총부O婦(적장자의 아내)의 직책은 가볍지 않다. 그런데 봉씨가 여러 가지 덕을 잃어버리고서야 어찌 종사를 받들고 한 나라의 국모가 되겠는가” 하면서 봉씨를 폐출시키고자 했다.
또 다른 사건은 세자가 종학宗學(조선시대 종실 교육에 관한 임무를 담당하던 관청)에 옮겨 거쳐할 때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외간 사람을 엿보았던 일이다. 또 항상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외에도 봉씨의 잘못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녀는 환관들의 주머니와 자루를 손수 만들었다. 이로 인해 세자의 생신에 바쳐야 할 물건들을 만들 여가가 없어지자, 지난해 생신에는 전에 바쳤던 오래된 물건들을 새로 마련한 것처럼 속이고 바쳤다. 또 궁중에 쓰는 물건과 음식물을 어머니의 집에 보내자고 청했다. 세자는 먹다 남은 음식물을 그 어버이에게 보내므로 이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세자에게 절대로 아뢰지 말도록 하고 보냈다. 이미 마음이 멀어진 세자와 그의 아버지는 며느리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종은 연이은 며느리들의 일탈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종은 황희?우의정 노한盧?찬성 신개申槪를 불러서 봉씨 문제를 의논했다. 모두 세자빈을 폐하도록 요구했다. 결국 세종도 봉씨를 폐하도록 명했다. 또한 세종은 봉씨를 폐하는 이유를 교서에 자세하게 기재하지 못하도록 요청했다. 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한 일은 매우 추잡했기 때문이다. 다만 봉씨가 질투가 심하고 아들이 없으며 노래를 부른 등의 몇 가지 범죄행위를 중심으로 교지를 지어 바치게 했다. 결국 봉씨는 평민이 됐고 소쌍은 죽임을 당했다. 그녀가 원치 않았지만,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조선이 버린 여인들>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쌍은 지엄한 세자빈이 자신을 찾아주자 늘 고마웠다. 세자빈 봉씨도 점차 소쌍에게 의지해갔다. 세자빈은 늘 혼자였다. 세자는 봉씨에게 관심이 없었다. 봉씨는 처음에는 소쌍에게 장난삼아 몸을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가슴을 만지기도 했다. 소쌍은 세자빈에게 지나친 장난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청했다. 그러나 세자빈은 소쌍의 반응에 더 재미를 느꼈다. 오히려 거부하는 소쌍을 보며 짜릿함까지 느꼈다. 봉씨는 찾아오지 않는 세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쌍을 약 올리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봉씨는 소쌍이 곁에 없으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소쌍은 무서웠다. 세자빈의 스킨십이 나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자빈은 소쌍을 남자처럼 생각해 온몸을 희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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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은 소쌍을 사랑해 한시도 떠나지 못하게 했다. 500명이 넘는 궁녀들이 머무는 궁궐에 곧 소문이 퍼졌다. 궁녀들은 “세자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한다.”고 수군거렸다. 이 소문은 곧 세자에게도 알려졌다. 소쌍이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다가와 갑자기 물었다.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 소쌍은 얼떨결에 그렇다고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세자의 표정은 파래졌다.
평소 세자빈은 소쌍에게 사랑 고백을 자주했다. 세자빈은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며 소쌍이 잠시라도 곁을 떠나면 원망하고 성을 내었다. 세자빈의 집요한 사랑에 소쌍은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다르게 하므로 매우 무섭다” 하고 털어놓았다.
소쌍은 성격이 서글서글해 세자빈뿐만 아니라 주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권승휘權承徽의 사비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해 함께 자기도 했다. 봉씨는 소쌍을 질투해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르게 해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했다. 한편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했다. 그런데 소쌍과 동침한 이후로는 여종을 시키지 않고 직접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다. 또 몰래 그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시아버지인 세종에게도 알려졌다. 세종은 왕비와 함께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었다. 소쌍은 부들부들 떨면서 아뢰었다.
“지난해 동짓날에 세자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세자빈께서 같이 잘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소인은 거절하였으나 세자빈께서 윽박질러 할 수 없이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사옵니다. 그런데 세자빈이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였습니다. 이후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궁궐이라는 지엄한 공간에서 세자빈이 이뤄질 수 없는 동성 간의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세종도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세종은 시녀와 종비從婢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동침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동성애를 하는 자는 곤장 70대를 내리게 하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곤장 100대를 더 집행하기도 했다. 동성애는 형벌이 강화되자 약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세종은 뜻밖에도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애자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즉시 세자빈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세자빈은 단지 놀이가 지나칠 뿐이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은 아니라고 고했다. 소쌍은 자신과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다른 노비인 단지와 서로 사랑해 밤에도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키스를 한다며,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항변했다.
이러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봉씨는 몇몇 증거에 발목 잡혀 결국 처벌을 받게 되었다. 봉씨는 소쌍과 관계를 가지면서 약간 변태적인 성향도 보였다. 자신이 소쌍과 즐기는 사이 다른 여종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했다. 몇몇 여종들은 몰래 벽 틈으로 들여다봤던 사실을 세종에게 아뢰었다.
세종은 어이가 없었다. 세자빈을 간택할 때 그렇게 신중을 기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자신을 책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문종이 되는 세자는 여자 복이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남자를 지나치게 밝혔다. 1444년(세종 9) 세종은 세자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하지만 왕실의 후사를 잇는 일이 중대하므로 빨리 배필을 맞이할 생각을 가졌다. 김구덕金九德의 손녀딸인 김씨를 간택해 세자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세자는 학문을 좋아할 뿐 여자에 별 관심이 없었다. 세자빈은 아들을 낳아야 자신의 입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세자의 관심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
세종은 대대로 명가의 딸인 김씨를 간택해서 세자빈을 삼았다. 명문 출신이지만 남편의 사랑이 그리운 김씨는 사랑을 얻기 위해 각종 비책을 사용했다. 세종이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궁인을 보내어 심문했다. 김씨는 시녀 호초胡椒에게 배웠다고 고했다. 세종은 바로 호초를 불렀다. 호초는 고해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겨울 세자빈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자 계속 강요해 어쩔 수 없이 방법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가지고 술에 타서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자빈은 즉시 효동孝童?덕금德金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와 한쪽을 베어 그 조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워 먹지는 못했습니다.”
세자빈이 다른 방법을 묻자 호초는 더 자극적인 방법을 가르쳐줬다.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습니다.”
세자빈이 이렇게도 무리수를 두어서 세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 것은 자신의 가문을 일으킬 아들을 낳기 위해서였다. 결국 1429년(세종 11) 7월 20일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빈시켰다.
김씨가 폐빈된 그해 봉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봉씨는 봉여奉礪의 딸이었다. 조선시대의 국혼은 대개 왕비와 세자빈을 뽑는 것을 말하는데, 그 대상은 사실상 사대부 가문 중에서도 당대의 명문 가문으로 한정됐다. 그중에서 열다섯 살 안팎의 딸을 데리고 있는 가문을 헤아려보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왕비를 간택할 때는 금혼령이 전국에 반포돼 처녀들의 결혼을 일시적으로 금지했다. 금혼령의 대상은 사대부 집안의 규수로 나이 제한은 확실치 않으나 대략 13~17세 정도의 처녀였다. 나라에서는 금혼령을 내리고 가례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해 간택과 혼례를 주관했다. 금혼령을 내린 후 명문 가문의 규수 가운데 부덕과 집안, 미모, 세 가지를 갖춘 처녀를 최종적으로 한 명 뽑았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뤄졌으며 최종 단계인 삼간택에는 세 명이 후보로 올라간다. 세 명 중 한 명이 왕비나 세자빈으로 낙점되면 나머지 둘은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혼자 살거나 후궁이 되기도 했다. 최종 간택에서 낙점받은 처녀는 그날부터 별궁에 들어와 일정 기간 동안 궁중 예절과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예의범절 교육을 마치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왕비나 세자빈이 되었다. 혼례가 끝난 후 왕비의 친가에 각종 은전이 내려지는데,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에 봉해지고 어머니는 부부인으로 봉해졌으며 왕비의 본향은 행정 단위를 승격시켜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봉씨는 뜻밖에도 세자와 금슬이 좋지 않았다. 세종이 왕비와 함께 세자에게 세자빈에게 따뜻하게 대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침실의 일까지 부모가 간섭할 순 없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도 자식이 없었다. 세종은 후사를 걱정해 사대부가의 딸들로 세 명의 후궁을 뽑아 승휘承徽(세자궁에 딸린 종사품 내명부의 품계로 여관女官에게 주었다.)로 삼았다.
봉씨는 평소에도 시기심과 질투심이 심했다. 세 명의 승휘를 뽑은 뒤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하자 원망과 앙심을 품었다. 드디어 권승휘가 임신을 하자 봉씨는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항상 궁인에게 “권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는 쫓겨나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 봉씨의 울음소리가 궁궐 먼 곳까지 들렸다. 세종이 왕비와 같이 봉씨를 불러서 타일렀다. 세자빈이 되어 아들을 낳지 못했으나 다행히도 권승휘가 아들을 두었다. 이는 인지상정 기뻐할 일이지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했으나 봉씨는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이후 봉씨는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세종의 인심을 더 잃어버렸다. 한 가지는 권승휘가 임신한 후 봉씨도 아이를 가졌다고 밝힌 것이다. 세종을 비롯한 궁중의 많은 어른이 모두 기뻐했다. 세종은 봉씨가 혹 놀라 아이가 잘못될까 염려해 중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중궁에서 거처한 지 한 달 남짓 되자 봉씨가 “낙태를 하였다”고 말했다. 봉씨는 자기 뱃속에서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했다. 세종은 늙은 궁궐 여종으로 하여금 가서 이를 보게 했다. 그러나 이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신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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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는 늘 외로웠다. 여자로서 즐거움을 알아버린 상황에서 남편이 늘 곁에 없었다. 오히려 세자가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해주지 못하자 궁궐 여종인 소쌍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된다. 봉씨가 처음부터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남편의 무심함이 그녀로 하여금 계집종과 관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봉씨는 세자를 매우 사랑했다. 당시 세자의 유모가 죽어 고미古未라는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궁중의 일을 맡게 했다. 봉씨는 밤마다 고미를 불러 세자를 불러오도록 했다. 그러나 세자는 봉씨를 피해다녔다. 한 번은 세자가 봉씨가 머무는 궁궐에 들어와 뜰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봉씨는 “저분이 왜 안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공연히 밖에서 걷고 있을까?”하면서 세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세자는 봉씨를 찾지 않았다.
궁궐은 너무나 조용하고 가라앉아 있어 봉씨는 힘들었다. 그 힘겨움을 술로 해결했다. 그녀는 항상 방에 술을 준비해두고 큰 그릇으로 연거푸 마셔 자주 취했다. 취기가 들면 뜰에 산책을 나갔다. 마실 술이 부족하면 사사로이 본가에서 가져왔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시렁에 두고 혼자 꺼내 먹곤 해 부족한 사랑을 달랬다.
봉씨는 세자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집착을 드러냈다. 세자가 며칠 동안 왕래했다가 오지 않자 노래를 지어 여종에게 부르게 했는데, 대개는 세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봉씨는 여러 번 투기 때문에 몸소 궁인을 구타해 혹 어떤 때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기도 했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픈 여인의 집착은 무서웠다.
술과 음식으로도 해소되지 못했던 외로움은 결국 봉씨로 하여금 여자를 탐하게 만들었다. 여종과 세자빈의 동성애는 조정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세종은 투기가 심하고 동성애까지 벌이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첫 며느리를 폐빈시킨 아픔을 또다시 겪어야 했다. 세종은 “총부O婦(적장자의 아내)의 직책은 가볍지 않다. 그런데 봉씨가 여러 가지 덕을 잃어버리고서야 어찌 종사를 받들고 한 나라의 국모가 되겠는가” 하면서 봉씨를 폐출시키고자 했다.
또 다른 사건은 세자가 종학宗學(조선시대 종실 교육에 관한 임무를 담당하던 관청)에 옮겨 거쳐할 때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외간 사람을 엿보았던 일이다. 또 항상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외에도 봉씨의 잘못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녀는 환관들의 주머니와 자루를 손수 만들었다. 이로 인해 세자의 생신에 바쳐야 할 물건들을 만들 여가가 없어지자, 지난해 생신에는 전에 바쳤던 오래된 물건들을 새로 마련한 것처럼 속이고 바쳤다. 또 궁중에 쓰는 물건과 음식물을 어머니의 집에 보내자고 청했다. 세자는 먹다 남은 음식물을 그 어버이에게 보내므로 이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세자에게 절대로 아뢰지 말도록 하고 보냈다. 이미 마음이 멀어진 세자와 그의 아버지는 며느리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종은 연이은 며느리들의 일탈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종은 황희?우의정 노한盧?찬성 신개申槪를 불러서 봉씨 문제를 의논했다. 모두 세자빈을 폐하도록 요구했다. 결국 세종도 봉씨를 폐하도록 명했다. 또한 세종은 봉씨를 폐하는 이유를 교서에 자세하게 기재하지 못하도록 요청했다. 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한 일은 매우 추잡했기 때문이다. 다만 봉씨가 질투가 심하고 아들이 없으며 노래를 부른 등의 몇 가지 범죄행위를 중심으로 교지를 지어 바치게 했다. 결국 봉씨는 평민이 됐고 소쌍은 죽임을 당했다. 그녀가 원치 않았지만,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조선이 버린 여인들>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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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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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씨
2010.11.22
설계자
2010.11.16
마지막 한문장이 안타깝네요 ㅜㅜ
달팽이
2010.04.03
지금은 덜하지만 아직도 동성애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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