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10월, 엄마와 딸이 함께 저녁 거리를 걷고, 비바람을 피해 조그만 식당에서 식사하고, 미술관과 사찰, 중고 서점에 방문한다. 그동안 둘은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궁금했던 일본의 날씨에 대해, 서로의 별자리에 대해, 각자 입은 옷과 기억이 응축된 사물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사이사이로 엄마와 딸의 대화, 화자인 딸의 기억과 상념, 서로에게 가닿으려 하나 실패할 뿐인 옅은 낙담과, 그럼에도 그 마음을 이어보려는 애씀의 시간이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속에서 고요히 교차한다.
(※ 세르비아 출판사 'Laguna'가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의 저자 '제시카 아우'와 서면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엘리 편집부에서 허락을 받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소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무엇을 담고 싶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나요?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도 오랜 시간을 거쳐 소설의 모습을 갖춰갔습니다. 첫 버전은 십 년 전에 쓴 단편 소설로, 엄마와 딸이 도쿄를 여행하는 이야기였어요. 그 뒤엔 단편집을 묶어볼까 생각하며 이런저런 다른 글을 썼는데, 어느 것도 십 년 전에 쓴 단편만큼 살아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몇 년이 지나 다시 그 단편을 붙들었죠. '엄마와 딸의 여행'이라는 큰 틀 속에서, 그간 생각해온 많은 것들 ― 젊은 여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스스로를 꼭 한 명의 예술가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예술과 문학에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감각 ― 이 자연스럽게 제 길을 찾으며 이야기로 꾸려지더군요. 소설에서 볼 수 있듯, 과거 기억 속으로 여러 곁가지를 뻗으면서요.
글에 특별히 담고자 했던 건 없지 싶어요. 다만, 돌이켜보니 글을 이끌던 주된 물음 중 하나가 '거리'라는 점은 알겠어요. 계급이든 교육이든, 문화나 출생지 또는 언어이든, 성격이든 기질이든 한 가족 안에도 종종 여러 차이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제가 묻고 싶었던 건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관계에서 교차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였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생기는 격차가 궁금했어요. 자식이 부모를 매우 내밀히 알 수 있다는 점과 짝을 이루면서요.
글을 쓰는 동안 이야기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던가요? 소설을 쓰며 자신에 대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새로 배운 점이 있을까요?
글쓰기가 우리를 어느 특정 지점으로 데려다준다고는 못 하겠어요. 다만 보통의 시간이 허용하는 것보다 공간들에 더 오래 머물도록은 해주죠. 때때로 그 같은 탐색 과정과 보듬는 시간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하고요. 물론 그 시간을 지나온다고 우리가 매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는지 이해하려고, 나아가 스스로에게도 진실하다고 느껴지는 방식으로 이해해보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디아스포라와 거리의 본질을 다룬 글이라면 읽고 또 읽었지만, 실제로 제가 지나온 경험―혼란과 불완전하다는 감각, 그와 동시에 친근함과 향수―과 맞닿아 있는 글은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이 지점에 주목했고, 또 주목하는 작가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어린 시절에 그런 글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했죠.) 그래서 정의되기보다는 정의하고자, 외부세계와 내면세계를 조화시키고자 했습니다. 하나 배운 게 있다면, 한때 주목받지 못하고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인 경험으로만 인식된 이주 경험은 사실 풍요로운 생성적 원천이며 마땅히 문학이 탐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의 엄마와 딸은 누구인가요? 어째서 구체적 서사보다는 소설의 분위기를 통해 두 인물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나요?
두 인물에겐 각기 다른 시기에 저와 저희 가족을 이루던, 삶과 문학을 향한 저의 물음을 이루던 조각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서사에 관해서라면 저는 단 한 번도 이걸 쓸 수가 없었어요. 삶이 그런 식으로 흐른다고 느껴지지 않아서요.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고 해도 곧이어 그 사이사이로 일상의 과업과 정처 없는 상념들이 끼어드니까요. 정반대로 삶의 상당 부분은,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 이처럼 사소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들, 내밀히 느껴지나 분명히 인식되지는 않는 순간들이라고 생각해요. 당시엔 파악할 수 없지만 언제고 돌아오는,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는 시간들이요.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의 주요 질문 중 하나는 '타인의 내면세계를 진정으로 알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입니다. 글을 마치고 나서 떠오른 답이 있을까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겠어요.
'우리는 타인의 내면세계를 진실히 알 수 있는가?'
타인을 진정으로 알고, 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것 하나 불변하고 고유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알고자 애쓰는 시도는 가치가 있어요. 쓰기, 그와 더불어 읽기는 실로 이해라는 행위의 한 형태이고, 나아가 공감을 향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타 존재의 의식에 가닿기를 희망해볼 수 있는 최대로 가까운 거리일 거고요.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는 '정체성', '친밀성', '세대 차이', '문화 차이'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걸 한 이야기 속에 담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 중 어떤 주제가 가장 중요했나요?
이 모든 것들이 서로 긴밀히 연관돼 있고 서로를 참조한다는 점에서 어렵기보다는 생성적이었어요. 그렇기에 어느 주제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정체성', '소속감', '고향' 등의 어휘가 맥락에 따라 유용하기도 하겠지만 거대하고 추상적인 명사이기도 해, 그저 한 존재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의 복잡다단함과 미묘한 함의를 언제나 잘 포착해 전달해주지는 못합니다. 여성으로서 화자가 지나온 시간과 교육은 그가 가족과 유산에 품고 있는 물음과도 깊이 연결돼 있고요.
이를테면 한 곁가지 이야기에서 화자는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을 돌아봅니다. 부분적으론 어머니의 노동과 헌신 덕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 세계는 화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각성의 공간이었죠. 화자 내면의 무언가를 해방시켜주었어요. 그와 동시에 대가가 뒤따르기도 했습니다. 철학과 비평과 이론을 공부하며 화자는 문득 어머니를 역사 속 한 인물, 식민 사상과 가사노동과 어머니됨이라는 규정이 교차한 인물로 이해하게 되죠. 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겪은 고통과 타인들이 그를 바라보던 시선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라는 제목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이 제목은 어떻게 선택했나요? 소설 속 모녀 관계의 본질을 암시하기도 하나요? 서로를 잘 알면서도 순간순간 낯선 사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거의 마칠 때까지도 정해둔 제목은 없었습니다. 앞서 생각한 가제로는 '공통 언어'가 있습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 언어를 향한 꿈』에서 따왔어요. 서로에게 긴밀히 연결되고자 하는 어머니와 딸의 열망뿐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성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가 좋았던 건 추상적이면서도 완료되지 않은 인상을 주어서예요. 문장 속 한 구절이나 질문일 수도 있고, 시기나 장소 어느 것하고도 관련되고요. 제목에 담긴 시간적 요소도 마음에 들었어요. 눈은 조건이 알맞게 맞물릴 때만 내리고, 그럴 땐 마치 마법을 부린 듯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끝내 모두 사라지고 말죠. 더불어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는 소설에서 엄마가 묻는 몇 안 되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삶과 예술의 관계 또한 공들여 그려집니다. 작가님께 있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요?
예술은 자본주의와 노동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줘요. 그런 기분이나 감각을 경험해보고 연결하고 그에 계속 닿아 있도록 해주죠. 이 같은 순간을 매번 맞닥뜨릴 수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찾고자 부단히 애쓰고 있어요. 삶을 묘사하려는 예술과 그런 예술을 통해 거듭 삶을 이해해보려는, 순환하고 재귀하는 삶과 예술의 관계를 그려보려 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에크프라시스와 은유적 사고 또한 내내 생각했고요. 어째서 우리는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이해하기 위해 '제3의 것' ― 춤이든 음악이든 회화든 소설이든 ― 을 필요로 하는 걸까요? 삶에는 복잡하고 명료히 언어화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어쩌면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는 유일한 방법은 그 주위를 맴돌며 글을 쓰거나 삶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것뿐이지 않을까요?
작가로서의 하루는 어떻게 흐르나요?
지켜본 적은 거의 없지만, 이상적인 하루란 매일의 작업과 운동과 고독이 적절히 배분된 날이지 싶어요. 얼마간 글을 쓰며 종이 위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어느 시점엔가 수영이나 달리기로 넘어가요. 집에 작고 좁은 일광욕실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글을 쓰고 반려묘가 창틀에 앉아 쉬어요. 무엇보다 집을 나서지 않아도 되는 날을 사랑해요.
*제시카 아우 호주에서 태어나 멜버른대학에서 예술과 법을 공부했다. 중국에서 말레이시아로, 말레이시아에서 호주로 이주한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경험이 저자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다. 2011년에 출간한 첫 소설 『화물(Cargo)』로 캐슬린미첼상 젊은작가 부문에서 적극 추천받았고, 문학 잡지 <민진(Meanjin)>과 웹진 <이언(Aeon)>에서 에디터로 활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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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