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웬델 베리는 대학의 통합과 대학교육의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 그에게 농업은 하나의 산업이라거나 수출을 해야 농업경제가 건실해진다는 주장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농부들이 너무 많다거나 손작업이 나쁘다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자연을 지켜야 한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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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친북좌파 vs. 보수(반북)우파

나는 누구를 섬기지 않고 어떤 것을 받들지도 않는다. 존경하는 인물은 없으며 특정한 이념적 지향점이나 종교 또한 없다. 우리 집은 특별한 이유 없이 제사를 안 지낸다. 설과 추석에 차례는 지낸다. 당연히 국가관 혹은 애국심은 흐릿하다.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인물과 사상 조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섬기거나 받들 정도는 아니지만 마르크스를 위대한 사상가로, 그의 저작(엥겔스의 것과 함께)을 좋게 본다. 하여 나는 온건 보수 성향임에도 ‘친북 좌파’라는 꼬리표를 반긴다. 누가 그러는데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란다. 맞다. 나는 ‘친북’이다. 난 이북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줄곧 살고 있다. 군 복무는 이북 바로 코앞에서 했다.

그러나 나는 ‘친북’이 아니다. 나는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그렇다고 권력의 족벌세습과 장기집권 독재를 옹호하진 않는다. 나는 누구 말마따나 후보군 중에서 추첨을 통해 권력자를 뽑는 게 더 민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평준화 지지자다.

나는 북한의 상징이랄 수 있는 거대 매스게임에 숨이 막힌다. 어느 대기업의 신입사원연수회에서 매스게임을 하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됐든 규모와 상관없이, 남한의 재벌과 북한의 권력이 상동(相同)임을 말한다. 나는 몇 년 있다 치러질 인천아시안게임에 반대한다. 내가 그런 대규모 국제 스포츠행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매스게임 때문이다.

개회식과 폐회식의 식전 식후 공개행사에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고향에서 아시안게임을 하건 올림픽을 하건 아무 상관 않겠다. 나는 1983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 식전 공개행사에 참여했다. 정말 하기 싫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러는 게 교육적이라고 한다면, 남북한이 뭐가 다르랴. 외려 저쪽 학생들은 자발적이라고 하던데.

짧은 체류 경험과 옅은 지식으로 우리를 싸잡아 비꼰 미국인을 비판했다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소릴 들었다. 우리에게 ‘의심스런 사상’과 ‘친북’은 압도적인 표현이다. 불온하고 불순하다는 낙인이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런 말은 하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을지 몰라도, 그런 말을 듣는 사람에겐 ‘표현의 자유’뿐만 아니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까지 다 없다. 적어도 크게 위축받는다. 그리고 ‘친북좌파’의 상대어는 ‘반북우파’지 ‘보수우파’가 아니다. ‘보수우파’는 ‘진보좌파’와 제대로 된 대비를 이룬다.

웬델 베리에 대한 비판적 지지

스코트 니어링을 비판했다가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문제가 된 발언이다.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는 ‘스콧 니어링이 청교도들의 미 대륙 침범과 인디언 학살을 삶의 개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최근 지적한 바 있다.” (강성민, 「진단_한국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 <교수신문> 2004년 9월 10일자) 나는 헬렌 니어링-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생태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사회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20만 평 농장의 주인이 사회주의자일 수 있다면, 그건 미국식 사회주의의 한계다.

나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르베리-호지 여사의 국내 강연에 아무런 감응을 못 느꼈다. 나는 제인 구달과 에드워드 윌슨의 어떤 측면 또한 우리에게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필자도 기여한 바 있는 것 같아 본란의 ‘제인 구달’ 편에선 나름대로 긴장감을 가졌다. 에드워드 윌슨의 번역서 리뷰 청탁 글은 비판 위주로 쓴다.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 )는 “미국의 농부, 시인, 작가 그리고 오늘날 생존해 있는 가장 뛰어난 문명비평가”다(이하 웬델 베리의 이력에 관한 내용은 산해에서 펴낸 그의 산문집 두 권에 있는 저자 소개 글을 참조했다).

“영문학자로서 한때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고향 켄터키로 돌아가 현대적 농법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스코트 니어링 부부나 헨리 소로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농촌을 미화시키지 않고 지역경제와 공동체의 보존을 역설한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그는 다만 2에이커의 땅에 채소를 재배한다. 2에이커는 약 8,094제곱미터고, 평수로 따지면 약 2,500평이다. “그는 지금도 그다지 넓지 않은 자신의 땅을 세심하게 돌보며 살고 있다. 그는 마치 예술가가 작품 재료에 정성을 쏟듯 땅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웬델 베리가 니어링 부부와 노르베리-호지 여사 그리고 제인 구달보다는 좀 낫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자연은 희망의 기초이며 뿌리이다”

『희망의 뿌리』(문채원?정혜정 옮김, 산해, 2004)는 “‘구매 저항’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웬델 베리 역시 판매 대상인 그의 책에 관심이 있다. “(이 책을 사준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만일 빌렸다면 당신의 절약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만일 훔쳤다면 이 책은 당신을 더 혼란스럽게 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인세(印稅) 수입이 단어를 정렬한 대가라 여긴다. “내 재산은 단어를 정렬하는 능력인 것이다.” 또한 그의 사전에는 ‘지적 재산’이라는 용어가 없다. “나는 지적 재산권 같은 걸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한국어판 저서 다섯 권에는 모두 저작권 표시가 있고 웬델 베리가 저작권자로 돼 있다.

『희망의 뿌리』에는 글이 8편 실려 있다. 「환경보호와 지역경제」에서 웬델 베리는 우리가 희망을 갖기를 바란다. 희망을 갖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과 후손을 위해 현재의 상황과 삶을 들여다보고 확실한 희망의 토대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찾으려고 하면 희망의 토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자연이다. “건강한 자연은 희망의 기초이며 뿌리이다. 단, 겸손하고 지혜롭게 자연을 우리의 스승으로 인정할 수 있을 때에 한해서.” 또 그것은 ‘건강한’ 지역사회다. ‘건강한’ 지역사회는 한곳에 이웃해 사는 사람은 물론, 그 장소 자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건강한 지역사회는 지속 가능하다. 타당한 한계 내에서 자급자족하며, 상식의 범위에서 스스로 결정한다.”

그는 실질적인 개혁은 지역사회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땅의 이용과 생산 방법을 지역에서 개혁해야 한다. 규모를 줄이고 경비를 줄이며 산업 의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에선 지역상품을 소비해야 하고, 지역경제가 지역의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경제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대책이다.

“이런 주장이 혁명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혁명은 폭력적인 혁명이 아니라 조용한 혁명이다. 이 혁명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고향을 파괴하는 경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과 정신적인 힘을 발견하게 해준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기와 도시 안정에 대한 27가지 제안을 담은 「차에서 내리고 말 등에서 내리자」에서 그는 단언한다. “지구적으로 사고하면서 지역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보존은 좋은 일이다」에선 ‘알맞은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work)’은 지구 어디서건 우리와 지구의 관계를 제대로 나타내는 진짜 이름이다. ‘알맞은 일’은 지구와 우리의 적절한 관계를 가리킨다.

‘알맞은 일’

“알맞은 일은 신의 작품을 경배한다. 알맞은 일은 존중하는 마음 없이는 어떤 것도 이용하지 않는다. 알맞은 일은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도구와 재료를 이용하는 법이 없다. 알맞은 일은 자연을 신비하고 힘 있는 존재이자 없어서는 안 될 교사로서, 인간이 손으로 만든 모든 작품을 평가하는 피할 수 없는 재판관으로서 존중한다. 그것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으며 기쁨과 일, 사랑과 일, 유용함과 아름다움도 분리하지 않는다.”(「기독교의 자연 파괴」에서)

「적과의 화평」은 ‘1차 걸프전에 대한 짧은 기록’이나, 미국의 두 번째 이라크 침략에도 잘 들어맞는다. 정말이지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한결 나아질지도 모른다.” 이 글의 마지막 성찰을 곱씹어보자.

“만일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낭비를 줄이고 적게 소비하며 적게 사용하고 욕구를 줄이며 필요를 줄여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나타내는 가장 놀라운 일은 우리 지도자들에게는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내보내 희생시키려는 용기는 있으나 탐욕과 낭비를 줄이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웬델 베리의 ‘공동체론’ 혹은 ‘공동체주의’를 존중하지만, 그게 나하곤 안 맞는 것 같다. 이와 별개로 단문으로 표현된 그의 현실 인식은 공감하는 바가 크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무관심하다. 정부가 시골이나 국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기업의 이익만 우선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GNP와 기업의 손익계산은 한 나라의 번영이나 건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능한 한 집 가까운 곳에서 즐거움과 휴식을 찾자.”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바탕에는 수출업자에게 유익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가정이 자리하고 있다.”
“활자화될 수 없는(활자화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학대에는 반대하면서도 여성이 경제구조 속으로 내몰리는 현실은 적극 옹호한다.”
“특히 시골 공동체의 공무원들은 그 공동체를 편협하고 뒤떨어졌으며 무지몽매하고 전근대적이며 미개하고 ‘우리’와 다르므로, 이 공동체에는 외부의 이익에 부합(외부의 이익에 혜택이 가도록)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해방’의 개념에서 출발한, 결혼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 생활에서 성을 사랑의 실천에서 분리하기로 결정한 탓에 형성된, 혼란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복합적으로 해롭고 위선적인 성도덕의 양상은, 그 원인이 우리와 다를지 몰라도 매우 비슷한 결과를 보인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은 무엇이든 인정되고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므로 모든 욕망도 동등하다. 남자가 지하철 같은 데서 임신한 여자를 그냥 세워둔 채 자리에 앉아 있거나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뒤따라 들어오는 여자 면전에서 문이 꽝 닫히게 놔두어도 괜찮다.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도 괜찮다. 이혼한 부모가 양육비 지불을 게을리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개탄할 일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난잡한 성행위도 괜찮고 간통도 그렇다. 10대들의 난잡한 성행위는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괜찮다. 산아제한의 한 가지 방법으로 낙태도 괜찮고 광고와 대중오락에서 매춘도 괜찮다.”

자연을 지켜야 하는 이유

『희망의 뿌리』와 함께 번역 출간된 『생활의 조건』(정경옥 옮김, 산해, 2004)에서 웬델 베리는 “사람을 노동시장의 필수품으로 보는 천박한 관점에 반대한다.” 이 책의 원제목은 ‘Homo Economics’다. 『희망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에세이 모음이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어떤 규칙성에 의존하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 수록 글의 공통된 주제다.

웬델 베리는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대학과 대학생의 ‘취업 준비’를 비판한다. “‘취업 준비는 순전히 사적인 목적을 위해 공공의 자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행위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시간 낭비이기도 하다. 가장 적절한 취업 준비는 본래 고용인이 감독하는 도제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어 수업의 올바른 목표는 제대로 말하고 쓰는 방법이지 연설가, 방송인, 독창적인 작가, 전문가, 언론인 등 현장에서 ‘비즈니스 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되는 비결이 아니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은 필요한 경우에 연설도 잘하고 기사, 소설, 업무상 편지도 잘 쓸 수 있지만, 제대로 말하고 쓰지 못한다면 직업적인 기교를 아무리 배워야 소용없다는 얘기다.

또 우리는 단지 엉터리 애국심과 권력가의 현실적인 탐욕을 따라갈 뿐이라고 주장한다. 웬델 베리는 미국 독립혁명을 이상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아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 미국의 구성원 가운데 북미 인디언 원주민은 빠져 있다.

“과거 크나큰 역경과 대가를 치렀던 수백만의 이주자들, 자유를 찾은 노예들, 서부로 간 이주민들, 한 가족이 경제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생활의 만족에서도 어느 정도 독립성을 이룩할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소규모 농장?상점?업체를 시작으로 젊은 부부들을 동요시킨 오랜 희망의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를 요즘에도 전국 어디서에서나 들을 수 있다.”

웬델 베리는 대학의 통합과 대학교육의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 그에게 농업은 하나의 산업이라거나 수출을 해야 농업경제가 건실해진다는 주장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농부들이 너무 많다거나 손작업이 나쁘다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자연을 지켜야 한다.

“자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크든 작든, 공공의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모든 종류의 자연이 필요하다. … 우리에게는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전체적인 협약을 통한 절대 야생’의 지대가 필요하다. … 나는 어떤 장소에서든 인간경제와 관련해서 질문되어야 할 다음 세 가지 항목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곳에 무엇이 있는가?
둘째,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면 자연은 그것을 허용할 것인가?
셋째, 또한 자연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인가?”

소설과 첫 번째 번역서

장편소설 『포트윌리엄의 이발사』(신현승 옮김, 산해, 2005)에선 저자의 특이한 알림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책에서 ‘주제’라는 걸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소송을 당할 것이다. 이 책에서 숨겨진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거나 해석하거나 분석, 비평하거나 그 외의 어떤 방법으로든 ‘이해’하려 드는 사람은 이 책을 해석하려고 하는 다른 집단이 사는 불모의 섬으로 유배당하게 될 것이다. -웬델 베리”

나는 송사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추방되거나 유배되는 것도 싫다. 그런데 『포트윌리엄의 이발사』 한국어판은 작품 해설을 싣고 있다. 편집자가 저자의 뜻을 거스른 이유다.

“권두에서 웬델 베리는 이 책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정란 시인의 글을 청해 싣는다. 물질주의에 물든 초국가적 권력에 맞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반성과 진정이 담긴 삶을 아름답게 그려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편집자”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정승진 옮김, 양문, 2002)는 처음 번역된 웬델 베리의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내가 컴퓨터를 사지 않는 이유에 대한 이유」는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아마 우리 중 상당수는 현재가 가능한 모든 세상 중 최선의 세상이고, 우리가 올바른 장비를 구입한다면 훨씬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웬델 베리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남녀 모두에게 결혼생활과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남녀 모두에게 있어 집에서 일하는 것보다 ‘집 밖에서 고용되는 것’이 더 가치 있거나 중요하거나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옳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또한 나는 “장수에 대한 강조는 산업적 정신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목적이 어떻게 인간 생명의 가치를 격하시키는지, 통계가 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훌륭한 삶은 단지 길기만 한 삶보다 더 나은 것이며, 훌륭한 삶은 그 길이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몽골의 열두 살 소녀 푸지에는 나름의 훌륭한 삶을 살았다. <푸지에>는 2007 제4회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대상 수상작이다.

“‘기술 진보’의 가장 직접적이고 두려운 위험은 신체를 비하하고 퇴화시키는 것”이고,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성적 자유’만을 가지고 우리 시대가 지나치게 육체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웬델 베리는 “컴퓨터를 이용함으로써 작가들은 정신과 육체의 철저한 분리, 정신노동으로부터 육체노동의 제거라는 유희에 빠져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통섭』이 아니라 『통합』이다

『삶은 기적이다-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박경미 옮김, 녹색평론사, 2006)은 전권에 걸쳐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지식의 대통합』(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에서 개진한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편다. (이하 내용은 <문화예술> 2006년 4월호에 실린 ‘출판 리뷰’의 일부임)

『통섭』의 옮긴이 서문에서 최재천 교수는 이 책이 “미국 학계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며,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한 서평자로 제리 포더와 리처드 로티를 꼽는다. 그리고는 로티의 비평에 대해 실망감을 표출한다. “나는 로티가 스스로 그 자신의 철학이 엄청나게 좁은 학문이라고 고백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웬델 베리와 『삶은 기적이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웬델 베리와 윌슨 사이에는 근본적이 차이가 있다. 웬델 베리는 “그는 시종일관 대학에 속한 사람이었고, 나는 늘 학교 밖에 있을 때가 훨씬 속이 편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웬델 베리는 “과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다면서 무지에 관해선 “상당한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윌슨을 “물질주의자”로 규정하는 웬델 베리는 “과학이 아닌 모든 것은 과학이 되어야 하며 또 과학이 될 것이라는 윌슨의 확신은 그 자신이 대단히 소유욕이 강한 정신의 소유자이며, 지적으로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통합』(『삶은 기적이다』에서 consilience의 번역)은 물살은 무섭게 빨리 흐르는데 그것은 보지 못한 채 추측상으로만 있는 징검다리 돌 하나에서 다음 돌로 뛰어넘어 가면서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한다.

결국 웬델 베리가 반대하는 건 “기계와 기계적 관념이 피조물의 삶의 조건과 상황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우리의 대책 없음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윌슨의 ‘대책 없음’은 낯이 익다. 윌슨의 주장은 단순하고 조악해진 마르크스주의를 연상시킨다. 유난스럽게 ‘과학’을 들먹이는 것이 그렇고, ‘환원론’에 기대는 것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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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