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옳지 않은 건 옳지 않다고 거침없이 말했고, 때론 거짓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말라고 나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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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약속을 하면,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나에게 총을 겨누었다. 옳지 않은 건 옳지 않다고 거침없이 말했고, 때론 거짓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말라고 나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거짓말도 생존을 위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내 안의 소용돌이를 감추지 못했고, 버럭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내 어깨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이 있었다.

세상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곳곳마다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사람들 사이에 전선이 있었다. 자기 혼자만 건너려고 징검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등짝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험한 세상을 건너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은 때때로 나를 속였다. 세상에 상처받으며, 나에게 상처받으며, 내 몸에도 하나 둘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찌르는 칼도 있지만, 지키는 칼도 있다고 나는, 나를 위로했다. 칼이 부러지면 맨손으로 싸울 수 있는 깡다구도 내겐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는 부질없이, 간단없이 톱밥처럼 분분히 부서졌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사납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바람을 이기지 못했다. 바람을 이기려고, 나도 바람이 되었다. 바람은 바람을 이길 수 없었다. 밤이 깊어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었다.

환상과 환멸이 전갈처럼 춤을 추는 세상이었지만, 눈물이 되어 스미는 사랑도 있었다. 지리멸렬한 세상의 바다에 섬처럼, 등대처럼 떠 있는 빛이 있었다. 명멸하는 그 빛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파랑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무가 되고 싶었다. 나무가 되어,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작은 십자가라도 되고 싶었으나, 나는 하루하루 칼자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솟아오른 이카로스처럼 나의 꿈은 쨍쨍하고 허무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면, 나 혼자 있는 곳에서 그를 향해 거친 욕을 퍼부었다. 내가 뱉은 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되어 마디마디 나를 더럽혔다.

길을 가다가 아주 아주 짧은 치마와 눈이 부딪치면, 세 번쯤 보고 싶었으나 두 번만 봤다. 아니 아니 네 번을 본 적도 있다. 여자의 아슬아슬한 치마는 나를 늘 죄짓게 했다. 여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짧은 치마의 책임은 더욱 아니라는 것도 안다.

여자의 꽃봉오리를 몰래 훔쳐본 적도 있다. 갓난아기들이 입을 맞출, 여자의 둥근 봉오리를 훔쳐보며, 슬프게도 나는 내 영혼의 뜨락에 둥근 무덤을 쌓고 말았다.

하나님, 이런 놈이 글을 써도 되나요.
제가 눈을 빼 버려야 하나요,
아니면 눈이 저를 빼 버려야 하나요, 라고 속삭이기도 했다.
쪽팔려 눈을 감으면,
빨간 눈을 가진 악마가 슬금슬금 다가와
피 묻은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남자가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누대를 걸친 수놈들의 유구한 전통이 모두들 그렇지 않느냐고,
악마는 드르륵 드르륵 내 가슴에 바느질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하나님 안에 있었으니까.
하나님은 내 안에 있었으니까.

때로는 반짝이고 싶어 내 몸에 불을 켰다. 내가 내 가슴에 훈장을 달았던 적도 있다. 어쭙잖은 글이지만, 내가 쓰는 글에 반역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가급적 겸손했고. 가급적 배려했고, 가급적 칭찬했으며, 집에 갈 차비까지 몽땅 내주고 한 겨울 새벽길을 서너 시간씩 걷기도 했다. 부모님이 선물해준 착한 마음도 있었겠으나, 글과 사람이 다르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삶의 무게보다, 나이의 무게보다, 내가 쓴 글의 무게가 내겐 훨씬 더 무거웠다. 보잘것없는 글을 그렇게라도 책임지고 싶었다. 고양이처럼 시무룩한 낯짝으로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지만, 내가 쓰는 글을 배반하고 싶지는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어찌어찌 술을 몇 잔 마시면, 흐트러지지 말자고, 실수해서는 안 된다고, 비 맞은 무궁화처럼 얼굴을 털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던 탓에 욕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 동요도 없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지갑에 돈을 세던 날부터 창피도 당하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탓에,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야 내 방이라는 것을 처음 가져보았다. 철없던 시절 가난한 엄마에게, 엄마가 나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막말을 한 적이 있다. 가난이 싫었지만,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부자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뒤로 돈의 가벼움을 나의 전 재산으로 삼을 수 있었다. 만 원이 있으면 만 원으로 밥을 먹었고, 천 원이 있으면 천 원으로 상다리가 부러졌다. 부잣집 담벼락으로 넝쿨장미가 폭포처럼 쏟아지면,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와 음료수 병에 꽂아 놓았다. 코를 큼큼거리며 하루 종일 행복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사주는 칼국수 한 그릇이 어린 딸아이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해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일류를 지향하는 삼류가 되기보다, 삼류를 지향하는 일류가 되고 싶었다.

돈을 탐하지 않았다. 돈에 멱살을 잡히면 끝장이다. 잔머리 백 단이 되던 날부터 손해도 별로 보지 않았다. 미련하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것이지, 미련하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뿌연 유리창 위로 옥수수수염처럼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글쓰기의 천의무봉을 기대하지 않았다. 언어의 서커스를 꿈꾼 적은 있었다. 밤낮으로, 닥치는 대로, 무자비하게, 시와 소설과 동화를 읽었다. 피어날 듯, 피어날 듯, 문장은 피어나지 않았다. 사람만큼 써지는 게 글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나는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기 때문이다. 어둠을 지켜야 할 때, 나는 빛 속으로 걸어나갔다. 빛을 지켜야 할 때,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한 움큼의 진실도 얻을 수 없었다.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는 한 움큼의 진실도 얻을 수 없었다.

하나님, 저는 나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촛불 속으로 몸을 던지는 나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와 딸아이에게 혈기를 부리고, 막말을 하고,
죽이고 싶도록 제가 싫어, 당신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을 때,
당신은 끝끝내 제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
저를 믿을 수 없어서 당신을 믿었습니다.

얼어붙은 유리창 너머로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던 밤,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개나리꽃을 꺾어본 아이들은 개나리꽃을 사랑할 수 있다.
잠자리 날개를 꺾어본 아이들은 잠자리를 사랑할 수 있다.

쓰러질 때마다 진실 한 조각을 주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넘어지면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림을 자꾸자꾸 망쳐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몰랐고,
풀꽃들은 일어서기 위해 당당히 쓰러진다는 것을 몰랐다.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나는 눈사람처럼 무너져야만 했다.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나는 눈사람처럼 일어서야만 했다.
쪽팔린다 해도. 상처받는다 해도.
눈사람처럼 한 걸음도 걸어갈 수 없다 해도.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정말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이철환 #반성문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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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전

2011.07.30

이철환 선생님께 예전에 영어를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전 그분이 작가 이철환님인가 잘 매치가 안되었는데 예전 친구들을 통해서 동일인물임을 알게 되었지요. 열정적인 수업이었고 문학소년같이 편지지에 무엇인가를 적어주었던 생각이 나네요. 아직도 <에반젤린>인가 그 소설을 볼때면 문득 당시가 떠오릅니다. 롱펠로우의 작품인데 이철환선생님이 무척 아꼈던 작품이어서 글에서 인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 글을 읽다보니 윤동주시인의 자기고백과 부끄러움이 느껴집니다. '죽는날까지 한점 부끄러움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말입니다. 시간이 좀 된 글들이지만 가슴 따뜻해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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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

2007.08.16

일부러 슬프게 하려는 것 같은게 좀 억지 스럽지만 나름 볼 만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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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님

2007.08.14

목사님의 추천으로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조금이나마 읽었더니 목사님께서 왜 추천해주셨는지 이해가 되네요. 나약하지만 나의 주님을 믿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싶습니다. 나비가 아닌 나방이지만 하나님께선 제 손을 놓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약하고 별볼것없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말라 네 손 잡아주리라"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아버지 안에서 사랑받고 자라납니다. 하나님안에서 기쁨니다. 오늘도 은혜받습니다. 아버지 항상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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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

소설과 동화를 쓰는 작가이다. 수년 동안 여러 지면에 ‘침묵의 소리’와 ‘풍경 너머의 풍경’을 주제로 그림을 연재했다. 지난 10여 년간 TV·라디오 방송과 학교, 기타 공공기관 및 기업체 등에서 1000회 이상 강연을 했으며, 풀무야학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작품집으로는 『연탄길(전3권)』, 『행복한 고물상』, 『위로』, 『곰보빵』, 『눈물은 힘이 세다』, 『송이의 노란 우산』, 『낙타 할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의 자전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 등 20종이 있다. 400만 이상 독자들이 읽은 『연탄길』은 일본과 중국, 대만에 수출되었고 『곰보빵』은 일본에, 『송이의 노란 우산』과 『낙타 할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는 중국에 수출되었다. 『연탄길』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제4회 더뮤지컬어워즈에서 ‘소극장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작품 중 총 9편의 글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고, 〈뮤지컬 연탄길〉의 대본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1편의 글이 영어로 번역돼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KBS 1TV [아침마당 목요특강], CBS TV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총 3회), KBS 2TV 특강, JTBC 특강, MBC TV 특강 등 여러 방송에서 강연했다. 2014 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홍보대사로도 활동했으며, 2000년부터 책 수익금으로 운영해온 ‘연탄길 나눔터 기금’을 통해, 낮고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을 후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