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이자 소설가, 그리고 독서가인 김운하 작가. 전작인 『네 번째 책상 서랍 속의 타자기와 회전목마에 관하여』에서 유쾌하게 독서의 쾌락을 전파하던 그가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신작 『우연의 생』을 냈다. 문학, 예술, 철학을 넘나들면서 인간의 삶과 우연을 사유하며 문학적 글쓰기로 담아낸, 김운하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우연'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오랫동안 우연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우연보다는 운명이란 것에 더 관심이 컸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개인사와 관련된 것이기도 한데, 고교 3학년 때와 이듬해 갑작스레 부모님을 다 여의고, 사실상 나락 지경에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죽음 충동에 시달리면서 삶과 죽음, 운명 등에 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그게 대학 진학 후에 자연스럽게 저를 철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면서 철학의 큰 테마로 결정론과 자유, 운과 능력 등의 문제를 접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이 문제를 숙고해 왔던 것인데, 이제 특별히 운명이나 우연에 관한 제 입장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작가님의 삶에서 '하필이면 왜...' 또는 '이토록 축복 같은 우연이라니!' 싶었던 사건이 있을까요?
물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몇 번 있었지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멋진 사랑에 빠졌을 땐, 사실 우연이지만, 그걸 우린 “이건 운명이야!” 하고 생각하다, 헤어지고 나면 “그건 우연이었을 뿐이야.”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제가 건국대 인문대학의 몸문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인연은 정말 기막힌 우연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저는 블로그에 글을 많이 쓰는 편이었고 제가 작가라는 걸 밝히진 않았어요. 그런데 정말 우연히 연구소 소장님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제 블로그를 방문하였고 제가 누군지 너무 궁금한 나머지 먼저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연구소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십여 년 동안 연구소에서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기도 했고 또 여러 프로젝트도 함께해 왔는데, 저의 정신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죠!
'클리나멘'이라는 제목으로 세 개의 꼭지가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클리나멘'이 이 책에서 중요한 단어(키워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클리나멘'이 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클리나멘(Clinamen)이란 단어는 고대 원자론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가 쓴 단어예요. 아마도 그는 서양철학에서 처음으로 우주의 작동에 우연이 작용한다는 걸 드러낸 철학자일 거예요. 원자론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마치 비가 내리듯 무수한 원자들이 낙하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특정 원자들이 ‘궤도 이탈’을 하여 다른 원자와 부딪치거나 결합하는 운동을 하면서 세계를 만들어 간다고 봅니다. 즉 클리나멘의 정확한 의미는 ‘원자의 궤도 이탈, 비껴남’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거기서 놀라운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중력과 관성에서 벗어난 자발적인 비켜남과 이탈을 윤리학적인 자유와 창조의 가능성으로 본 것이지요. 우연을 자유와 창조의 가능성으로 이끌어 내고 운명에 대항하는 힘으로 만들어 낸 거예요. 제 책의 주제의식도 바로 그런 것이기에 책에서 클리나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생이 우연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삶이 참 불가해하게 느껴지고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게 의미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작가님께서는 이렇게 우연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시는지요. 또 이런 생각을 하는 독자들을 위해 추천해 주고 싶은 꼭지가 있나요?
저 역시 그런 문제로 많이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스갯말로 “인생은 운칠기삼이야.”라는 말도 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노력은 무언인가? 행불행이 운과 우연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주체성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요. 하지만 독자 분들도 ‘나비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뉴욕에서는 허리케인이 분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지요. 그건 초기 경로의 미세한 효과가 나중에 예측 불가능한 거대한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인데요. 저는 물론 인생의 대부분이 우연이 결정한다고 보긴 하지만, 클리나멘적 자유를 통한 우연의 활용 혹은 선용, 그리고 우리의 노력이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봅니다.
제 책에서 우연으로 시작된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카프카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4장 ‘블라우엔 슈테른 호텔’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우연이 지배하는 삶에서 우연한 행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떤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를 엿볼 수 있는 42장 '세렌디피티 또는 젬블라니티'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이 책에서는 '우연'이라는 주제 아래 카프카, 시오랑, 쿤데라, 한스 벨머 등 수많은 예술가의 이야기와 작품이 등장합니다. 작가님께서 특별히 영감을 많이 받은 예술가나 작품이 있나요?
개인적으로 우연의 문제에 가장 영감을 많이 준 작가가 있는데,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입니다.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는데요, 그 작품의 큰 주제중 하나가 바로 우연의 문제입니다. 쿤데라는 “우연만이 신비롭다.”라고 씁니다. 사실 그렇지요. 근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만사가 원인과 결과의 엄격한 인과법칙에 따라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다면, 아무런 삶의 신비는 없겠지요. 어떤 사랑도, 어떤 행운도, 그렇게 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요.
행간에서 철학적 사유를 느낄 수 있는데요. 철학자의 이름이나 책을 언급하지 않고, 문학적인 글로 사유를 전개하기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우연의 생』에서 시도하신 글쓰기에 대해 듣고 싶어요.
제 글쓰기의 특징이 바로 ‘우연의 글쓰기’입니다.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 작가들 일부가 그런 걸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걸 ‘자동 글쓰기’라고 불렀지요. 저는 어떤 주제에 대한 답을 미리 다 알고 글을 쓰기보다는, 탐구하면서 글을 쓰고 글을 쓰면서 답을 찾아갑니다. 이 책도 그렇게 쓰였습니다. 이 책의 43번째 꼭지인 「우연의 새와 함께」에서 그게 잘 드러나는데, 인생과 우연의 진정한 관계와 의미에 관한 답이랄까요. 사실 이 책의 결론도 미리 준비하지 않았어요. 원고를 써나가면서 다시 숙고하고, 산책도 하고, 그러다 보면 불현듯 어떤 장소에서 무언가가 솟아나더라고요. 이 책이 일종의 파편적 글쓰기 형태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고, 저는 책을 쓸 때 늘 그런 글쓰기를 추구하는 편입니다.
우연의 신 티케의 이끔을 기다리는, 준비 중인 글이나 계획이 있다면 살짝 알려주세요.
실은 2년 전부터 저를 사로잡은 주제로 책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는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고래와 관련된 책입니다. 2년 전이 허먼 멜빌의 탄생 200주년이었어요. 꼭 그 때문은 아니고, 저희 연구소에서 공저로 책을 준비하면서 제가 서문을 쓰게 되었는데, 고민 중에 우연히 모비딕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생태와 온난화에 관련된 책이라서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서문을 쓴 후에 이상하게도 계속 허먼 멜빌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이상한 압박감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금 써나가다 이런저런 일로 중단한 상태인데 올해는 꼭 완성하고 싶네요.
* 김운하 소설가, 인문학자.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에서 연구와 강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우연이 빚어내는, 예측 불가능하고 결말을 결코 미리 알 수 없는 생의 이야기라고 믿는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137개의 미로 카드』 등의 소설과 『카프카의 서재』,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네 번째 책상 서랍 속의 타자기와 회전목마에 관하여』 등의 인문에세이를 썼다. 또한 몸문화연구소의 포스트휴먼총서 『인류세와 에코바디』, 『포스트바디: 레고인간이 온다』 등을 기획하고, 집필에 참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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