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의 아버지, 안데르센을 찾아서
지난 6월 22일부터 8월 15일까지 코엑스 장보고홀에서는 200년 전 태어나 155편의 주옥같은 동화를 남기고 떠난 안데르센의 일대기와 그의 작업을 둘러보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아이들의 눈길은 물론이고 어른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글ㆍ사진 김영욱
2007.08.14
작게
크게
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내 삶에서 나왔습니다.
상상으로만 만들어낸 인물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내가 아는 사람이거나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람들입니다.
- 안데르센, 1834년 편지 중에서

지난 6월 22일부터 8월 15일까지 코엑스 장보고홀에서는 200년 전 태어나 156편의 주옥같은 동화를 남기고 떠난 안데르센의 일대기와 그의 작업을 둘러보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미국의 ‘자연사박물관’과 ‘빌 클린턴 대통령 기념 도서관’ 등을 설계한 디자이너 랄프 아펠바움이 스물다섯 점의 안데르센 유품과 그가 쓴 동화, 그의 일대기를 한 자리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것이다. 안데르센의 삶을 연대순에 따라 6단계로 나누고, 시기별로 가장 대표적인 작품과 그에 해당하는 유품을 체험 공간과 함께 배치한 전시장 구석구석은 아이들의 눈길은 물론이고 어른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몇 해 전, 안데르센의 삶의 자취를 찾아 덴마크 코펜하겐을 방문한 적이 있는 필자는 이번 전시회를 둘러보는 내내 그의 외로운 삶, 코펜하겐과 오덴세의 중세적인 매력, 주옥같은 그의 작품이 떠올라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전시회가 마감되었다고는 하나, 앞으로도 ‘안데르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을 다양한 책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으니 일단 아쉬움을 접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접기 전에, 필자가 전시회에서 본 작품과 유품, 경험했던 덴마크,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연을 소개함으로써 더 많은 분이 지속적으로 안데르센의 동화에 관심을 둘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볼까 한다.

전시회 초입에 설치한 『미운 오리 새끼』 오리엔테이션 극장.
책 모양의 LCD를 통해 안데르센의 삶과 작품이 펼쳐진다.

I. 미운 오리 새끼 (1805~1819)

오리 우리에서 나왔으면 또 어떠니, 너는 백조 알에서 태어난 존재인데,
- 안데르센, 『미운 오리 새끼』 중에서

오덴세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안데르센.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글자를 읽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틈틈이 안데르센에게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어주었다. 안데르센은 일곱 살 되던 해, 부모와 함께 극장에서 홀베르가 쓴 <도나우의 처녀(Das Donauweibchen)>를 보고 언젠가 자신도 연극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학교에 간 안데르센은 아이들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언제나 자신이었기에 때때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도, 그가 열한 살 되던 해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안데르센의 어머니는 이웃집 빨래를 모아 빨아주어 품삯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갔고, 안데르센은 동네 아이들에게 이야기와 노래를 불러주며 푼돈을 모았다.



안데르센이 유년기를 지낸 오덴세의 집.
도로 쪽에서 바라본 사진(왼쪽)과 뒷마당 쪽에서 본 사진(오른쪽)

II. 젊은 예술가 (1819~1830)

아, 그 엄청난 황금들! 세상의 모든 돼? 모양 사탕, 장난감 병정,
채찍, 흔들목마랑 코펜하겐을 몽땅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 안데르센, 『부싯돌 상자』 중에서

열네 살이 되던 해, 안데르센은 동네 후원자가 써준 왕립극단 추천장 한 장을 달랑 들고 마차를 타고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그러나 안데르센과 가난한 어머니는 돈이 부족해 코펜하겐 근처부터는 걸어가야 했다. 고작 열네 살의 소년 안데르센에게 북적거리는 코펜하겐은 꿈의 도시였지만, 요나스 콜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허름한 윤락촌의 다락방에서 날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 가수나, 배우, 무용수가 되겠다던 꿈은 접어야 했다. 매부리코에 멀대같이 큰 키에 삐쩍 마른 안데르센을 본 사람들은 그저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요나스 콜린의 도움으로 안데르센은 기숙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 열일곱, 다른 학생들보다 무려 일곱 살 정도 많았으나, 아는 것은 가장 적었다. 합리주의자였던 메이슬링 교장은 걸핏하면 공상에 빠지는 안데르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안데르센 또한 자신의 글짓기를 허용하지 않는 메이슬링 선생님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안데르센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 요나스 콜린이 있었기에 외형적으로 메이슬링 선생님은 안데르센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겼다. 1894년 7월의 일기에 따르면, 예순아홉 살이 되어서도 안데르센은 메이슬링 교장 선생님 앞에서 불안하게 서 있는 창피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런 차갑고 무서운 메이슬링 선생의 이미지는 훗날 『눈의 여왕』의 모티브로 되살아났다.

안데르센이 코펜하겐에 입성한 1819년, 코펜하겐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단단히 성벽과 요새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마차에서 내린 안데르센은 성벽을 따라 티볼리까지 먼 길을 홀로 걸어야만 했다. (왼쪽-세계 최초의 놀이동산 티볼리) 기숙학교의 교장 메이슬링의 쌀쌀맞고 이중적인 태도에 질린 안데르센은 메이슬링을 모델로 『눈의 여왕』을 썼다. (오른쪽-전시회장에서 『눈의 여왕』을 보여주고자 설치한 무대의 한 부분)

III. 여행은 삶이다 (1830~1840)

아, 여행, 여행! 이곳저곳을 훨훨 날아다니며 인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 안데르센, 1831년 5월 31일 일기에서

안데르센은 1831년 처음으로 이태리, 독일, 프랑스를 여행한 이후 1973년까지 총 29회 외국여행을 했다. 그가 덴마크 밖에서 생활한 기간을 환산하면 약 10년에 이르는데, 사실 처음으로 안데르센이 유럽 여행을 떠난 계기에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이유가 숨어있다. 든든한 후원자인 요나스 콜린의 차남 에드바르와 그의 여동생 루이제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안데르센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나스 콜린이 왕실기금으로 특별 여행자금을 마련해 내쫓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데르센에게 여행은 풍부한 이야기의 소재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안데르센은 이태리를 사랑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이태리야말로 상상의 땅이었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여러 차례의 여행을 통해, 멘델스존, 슈만, 리스트 등의 음악가와 빅토르 위고, 찰스 디킨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등의 작가와 어울릴 수 있었다.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훗날 『인어공주』를 구상하며 시를 썼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즉흥시인』을 완성해 작가로서의 길로 접어들었다. 1935년 안데르센은 뉘하운에 거처를 마련하고, 바다가 보이는 쪽에 책상을 두고 동화 창작을 시작했다. 안데르센은 이후 20년간 뉘하운에서 머물며 동화 집필을 하고 기회가 닿을 때면 트렁크 속에 옷가지를 집어넣고 여행을 떠났다.

『하늘을 나는 트렁크』를 상징하는 전시물과 안데르센이 여행을 할 때면 들고 다녔던 가죽 여행가방

IV. 우정과 사랑 (1840~1850)

나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을 보았으며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지요.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답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모두 보니 세상은 엉망이더군요.
나는 결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답니다. 그래야 되는 것만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 안데르센, 『그림자』 중에서

안데르센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안데르센은 상호의존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다. 못생긴 외모 탓인지 아이같이 순진한 탓인지 안데르센은 이성에게 그다지 인기가 많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남성에게 더 끌리는 안데르센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안데르센은 예쁜 여성을 봐도 육체적 사랑보다는 정신적 사랑을 나누고자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자』는 평생을 두고 그가 사랑했던 에드바르와 자신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안데르센은 ‘너’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 에드바르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기대했으나, 에드바르에게서 기대 이상의 애정을 받을 수 없어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었다.
그러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에드바르 콜린은 45년에 걸쳐 현실적으로 안데르센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안데르센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평을 해준 것은 물론이고, 원고의 교정과 출판업자와의 교섭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냥팔이 소녀』의 주인공처럼 애절한 사랑을 갈구하며 지내야 했던 안데르센은 결국 죽어서야 에드바르 콜린과 잠시 함께할 수 있었다. 이는 안데르센의 묘소 옆에 에드바르의 주검도 얼마간 함께 묻혔기 때문이다. 1945년 작품인 『성냥팔이 소녀』는 코펜하겐에 와서 콜린 가의 지원을 받게 되기까지 거리를 떠돌며 구걸하다시피 자신의 노래와 춤을 팔던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는 동화다.

전시장 『그림자』 코너에 마련된 설치물과 안데르센이 스무 해 동안 살았던 니하운 항구

V. 고독 (1850~1860)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아이들의 사는 인간의 집으로 들어간다.
부모들을 기쁘게 하는 아이를 만날 때마다
신은 우리가 겪을 고난의 시간을 줄여줄 것이다.
착한 아이를 보며 우리가 웃음 지을 때마다
300년 중 하루가 줄어든다.
하지만 못된 아이를 보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
눈물 한 방울에 고난쟀 시간이 하루씩 추가된다.
- 안데르센, 『인어공주』 중에서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대부분의 비평가가 안데르센 동화의 독창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데르센 자신은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외로움을 피할 수 없었다. 바위에 앉아 결혼할 수 없는 왕자와 자신이 속할 수 없는 땅을 바라보는 인어공주의 심정이랄까? 하지만 그에게 외로움은 창작의 밑바탕이기도 했다. 지칠 줄 모르는 낭만주의자인 그는 평생 자신을 신이 선택한 자식으로 생각했고, 자신의 고통을 뿌리 뽑힌 자들의 아름다움으로 여겨, 슬픔을 승화시켰다. 마치 그의 동화 『전나무』의 주인공처럼.

(왼쪽부터) 전시장에 설치된 인어공주의 꼬리, 코펜하겐 바닷가에 있는 인어공주 동상,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뭍을 바라보는 전시장의 대형 인형

VI. 명예 (1860~1875)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도랑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군요.
- B. S. 잉게만, 1858년 4월 10일, 안데르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1819년 열네 살의 나이로 고향 오덴세를 떠날 때 한 점술가가 예언했던 대로 그는 오덴세의 명예시민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명예가 높아지자 가난한 사람들이 그에게 달라붙어 귀찮게 했다. 이율배반적인 성향이 있기도 했던 안데르센은 자신의 가난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의 유년 시절의 진상을 꿰뚫어보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런 그의 불안감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소리쳤다. 그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은 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행렬이 끝날 때까지 참아야 해.’ 왕은 마음을 다잡고 한층 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말년의 20년간 안데르센은 많은 표창과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외로웠고 관절염으로 괴로웠다. 그는 어린 시절 익힌 ‘페이퍼 콜라주’로 자신의 동화를 재창조했다. 정교하게 오려낸 색색의 페이퍼 콜라주는 그의 놀라운 손재주를 보여주는 유품이 되어, 현재 그의 박물관에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동화의 황제 안데르센은 개인적 외로움과 대외적 명성이라는 멍에를 다 풀고, 1875년 8월 4일 오전 열한 시 오 분, 코펜하겐 북쪽 롤리게드의 별장에서 숨을 거두고, 지상에서의 소명을 다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의 장례는 덴마크 왕실장으로 장대하게 치러졌다.

(왼쪽부터) 전시장에 설치된 『엄지공주』의 무대, 안데르센이 매일 산책을 즐겼다는 로젠보르 궁전과 왕립 공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안데르센의 욕망이 담긴 『외다리 병정의 모험』의 무대

# 안데르센 자세히 알기

안데르센의 진정한 참모습이 무엇인지,
그의 사람됨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언급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중략)
나는 그가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안다.
진정으로 그를 잘 알았던 사람이라면 이 단순한 선언을 결코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 에드바르 콜린, 『안데르센 회고록』 끝 부분

안데르센 관련 도서

안데르센은 관 속에서 자신이 산 채로 깨어날까 봐 자신의 임종을 지켜준 멜키오르 부인에게 자신이 죽으면 정맥을 잘라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멜키오르 부인은 그 말이 안데르센의 마지막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장례식장에는 안데르센의 혈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안데르센은 유서를 통해 3만 릭스달러의 재산을 평생 사랑했던 에드바르 콜린에게 남겼고, 자신의 저작권도 에드바르에게 남겼다. 또한 자신의 묘역 옆을 에드바르 콜린과 그의 부인 헨리에테 콜린을 위해 비워두기까지 했다.

에드바르는 1882년 안데르센 회고록을 출판했고, 4년 뒤 그의 뒤를 따랐다. 200년 전 저 멀리 덴마크 땅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안데르센이 지은 수많은 동화는 현대 동화의 전범으로 누구도 그의 동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동화는 물론이고 시, 소설, 여행기를 아우르는 천재 예술가로서 그의 작품은 자신의 시련과 내면의 갈등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자신에게 냉혹했던 작가 안데르센의 철저한 작가정신을 기리며 남아있는 무더위를 그의 작품으로 식혀보는 것은 어떨까?
#안데르센 #미운 오리 새끼 #덴마크
2의 댓글
User Avatar

waterunicorn

2013.02.26

언젠간 한 번 쯤 안데르센의 전 작품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그의 고향도 너무 가보고 싶네요!
답글
0
0
User Avatar

앙ㅋ

2012.02.05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수세기를 관통해서 만화,영화,연극으로 재탄생하고 있죠. 아동판보다 성인판으로 읽으면 잔익하고 끔찍한것들이 많아요.
답글
0
0
Writer Avatar

김영욱

Writer Avatar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덴마크 오덴세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대개는 혼자 집에서 공상하거나, 자기만의 작은 극장을 갖고 놀거나 인형 옷을 만들어 놀았다. 가수나 배우가 되고 싶어 열네 살에 무작정 대도시 코펜하겐으로 가 여러 극단을 찾아다니지만 타고난 재능이 없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매번 퇴짜를 맞았다. 14세 때 코펜하겐의 덴마크 왕립 극장의 단원이 되어 배우의 꿈을 키우지만 변성기가 오면서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1822년 완성한 희곡 『알프솔』은 상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을 들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정치가 요나스 콜린과 국왕 프레데리크 6세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1827년에는 시 「죽어가는 아이」가 코펜하겐 신문에 실렸다. 여행을 즐긴 안데르센은 유럽 곳곳을 누비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1835년 서른 살에 첫 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하며 유럽에 이름을 알렸다. 같은 해에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발간했으나, 처음엔 비난받기 일쑤였다. 교육적, 계몽적 측면보다 환상적 묘사에 힘을 실은 동화는 외면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잇달아 기발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창작 동화를 발표하며 명성을 떨쳤다. 오늘날 안데르센은 구전 민담의 원형을 넘어서서 ‘동화’ 장르를 개척한 ‘동화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못생긴 새끼 오리』, 『눈의 여왕』, 『성냥팔이 소녀』, 『빨간 구두』, 『나이팅게일』 등 생전에 남긴 200여 편의 동화는 ‘불멸의 이야기’라는 찬사를 받으며 100여 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 동화뿐만 아니라 소설, 시, 극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그는 자신이 관찰하고 상상한 모든 것을 현실로 불러들이고, 이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작가이자 예술가이다. 1875년 친구인 멜히오르가(家)의 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덴마크 국민들의 크나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장례에는 국왕 내외도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