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아이드 걸스(Brown Eyed Girls)
이미 아이돌 그룹이 포화된 상황에서 각자의 활로를 찾는 것은 곧 그룹의 존속을 결정짓는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그 활로가 콘셉트에 의지한 단발적인 시도일지라도 순간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어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찬사가 얼마나 유지되는가는 일단 나중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크레용 팝이나 걸스데이 같은 그룹은 콘셉트 하나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이전투구 속에서 기존 걸 그룹들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그룹이 원래 가지고 있던 지명도와 경력으로 다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물결에 휩쓸려 자초될 것인지 불확실한 상황인 것이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특히나 「Abracadabra」이후 파격적인 이미지로 선회하면서 그룹의 방향을 재설정한 상태다. 이것이 일종의 선례로 비추어지면서 아류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제 성패는 비슷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가지는가에 달려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가 섹시한 걸 그룹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그럼에도 최근 다른 걸그룹들이 제공한 말초적인 자극이 과했던 탓인지 「Kill bill」에 삽입된 관능적인 커플댄스나 영화의 이미지가 별다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앨범의 성취는 음악의 관능적인 어법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멤버들의 역량이다. 「날아갈래」나 「레시피」같은 곡들에서 중독성과 내러티브를 겸비한 후렴구의 이면에는 분명 보컬의 공이 컸다. 특히 「After club」이나 「Kill bill」에서 미료의 랩은 곡의 긴장감과 절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현재 랩퍼란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아이돌 멤버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실력을 보여준다.
첫 곡 「After club」에서부터 「Satisfaction」까지 놀라운 속도감을 보여준다. 심상과 구성이 다소 겹치는 곡들이지만 리듬 변주와 세션들은 곡들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다만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비슷한 이미지로만 나열되면서 각자 개성을 크게 피력하지 못한다. 앨범 초반의 흡인력이 중반부를 지나면 식상해져서 되돌아온다. 그런 면에서 「레시피」는 효과적인 반전이며 마무리인 「Good fellas」로 넘어가는 든든한 가교가 된다. 프로듀싱과 앨범 구성의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충분히 믿고 들을 수 있는 아이돌이 되었다. 그만큼 멤버들은 경력과 연륜이 쌓였고 다양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적응력도 얻었다. 센세이셔널한 성공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선전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파이의 크기가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아이돌 시장이 무의미한 소모전임에도 계속 달려드는 형세로 변하면서 나름대로의 준수한 결과물들이 묻히고 마는 순간이 생긴다. 단발적인 콘셉트 송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하지만 파이가 커지는 속도에 비해 아이돌 시장의 몸집이 너무 비대해진 지금 상황에서도 조명 받아야 하는 사례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음반을 앞에 두고서도 심정은 다소 착잡하다.
글/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