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에서 ‘작가-활동가’로 탈바꿈하다
로이의 면모를 간추린 고진의 서술은, 그녀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로이는 영어로 작품을 쓰는 소설가로 우리에게 먼저 왔다.
200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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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2004년 겨울호(통권 41호)에 실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은 비평가로서 그의 안목과 진가를 새삼 확인시켜 주는 글이다. 문학의 지위와 영향력이 현저히 쇠퇴했다는 것이 고진 글의 요지다. 다시 말하면 문학이 그간 짊어져온 “지적?도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다. 이제는 문학이 제도화된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으며, 진실이라고 말해지는 것보다 진실을 더 잘 나타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그의 박학다식의 뒷받침으로 설득력이 있다. 고진은 이 글에서도 일관되게 사르트르를 옹호하는데 로망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저작을 가리키는 데리다의 용어 ‘에크리튀르’를 비판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사르트르처럼 소설이나 희곡을 쓸 수 없었던 데리다가 그것을 부정하는 대신, 사르트르가 ‘문학’으로 언급한 것을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으로 바꿔 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은 근대문학으로서의 소설(앙티 로망을 포함해서)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거기에서 뭔가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기대한다면 착각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고진의 주장은 우리에게 친숙한 사례를 거론하고 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일본 ‘사소설(私小說)’의 특성과 오자키 고요의 만년작 『금색야차(金色夜叉)』가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회심리적 배경을 짚은 대목이 그렇지만,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하게 그 영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말을 정말로 실감한 것은” 그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실로 “충격”이다.
2000년까지도 한국에서는 문학의 역할이 점점 강해질 것으로 봤던 고진이 그런 생각을 접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문학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학생운동의 몰락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 그가 사귄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전부 문학에서 손을 뗐다는 점이다. 한편, 아룬다티 로이(1961- )는 앞길이 트여 있음에도 문학을 때려치운 소설가로 거론된다.
「인도의 작가 가운데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1997년 영국의 부커 상을 수상했는데, 그 수상작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첫 소설로 수상한 후,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고 인도에서 댐 건설 반대운동, 반전운동 등에 힘쓰고 있습니다. 발표하는 작품도 그와 관련된 에세이뿐입니다. 유럽에서 인기를 얻은 인도의 작가는 미국이나 영국으로 이주해서 화려한 문단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로이는 자기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는 않으며 쓸 것이 있을 때에만 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로이의 말과 행동은 문학이 수행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면, 그리고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가로 존재하는 것도 더이상 불가능하다면, 소설가는 단순히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직함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로이는 문학을 버리고 사회운동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이의 면모를 간추린 고진의 서술은, 그녀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로이는 영어로 작품을 쓰는 소설가로 우리에게 먼저 왔다. 장편소설 『작은 것들의 신』(황보석 옮김, 문이당, 1997)은 로이의 부커 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의 빠른 번역 소개가 영국 문학상의 후광을 입으려는 마케팅 전략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출판사로서는 꽤 섭섭할 게다.
『작은 것들의 신』은 『델리』(쿠쉬완트 싱), 『붺베이의 연인』(쇼바 데), 『나 한야테』(마야트레이 데비) 등의 장편과 더불어 이 출판사의 ‘인도 문학선’을 이룬다. 게다가 이 소설은 판매에서도 별로 재미를 못 봤다. 현재 온/오프 라인 서점에서 공히 절판도서로 분류된 상태다. 출판사에는 이 책의 재고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듯. 필자는 출판사에 직접 주문해 책을 구입했다.
『작은 것들의 신』의 옮긴이는 ‘역자의 말’ 첫머리에 아룬다티 로이가 “샐먼 루시디, 비크람 세스 등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 작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고 썼다. 지금까지 거명된 로이를 포함한 여섯 명의 인도 작가는 하나같이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한다. 로이가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데에는 영어권 작가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터이다. 더구나 부커 상의 최근 선정 추세가 마이너리티 혹은 외국인 작가에게로 기울고 있음에랴.
로이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200년에 걸친 영국의 인도 지배와 무관치 않다(물론 그녀가 불가촉 천민이나 빈곤층 출신이 아니라는 점도 감안해야겠지만). 하면, 로이는 식민 지배의 긍정적 유제 혹은 식민지 발전론의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20세기 후반에는 문자가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된 사례는 오히려 적”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거라는 가라타니 고진의 시각에 힘을 실어 주는 사례로 보인다. 우리의 상황을 놓고 보자면,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의 우리말 표기 논란은 이제 부질없다는 말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 산출한 문학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에 도전하자는 역발상도 쓸데없고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의 일부 계층의 반발을 사는 작가다. 그래도 『작은 것들의 신』은 인도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잘 팔렸다. 하지만 이 소설의 한국어판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소설이 국내 독자의 인도에 대한 환상을 깰 소지가 있어설까? 『작은 것들의 신』은 여전히 인도 사회를 옥죄고 있는 카스트 신분제의 질곡과 가부장의 횡포를 바탕에 깔고 있는 소설이다. 한편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다.
아니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구성의 낯섦과 로이의 삐딱한 성격 탓일까?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것이 보기 드문 소설의 구현 방식은 아니다. 『작은 것들의 신』의 형식상의 생소함은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사건의 흐름이 뒤섞인 때문이다. 번역자는 로이를 “호전적 성격의 소유자”로 보는데 엄정한 평가는 아닌 것 같다. “어느 독자에게도 마음을 쓰지 않으며 외국의 독자들을 위해 자기의 소설에 주석을 달려고도 하지 않”은 것을 ‘호전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탁월한 스타일리스트인 로이의 언어 감각을 옮기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까닭일까?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 오히려 독서의 걸림돌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서른하나./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라는 소설 도입부의 시적인 표현은 바로 김지하 시인의 시 「새벽 두시」를 떠올리게 한다.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전문,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창비, 1982)에서)
거의 30년의 세월을 격한 한국 시인과 인도 소설가의 친연성. 외고모할머니인 ‘막내 코?마’가 조카딸의 쌍둥이 남매인 라헬과 에스타에게 “나는 언제나 영어로 말하겠습니다”와 “앞으로는 거꾸로 읽지 않겠습니다”를 백번씩 쓰도록 한 것은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박상희 옮김, 비룡소, 1996)에게 부과된 징벌을 연상시킨다.
위성 방송의 보급은 인도가 적어도 우리보다 4~5년은 이른 듯 싶다. 1990년대 중반 인도의 WWF 팬이 헐크 호건과 미스터 퍼펙트의 경기를 즐겼다면, 10년 후 한국의 레슬 매니아는 만능 엔터테이너 ‘락’과 민머리 ‘골드버그’의 게임에 열광했다. 그 중 일부는 종목을 바꿔 레미 본야스키와 무사시가 맞붙은 이종 격투기 K-1 파이널 토너먼트 결승전에 더 들떴을 지도.
소설에 나타난 인도의 사회상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시집간 딸은 부모 집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일반적으로 용인된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물며 이혼한 딸은.” 단산, 여권의 신장, 이혼율의 가파른 상승세 등의 이유로 출가외인과 이혼한 딸에 대한 박대는 옛일이 돼 가고 있지만, 가정 폭력은 역시, 여전히 만연해 있다. “그러나 구타는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지각대장 존』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다. 음습한 구석이 없진 않으나 외설 혐의로 고소를 당할 만큼 선정적이진 않다. 전체적으로는 회색 빛 구름이 짙게 드리운 흐린 날씨라고 할 수 있지만, 또 그런 만큼 가끔 구름을 뚫고 비치는 햇살은 더욱 포근하고 따뜻하다. “점잖고 질서 바른 세상에 대해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분노가” 번뜩이는 경우가 그렇거니와, 연인이 한순간에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대목은 소설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찰나의 미학.
“그는 이제부터 그녀에게 선물을 줄 때 서로의 손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만든 보트며 상자며 작은 풍차들을 줄 때도. 그는 또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기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 그에게 줄 선물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생각이 예리한 칼날처럼 분명하게 들어와 박히자 싸늘한 냉기와 후끈한 열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러는 데는 한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생존의 비용』(최인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은 우리에게 소설가에서 사회운동가로 변모하는 아룬다티 로이를 보여주는 징검돌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대규모 댐 건설에 반대하는 「공공의 더 큰 이익」과 핵무기 개발의 어리석음을 질타한 「상상력의 종말」로 구성된 작은 책이다. 하지만 로이의 진정성과 비판의식은 빼곡하게 담겨 있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은 대규모 댐 건설에 얽힌 난맥상과 이에 대한 비판적 논거를 패트릭 매컬리의 『소리 잃은 강』(강호정 외 옮김, 지식공작소, 2001)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약간 아쉽기는 하다. 그렇다고 로이의 독자적인 시각이 무딘 것은 아니다. “4,000만 명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혹은 공급하는 체하기 위해 20만 명을 재정착시키는 것. 이 사업과 관련된 산술은 근본부터 틀려먹었다. 이런 방식의 계산은 파시스트적인 것이다.”
또, 댐 건설을 위시한 이른바 국책 사업을 강행하려는 논리는 우리와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사업을 취소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거나 “국가 만든 위원회를 상대하다가 사람들은 진이 다 빠진다”는 것이다. “큰 댐이 국가의 ‘개발’에서 하는 역할은 핵폭탄이 국가의 무기고에서 하는 역할과 같다”는 지적은 다음 글로의 연결 고리다.
「상상력의 종말」은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잇따른 핵실험에 분노하면서 쓴 글이다. 그런데 인도는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에도 미국, 러시아(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핵 보유국으로 간주되었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인도가 처음으로 핵무기에 손을 대고 1년쯤 지난 1975년, 인디라 간디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니까 필자의 착각은 핵무기 보유 또는 자체 개발의 시작과 핵실험 성공의 차이를 간과한 결과인 셈.
“?무기는 사용되는 경우에만 치명적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로이는 “인도의 핵폭탄은 국민을 저버린 지배 계급이 저지른 마지막 배신 행위”라 규정한다.
정치평론 모음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 녹색평론사, 2004)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가-활동가로서의 면모는 확연해진다. 신문 기고문과 연설문을 엮은 이 책은 댐 건설 반대 운동, 9.11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촘스키의 저항정신, 민주주의와 미국 등을 다뤘는데 명확한 관점으로 사태의 진실을 밝힌 점이 돋보인다.
「작가와 세계화」에 나타난 로이의 작가 정신은 문학에서 한발 물러서서 발현된 것이기에 더욱 빛나고 아름답다. ‘작가-활동가’라는 꼬리표를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룬다티 로이는 순수라는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어느 쪽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일단 그것을 본 뒤에는,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 발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 됩니다.”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그의 박학다식의 뒷받침으로 설득력이 있다. 고진은 이 글에서도 일관되게 사르트르를 옹호하는데 로망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저작을 가리키는 데리다의 용어 ‘에크리튀르’를 비판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사르트르처럼 소설이나 희곡을 쓸 수 없었던 데리다가 그것을 부정하는 대신, 사르트르가 ‘문학’으로 언급한 것을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으로 바꿔 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은 근대문학으로서의 소설(앙티 로망을 포함해서)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거기에서 뭔가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기대한다면 착각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고진의 주장은 우리에게 친숙한 사례를 거론하고 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일본 ‘사소설(私小說)’의 특성과 오자키 고요의 만년작 『금색야차(金色夜叉)』가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회심리적 배경을 짚은 대목이 그렇지만,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하게 그 영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말을 정말로 실감한 것은” 그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실로 “충격”이다.
2000년까지도 한국에서는 문학의 역할이 점점 강해질 것으로 봤던 고진이 그런 생각을 접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문학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학생운동의 몰락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 그가 사귄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전부 문학에서 손을 뗐다는 점이다. 한편, 아룬다티 로이(1961- )는 앞길이 트여 있음에도 문학을 때려치운 소설가로 거론된다.
「인도의 작가 가운데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1997년 영국의 부커 상을 수상했는데, 그 수상작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첫 소설로 수상한 후,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고 인도에서 댐 건설 반대운동, 반전운동 등에 힘쓰고 있습니다. 발표하는 작품도 그와 관련된 에세이뿐입니다. 유럽에서 인기를 얻은 인도의 작가는 미국이나 영국으로 이주해서 화려한 문단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로이는 자기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는 않으며 쓸 것이 있을 때에만 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로이의 말과 행동은 문학이 수행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면, 그리고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가로 존재하는 것도 더이상 불가능하다면, 소설가는 단순히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직함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로이는 문학을 버리고 사회운동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이의 면모를 간추린 고진의 서술은, 그녀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로이는 영어로 작품을 쓰는 소설가로 우리에게 먼저 왔다. 장편소설 『작은 것들의 신』(황보석 옮김, 문이당, 1997)은 로이의 부커 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의 빠른 번역 소개가 영국 문학상의 후광을 입으려는 마케팅 전략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출판사로서는 꽤 섭섭할 게다.
『작은 것들의 신』은 『델리』(쿠쉬완트 싱), 『붺베이의 연인』(쇼바 데), 『나 한야테』(마야트레이 데비) 등의 장편과 더불어 이 출판사의 ‘인도 문학선’을 이룬다. 게다가 이 소설은 판매에서도 별로 재미를 못 봤다. 현재 온/오프 라인 서점에서 공히 절판도서로 분류된 상태다. 출판사에는 이 책의 재고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듯. 필자는 출판사에 직접 주문해 책을 구입했다.
『작은 것들의 신』의 옮긴이는 ‘역자의 말’ 첫머리에 아룬다티 로이가 “샐먼 루시디, 비크람 세스 등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 작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고 썼다. 지금까지 거명된 로이를 포함한 여섯 명의 인도 작가는 하나같이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한다. 로이가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데에는 영어권 작가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터이다. 더구나 부커 상의 최근 선정 추세가 마이너리티 혹은 외국인 작가에게로 기울고 있음에랴.
로이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200년에 걸친 영국의 인도 지배와 무관치 않다(물론 그녀가 불가촉 천민이나 빈곤층 출신이 아니라는 점도 감안해야겠지만). 하면, 로이는 식민 지배의 긍정적 유제 혹은 식민지 발전론의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20세기 후반에는 문자가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된 사례는 오히려 적”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거라는 가라타니 고진의 시각에 힘을 실어 주는 사례로 보인다. 우리의 상황을 놓고 보자면,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의 우리말 표기 논란은 이제 부질없다는 말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 산출한 문학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에 도전하자는 역발상도 쓸데없고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의 일부 계층의 반발을 사는 작가다. 그래도 『작은 것들의 신』은 인도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잘 팔렸다. 하지만 이 소설의 한국어판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소설이 국내 독자의 인도에 대한 환상을 깰 소지가 있어설까? 『작은 것들의 신』은 여전히 인도 사회를 옥죄고 있는 카스트 신분제의 질곡과 가부장의 횡포를 바탕에 깔고 있는 소설이다. 한편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다.
아니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구성의 낯섦과 로이의 삐딱한 성격 탓일까?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것이 보기 드문 소설의 구현 방식은 아니다. 『작은 것들의 신』의 형식상의 생소함은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사건의 흐름이 뒤섞인 때문이다. 번역자는 로이를 “호전적 성격의 소유자”로 보는데 엄정한 평가는 아닌 것 같다. “어느 독자에게도 마음을 쓰지 않으며 외국의 독자들을 위해 자기의 소설에 주석을 달려고도 하지 않”은 것을 ‘호전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탁월한 스타일리스트인 로이의 언어 감각을 옮기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까닭일까?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 오히려 독서의 걸림돌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서른하나./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라는 소설 도입부의 시적인 표현은 바로 김지하 시인의 시 「새벽 두시」를 떠올리게 한다.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전문,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창비, 1982)에서)
거의 30년의 세월을 격한 한국 시인과 인도 소설가의 친연성. 외고모할머니인 ‘막내 코?마’가 조카딸의 쌍둥이 남매인 라헬과 에스타에게 “나는 언제나 영어로 말하겠습니다”와 “앞으로는 거꾸로 읽지 않겠습니다”를 백번씩 쓰도록 한 것은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박상희 옮김, 비룡소, 1996)에게 부과된 징벌을 연상시킨다.
위성 방송의 보급은 인도가 적어도 우리보다 4~5년은 이른 듯 싶다. 1990년대 중반 인도의 WWF 팬이 헐크 호건과 미스터 퍼펙트의 경기를 즐겼다면, 10년 후 한국의 레슬 매니아는 만능 엔터테이너 ‘락’과 민머리 ‘골드버그’의 게임에 열광했다. 그 중 일부는 종목을 바꿔 레미 본야스키와 무사시가 맞붙은 이종 격투기 K-1 파이널 토너먼트 결승전에 더 들떴을 지도.
소설에 나타난 인도의 사회상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시집간 딸은 부모 집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일반적으로 용인된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물며 이혼한 딸은.” 단산, 여권의 신장, 이혼율의 가파른 상승세 등의 이유로 출가외인과 이혼한 딸에 대한 박대는 옛일이 돼 가고 있지만, 가정 폭력은 역시, 여전히 만연해 있다. “그러나 구타는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지각대장 존』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다. 음습한 구석이 없진 않으나 외설 혐의로 고소를 당할 만큼 선정적이진 않다. 전체적으로는 회색 빛 구름이 짙게 드리운 흐린 날씨라고 할 수 있지만, 또 그런 만큼 가끔 구름을 뚫고 비치는 햇살은 더욱 포근하고 따뜻하다. “점잖고 질서 바른 세상에 대해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분노가” 번뜩이는 경우가 그렇거니와, 연인이 한순간에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대목은 소설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찰나의 미학.
“그는 이제부터 그녀에게 선물을 줄 때 서로의 손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만든 보트며 상자며 작은 풍차들을 줄 때도. 그는 또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기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 그에게 줄 선물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생각이 예리한 칼날처럼 분명하게 들어와 박히자 싸늘한 냉기와 후끈한 열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러는 데는 한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생존의 비용』(최인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은 우리에게 소설가에서 사회운동가로 변모하는 아룬다티 로이를 보여주는 징검돌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대규모 댐 건설에 반대하는 「공공의 더 큰 이익」과 핵무기 개발의 어리석음을 질타한 「상상력의 종말」로 구성된 작은 책이다. 하지만 로이의 진정성과 비판의식은 빼곡하게 담겨 있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은 대규모 댐 건설에 얽힌 난맥상과 이에 대한 비판적 논거를 패트릭 매컬리의 『소리 잃은 강』(강호정 외 옮김, 지식공작소, 2001)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약간 아쉽기는 하다. 그렇다고 로이의 독자적인 시각이 무딘 것은 아니다. “4,000만 명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혹은 공급하는 체하기 위해 20만 명을 재정착시키는 것. 이 사업과 관련된 산술은 근본부터 틀려먹었다. 이런 방식의 계산은 파시스트적인 것이다.”
또, 댐 건설을 위시한 이른바 국책 사업을 강행하려는 논리는 우리와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사업을 취소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거나 “국가 만든 위원회를 상대하다가 사람들은 진이 다 빠진다”는 것이다. “큰 댐이 국가의 ‘개발’에서 하는 역할은 핵폭탄이 국가의 무기고에서 하는 역할과 같다”는 지적은 다음 글로의 연결 고리다.
「상상력의 종말」은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잇따른 핵실험에 분노하면서 쓴 글이다. 그런데 인도는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에도 미국, 러시아(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핵 보유국으로 간주되었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인도가 처음으로 핵무기에 손을 대고 1년쯤 지난 1975년, 인디라 간디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니까 필자의 착각은 핵무기 보유 또는 자체 개발의 시작과 핵실험 성공의 차이를 간과한 결과인 셈.
“?무기는 사용되는 경우에만 치명적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로이는 “인도의 핵폭탄은 국민을 저버린 지배 계급이 저지른 마지막 배신 행위”라 규정한다.
정치평론 모음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 녹색평론사, 2004)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가-활동가로서의 면모는 확연해진다. 신문 기고문과 연설문을 엮은 이 책은 댐 건설 반대 운동, 9.11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촘스키의 저항정신, 민주주의와 미국 등을 다뤘는데 명확한 관점으로 사태의 진실을 밝힌 점이 돋보인다.
「작가와 세계화」에 나타난 로이의 작가 정신은 문학에서 한발 물러서서 발현된 것이기에 더욱 빛나고 아름답다. ‘작가-활동가’라는 꼬리표를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룬다티 로이는 순수라는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어느 쪽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일단 그것을 본 뒤에는,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 발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 됩니다.”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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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성일
앙ㅋ
201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