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알록달록하네!"
<킬리만자로>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각본을 썼던 오승욱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밝은 톤은 절대 아니다.연식 좀 되시는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1974년에 카빈 소총을 들고 강도와 살인을 저지른 두 범죄자 이종대, 문도석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구상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인호 작가의 소설인 <지구인>처럼 두 인물의 이야기를 원작 삼아 풀어내진 않았으며,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영감' 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영감이란 해당 사건의 결말처럼 두 범죄자가 느꼈을 최악의 좌절감과 위기의 감정. 그리고 거기서 발현된 인간의 가장 포악하고 추악한 모습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종대와 문도석은 총으로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
작품 속에서 쌍둥이인 해식, 해철 형제 (박신양) 중 동생인 해철이 자신의 처지에 절망해 형이 보는 앞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경찰로서의 진급도 막혀버린 해식은 동생의 유골을 들고 그가 살았던 주문진으로 내려오고, 자신을 해철로 오해한 번개 (안성기) 일행과 종두 (김승철) 일당을 만난다. 그리고 해식은 특유의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충돌을 일으키고 파국을 맞는다. 이 글의 도입부에 나오는 위의 대사는 주문진에 도착한 해식이 내뱉는 대사다. <킬리만자로> 속 인물들에게 '알록달록' 이란 단어는 어찌 보면 존재만으로도 ‘사치’ 다. 작품 자체가 무채색의 음울하고 을씨년스러운 절망에 휘감겨 있으니까. 이런 작품이 용감하게도 ‘2000년 5월’ 에 한국 극장가에 당도하여, 그 해 많은 관객들에게 극악무도할 정도의 폭력성을 담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다. 5월! IMF로부터 막 한숨 돌리고, 살랑살랑 불기 시작한 봄바람이 절정을 향해갔던 시기에 개봉한 작품이었다! 이런 세상에. 망하려고 작정했군. 예상대로 작품은 경악의 도가니 속에서 정말 흥행실패를 하고 말았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나오기 전까지는 독보적이었을 거 같어!
<킬리만자로>를 감독할 당시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오승욱 감독이 존경하는 감독의 리스트에는 <최후의 증인>,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등을 만든 이두용 감독의 이름이 꼭 끼어있었다. 원래 2시간 34분의 상영시간을 갖고 있던 <최후의 증인>의 복원을 촉구한 사람도 오승욱 감독이었는데, 다시 보는 <킬리만자로> 에는 이두용의 영향이 짙게 있었음이 확인된다. 으슬으슬 추운 날씨에 추레한 옷을 입고 서 있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애써 담아내려는 것을 봐도 말이다.
몇 년 만에 작품의 DVD를 다시 꺼내 보게 된 건 간단한 의문에서였다. ‘이 작품이 그 정도로 셌었나?’ 하는. 사실 내게 <킬리만자로>는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구석들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얼음지옥을 주문진이란 공간에서 구현해 보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러나 당시 영하 10도를 훨씬 넘긴 날씨였다던 추위의 느낌은 여전히 내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되려 감독은 마지막 결말부를 제외하고 당시 주문진에 쌓여있던 눈을 불필요하게 여겼다던데, 사실 눈이라도 없었으면 작품 속의 추위는 절대 전달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등장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분투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생략이 심한 이야기 전개 또한 불만이었다. 박신양의 1인 2역 연기가 빛을 발하는 초반 20분 분량에서 작품은 두 형제의 내적 갈등과 좌절을 생활 묘사보다도 훨씬 꼼꼼하게 다뤄낸다. 그러나 주문진에 살고 있는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은 많이 부족하다. 마치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산 해식이 처했을 당혹스러움을 관객도 느껴보라는 듯한 태도다. 문제는 그럴 거면 차라리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작품은 끊임없이 어떤 정보와 인물설정을 주려다 마는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은 작품 속에서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 ‘신인감독 오승욱’ 에게는 가장 구현하고 싶었을 요소였을 듯하다. 작품이 여러 의미로 촘촘한 이야기 구성을 과시하고 그로 인한 영화적 효과도 얻을 수 있었겠지. 그러나 결과적으론 역량부족과 날씨, 여러 상황에서의 타협 때문에 그리 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처음 볼 때는 저런 단점들이 먼저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 두 번째 감상할 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이 여러 사연들을 단칼에 생략해 버린 부분들이, 결과적으로 <킬리만자로>에게 영화적 완성도의 하자를 뛰어넘는 에너지를 주는 듯 보인 것이다.
밑바닥 인생들은 뭘 해도 이렇게 끝나는가?
작품은 허무와 파국만을 목표로 삼아 무조건 돌진하며, 그 돌진의 동력은 폭력과 처연함이라는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위에서 말한 폭력성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단순히 시각적인 부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번개의 어린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댄다. 그리고 해식은 해철의 존재를 잊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그의 유골가루를 소주에 타 들이킨다. 당시 등급심의를 받을 때도 논란이 되어 잘리느냐 마느냐를 논했던 시퀀스들이다. 재감상을 하는 와중에 이런 순간들에서 묘한 서글픔이 느껴졌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역시 사랑을 줘야 할 대상을 그에 걸맞게 보듬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보는 건 오직 능력도 없고 인정도 없는데 주제에 존경만 받고 싶어 하는, 욕구만 가득 찬 양아치들의 발악이다. 이건 주인공들이건 악역이건 관계없다. 살면서 해본 일이 욕 쓰는 것과 폭력을 휘둘러 본 것. 그리고 시비 걸어본 게 다인 이들은 정말 작품 내내 그 짓만 반복하다 최후를 맞는다.
<킬리만자로>는 주인공들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거의 대부분 얻어맞기만 하는, 참 드물게 ‘없어 보이는 느와르’ 다. 제목마냥 킬리만자로 산맥의 거창함을 즐길 수 있는 작품도 아니고, 자의와 타의로 인해 어딘지 모르게 결핍된 영화적 요소들은 결국 작품을 패배와 쓸쓸함의 정서로 채워나간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 같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건 결말만 비슷해 보이며 오히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기나긴 이별> 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작품에서는 어촌과 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비릿한 기운만 느껴질 뿐이다.
서울에 비하면 주문진은 발전하지 못한 과거의 도시이며, 거기서 누군가는 지옥처럼 살고 있다. 그 와중에 잘해보고자 노력하고, 또 웃으려고 애쓰지만 작품은 그것을 불행한 존재들의 마지막 발악처럼 취급한다. 하지만 이게 결국 사실임을 우리는 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얼마나 피폐한지를. 오히려 잠시나마 희극적인 상황들을 집어넣어, 지옥 속에서 이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 이 작품 자체가 나름 애정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화법이나 표현수위, 혹은 결말이 어떻든 <킬리만자로>는 사랑의 시선을 가지고 밑바닥 인생들을 바라본 작품이었다. 시각적인 지옥도의 구현은 성에 차지 않지만, 그 속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남달랐다. 굉장히 세다고 알려진 작품이 이제 보니 가장 섬세하달까.
그래서 이 작품은 슬프게 보이기도 한다. 애정 어린 시선을 받는 등장인물들은, 그를 배반하듯 작품 속에서 이젠 너무 늦어버렸다는 듯이 굴어대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 작품 이후 한국에서 밑바닥 폭력잡배들을 다루는 소재의 작품들은 지향점을 발작적인 웃음과 눈물 창출로 정하고 나름의 전성기를 누렸다. <킬리만자로> 같은 스타일의 작품은 이후 여러모로 보기 힘들어 졌다. 이걸 볼 때마다 마치 ‘영화가 이들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진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밑바닥 인생들은 광대가 되어 한심한 행각으로 웃음짓게 만들다가, 팍!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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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http://sega32x.blog.me *
앙ㅋ
201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