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깃든다』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던 조송희 저자가 우연히 찾아온 여행의 기회를 접한 뒤 ‘여행생활자’로 다시 태어난 10년간의 기억들 소환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49살에 첫 해외여행을 떠난 뒤 한겨울의 시베리아 ‘바이칼’의 압도적이고도 경이로운 대자연 속에서 그녀의 여행 본능은 봉인해제 되었다. 이후 <고도원의 아침편지> 문화재단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세상의 이야기를 사각 프레임에 담고 글로 표현했다. 바이칼을 시작으로 히말라야의 ABC트레킹에 도전했다. 북인도를 유랑했으며 산티아고를 걸었다. 몽골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오지를 여행했고 프라하를 거쳐 눈 덮인 아오모리에서 여행의 에필로그를 썼다.
‘이혼을 하더라도 갈래요!’ 책의 프롤로그가 비장하게 시작됩니다. 그토록 여행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참 쉽게, 행복하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만 힘든 것 같았습니다. 변화가 절실했고 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내겐 여행이었습니다. 트레킹 경험이 전혀 없던 내게 안나푸르나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산이었습니다. 그 봉우리를 넘는다면, 나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죽을 고생을 하며 안나푸르나에 올랐지만 그 곳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봉우리는 또 다른 봉우리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다른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세상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알았습니다. 나만 힘들게 산다고, 나만 죽을 것처럼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봉우리를 오른다는 것을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아픔과 슬픔을 짊어지고 자신의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안나푸르나를 넘으며 나는 도저히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내 삶의 경계 하나를 넘었습니다.
작가님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좋아하는 곳을 찾아가 천천히 스며들며 걷는 느낌입니다. 작가님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가 되었습니까?
여행에 관심을 가질 만한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남들 다가는 해외여행도 내겐 ‘꿈’같은 일이었지요. 49살이 되던 해 1월, 첫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이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바이칼’ 이었습니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의 바이칼은 두꺼운 얼음으로 짱짱하게 얼어붙어있었습니다. 바이칼 호수 위에서 ‘쩡’ 하고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들었지요. 깊은 수심(水心)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 같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단단하게 얼어붙어있던 내 마음에도 금이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두껍고 단단한 얼음 아래는 수많은 수생생물이 살고 있는 또 다른 생명의 세계가 있잖아요. 나도 내 안 깊이 감추어져 있던 생명의 본질을 만난 것이지요. 그 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 후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먼지처럼 작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굳어있던 내 생각도 깨지기 시작했지요. 그 깨짐이 참 통쾌했습니다. 여행을 많이 해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길은 가장 훌륭한 학교’라는 것을. 저는 여행을 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했고 어린아이처럼 말랑말랑한 감성을 되찾았습니다. 여행을 통해 성장하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여행 참 좋죠. 그러나 여자 혼자서 떠나는 여행, 정말 두렵지 않을까요?
가끔은 정말 두렵습니다. 하지만 혼자 여행을 떠나면 자기 자신과 가장 깊이 만날 수가 있습니다. 가장 힘들고, 외롭고 두려운 순간에 내면의 민낯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과정이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것 같아요. 그게 여행의 목적이기도 하지요.
여럿이 하는 여행에 ‘함께’라는 즐거움이 있다면 혼자 하는 여행은 혼자이기에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혼자일 때 오감은 더 생생하고 예민하게 깨어나지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더 많이 생갑니다. 일행이 없기 때문에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과 더 깊이 교감하게 되거든요. 중간 중간 새로운 길벗이 생기거나 친구들이 합류하기도 하니까 완전히 혼자인 것도 아닙니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때문에 여행이 더 다채롭고 풍성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전상의 문제도 있지만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하면 됩니다. 요즘은 여자 혼자 여행하기에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숙소나 교통편 예약 등 어지간한 건 인터넷으로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깃든다』가 지난10년 동안의 기록이라고 하셨는데요. 작가님이 여행지를 선택하는 기준이 따로 있으셨는지, 그리고 그 여행지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요?
여행도 운명처럼 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오랫동안 꿈꾸었던 여행지도 분명히 있습니다. 나는 화려하고 편안한 여행지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향기가 깃든 곳에 더 끌립니다. 바이칼은 내 여행지의 시작입니다. 바이칼을 만나지 못했으면 여행생활자 조송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안나푸르나는 도전이었습니다. 굽이굽이 히말라야의 산자락을 넘으며 나를 구속하고 있던 자신을 넘어섰습니다. 산티아고에선 길의 정령이 나를 불렀다는 것을 알았고, 앞으로도 계속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도를 여행할 때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들의 삶 속에서, 오래 끌어안고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책으로만 접하던 역사와 문학, 찬란한 문화와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어요. 몽골의 대자연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선물 받았습니다. 한 겨울의 아오모리는 순결한 첫사랑 같은 곳입니다, 수많은 여행지는 모두 나름의 의미와 사유를 품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여행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인도에서 한 락샤꾼의 집에 초대 받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텃밭에서 금방 딴 채소와 과일, 갓 지은 밥에 끼얹어주던 향긋한 커리, 그리고 한잔의 짜이... 밥상도 없이 방바닥에 차려주는 그 밥이 인도를 여행하는 한 달 동안 먹었던 어떤 밥보다 맛있었습니다. 낯선 이를 기꺼이 초대해 준 것도 고마운데, 릭샤꾼의 어머니는 식사하는 내내 저를 지켜보며 이것저것 권하셨어요. 콧등이 시큰하면서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어린 시절, 소복이 쌓인 밥을 자꾸 디밀어주시던 내 어머니의 밥상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자식에게, 손님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 마음이 짐작되는 나이가 되었나 봐요. 길 위에서 처음 만난 인연일지지라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깃들게 되는 힘. 바로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가 됩니다.
여행이 작가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저는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에게 독서와 논술을 가르치는 일도 했었지만 충실한 아내, 좋은 엄마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지요. 여행을 시작한 이후 저는 스스로에게 ‘여행생활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이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일상과 여행, 일의 경계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일상이 여행이 되고, 여행도 일의 일부가 되었지요.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더 유연해지고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자족들도 그런 나를 지지합니다. 저는 지금의 제가 참 좋습니다.
요즘 여행을 다니기가 쉽지 않죠. 여행의 긍정 효과는 무엇이고 작가님의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까요?
여행을 한 지난10년, 스스로 참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10년 전에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일들을 해내고 있어요. 사진작가로, 여행 작가로, 여행이 내게 준 선물입니다. 앞으로의10년 후의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저도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0년 후에도 나는 수시로 가방을 싸며 낯선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여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수그러들 때까지는 해외에 나가기도 힘들겠지요? 이럴 때는 책을 읽으면 어떨까요?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깃든다’ 같은 여행기를 읽으면서 낯선 길을 걷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거예요. 책이 훌륭한 가이드이자 길벗이 되어 줄 것입니다. 내 주변을 여행지로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해질 무렵, 동네 공원을 걷거나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혼자 커피한잔을 마시는 건 어떨까요?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죠. 멀리 떠나지 않아도 세상이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