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모를 불안과 끝을 알 수 없는 불안. 둘 다 달갑지 않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고르게 될까? 2021년 1월 13일, 신문들은 일제히 “문재인 대통령, 전 국민이 코로나19 백신을 무료로 맞을 것이다”를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그러나 기대는 불과 수초 만에 무너졌다. 집단면역이 되려면 전 국민의 60~80%가 백신을 맞아야 하고, 그때까지는 얼굴의 절반을 감금한 채 살아야 한다는 기사가 바짝 뒤를 쫓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는 좋은 소식이 들려와도 단 수초 만에 불안의 추격을 받는다. 정신과 의사 김병수는 작년 8월, 스스로 ‘아마도’라고 기억하는 아홉 번째 책 『상처는 한 번만 받겠습니다』를 펴냈다. 책 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는 다음과 같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태도를 살짝 바꿔주고 어울리는 자세를 찾아주고 싶다.” 태도를 ‘살짝’ 바꿈으로써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속삭임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척이나 달콤한 것이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불안에 휘둘리지 않으면 된다.” 56쪽에 나오는 문장에 밑줄을 쳤어요. 코로나가 인류에게 불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불안할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은 정상적인 감정이에요. 그리고 필요하고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지만, 일상적인 불안은 저마다 기능을 갖고 있어요. 예를 들어, 입시생이 느끼는 불안은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거든요. 물론 지금은 특수 상황이죠. 누구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거예요. 이럴 때는 어느 정도의 불안에는 겁먹지 않는 게 맞아요. 당연한 불안이니까요.
겁먹지 않겠다는 태도만으로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뜻밖에도 그래요. 하지만 그전에 불안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해요. 내 불안이 정상적인 불안인지, 이 상황이 누구나 불안을 느낄 만한 것인지, 유독 나만 더 고통스럽게 느끼는지, 과거의 상처나 어떤 이유 때문에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 사실과 자기 안에서 증폭된 불안을 분리할 수 있게 돼요. 그런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주저앉지 않도록, 나를 위안하고 달랠 방법을 찾아야죠. 비상약처럼 꺼내 먹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일수록 좋아요.
책에 나와 있는 라이프스타일 처방들이 비상약이 돼줄까요? 실제로 선생님이 행하고 있는 처방들이 나오더군요.
그런 건 디테일이 중요하거든요. 자기한테 딱 맞아야 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해요. 아침마다 하는 뜨거운 물 샤워, 매일 하는 달리기나 등산은 제가 저에게 내린 처방이니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는 없어요. 우선 정리 정돈으로 시작해도 좋겠네요. 우울증 환자들이 좋아지면 백발백중 정리 정돈을 하거든요. 반대로 살짝 우울한 날에 정리 정돈을 하면 우울감이 사라지는 효과를 볼 수 있어요. 식습관을 바꾸는 것도 큰 도움이 돼요. 유산균만 꾸준히 먹어도 마음 건강에 일정한 효과를 볼 수 있죠. 장과 뇌는 연결돼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술은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약도 최선은 아니고요. 3개월만이라도 술을 끊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 경험하는 게 백배 나아요.
다들 마음이 유리 같은 시기라 생활에 또 다른 긴장감을 주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선 일단 그 일을 하기로 한 시간을 비워두세요. 그리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자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계획한 바의 1%라도 행하게 되죠. 그렇게 차츰 리듬을 만들어가야 해요. 아주 단순하지만 기본을 지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에서 ‘연민 집중 치료’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연민’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연민의 대상이 된다는 것 만한 위안도 없을 테니.
요즘 많이 행해지는 치료법이죠. 정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유지돼야 해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위안, 즉 연민을 가져야 해요. 그다음에 다른 사람과 연결돼 있어야 하고. 또 가치 추구 행동을 해야 하죠. 그래야 ‘잘살고 있다’, ‘행복하다’, ‘평온하다’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자기 위안이 1단계이군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맞아요. 우울이나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개 1단계에서 실패해요. 우선 나 자신이라도 나를 따뜻하게 대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야 해요. 그것이 가장 중요해요.
마음을 먹으면 되는 걸까요?
마음을 먹지 않기도 하니까요. 너무 많은 사람이 자기 비난 습관을 못 버려요. 그동안 충분히 고생했잖아요. 하지만 “괜찮다”, “이해한다” 류의 위로는 효과가 낮아요. 자신에 대한 관점을 넓히는 작업이 꼭 함께 수반돼야 하죠. 지금의 내 모습이 이렇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니까요. 부모님, 살아온 과정, 직장 생활, 정말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라는 사람이 이뤄졌잖아요. 다양한 측면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왜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했는지 이해해야 해요. 그러고 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죠.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가 자기 위안의 1단계고요. 다음 단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잘했다’예요. 이 많은 이유에도 이만큼 살아내다니 대단하다고 인정해주는 거죠. 마지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예요. 내가 추구하는 가치 - 그것이 돈이든 소명이든 - 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과정이에요. 이 세 단계를 차근차근 해내야 해요.
타인을 향한 위로하는 방법도 같을까요?
이 세 단계를 타인에게 똑같이 해줘야 해요. 포기하지 말고 ‘그럴 수도 있겠다’를 찾아나가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도 꼭 거쳐야 하고요. 계속 묻어둘 수는 없으니까요.
위로에도 적당한 온도가 있을까요?
쉽지 않은 문제네요. ‘공감피로’라는 게 있어요. 흠, 암환자 가족들이 정신과 진료를 많이 받으시거든요. 너무 힘을 빼셔서 그래요. 그분들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이래요. “하루 이틀 하다가 그만둘 거 아니면 그렇게 시작해선 안 된다”고. “이러다가 몇 달 못 가서 환자에게 배신감을 안겨줄 거냐고.” 매정한 말이죠. 하지만 정말 그래요. 중요한 건 ‘일관성’이에요. 그러려면 자기 삶을 지속해야 해요. 취미 생활도 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에너지를 유지해야 해요. ‘계속’ 하는 위로가 진짜 위로이니까요.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한국인의 고달픈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로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직장인의 스트레스, 중년 여성의 우울, 마흔의 사춘기 등 한국적 특성에 기초한 세대별, 상황별 아픔에 주목한다. 이를 주제로 『버텨낼 권리』 『감정의 색깔』 『사모님의 우울증』 『이상한 나라의 심리학』 등 여러 책을 출간했으며 다양한 매체 출연과 강연, 칼럼 등을 통해 대중과도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교수로 근무했고 같은 병원 건강증진센터의 스트레스 클리닉에서 진료했다. 대한우울조울병학회, 한국정신신체의학회,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등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서울 교대역 사거리에 있는 작은 의원에서 내담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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