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극단적으로 얘기해 만약 지구에 대재앙이 일어나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사라졌다고 가정하자. 그런 상황에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면 세상은 분명 재건되어야 할 텐데,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식물이 아닐까? 인류는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드볼트(Seed Vault)'라는 시설을 만들었다.
시드볼트란 종자를 영구히 보존하는 시설이다. 시드뱅크가 필요에 따라 종자를 수시로 저장하고 다시 꺼내서 연구에 활용한다면 시드볼트에 한번 들어간 종자는 지구에 대재앙이 일어나거나 그 식물이 멸종하기 전까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도 불린다.
이런 시드볼트는 전 세계에 단 두 곳 있다. 하나는 노르웨이에 있는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이고, 또 하나는 놀랍게도 경북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내에 있는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이다. 스발바르 시드볼트가 주로 작물 종자를 저장하고 우리나라 시드볼트가 야생 식물 종자를 저장하는 만큼 이곳은 세계 유일무이한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최근 우리나라 시드볼트에 관한 책 『시드볼트 – 지구의 재앙을 대비하는 공간과 사람들』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시드볼트와 시드볼트를 둘러싼 사람들을 조망할 뿐 아니라 종자를 수집하는 방법과 영구적으로 저장하는 과정, 종자의 다양한 연구 방법, 수목원의 역할, 기후 위기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후위기로 전 세계가 신음하고 대형 산불이 우리나라를 덮친 와중에 나온 이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련해서 지난 17일 『시드볼트』의 저자 중 한 명이자 시드볼트 운영센터에서 종자의 저장과 입고를 담당하는 김진기 대리를 만났다. '최악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매일매일 최악의 순간을 대비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시드볼트에서 종자 저장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종자를 저장하는 것은 단순한 일 같은데… 그냥 넣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보통 그렇게들 많이 생각한다.(웃음) 그런데 시트볼트에 종자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많다. 몇 가지만 얘기하자면 우선 종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 구축이다. 어떤 종인지 구분하는 것은 물론, 지역, 날짜, 시기 등 그 종자에 대한 모든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시드볼트는 종자를 저장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데이터도 저장하는 곳이다. 그래야 먼 훗날 이 종자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에 실제 저장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도 있지만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종자를 수집하거나 기탁받아서 실제 저장하기까지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다는 것은 알아주시면 좋겠다.
최근 『시드볼트』를 출간했다. 이 책은 대리님을 비롯해 시드볼트 운영센터의 모든 구성원이 작가로 참여했다. 어떤 책인지, 왜 모두가 함께 이 책을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시드볼트는 근래 들어 다양한 언론 매체에 노출되면서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 인지도 면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사실 시드볼트의 종자들은 영원히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환경은 너무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식물들 역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시드볼트에는 더 많은 종자가 저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일을 하는 동시에, 시드볼트가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더 알려지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에서 종자를 기탁할 것이 아닌가. 이런 이유 때문에 모두가 기꺼이 책을 만들게 되었다. 그 외에도 책에는 과거 우리나라 종자 반출에 대한 아픈 역사를 비롯해 환경과 종자에 대한 흥미롭고 풍성한 내용들이 많으니 식물과 환경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면 좋겠다.
지금까지 시드볼트의 종자는 한 번도 반출된 적이 없다. 최근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원 삼척까지 번지면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시드볼트 종자 반출 등에 대해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아직 가능성은 없다. 사실 이게 시드볼트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우리는 많은 양의 종자를 모은다기보다, 최대한 다양한 종류의 종자를 저장하는 것에 우선했다. 하지만 산림을 복구하려면 종의 다양성보다는 종자 자체의 숫자가 많아야 하는데, 설령 시드볼트가 열린다 해도 현재 그 정도의 수량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화재가 있기 전부터 우리는 시드볼트의 역할을 다변화해서 종의 복원은 물론이고 지역 복구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관련한 계획을 조금씩 수립하고 있다. 앞서 시드볼트가 더 많이 알려져야 하고 더 많은 종자가 들어와야 한다고 말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시드볼트의 기술력에 관해 얘기를 듣고 싶다. 혹시 전기가 끊긴다거나 냉동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보관하고 있는 종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시드볼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안전성이다. 대부분의 장치를 2중, 3중으로 대비해 안전성을 최대한 높였다. 시드볼트는 영하 20도, 상대습도 40%를 언제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저장시설에 관해서는 담당자가 하루에도 수 차례 점검한다. 냉각 장치도 여러 대 있어 만약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남은 예비 냉각 장치를 가동할 수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전기인데 우선 전기 선로를 다원화했다. 한쪽에서 전기가 끊겨도 다른 쪽에서 전기를 받을 수 있도록. 물론 모든 선로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서 자가발전 시설도 갖추고 있다.
김진기의 꿈은 무엇인가?
시드볼트에 저장할 수 있는 종자는 총 200만 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재는 약 13만여 점의 종자가 저장되어 있고. 그동안 채운 13만이라는 숫자가 적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앞으로 채워야 할 숫자를 생각하면 아득할 때도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맨땅에서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종자를 다루는 기관에서조차 시드볼트가 뭔지 몰랐다. 종자 기탁을 얘기하려면 우선 시드볼트라는 생소한 건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던 거다. 설명한다고 바로 알아듣고 우리 취지에 공감하는 것도 물론 아니었고.(웃음) 그런 시절을 지나 겨우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인지도도 많이 올라가고, 심지어 책까지 나왔으니 훨씬 더 사정이 좋아졌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꿈은 퇴직하기 전까지 시드볼트를 종자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제 187만 점 남았다.(웃음)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드볼트』를 읽음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에도 시드볼트가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또 주변에 있는 식물들의 중요성을 알고, 환경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김진기 시드볼트운영센터 대리. 2001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근무하면서 ‘야생화 및 멸종위기식물 종자은행 구축사업’과 ‘해외생물 소재확보 및 활용사업’에 참여했다. 이 무렵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시드볼트가 생기자 마치 운명처럼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전했으나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마침내 네 번째에 시드볼트운영센터의 일원이 되었다. 김진기는 시드볼트에 들어가는 종자를 확인하고, 변경 사항을 기록하고, 데이터로 만들고, 보관 위치를 정하고, 저장하는 일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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