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에게 긴 메일을 받았다. 이렇게 긴 사적인 메일을 받은 게 참 오랜만이다. 답장을 쓰려고 보니 나도 이런 메일을 쓴 지 오래되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내 직업은 달리 제쳐 놓는다고 해도, 강의나 글쓰기로 생각을 전하고, 모임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SNS도 하는 나는 사람들과 꽤 소통하며 살고 있다. 소통이 서로의 생각, 감정, 경험 등을 나누는 것이라면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기술 발달의 혜택으로 우리는 손쉽게 많은 것을 나누며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과 소통하며 어떤 성과도 만들어내고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일부가 비어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상담자들 중에는 사이좋은 친구나 지인이 많은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없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아, 깊은 고민을 이야기할 수 없어서 괴롭겠구나!”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곤란함이 있다면 그것보다는 같이 이야기할 특정한 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단짝 친구처럼 나와 이야기를 나눌 단 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만 일대일의 소통은 부재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소통은 대부분 이런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눈과 입과 귀를 활짝 열고 살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이전보다 더 많이 소통하게 되었는데 방식은 다르다. 내가 복수의 사람들에게 쓰거나 말하고, 다른 사람이 쓰거나 말하는 복수의 사람들 안에 내가 있게 된 것이다. SNS 활동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소수의 특권처럼 여겨지던 강의나 글쓰기도 소규모 모임이 활성화되고 독립 출판 등이 등장하면서 평범한 일이 되었다. 물론 유튜브의 역할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루어지는 소통은 누가 누구를 향해 하는 것일까? 내가 말하고 쓰지만, 누구를 향해 말하고 쓰는지 수신자가 정해지지 않는다. 내가 읽고 듣지만, 그것이 나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SNS가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내가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유튜브가 기존의 방송과 다른 점은 유튜버로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유튜버가 직접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도 있다. 하지만 사실 시청자인 나는 복수의 사람들 중 하나로 존재할 뿐이다. 늘 누구나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세상이 되었지만, ‘나’라는 한 명의 개인이 ‘너’라는 라는 한 명의 개인과 만나는 일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사적인 존재에서 사회적(social)인 존재로 이행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에서 주인공 샹탈이 바라던 바와 같이. “사랑의 시선은 외톨이로 만드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장마르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투명하게 변한 두 늙은이의 사랑스러운 고독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슬픈 고독이다.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들이 그녀를 인간 사회에 머무르게 하고 사랑의 시선은 그녀를 사회로부터 유리한다.” 이 소설에서는 육체의 매혹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세상의 공감과 인정이 만들어내는 내 존재의 사회적인 가치이다. 사회적인 관계망. 개인이 그 망을 벗어나면 어떤 의미나 가치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러한 세상의 이치가 우리의 문명을 만들고, 그 자체만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거기서 오는 만족감과 편리함 그리고 익숙함이 우리를 점점 더 그쪽으로 편향되게 이끌어간다면 생각해 볼 문제가 된다. 일대일의 직접적인 관계가 온라인상의 연결이나 단체톡방에서의 대화로 대체되고, 깊은 고민이나 비밀도 복수의 수신자를 상대로 공공연하게 밝히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한 사람을 ‘너’로 만나는 일은 이제 일상이 아니라 마음먹고 해야 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나’와 ‘너’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만남은 『정체성』 의 장마르크의 말처럼 사회로부터 유리된 고독한 사랑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우리는 이제 그런 순간조차 관계망 안의 소통이 되기를 바라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복수의 시선 아래 이루어지는, 관계망 안에서의 응답과 인정은 한 개인의 고유하고 세밀한 영역을 일반적인 공감과 이해의 장 안으로 회수해버리기 쉽다. 이를테면 ‘익명의 시선....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에 흡입되는 것이다. 익명의 시선은 표면에 머무는 시선이다. 우리가 익명의 시선에 드러낼 수 있는 것도, 그것에 의해 인정받는 것도 늘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어림값이 되어 버린다. 표면을 훑고 지나간 시선 아래로는 ‘나만의 것’으로 고유하게 남는 나머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 생기는 이면의 결과이며 또 다른 목적이기도 하다. 타인과의 이질적인 간극으로 인해 생긴, 그 어떤 것으로도 축소되어 순환되지 않는 ‘나’의 찌꺼기를 남기는 것. 그러한 찌꺼기가 내 이름 아래 모이면 그것이 나의 고유한 정체성이 된다. 관계망 안에 머물되 그것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우리에겐 관계망 안에 나만의 은밀한 둥지를 접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도 샹탈처럼 ‘익명의 사람들 속에 내던져져 버려’ 이름을 잃을 수 있다. “겸허한 자세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처음,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우선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그녀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랐다.”
내 이름의 정체성을 찾아 나만의 둥지를 지키는 일, 그것은 혼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나를 불러주고, 내게 말해줄 때 가능해진다. 그렇게 메시지의 수신자가 된 내가 누군가를 향해 말하고 쓸 수 있을 때, 나는 그 말과 글의 온전한 무게를 짊어지는 한 명의 개인이 된다. 그런 고유한 주체로서의 무게를 덜어내는, 복수의 사람들 안에서의 소통만 하다 보면 자칫 나의 한 부분, 혹은 전체가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한 상태가 될 수 있다. 한 사람을 향해 말하고, 한 사람을 향해 쓰는 일이 너무 오랜만에 하는 특별한 일이 되는 건 이름을 가진 주체에게 다소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내 이름을 불러주며 기꺼이 내 수신자가 되어준, 멀리 사는 내 오랜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긴 답장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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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밀란 쿤데라 저/이재룡 역 | 민음사
밀란 쿤데라가 언제나 던져 온 화두를 담은 작품이다.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불확실한 자아를 보듬고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 대한 성찰을, 짧지만 넓은 행간? 담고 있는 철학 소설이자 동시에 오늘날 누구나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연애 소설이다.
이수련(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썼고,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 등을 번역했다.
kirkir
2020.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