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유년을 에픽하이와 보냈다.”는 어느 팬의 말처럼 2003년 데뷔 이래 그들의 음악이 대중의 기억에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이 만들어낸 고유의 감성 때문이다. 한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감정의 형태는 인간의 체온과 닮아 있었고, 우울과 명랑 등 높낮이를 오가며 위로를 전달했다.
동시에 흐려졌다. 익숙해진 문법은 클리셰가 되어 오히려 과거를 돋보이게 만드는 지점이며, 개인의 상처를 소재 삼아 깎아 내려간 자기 고백의 일지 역시 반복된 난도질로 듣기 싫은 투정이 되어 버렸다. 따스한 온도를 지녔던 에픽하이조차 시간이 지나며 생긴 수많은 생채기에 마음이 마모되었고, 조금은 무표정하게 됐다. 세상과 선을 긋기로 다짐한 어른의 말로. 에픽하이의 열 번째 앨범,
'Lesson Zero'가 메시지를 드러낸다. 레슨이라는 제목 아래 꾸준하게 에픽하이의 세계관을 관통하던 시리즈는 천재를 지칭했던 한 아티스트의 시선을 담고 있다. 어쩌면 거만하게 시스템을 비판해왔던 화자는 '이제 보여, 모든 답을 향한 내 질문은 나를 무릎 꿇게만 할 것이고 나를 0으로 되돌리기만 할 것을'이라며 패배를 선언했고, 그 무기력증은 앨범의 전반에 걸쳐 주요 서사로 작동한다.
명백한 주제 의식 아래 세련된 신진 세력을 녹여낸 프로듀싱도 주목할 만하다. 씨엘과 지코가 참여한 라틴풍의 'Rosario'부터 프로듀서 코드쿤스트가 주조한 '정당방위'도 우원재, 넉살, 창모란 신선한 재료에 걸맞은 결과물이 되었고, 이는 낮게 깔린 분위기를 중심으로 꾸려진 비트와 조화를 해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한 미쓰라 진의 도움이 크다.
특히 '수상소감'이 눈에 띈다. 희망, 좌절의 해소 등 유효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행동은 물거품이 됐고, 타인과 벽을 쌓는 행위로 이제야 진짜 모습을 찾게 된 심경 변화가 흥미롭다. 무엇보다 후렴구에서 비아이가 표현하는 '먹구름도 구름이었지, 쓴웃음도 웃음인 거지'란 글귀는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포기에 가까운 심정처럼 여겨져 공허하다. 1인칭부터 3인칭까지 특정 대상을 상대로 했던 그들의 시점이 더는 뚜렷하지 않은 이유다.
그런 점에서 '내 얘기 같아'가 아쉽다. '연애소설', '우산', '헤픈 엔딩' 등 서정적인 선율 위로 보컬이 다수의 지분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에픽하이의 타이틀로써 이번 곡 또한 헤이즈의 힘을 빌려오지만 선을 이탈한 이별이란 재료에 딱히 몰입할 여지가 없다.
위안의 성질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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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