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A] <여신님이 보고 계셔> 한영범 [No.113]
글ㆍ사진 이민선
201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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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8d3901">여신님, 도와주세요 부탁 드려요!</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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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8d3901">무인도에서 백 일을 동고동락했던 여섯 명의 군인들은 각자 갈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쉬워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선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으로선 쉬이 가늠할 수 없습니다. 같은 곳을 향할 수 없는 현실만 또렷이 알 뿐.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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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e95d00">* 이 글은 한영범을 연기한 배우 최호중과의 대화를 기초로 한 가상 인터뷰입니다.</font>

 

 

<font color="#6d201b">이창섭 일행이 떠나간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font>                    

 말도 마세요, 착잡합니다.

 

<font color="#6d201b">그들은 원했던 북조선 고향으로 향했고, 당신들은 여기 남아서 구조를 기다릴 거잖아요.</font>
그렇긴 하지만, 지금 같은 전시에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그들이 무사히 이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여기 남아 있다간 포로수용소로 끌려갈 테니 가는 걸 붙잡을 수도 없고, 제가 뭐라 말할 수 없었어요. 어쩐지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슬픈 생각이 듭니다. 부디, 그들도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네요. 아, 이러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울컥하네요.


<font color="#6d201b">처음 그들을 만날 때만 해도 그들과 헤어지는 마음이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죠?</font>
그럼요, 만남 자체가 싫었죠. 포로 이송 명령을 받고 처음 창섭이 형을 봤을 때 겉으론 강한 척했지만 속으로 엄청 쫄았습니다. 인상도 진짜 무섭잖아요. 전 사무실에 앉아 행정 업무나 보는 걸 좋아했는데, 어쩌다 험한 수송 업무를 맡아서 무진장 짜증났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야외 업무는 딱 질색이거든요.


<font color="#6d201b">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죠. 예상치 못한 난파로 무인도에 고립되다니요.</font>
제가 이런 뒤숭숭하고 혼란한 시대에 군대에서 12년간 짬밥 먹으면서, 손바닥 비비고 요리조리 몸 사려가며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든 헤쳐 나갔는데 말입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막막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처음으로, 울고 싶었다니까요.

<font color="#6d201b">이런 분이 어떻게 대위까지 해먹게 되셨습니까.</font>
아, 전쟁 중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전쟁의 한가운데, 군대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그럼요.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제가 진급을 좀 빨리 했어요. 제가 일 처리를 잘하기도 하지만, 실제보다 좀 더 능력 있어 보이기도 하거든요, 허허. 전 뭐 군인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장교로 바짝 목돈 벌어서 얼른 제대하려고 했죠. 나가선 장사나 하면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인생이 꼬여버렸지 뭡니까.


<font color="#6d201b">그래도 꼬인 인생 푸는 것 전문이시지 않습니까. 여신님까지 불러들이셨으니 말이죠.</font>
살아서 딸을 만나려면 배를 고쳐야 하는데 어떡합니까. 얼토당토않게 부하인 석구가 배를 고칠 수 있다고 뻥까지 쳐놨고, 못 고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조종수 순호를 어떻게든 구슬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거죠. 제 생각에, 공부는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지만, 이 두 가지는 타고나는 거라고 봅니다. 예술적 재능과 처세술. 제가 또 처세의 달인 아닙니까. 타고난 센스가, 크!


<font color="#6d201b">그래서 섬이 예쁘니 섬 주인 어쩌니,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으신 겁니까?</font>
거짓말이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며칠 무인도에서 지내다 보니 저절로 핀 꽃이며 우거진 숲을 보니, 게다가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보니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자연에서 희망의 빛도 함께 본 것이지요.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죠, 여신님은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 순호가 먼저 말한 겁니다. 네, 그렇죠.


<font color="#6d201b">네, 알겠습니다. 여하튼 ‘여신님이 보고 계셔’ 작전으로 지내기가 편해진 건 사실이에요.</font>
가장 중요한 건 심리적으로 안정됐다는 거죠. 이창섭을 비롯한 북한군들이 날 죽일 것 같았는데, ‘어라? 이 사람들도 내 말을 믿어주네? 어, 이들도 조금씩 웃네?’ 그러니 제 잔머리는 더 빨리 움직인 거죠. 어떻게 하면 저들을 내 편으로 만들까 하고요. 여신님이 좋아하실 거란 명분으로, 먹을 것은 나눠 먹자, 깨끗이 씻자, 싸우지 말자, 그런 규칙도 만들었습니다. 오호, 잘만 되면 서둘러 배를 고친 후에 내가 먼저 타고 나갈 수 있겠다! 빛이 보였달까요.


<font color="#6d201b">처음에는 배를 고치는 게 작전의 목적이었지만, 차츰 서로를 의지하게 된 건 참 신기한 일이에요.</font>
철저히 경계하는 사이였는데, 우리가 그러리라곤…. 사람이라곤 우리뿐이니 서로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밤이면 모여 앉아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요. 어렸을 적 이야기, 가족 이야기, 언제 즐거웠고 또 슬펐는지…. 아, 얘기를 나누다보니까 그들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더라고요.


<font color="#6d201b">한 대위님은 딸 자랑, 많이 하셨고요?</font>
에이, 뭐, 조금. 제가 이래 보여도 시시콜콜 제 이야기 늘어놓는 성격은 못 됩니다. 남의 얘기를 더 잘 들어주죠. 한참 동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잠들기 전에 혼자 딸애 사진을 꺼내 보곤 했죠. 제 딸, 보여드릴까요? 저 닮아서 예쁘죠? 흐흐. 애교도 많고 잘 울지도 않아요. 딸을 생각하면 꼭 돌아가야 한다, 얼른 이 섬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되새기게 됐어요.


<font color="#6d201b">류순호와는 남다르게 통하는 데가 있었던 것 같던데요.</font>
순호를 처음엔 완전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녀석 알고 보니 속이 깊었어요. 어쩜 여신님이 아니라 순호가 우리를 바꾼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또, 촉이 좀 좋지 않겠습니까? 딱 보니, 이 녀석 가끔 낌새가 이상하더라고요. 무슨 꿍꿍이가 있나 살짝 의심도 되고요. 제가 남몰래 여기저기 뒤져보고선 순호의 뜻을 알게 됐죠. 에이, 다 지나간 일이고, 우리 모두 이젠 서로를 탓하지 않아요.


<font color="#6d201b">하지만 몰래 구조 요청한 건 후회하지 않나요?</font>
엄청 후회했죠. 백 일간,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함께 지냈던 사람들인데, 미안함이 너무 커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 이게 아닌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font color="#6d201b">지난 백 일간의 일들, 정말 잊을 수 없겠죠?</font>
정말 평생,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겁니다. 추억이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 굉장한 사건임에 틀림없죠. 제가 나중에 이곳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면, 다들 뻥이라며 안 믿겠죠. 예, 제가 워낙 말재주가 좋고 허풍이 심하니까요, 흐흐. 아무도 믿지 않은들 어떻습니까. 그들이 진정 보고 싶을 겁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3호 2013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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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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